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91화 (91/400)

91화.  < 빠지다.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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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황제 폐하께 이명을 하사받은 영애가 2명 있다.

……실비아 에바나일 남작 영애……

……노란 화원 한가운데 금빛 실오라기가 피었구나……

……이제부터 사람들은 너를 이리 부르리다……

금사매金絲梅 영애.

이 세계의 여자 주인공.

……라비엘 이 반시 아 공작 영애 … …

……자신의 머리를 떨구지 않으려 은빛으로 도금한 꽃이로다……

.......아이야. 제국의 신민은 이제부터 너를……

은백합銀百合 영애.

이 묵시록의 악역 영애.

귀족가의 여식들은 보통 데뷔탕트(사교계에 데뷔하는 무도회)를 가지면서, 이명을 얻게 된다. 데뷔탕트를 열어준 왕족이나 대귀족이 새로운 이름을 선물해주는 것이다.

얼마나 고귀한 자가 선물하느냐에 따라 영애의 이명은 때깔이 달라진다. 남작이 선물해주는 이름과 백작이 선물해주는 이름은 급이 다르다.

제일 때깔이 칼라풀한 것은 당연히 제국의 황제가 지어주는 이명. 폐하께 이름을 선물 받았다는 것 자체가 가문의 영광이고 일신의 영예다.

그런 두 영애가 같은 아카데미에 있으니 거대한 태풍이 몰아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그렇다지만.’

나는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나의 동료, 금사매 영애역(役)을 분하게 된 이단심문관을 황태자는 안고 있었다. 어찌나 꾸욱 껴안았는지 손끝에 이단심문관의 옷이 물비늘처럼 감겼다.

‘일국의 황태자치고 너무 경박한 거 아닌가?’

묘하게도 마음에 안 들었다.

황태자와 나는 시선이 마주쳤다. 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보던 참이라, 나는 얼른 눈을 깔아야 했다. 그런데 황태자의 눈길도 이상했다.

경멸. 분노. 멸시.

눈동자에 부정적인 감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자네도 살아남았군.”

어.

저거, 나한테 말한 건가? 지금 시선을 맞추고 있는 사람이 나뿐이니까 아마도 그런 모양이다. 그런데 목소리가 꼭 유통기한이 3일이나 지나버린 시금치를 씹어먹은 인간 같다. 재수가 없는 것이다.

“예. 전하.”

나는 사극 드라마를 떠올리면서 말투를 흉내 냈다.

“무사히도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운이 좋군.”

“어찌 미천한 소인의 행운 덕분이겠습니까? 이 또한 전하의 성은이 미친 것입니다.”

"......."

황태자의 고운 눈썹이 미끄러졌다. 방금 나는 [네가 자작극으로 습격을 꾸며낸 거지?] 라고 은근슬쩍 꼬집은 것이다. 도둑놈이 제 발 저린다고, 평범한 인삿말을 들어도 뜨끔할 수밖에 없지.

“자네의 말이 과하군.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다 내 성은이 깃들었다고 말할 속셈인가? 자네 스스로 목숨을 지킨 것, 암살자들의 흉수에서 실비아를 지킨 것, 모두 그대의 행운이다. 감사를 표하마.”

와우.

한걸음 물러서서 칭찬한 것 같지만 잘 들어보면 아니다. 내 ‘실력’ 덕분이 아니라 ‘행운’ 덕택이라고 낮잡아 말한 것이다. 설마. 설마 아닐 거라 생각하고 싶다만, 지금 황태자가 나를 견제하고 있는 것인가?

“금사매 영애는 저의 주인이십니다.”

그 순간.

“그리고 저는 아가씨의 것이지요.”

나도 모르게 입이 움직이고 있었다.

“전하. 한 자루의 검이 자기 주인을 지킨 것을 어찌 행운의 소관이라 이르겠습니까? 도구가 도구의 쓸모를 다했을 뿐입니다. 전하께선 과한 칭찬을 거두어주소서.”

