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 악역(惡役). (3) (본문 내용수정) >
=============================
3.
묵시록에 떨어지고 사흘째.
은백합 영애는 아카데미에 결석했다.
“몸이 아파서 드러누웠다고 하는군요.”
“그렇습니까...."
“예. 원래 잔병치레가 많았답니다. 심지어 밤새도록 하인들을 심문했을 테니 오죽하겠습니까!”
이단심문관이 다소곳하게 홍차(건강에 좋은 나트륨 다량 함유)를 홀짝였다.
“체력이 국력! 몸이 아파서는 아무리 가슴에 큰 대의를 품었다 해도 이루기 어렵습니다. 으음, 안타깝군요. 은백합 영애는 제국을 노려볼 만한 인재입니다만….”
“태자도 출석이 끊겼다고 얼핏 들었는데요.”
“아하핫. 예에, 전부 집사 덕분입니다. 아마 충격이 크지 않겠습니까? 이대로 휴학을 신청할지도 모릅니다.”
정원 한켠. 목련이 흐드러진 정원에서 우리는 티타임을 갖고 있었다. 정원을 오가던 다른 학생들은 우리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미친 주종이다!”
“불량 영애예요!”
“가까이 가면 안 되어요!”
영애들은 드레스 자락을 들고, 영식들은 발목을 걷어부치고 호다닥 도망쳤다.
덕분에 우리는 넓은 정원을 독차지했다. 꿀이군.
“이단심문관. 방금 절 [사왕]이 아니라 [집사]라 불렀어요. 조심하시죠.”
“앗! 죄송합니다. 제 실수입니다. 몰입률이 20%를 넘어서니 마음대로 안 되는군요. 참. 이 소금홍차 의외로 매력이 있습니다! 한 잔 더 부탁합니다, 집사.”
“또 집사로 불렀다니까요….”
나는 한숨을 쉬면서도 아가씨의 찻잔에 홍차를 따라드렸다.
또르르.
“으흠.”
나는 콧노래를 불렀다. 집사의 역할을 차지하게 된 이후 깨달은 것인데, 다도(茶道)라는 게 참 깊다. 주전자에서 찻물이 떨어져 잔에 고이는 장면마저, 한 방울 한 방울 물결되어 퍼지는 광경 또한 아름답다. 그야말로 아가씨께 어울리는 문화…….
[인물에 대한 몰입이 심화됩니다.]
[현재 당신의 몰입률은 10%입니다.]
“꺄아악?!”
이단심문관이 팔짝 뛰었다.
“집사, 왜 갑자기 저한테 찻물을 뒤집어 엎습니까! 뜨겁습니다! 제 섬세한 모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습니다!”
“[꺄아악]이라니! 당신 원래 그런 식으로 비명 안 질렀잖아요! 진짜 몸도 마음도 금사매 영애가 되어버린 거 아닙니까? 한 번 말해보십쇼. 봄이 오면!”
“목련이 떨어지고 집사의 머리카락도 떨어집니다.”
“아아아악!”
탈모의 공포를 체험하는 시간이 잠시 있었다.
우리는 진정하고 싸움을 멈췄다. 나는 종자로서 이단심문관의 머리를 빗질해줬다.
며칠 사이, 이단심문관은 뒷머리카락이 조금 자랐다. 신성술식 변신(變神)의 효과일까? 아니면 금사매 영애를 점점 더 닮아가는 것일까?
“감정 표현이 예전보다 훨씬 다양해졌네요. 이단심문관 씨.”
내 손가락이 금빛의 머릿결을 훑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빗질을 해준 적도 받아본 적도 없었지만, 손이 저절로 알아서 움직였다.
“예전에는 항상 웃었지만. 정반대로 생각하면 전혀 안 웃는 것과 똑같지요. 기뻐서 웃는다기보다 그냥 웃음이 기본 표정이라는 느낌이 강했어요.”
“아핫. 지금은 달라졌습니까?”
“예, 좀 더 감정이 담기게 됐어요. 생생하다고 할까요? 이제는 당신이 웃으면 왜 웃는지 알 것 같아요. 이 사람이 진짜로 기뻐서 웃는 건지, 비웃는 건지.”
“그렇군요. 저도 자각은 하고 있습니다. 사왕은 이게 좋은 경향이라고 보십니까?”
