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97화 (97/400)

97화.  < 당신의 심장.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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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시초문이라는 얼굴이군.”

은백합 영애는 말했다.

“그대를 보낸 성좌가 아무런 설명도 안 했는가? 희귀한 일이다. 사도(使徒)를 보낼 적에 성좌는 최대한 많은 정보를 안겨주고 시작할 텐데. 혹여 성좌와 사이가 나쁜 것인가?”

“사도라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흥미로워.”

은백합 영애는 서랍을 열었다. 모래시계. 방금 뒤집어 놓은 모래시계와 똑같이 생긴 도구였다. 짤랑! 영애는 책상에 달린 초인종을 가볍게 눌렀다.

집무실 문이 열렸다.

“부르셨습니까? 아가씨.”

“15분 추가다. 더 추가될 수도 있으니 다들 편히 쉬고 있어라.”

“대화가 즐거우신 모양이군요. 차를 따라올까요?”

“음. 제르니산(産)으로.”

“알겠습니다.”

반백의 하인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나는 뭘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엉거주춤 서 있었다. 내 모습을 보고 은백합 영애는 살짝 눈꼬리를 올렸다.

“괜찮네. 편히 서 있게.”

편히 앉으라는 말이 아니었다.

“어느 성좌가 자네를 보냈는가? 무티아? 삼각성(三角星)? 히시미트 크리츠? 나사로? 프시메? 흐음. 얼굴을 보니 한 번도 못 들어봤다는 표정이군. 그대는 대체 누구의 대리자인가?”

“만상의 도서관장이……"

나는 머릿속이 혼미했다. 눈앞의 공녀가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건 느꼈지만 이럴 줄은 몰랐다. 그나마 도서관장의 이명을 뒤늦게라도 떠올린 것은, 내가 마지막 정신줄까진 붙잡았기 때문이다.

“아니, 방구석 도서관장이 보냈습니다.”

“도서관.”

은백합 영애는 왼손으로 깃펜을 돌렸다.

“방구석… 아아, 하무스트라인가 ”

하무스트라.

진명.

이 사람, 성좌의 진짜 이름을 알고 있다.

“하무스트라가 그대한테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는가?”

“…도서관장은 묵시록에 최대한 개입하지 않으려 하니까요. 저희한테 미리 정보를 주기보다는 저희 스스로 정보를 알아내길 원할 겁니다.”

“묵시록?”

“성좌가 없어 방벽이 무너진 세계. …그리하여 멸망이 예정된 세계를 도서관장은 그렇게 불러요.”

은백합 영애는 재밌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눈동자는 붉어서, 가늘어져도 시선이 흐릿해지지 않았다.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시선의 색깔을 영애는 가졌다.

“성좌답게 오만하군. 남의 세계를 자기 멋대로 부르기는. 묵시록, 묵시록인가…. 흐음. 언젠가 멸망하리라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네 만. 내 영혼을 간단히 넘겨줄 수는 없다.”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잠깐 아직도 뭘 모르겠다는 표정이구나. 그대, 나의 영혼을 노리고 금사매 남작 영애의 시종에게 빙의한 것 아닌가?”

고개를 저었다. 이거야말로 금시초문인데.

"......."

은백합 영애가 입술을 다물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천연기념물을 보는 듯한 기색이 서리기 시작했다. 드르륵. 영애는 계속 나를 바라본 채 서랍을 열어 뭔가 꺼냈다. 3번째 모래시계였다.

짤랑.

“부르셨습니까, 아가씨? 마침 차를 가져왔습니다.”

“15분 더 쉬게.”

“오늘 아이들이 아주 좋아하겠습니다.”

하인이 나갔다.

은백합 영애는 홍차를 홀짝이면서도 나를 찻잔 너머로 바라보았다.

“이보게. 남작 영애의 집사.”

“어, 김공자라 불러주십시오. 이쪽이 본명이에요.”

“싫다. 무례하구나. 어디서 나한테 본명을 불리려는 것인가. 귀족이 아닌 집사에게 빙의한 자신을 탓하도록 해라.”

이 사람 아까부터 소소하게 도도하지 않아?

“아무튼 그대가 순수한 백지와 같은 상태임은 알겠다. 그대는 [공략집]을 받지도 않은 것 같군.”

공략집은 또 뭐야?

“이런 것이다.”

은백합 영애가 서랍에서 종이를 꺼냈다.

A4용지만한 종이엔 동글동글한 필기체가 쓰여 있었다.

+

1. 은백합 영애는 햇빛에 약하다. 데이트 시간은 낮보다 저녁과 밤을 노릴 것.