당황스러웠다. 정말, 진짜로, 나는 대충 얼버무려서 물러설 작정이었다. 일국의 황태자와 일가의 집사가 싸워봤자 뭐 좋겠는가. 그런데도 혓바닥이 나불나불 잘도 움직인 것이다.

‘어? 드디어 내가 돌아버렸나?’

머릿속이 살짝 몽롱해지려는 그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물에 대한 몰입이 심화됩니다.]

뭐?

[현재 당신의 몰입률은 1% 입니다.]

미친?

“……정말, 입술을 꿰매버리고 싶을 정도로 달변이군.”

내가 마음속으로 미친을 연발하고 있는 와중에 황태자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모욕감. 치욕감. 그야말로 욕 나오려는 걸 참는 낯짝이었다.

가능하면 나도 욕을 한 바가지 쏟아버리고 싶었다. 왜냐하면, 황태자의 표정이 구겨진 걸 보니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상쾌해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멈춰야 한다는 생각보다 꼴 좋다는 감정이 먼저 들었다. 미친. 이런 미친.

“요즘 남작 수준의 귀족가에선 인성이 아니라 혓바닥을 보고 하인을 선발하는 모양이다. 폐하께서 세태를 아시면 참으로 한탄하실 것이다.”

잠깐만.

기다려라. 이 세계의 황태자인가 뭔가 하는 금발 라면 사리야. 더 이상 나를 도발하지 마. 제발 [나]의 감정을 건드리지 말라고. 이건, 이 스테이지는…….

“그럴 리가요. 폐하의 총안이 흐릿해질 날이 감히 있겠습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이리 장성하시어 나날이 본교에서 덕을 쌓고 계시거늘, 폐하의 성심도 사뭇 기쁘실 줄 아뢰옵니다.”

다르게 말하면, 네가 암살자 따위를 고용하고 다닌다는 걸 네 애비가 알면 참 좋겠구나, 하는 비아냥인데 지금 이딴 해석은 안 중요했다.

나는 이번 스테이지의 함정을 깨달았다.

그리고 성기사와 백작, 우리 탑의 경제와 치안을 다루는 헌터들이, 왜 그토록 힘을 못 쓰고 공략에 실패했는지도 알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두 사람, 컨셉에 잡아먹히는 거 같더니만!’

[인물에 대한 몰입이 심화됩니다.]

안돼.

[현재 당신의 몰입률은 2% 입니다.]

이건 미친 짓이야.

“흥. 되었다. 자네와 말로 겨루는 것 자체가 품위를 떨어트리는 짓이지. 오늘밤에 벌어진 일에 대해선 내가 철저히 진상을 조사할 것이다.”

“태자 전하만큼 믿음직스러운 분이 본교에 또 계시겠습니까?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드릴 뿐입니다. 부디 습격의 배후를 밝혀내어 일벌 백계 하시지요.”

“물론일세.”

아아.

‘이거’였냐!

이게 이번 스테이지의 특징이었나!

황태자는 힐끔, 나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실비아 영애가 아닌 밤중에 많이 놀란 것 같군. 혹시라도 습격의 흉수가 더 잠복하고 있을지 모르는 일. 오늘은 내가 영애를 보호할 테니, 자네는 그리 알게나.”

“전하.”

내 혀는 자동응답기로 진화하고 있었다.

“소인의 무례를 용서하시지요. 이런 사태가 벌어진 때일수록, 자신이 가장 마음을 편하게 놓을 수 있는 곳에서 피로를 풀어야 합니다. 저의 주인께서는 평소처럼 개인실에서 머무르길 원하실 것입니다.”

“……지금, 나의 곁에 있으면 마음이 편치 못하리라 말한 것인가.”

“송구합니다. 소인은 전하께 그저 사실을 말씀드릴 뿐입니다.”

살려줘.

나 좀 살려줘라!

[인물에 대한 몰입이 심화됩니다.]

[현재 당신의 몰입률은 3% 입니다.]

헬프미! 헬프미!

-야. 너 …… 뭐 하냐?

검제 양반! 아니, 검제님!

-엥. 이 새끼가 쳐돌았나?