나는 이단심문관의 뒷머리를 조용히 내려봤다. 작은 머리. 작은 몸. 작은 어깨. 작은 팔. 이 작은 몸집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을지에 대해 생각했다.
이단심문관.
유럽 불가리아 출신, 1세대 헌터.
연령 불명.
살인수 불명.
“……예. 좋은 경향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입을 열었다.
“솔직히 저는 당신을 어떡해야하나 싶었거든요.”
“음? 무슨 뜻입니까?”
“당신은 싸이코패스에 미친 학살자니까.”
이단심문관의 뒷머리를 천천히 묶어주었다. 고아원에서 어린 동생들을 보살펴준 기억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다짜고짜 당신을 죽일 수는 없었어요. 당신 같은 사람을 가장 싫어할 흑룡주, 심지어 검성조차도 당신을 살려두고 있었거든요. 죽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다는 뜻이지요.”
이단심문관이 웃었다. 당신을 죽일지 말지 고민했다는 얘길 들어도 그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재밌어 했다.
“정확한 통찰입니다!”
“왜 사람을 죽여요?”
마침내 나는 그토록 묻고 싶은 질문을 물었다.
“당신. 싸이코패스지만 말을 알아듣는 싸이코패스잖아요. 당신 나름대로 남을 이해할 줄 알잖아요. 그런데 왜 죽이는 겁니까?”
“흐음.”
이단심문관이 손으로 턱을 짚었다. 생각에 잠긴 분위기였다. 정원의 꽃덤불 너머에서 학생들이 웃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이단심문관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에게만 들리게 귓속말로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우선은 제가 유능하다는 사실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이단심문관이 수인을 맺었다.
“신성술식, 은신(隱神)!”
이단심문관의 장갑 한 쪽이 사라졌다.
“제가 쓸 수 있는 신성술식 중 하나입니다. 어떤 물건이든 세상에서 실종시킬 수 있습니다. 당연하지만 살인에 쓰인 증거품과 시체도 없애버릴 수 있지요.”
맨살이 드러난 손가락이 허공을 노 저었다.
“권력자가 사람을 잘 죽이지 않는다면, 그건 권력자가 선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왕. 단순히 시체를 은폐하는 것이 귀찮아서, 나중에 발각될까 두려워서 그럽니다. 저는 귀찮음과 두려움에 시달릴 염려가 없습니다!”
"......."
“1세대 시절에 탑은 정말 혼란스러웠습니다.”
이단심문관의 얼굴은 해맑았다.
“노예제도의 부활. 인종차별과 민족감정. 테러. 괴뢰세력. 집단학살. 선동과 날조. 이념갈등. 인류의 역사를 압축시켜 입안에서 녹여 먹는 것 같았달까요? [이대로 가면 우리 모두 멸망한다]는 위기감이 중소군벌들, 현재의 5대 길드에 퍼졌습니다.”
흑룡. 상련. 만신전. 천무문. 자경단.
“5명이 모였습니다.”
마치 영웅 서사시를 읊조리듯 이단심문관은 말했다.
“흑룡주가 먼저 말했지요!”
[쓸데없는 말은 생략할게. 영원히 불가침조약을 맺자.]
“백작이 조건을 내세웠습니다.”
[상련에 바깥세상 물자들의 독점권을 보장해주게.]
“제가 덧붙였지요!”
[모든 길드가 저마다 독점적인 영역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사건 은폐에 협력하는 조건입니다!]
“독사가 투덜거렸습니다.”
[하필이면 제일 미친 놈들이 제일 믿음직스러운 인간들이라니. 쯔쯔. 말세로군, 말세야. …근데 이 커피는 뭔데 이렇게 쓰냐? 누가 나한테 시키지도 않은 커피 줬어? 어이. 이봐? 어이?]
“검성이 정리했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한다’고 말하지 않겠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라고 말하마. 오늘밤, 우리는 우리의 신념, 우리의 판단, 우리의 방법으로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다.]
“그날 밤 4653명이 죽었습니다.”
이단심문관의 웃음은 여전히 해맑았다.
“다음날 밤에는 10171명이 죽었습니다. 다시 그 다음날 밤에는 8275명이 죽었습니다. 다시 그 다음날 밤에는 7412명이, 다시 그 다음날 밤에는 23781명이 죽었습니다.”
