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 빠지다.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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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로맨스 판타지 규범3
『두 사람의 사랑을 키우고 싶은가? 우선 서로 미워하게 하라.』
『증오는 번개. 애정은 천둥. 증오라는 번개에 눈이 멀면, 애정이라는 천둥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6.
“평안하신지요?”
소르므윈 아카데미의 등굣길.
“예, 푹 자버렸답니다. 학우(學友)님께서도 간밤에 평안하셨나요?”
“덕분에요. 좋은 꿈을 꿔서 그런지 기분이 상쾌해요. 오늘 아침엔 토스트를 2조각 먹으려고요."
“어라. 어떤 꿈이었는지 꼭 듣고 싶은걸요. 식사를 같이 하시는 건 어떨까요?”
“어머나, 정말 멋진 제안이네요!”
“후후."
학생들이 미소를 지으며 고풍스럽게도 인사를 나눈다. 목련이 피어 하얀 등굣길 위에서 "어머나”와 "후후”가 재잘재잘 흐른다.
평화. 평온.
아기새들이 모여 나란히 합창해도 이것보다 평화로울 수 없고, 틀림이 만개한 꽃밭도 이것보다 평온할 수 없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정화되는 모습이다. 다이아몬드처럼 반짝거리는 순간이 이곳에 있다.
“아. 금사매 학우님. 평안하신지요?”
그리고 다이아몬드는 좀 때깔 고운 석탄에 불과했다.
불을 붙이면 존나 잘 타는 거다.
“아뇨! 전혀 평안하지 못합니다!”
"엣."
자신에게 인사한 영애를 향해서 이단심문관이 방실 웃었다.
“평온할 리가 없지요! 간밤에 암살자 자식들한테 습격을 받아 뒈질 뻔했습니다. 밤새도록 잠이 안 와서 안 그래도 억울한데 평온하다니요! 생각이 있으십니까?”
“네?”
“아니, 생각이 있을 리 없군요. 생각이 있다면 어젯밤 죽었을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평안하신지요’라고 인사할 리 없으니까요. 아하핫. 평안해야 하는 건 제가 아니라 당신의 머리입니다! 머리는 평안하십니까? 두개골은 안전하십니까? 뇌는 안녕하십니까?”
“네에 …… 에? 네?”
“아아! 이런, 머리가 쉬어서 그런지 입이 비틀어졌군요. 괜찮습니다. 제가 이해합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지요. 머리가 망가졌는데 정신상태가 온전하시겠습니까? 어서 보건실에 가보시길. 달리 말하면 제 눈앞에서 꺼져주십시오!”
“……아, ……아아……?”
휘청.
영애가 비틀거리더니 기절했다. 영애의 하인이 몸을 잡아줬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등굣길에서 굴렀을 것이다. 평범한 하루처럼 정답게 아침 인사를 나누던 학생들은 비명을 질렀다.
“백난화 자작 영애! 괜찮으신가요?!”
“세상에! 안색이 너무 하얘……"
“여러분, 어서 보건 선생을 부르시어요!”
“숨을 쉬세요! 제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숨을 쉬어야 해요!”
“금사매 영애! 방금 무, 무슨 말을 한 건가요……!”
웅성웅성.
평화를 노래하는 아기새들은 다 날아갔고, 평온을 즐기는 튤립 꽃밭엔 폭탄이 떨어졌다. 다이아몬드가 화르르 타오른 것이다. 귀족가 영애들은 능숙하게 기절한 학우를 챙기면서도 경악을 숨기지 못했다.
이단심문관이 방긋 웃었다.
“왜 난리입니까. 눈치 없이 평안하냐고 물어본 인간한테 당신의 머리는 안녕하시냐고 반문했을 뿐입니다만!”
근처에 있는 영애가 입을 뻐끔거렸다.
“머, 머리가…… 안녕하시……?”
“아. 당신은 머리숱이 붉군요. 멋지게 빨간 머리카락입니다! 혹시 두개골이 깨져서 뇌가 조금 흘러나온 거 아닙니까? 아핫. 안 그래도 안타까운 지능이 더 떨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어서 주워 담으십시오!”