2. 은백합 영애는 미각이 무뎌서 자극적인 음식을 좋아한다.

3. 은백합 영애는 하얀 꽃을 좋아한다. 그러나 백합은 너무 많이 받아서 질렸다. 선물을 고를 때 참고.

4. 은백합 영애는 실용주의자다. 정치, 외교, 돈에 대한 이야기를 선호한다. 낭만적인 연애시를 읊어도 소용이 없으니 참고할 것.

.

.

.

10. 은백합 영애는 충신이다. 자신이 제국이나 황태자에 대해 험담하는 것은 괜찮지만, 다른 사람이 그러는 건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주의 할 것.

+

나는 말문이 막혔다. 미친. 저게 뭐야?

“6회차 때 나를 공략하러 온 사도가 가지고 있던 공략집이다. 마호스라는 성좌가 보낸 사도였다. 그는 이것을 [공략 루트]라고 불렀다.”

입이 벌어졌다.

“고, 공략 루트……"

“하도 어이가 없어서 독살해버린 다음에 빼앗았지.”

은백합 영애는 담담하게 말했다.

“내 손에 죽을 때 [철저히 공략에 따라서 행동했는데 왜 넘어오지 않는 거냐!] 라고 비명을 지르더군. 마치 자기가 억울한 일을 당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억울한 사람은 나다. 어찌 인간의 마음에 공략집이 있겠는가?”

[은으로 도금된 심장이 불만을 얘기합니다.]

“사람을 쉽게도 보는 것이다. 정녕 나의 마음을 얻고 싶다면 정정당당하게 다가와야 한다. 그런데 공략집이니 공략 루트니. 뿌리부터 썩어버린 종자들이지.”

“그거야… 그렇지요.”

“말이 통하는군.”

은백합 영애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대를 높이 평가한 이유가 있다. 단지 머리가 똑똑할뿐만 아니라, 그래도 내 세계의 사람들을 [인간]으로 보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그래요?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 것 같은데….”

“그 당연한 조건조차 만족시키지 못하는 축생들이 많고도 많았다.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짐승들. 그런 주제에 자신만은 확고히 사람으로 여기지. 지저분한 것들이다.”

나는 잠시 숨을 죽였다.

은백합 영애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 턱을 짚었다.

“으흠?"

잠시 신음하더니, 은백합 영애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가.”

두근.

“이 말은 그대에게 의미가 있는가.”

두근.

“그대 역시 그런 이들을 많이 보아왔는가? 아니면 그대 또한 그런 눈으로 보아진 적이 있는가?”

두근.

“그 또한 아니라면, 그런가. 그대의 소중한 누군가가 비슷한 말을---”

“영애님.”

내가, 말을 끊고 들어갔다.

가슴을 쪼개어, 갈비뼈를 뜯어내, 돋보기로 날 것의 심장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이 느낌을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은으로 도금한 심장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더는 주도권을 내줄 수 없었다.

내가 말했다.

“정작 그런 말씀을 하시는 영애님께서도, 저를 귀족이 아닌 평민에게 빙의했다 하여 업수이 여기셨지 않습니까."

은백합 영애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뭐야, 내가 본명을 불러주지 않았던 게 그리도 섭섭한가?”

“그냥 영애님께서도 잘난 듯 말할 입장은 아니라는 겁니다.”

“잘난 듯 말할 입장이 아니다라. 아카데미를 터뜨린 불량 집사다운 말이구나.”

그렇게 말하는 은백합 영애의 목소리는 어쩐지 즐거운 기색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유효한 지적이란 걸 인정하마.”

그러니 본제로 돌아오도록 할까, 하고, 은백합 영애는 쿨럭 기침했다.

“자, 그래서?”

“네?”

“그대가 내 영혼 따위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겠다. 그렇다면 무엇을 원해서 세상의 경계를 넘어 이곳까지 온 것인가? 여기는 영원히 10일이 반복되는 세계다.”

[은으로 도금된 심장이 당신의 진의를 의심합니다.]

“설마 성좌가 그대를 싫어해서 이곳으로 유배를 보낸 건 아닐 테지. 하무스트라는 온건파에 가깝다 들었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휴가를 보내거나 휴양을 즐기러 왔을 리도 없다. 금사매 남작 영애의 집사를 연기하는 배우여, 대답하거라.”

“저는……"

“거짓은 듣지 않으마. 그대가 한 점이라도 거짓이 섞인 대답을 입에 올리는 순간, 그대의 목적이 무엇이든, 나로부터 그걸 얻는 것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나는 자신의 심장을 먼저 내보이지 않는 자에게 내 심장을 전시하지 않는다.”

나는 고민했다.