죽었습니다.
죽었습니다.
죽었습니다. 그렇게 읊조리던 이단심문관은 어느 순간 해맑게 말했다.
“그러다가,”
그 날은 갑자기 찾아왔다고 이단심문관은 말했다.
"그 날 밤에는,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길었던 정리작업에 마침표가 찍힌 것이다.
그 날 밤, 흑룡주는 목놓아 울었다고 했다.
그리고 검성은.
[본인이 책임을 지고 사퇴하지.]
검성은, 그당시에 자경단장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영원히 이번 사태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학살을 긍정했다. 참여했다. 해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저질렀다. 영원히 너희를 증오하마.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나 자신을 혐오하겠다.]
결별.
그날 이후 자경단의 길드장 자리는 영원한 공석(空席)으로 남았다.
“그 이후로는 성기사가 자경단을 맡게 되었지요.”
성기사.
자경단의 부단장. 언제나 부단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또한 그렇게 불려왔던 사람.
“성기사는 후회했습니다.”
나는 성기사가 약제사와 함께 검성을 막아섰던 밤을 문득 떠올렸다. 그 때 성기사와 검성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오간 것은 그 때문인가.
“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필요한 희생이었으니까요!”
이단심문관이 싱긋 웃었다.
“하지만, 금사매 영애에게 몰입한 영향일까요? 지금은 조금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뭔가요?”
“사왕. 그 때 그 시절에 당신이 있었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신기하군요. 단 한 번도 이런 기분에 잠겨본 적 없는데 말입니다.”
이단심문관이 고개를 들었다. 귓속말은 끝난 것이다. 그가 바라본 하늘엔 목련이 피어 있었다.
“당신들은 늘 이런 기분 속에서 사는 걸까요? 그 때 그렇게 했더라면. 이 때 이렇게 했더라면. 그런 생각 속에 표류하며, 방랑하며, 그럼에도 그렇게 살아가는 걸까요.”
“대단하군요.”
이단심문관은 아아, 한탄했다.
“그러기에,”
랭킹 5위의 헌터가 탄식하듯 말했다.
“이토록 당신들은 아름답고, 이다지도 사랑스러운 것이겠지요.”
“이단심문관…...."
“만약 저도 당신들처럼……"
이단심문관의 말이 잠시 멎었다.
“음.”
이어졌다.
"으음."
그리고.
“곤란합니다. 집사. 저는, 점점 더, 이 세계에 머무르고 싶어지고 있습니다.”
이단심문관이 미소를 지은 순간에 목소리가 들렸다.
[인물에 대한 몰입이 심화됩니다.]
[현재 당신의 몰입률은 11%입니다.]
나는 깨달았다.
아마도 이 사람을 죽이지 못할 거라고.
후회할 줄 아는 사람을, 나는 죽이지 못하는 것이다.
“아가씨.”
“예."
“봄이 오면.”
이단심문관이 손을 저었다. 사라졌던 장갑이 어느덧 돌아와서 그의 맨손을 감쌌다. 꽃잎 무늬가 그려진 하얀 손장갑. 이단심문관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봄은 좋지요. 산책하러 가겠습니까, 집사?”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단심문관은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곤 "풋!” 웃었다. 그리고 배꼽을 잡고 폭소했다.
“아하하핫! 핫! 낯빛이 엄청나군요, 사왕! 순식간에 파래졌습니다! 시체인 줄 알겠습니다!”
“진짜 당신…… 장난을 쳐도 이런 걸……"
“죄송합니다. 감정을 얻은 저는 좀 장난꾸러기가 되는군요! 앗. 알겠습니다. 제가 평소 사왕한테 무슨 감정을 느꼈는지 이제 감이 잡힙니다! 꼭 믿음직스러운 큰형을 보는 것 같습니다!”
“큰형이라니…. 당신 1세대잖아요. 사실 저보다 나이 더 많은 거 아니에요?”
“노코멘트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라고 이단심문관은 말했다.
“제가 빠르게 금사매 영애한테 몰입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렇게 대화하고 있는 사이에도 1%가 올랐습니다. 현재 저의 몰입률은 32%. 내일은 어쩌면 50%가 넘을지도 모르지요! 그만큼 저는 [감정]을 느끼는 것에 중독되고 있습니다.”