“……,하아……"
휘청.
“아가씨?!”
“꺄악! 매화초 백작 영애!!”
“보건 선생은 아직 안 왔나요?!”
“그 월급 도둑놈!”
“누가 생수 좀 떠오세요!”
“경비원! 경비원!”
혼돈이 도래했다. 그야말로 아포칼립스의 광경. 묵시록은 아직 멸망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소르므윈 학원의 등굣길은 신나게 초토화되고 있었다.
“아하핫.”
혼자서 반경 20미터를 쑥밭으로 만든 이단심문관은, 악의 한 점 없는 얼굴로 싱글벙글거렸다. 밤새 속성과외를 받은 탓에 눈 밑으로 검은 기미가 꼈지만 말이다.
“사왕, 최고입니다! 몰입이 정말 조금도 오르지 않습니다!”
당신도 최고인데요.
염제의 1대 1 과외가 불러일으킨 효과는 굉장했다.
“앞으로도 전적으로 믿고 가야겠습니다! 역시 사왕의 묘책은 믿음직스럽군요!”
나는 집사다운 각도로 허리를 숙였다.
“칭찬 감사합니다. 아가씨.”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 발을 밟고 있는 것도 몰입률을 막기 위한 방법입니까? 엄지발가락이 좀 아픕니다만.”
“불량 집사를 행세하려면 어쩔 수 없어요. 참으세요.”
“제가 이해하겠습니다!”
이날 아침, 아카데미 보건실에 총 14명의 영애가 입실했다.
여학생 기숙사 앞길에서 벌어진 사건은 순식간에 전교로 퍼졌다.
일명 [당신 머리 안녕] 사건이었다.
7.
식당, 본관, 정원.
어디를 가도 학생들은 이번 사태에 관해 수군거렸다.
『금사매 남작 영애가 실성했다.』
『어제 습격을 받고 난 다음부터 사람이 바뀌었다.』
『악마가 빙의한 것이다.』
『소문을 의심하여 진실을 밝히겠다고 용감히 떠난 영애 2명과 영식 1명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오히려 지금이 더 끌리지 않는가?』
『그래서 누가 금사매 영애의 암살을 사주했나?』
『소르므윈 비공식 동아리 ‘모든 언니의 동생들 모임(모언모)’은 작금의 변화를 환영한다. 우리는 소르므윈 학우 제군들에게 인식의 변화를 촉구한다.』
『영애의 집사가 홍차에다 소금을 섞어서 주는 모습이 목격됐다. 증인도 많다.』
『위험하다.』
『암살.』
『황태자 전하께서 수습하고 계신다더라.』
『실성했다.』
『미치겠다.』
『적당한 염분 섭취, 건강에 좋아… 홍차에 소금은 웰빙을 위한 것?』
『금사매 언니.』
소문은 눈사태처럼 불어나서 괴담으로 변했다.
"금사매 영애! 영애는 제 주인의 명예를 모욕했습니다!”
그러나 소문이 괴담으로 변했다곤 해도 14명의 영애가 기절한 건 사실이었다. 당연히 그 영애들의 하인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차마 귀족 아가씨한테 덤비지야 못해도, 똑같은 아랫사람인 나한테는 얼마든지 결투를 청할 수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분노한 하인들이 줄을 이뤄 달려들었다.
"주인의 명예와 가문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영애의 종자와 결투하는 것을 허락해주십시오!”
"호오.”
이단심문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여러분끼리 원만하게 해결---."
“잠깐만요.”
나는 몰래 이단심문관의 발을 밟았다. 이단심문관이 아앗했다.
“왜 그러십니까?”
“한 번 연기하기로 작심했으면 끝까지 불량 영애로 남아야죠. 남들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주지 마십쇼. 불량하지 못해요.”
"앗, 과연. 그렇군요. 그럼 어떻게 해야 불량에 어울립니까?”
"제가 시키는 대로 해보세요.”
우리 둘 사이에 귓속말이 소곤소곤 오갔다. 결투를 신청한 하인들은 어리둥절한 낯으로 우리를 쳐다볼 뿐. 잠시 뒤에, 이단심문관은 진리를 깨달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제 종자와 결투를 해도 괜찮습니다.”