진짜 지금 돌아버릴 거 같으니까 어떻게 좀 해주십쇼!

-어…… 뭘 어떻게 해달라는 말인데?

몰라요. 아무튼 저 정신 좀 확 들게 해주라고요!

-흠. 정말로 존나 심한 말 지껄해도 되는 각이냐?

무슨 말이든 상관없으니까 정신만 차리게 해주십쇼!

-아, 그러면.

배후령이 히죽 웃었다.

-좀비야. 넌 독사를 기분나빠하는 것 같더라만. 정작 틈만 나면 넌 누구보다 독사의 망상 속 주인공마냥 오그리토그리한 짓거리들을.......

아.

‘됐어요. 정신 차렸습니다. 그다음 말은 입에 담지도 마십시오.’

-오냐.

감히 독사 드립을 날려대는 배후령의 작태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런 응큼한 귀신을 봤나? 아무리 무슨 말을 해도 상관없다지만 진짜로 아무말 대잔치를 열어버리려 하네. 덕분에 미친 듯이 오르던 몰입률이 뚝 멈췄지만 말이다.

"......."

한편.

황태자의 품에 얼굴을 묻은 이단심문관도 정상은 아니었다.

"......? 응......?"

이단심문관이 갸웃, 갸웃, 고개로 도리질을 쳤다. 나는 처음으로 이단심문관이 ‘당혹’해하는 표정을 엿보았다. 자타공인 원탑 또라이. 순수 내츄럴 싸이코는, 지금 느껴지는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탓.

그래서인지 이단심문관은 황태자의 가슴을 밀쳤다. 품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나와 눈싸움을 벌이던 황태자가 당황하여 금사매 영애, 아니, 이단심문관을 바라봤다.

“실비아. 갑자기 왜 그러는가?”

“응? ……으으음? 오오?”

이단심문관이 머리를 한 번 더, 갸웃거렸다.

“신기하군요.”

“무엇이 신기하다는 말이냐, 실비아.”

“지금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낯선 감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단심문관이 베실 웃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군요!”

"......."

"마구, 가슴이 뜁니다. 오호. 아하. 과연! 정말로 신비합니다…."

이단심문관이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양손으로 가슴을 짚었다. 이단심문관, 아니, 금사매 영애는 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 같았다.

“이 몸의 주인은 당신을 정말로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시, 실비아….”

황태자가 울컥했다. 감격이란 이름의 국물에다 감동이라는 밥을 말아 먹은 면상이다.

만약 내가 서둘러 몰입을 멈추지 않았더라면 지금 타이밍에서 질투를 느꼈을지 모르는데, 다행히, 천만다행, 그럴 일은 없었다. 나는 뒤늦으나마 제정신을 차렸다.

“아가씨.”

나는 힘 주어서 아가씨, 라고 말했다. 이단심문관이 감았던 눈을 뜨고 날 바라봤다.

“기숙사로 돌아가지요. 황태자 전하께서 몸소 습격의 배후를 밝히겠노라고 공언해주셨습니다. 밤이 깊었으니 아가씨는 숙소에 돌아 가서 편히 쉬어야 합니다. 내일부터는 또 아가씨의 생활을 이어가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겐 우리의 ‘역할’뿐만 아니라 ‘목적’이 있다.

스테이지 클리어라는 목적.

이걸 잊으면 안 된다.

“앗. 참. 그랬지요.”

이단심문관이 눈을 깜빡거렸다. 나의 말뜻을 바로 이해한 것이다. 이단심문관은 치마 끝을 잡고 황태자를 향해 인사했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제 종자와 함께 숙소로 돌아가겠습니다.”

“아?”

“좋은 밤이 되시길. 태자 전하.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얼굴이 멍해진 황태자를 버리고, 이단심문관은 쉽게 등을 돌렸다. 그리고 발걸음 가볍게도 창고를 나가버렸다.

등 뒤에서 “실비아! 시, 실비아?!” 하고 황태자가 외쳤으나 이단심문관은 싱글벙글 복도를 걸어갈 뿐. 고개도 안 돌려봤다.