내가 묶어준 뒷머리를 이단심문관은 매만졌다.
“저는 이 묵시록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하지만 결말의 주인공은 당신입니다. 사왕. 제가 감정에 휩쓸려서 금사매 영애에게 익사하기 전에, 결말을 구해주십시오.”
“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할게요.”
이단심문관이 미소를 지었다.
“믿고 있습니다. 저의 집사.”
그날 밤에 이단심문관의 몰입률은 50%를 넘겼다.
4.
‘결국에 이 세상을 멸망시키는 장본인은 은백합 영애야.’
나는 문병을 핑계로 은백합 영애의 숙소로 향했다.
‘열쇠는 그녀다. 그녀를 이해해야 된다. 은백합 영애의 사랑, 질투, 허용, 교만, 독점…. 전부 이해해야만 이번 묵시록도 마무리지을 수 있어. 그럴 거야.’
공녀의 숙소는 어제와 달리 하인들이 북적였다.
“실례합니다.”
나는 공손히 말을 걸었다.
“공작 영애를 뵐 수 있겠습니까?”
“누구시오?”
“금사매 영애께서 병문안을 보내셨습니다.”
하인들은 얼굴이 굳어졌다. 자기들 주인과 금사매 영애의 사이가 나쁘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었다. “잠깐 기다려주시죠!” 라고 시종 한 명이 외치며 급히 숙소로 달려갔다.
잠시 후에 시종은 떨떠름한 얼굴이 되어 돌아왔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아가씨께서 문안 인사를 허락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시종의 안내를 받았다. 도착한 곳은 은백합 영애의 침실이나 접견실이 아니었다. 집무실. 수많은 하인들이 방문을 오가면서 보고 하고 있었다.
“레파노르 지방에서 올라온 서신입니다. 아가씨.”
“책상 왼편에 두어라.”
“아가씨. 청솔매 자작 영애가 당주를 대신해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계절이 계절이니, 환곡(還穀)에 관한 청탁인 듯싶습니다만….”
“재무조에 보내서 검토하고 가져와라.”
“아가씨.”
"음."
집무실 한가운데의 책상에서 서류를 살펴보던 은백합 영애가 머리를 들었다. 빨간 눈동자가 순식간에 내 몸을 훑었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
“손님이 왔군. 다들 나가 있거라.”
은백합 영애는 책상에 놓여 있는 모래시계를 잡아서 탁, 반대로 뒤집었다.
“15분 휴식을 주겠다.”
하인들이 우르르 나갔다.
넓은 집무실에는 은백합 영애와 나만이 남았다.
“그래.”
은백합 영애는 깃펜을 내려놓았다.
“금사매 남작 영애가 병문안을 보냈다고? 기특하군.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를 보자마자 이빨부터 갈던 아이거늘. 그 사이에 사람이 달라졌다.”
“……아파서 쓰러지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건강하시군요. 놀랐습니다.”
“이래 봬도 학생 신분일세. 수업을 빼고 할 일을 처리하려면 적당한 핑계가 필요하지. 그렇다고 나보고 건강하다 말하는 것은 과한 말 이네만.”
은백합 영애는 쿨럭, 잔기침을 흘렸다.
"자네의 활약은 눈여겨보았다. 용케도 짧은 시간 안에 간자들이 내 휘하에 잠복했다는 걸 눈치 챘군. 사람이 달라졌다는 얘기는 남작 영애뿐만 아니라 자네한테도 해당되네. 이번 [배우]는 그래도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 뽑혔어. 제국의 홍복이다.”
"그 정도로 똑똑하지 않았다면 병문안을 받아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예?"
"음.”
은백합 영애가 눈을 가늘게 떴다.
"똑똑한가 싶었더니 의외로 얼빵한 면이 있군.”
"무슨… 뜻입니까……?”
"나는 14회차일세.”
담담한 목소리가 흘렀다.
"그래봤자 인생의 마지막 10일을 반복하는 회귀자에 불과하네만. 자네와 같은 [배우]를 맞이하는 것도 이번이 13번째지.”
그 때.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목소리를 듣고 말문을 잃어버렸다.
[은(親)으로 도금된 심장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은백합 영애.
“그대는 몇 회차인가?”
그녀는 이 세계의 회귀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