"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당장 이곳에서……"
"단! 결투를 하려면 저한테 돈을 내십시오!”
하인들이 눈을 깜빡거렸다.
"..예?"
"저한테서 원하는 걸 얻어가려면 돈을 내라 이 말씀입니다.”
이단심문관은 정원 벤치에 앉아서 다리를 꼬았다. 방긋거리는 얼굴에 포스가 충만했다. 아마 어린아이들이 지금의 이단심문관을 본다면 자동으로 ‘언니!’ 라는 호칭이 튀어나올 것이다.
"저의 집사는 저희 가문의 것입니다. 이 학원에서 본가의 사람은 저밖에 없으니, 제 것이기도 합니다. 결투 도중에 제 물건이 상처를 입으면 어쩔 겁니까? 당신들이 책임지겠습니까?”
“어어, 어어어……"
귀족가의 종자들은 당황했다. 신성한 결투에 돈을 상납하라니? 너무 양아치적인 발언 아닌가?
“어, 얼마를 드리면 되겠습니까?”
“금화 5닢으로 봐드리겠습니다!”
"......."
“아핫.”
이단심문관은 내가 가르쳐준 대로 마지막 대사를 날렸다.
“여러분. 설마 주인 아가씨들에 대한 충성심이 고작 금화 5푼보다 못하진 않겠지요?”
"......."
하인들이 주섬주섬 금화를 꺼내었다. 보고 있자니 좀 불쌍하기도 했다. 그중엔 울상을 지은 종자도 있었다.
아가씨를 위한 결투를 돈 주고 사는 것이 과연 명예로운 일인지 근심하는 얼굴빛. ‘진짜로 이게 맞나?’ 싶은 표정.
그러나 낙장불입이다. 한두 명이 금화를 내기 시작하자 다른 하인들도 대세에 합류했다.
“여, 여기 있습니다. 영애.”
“예!"
“저도 여기……"
“예. 잘 받았습니다!”
“저어, 송구합니다. 제가 지금은 은화밖에 없습니다. 잔돈도 받아주시겠습니까…?”
“다 받아드리지요!”
이단심문관은 알뜰살뜰 하인들을 삥 뜯었다. 황제한테 이명을 하사받은 아가씨의 기품 따위, 짤랑짤랑이는 금전 소리에 흔적도 안 남기고 파묻혔다.
종자는 주인을 닮는 법.
"음."
나도 건달처럼 목을 상하좌우로 한 번씩 비틀어줬다.
열 명이 넘는 하인들이 나를 뻘쭘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냥 혹시 해서 물어보는데요.”
“뭐 , 뭐냐.”
나는 성검을 칼집째로 들었다.
“이 중에서 일주일 넘게 굶어보신 분?”
신나는 구타음이 정원에서 울렸다. 나는 드럼을 난타하는 한 명의 연주자가 된 기분으로 하인들을 차례차례 쓰러트렸다. 먼지가 날리 도록 패준 것이다.
"악!"
“헉 , 커억?!”
수많은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인들은 비명을 질렀다. 주위를 둘러보면 학생들이 경악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내 뒤에선 이단심문관이 금전을 손에서 굴리며 콧노래를 흥흥 불렀고 말이다.
비명, 경악, 돈소리.
세 개의 선율이 완전한 삼위일체를 이루었다.
“시,"
그 때. 구경하는 학생들 사이로 누군가가 급하게 뛰어왔다.
“실비아! 지금 이게 대체 무슨 난리인가?!”
이 묵시록 세계의 라면사리라고 할 수 있는 남자. 황태자였다.
금발 라면은 매우 당황하고 있었다. 퉁퉁 불어터진 면발 같은 면상을 보니 가슴이 통쾌했다. 어젯밤, 우리가 저 남자 때문에 느껴버린 당혹감을 오늘 정반대로 돌려준 거다.
“갑자기 이상해졌다는 풍문을 들었다만 언제나처럼 악의 넘치는 헛소문이라 여겼거늘. 지금, 학우들을 상대로 대체……. 자네!”