“……일이 어려워졌는데요.”

나는 이단심문관의 옆에 바싹 따라붙어서 중얼거렸다.

“몰입이라니, 이런 함정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젠장.”

백작이랑 성기사가 왜 실패했는가 좀 의아했는데 이젠 이해가 된다.

“아하핫.”

이단심문관이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따박. 따박. 달이 비치어 하얀 그늘이 진 복도로 우리 두 사람의 구둣발이 울렸다. 사람의 발 소리는 심장의 박동을 닮아 있었다.

“확실히 저희가 예상하지 못한 사태이긴 합니다. 사왕. 당신은 방금 몰입률이 얼마나 올라갔습니까?”

“3프로까지 미친 듯이 올랐어요. 겨우 막았고요.”

“굉장하군요. 저는 곧바로 10퍼센테이지를 찍었습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10퍼센테이지? 10%?’

망연해졌다. 그저 황태자라는 인물과 잠깐 시간을 보냈을 뿐인데 자아의 1할이 감염되었다는 말인가.

생각한 것보다 상황이 심각했다.

이래서야 평범하게 생활하는 것조차 사실은 독안개 속을 걸어 다니는 것과 다름없다. 조금씩 중독되어서, 정신을 차린 뒤에는, 이미 빠져나올 수 없게 된 독무(毒露).

정신줄을 놓으면.

순식간에 이 세계의 [로맨스]에 잡아먹히고 만다.

“……안되겠어요.”

내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느릿했다. 그래, 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것.

그건 내게 언제나 가장 두려운 일이니까.

“우리끼리 안전장치를 마련하지요.”

“안전장치입니까?”

“예."

나는 단검의 칼자루를 조심히 매만졌다. 청테이프의 촉감이 손가락에 감겼다. 낯익은 감촉에 안정감이 찾아왔다.

“키워드를 정해요. 어떤 상황이어도, 아무리 심각해도, 이 키워드를 말하면 일단 정신을 차릴 수 있게. 가령 제가 [복숭아]라고 말하면 이단심문관 씨는 [당근]이라고 말하는 식이에요.”

“아하. 저희 두 사람의 비밀암호군요!”

이단심문관이 웃었다.

“찬성합니다! 저도 비슷한 걸 드라마에서 본 적 있습니다. 그럼 어떤 말을 비밀암호로……"

뚜벅.

그 때, 복도 맞은편에서 굽소리가 들려왔다. 구두의 힐이 위태롭게 복도를 찍는 소리였다. 그 뒤를 둔탁한 발소리가 우르르 따라왔다. 한 사람이 여러 명의 하인을 거느린 채 다가오고 있었다.

달이 비치었다.

복도에 비친 달을, 날카로운 구두가 짓밟았다.

달빛만큼 은색인 머리카락. 은백합 영애.

공작가의 여식은 권속들을 이끌고 이 쪽으로 걸어왔다. 무엇에 그리도 화났는지 악역 영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우리를 노려보았다.

“아."

이단심문관이 짧게 신음했다.

"사왕."

이단심문관은 구두를 세워서 나한테 발돋움했다.

그리고 입술을 열어 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 아무래도 저 여자를 싫어하는 모양입니다.”

소곤.

언뜻, 언제나와 똑같은 목소리였다.

"......."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단심문관을 보았다.

“으흠.”

이단심문관은 빙그르르 돌았다. 긴 드레스 자락이 소용돌이치면서 작달막한 용오름을 일으켰다. 체중을 담은 바람이 내 가슴을 눌렀다.

“궁금하네요. 사왕.”

탓, 멈추어 선 이단심문관이 양손을 펼쳤다. 유일하게 맨살이 드러난 검지만을 남기고 나머지 손가락을 접었다.

“아아, 정말이지 궁금합니다."

양 검지로 입매를 눌러올린 그는 언제나와 같이 웃고 있었다.

“저는,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습니까?”

그러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인물에 대한 몰입이 심화됩니다.]

[현재.]

[당신의 몰입률은 4%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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