태자는 황망하게 중얼거리면서 나를 노려봤다. 음. 밥 말아 먹은 라면 국물치고는 눈빛이 꽤 살벌했다.
“자네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주인이 피곤하면 종자가 전력을 다해 말려야지! 아예 칼자루를 쥐고 경거망동하다니, 집사로서 삼류이고 하인으로서도 실격일세! 실격이야!”
“송구합니다. 전하.”
나는 성검을 허리춤에 차고 머리를 숙였다.
"소인은 아가씨 이외에 다른 분께 평가를 받지 않습니다. 아가씨께서 소인을 삼류라 평가하시면 저는 삼류인 집사이고, 아가씨께서 소인을 실격이라 말씀하시면 저는 물러날 것이나, 그러지 않는 이상에야 저는 충실한 집사로 남을 것입니다.”
“네가…… 이렇게 평지풍파를 일으켜 놓고도, 뻔뻔히……"
황태자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문을 닫았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 같은 하인과 말을 섞어봤자 소용이 없다고 여긴 건가.
“실비아. 내가 누차에 말하지 않았는가? 저런 남자를 집사로 두어서는 안 된다. 황실에는 심혈을 기울여 키운 환관 후보생이 여러 명 있다. 폐하께 부탁을 드리면 그 중에서 유능한 이를 한 명 데려올 수 있다. 괜찮다! 걱정하지 마라. 이미 부황(父皇)께서는 너를 어여삐 여기고 계시다.”
와오.
구경하는 학생들이 나지막하게 탄성을 냈다. 달콤한 표정에 빠진 영애들도 군데군데 보였다. 방금 황태자는 너무도 적나라하게 애정을 표현한 것이다.
영애들은 하아, 애툿하게 한숨을 쉬며 속닥거렸다.
“어쩌지요? 태자 전하의 약혼자는 은백합 공녀님인데…….”
“하지만 두 분 모두 태어나기도 전에 언약으로 맺어졌을 뿐이잖아요? 너무 오래된 옛일이에요. 폐하께서 금사매 남작 영애를 아끼신다는 건 예전부터 돈 소문이니, 혹시……"
“아아, 어쩌면 좋을까요!”
어쩌면 좋냐고 한탄하면서도 영애들은 눈을 반짝였다.
황족의 로맨스만큼 뜨거운 스캔들이 없다.
자기 집안의 다이아몬드가 불타면 아까워 죽겠지만, 다른 사람, 심지어 제국에서 제일 화려한 다이아몬드가 활활 타오르는 모습은 천금을 내서라도 구경하고 싶을 거다.
“실비아, 어떤가?”
황태자는 다가가서 이단심문관의 손목을 잡았다.
“내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겠는가?”
이단심문관이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이 순간엔 나도 긴장했다.
[여자 주인공]인 금사매 영애의 사랑이 더 격렬할 것인가. [불량 영애]를 연기하는 이단심문관의 자아가 더 강할 것인가. 나는 최선을 다해서 후자에 힘을 실어줬지만, 결국 마음의 싸움을 벌이는 장본인은 이단심문관이었다.
우리가 승부에서 패배할 수도 있다.
“……태자 전하.”
이단심문관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오늘 어떤 향수를 뿌리셨습니까?”
“뭐?”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저에게는 조금 낯선 향기입니다.”
이단심문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퍼졌다.
차르륵.
이단심문관은 자연스럽게 황태자의 손아귀에서 손목을 풀어버린 다음, 부채를 꺼내 펼쳤다. 부채 위로 반개한 눈웃음이 꽃피었다.
“어제 저를 습격한 암살자들의 배후는 밝혀졌습니까?”
“아, 아니… 아직은 조사가 진행 중이다.”
“어젯밤 제 곁에 집사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저는 해코지를 당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저를 생각하신다면, 그만큼 저의 집사도 존중해주시길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집사가 작게는 저의 목숨을 지키고 크게는 학원의 명예를 지킨 것 아닐까요?”
"......."
“전하. 저는 저의 집사를 제일 신뢰하고 있답니다!”
황태자의 면상에서 라면이 끓어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단심문관은 부채를 활짝 펼친 채 웃은 것이다.
“오-호호호홋!!”
이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