‘당신의 세계를 25층으로 삼고 싶습니다.’

정말로 이 스테이지가 반드시 필요한가? 아니다. 다른 스테이지를 골라도 우리 탑의 입장에선 별 문제가 없다.

‘제가 가진 성검의 파편이 이 세계에 있습니다.’

꼭 파편을 다 모아서 성검을 완성해야만 하는가? 그것도 아니다. 반짝이에게 자매들을 찾아주는 것은 그 소유주인 나를 강하게 만들 테지만, 바꾸어 말하면 그냥 좀 강해질 뿐이다.

"......."

지금 이 스테이지에 머물러야 할 이유.

“……제가 아직 사랑을 모른답니다.”

“뭐?”

“연애 감정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거에 제가 무지합니다. 공녀께서는 모르시겠지만 이 세계의 장르엔 [로맨스]가 들어가서요. 사랑을 배우기에는 여기가 적합하다고 생각해요.”

스승님께서 마지막 비무를 벌이셨을 때.

배후령은 스승님의 검을 가로막으며 외쳤었다.

「공자 이놈은 아직 세상의 기쁜 맛을 덜 봤어.」

「알고 있냐? 교주야. 이놈은 아직 누구를 사랑해본 적도 없어. 웃기잖냐! 연애를 해본 적도 없다고!」

그 말이 내게는 가슴 깊이 각인되었다.

"저한테 부족한 게 있으면 배우고 싶어요. 아니, 알고 싶어요. 모르는 채로 놔두다니. 억울합니다. 100% 꽉 채워서 산 것처럼 느껴지지 않잖아요.”

은백합 영애는 유심히 내 얼굴을 봤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엔, 내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약간은 당혹스러움이 섞인 것 같았다.

“그래서 사랑을 배우고 싶다는 말인가?”

“맞아요.”

“나에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설명하라.”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정확히 말하면 이 ‘세계’에서 사랑을 배우고 싶다는 것에 가깝습니다.”

“세계라.”

“예, 저한테 모자란 점을 알고 싶습니다. 느끼고 싶습니다.”

“그럼 왜 나한테 찾아왔지? 그대의 아가씨. 금사매를 찾아가는 쪽이 더 빠르지 않겠나.”

이단심문관.

금사매 영애.

“안됩니다.”

“어째서? 빙의한 인물을 싫어하나?”

“싫다, 좋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사람은……"

‘만약 저도 당신들처럼’이라고, 그 사람은 말했다.

말했었다.

“그 사람은 저보다 더 서툽니다."

"......."

“배우려면 좀 더 잘 아는 사람에게 배워야지요.”

은백합 영애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잠시간 침묵.

“하긴, 이번의 금사매는 누군가에게 사랑을 가르쳐줄 만한 재목은 아닌 것 같더군. 오히려 가르침 받아야 할 입장 같더구나.”

“예."

“하지만 여전히 나를 찾아올 이유는 없는 것 같다.”

“이유는 있습니다.”

나는 힘주어 말했다.

지하감옥에서 했던 생각을 머리에 담아서.

“저는 당신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그 말을, 은백합 영애는 예상치 못했던 것 같았다. 살짝 튀어 오른 찻방울이 드레스의 앞섶을 적셨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다가 말했다.

“이해하고 싶다…?”

“예. 황태자를 위해서인지 제국을 위해서인지 저야 아직 몰라도, 공녀께서는 인생을 바쳐서 충성하고 계세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궁금해요. 어떤 심정이고 어떤 마음인지 알고 싶어요. 만일 그게 사랑 때문이라면, 저도 당신처럼 그런 감정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

"좀 부끄럽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한데요. 이게 저의 솔직한 대답이에요.”

은백합 영애는 한동안 침묵했다.

“이건,”

이제는 확실하게 보였다.

“정말로 처음 접하는 경우로군.”

은백합 영애는 당황하고 있었다.

“사랑을 알고 싶다. 그것만 해도 사람 무서운 줄 모르는 발언이다. 하물며 나를 이해하고 싶다고? 이해라는 말을 함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그건 사람을 독에 이르게 하는 단어다. 이해는 책임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도서관장님.”

나는 고개를 들어 허공을 올려봤다. 그곳에 물론 도서관장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나누는 대화를 도서관장은 듣고 있을 테고, 탑의 헌터들은 보고 있을 거다.

“잠시만 중계를 멈춰주세요.”

집무실 공기는 조용했다.

“은백합 영애께만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잠시 뒤, 내 부탁에 목소리가 반응해왔다.

[방구석 도서관장이 당신의 요청을 기꺼이 수락합니다.]

[당신에게는 10분 동안 ‘장면 스킵’이 허용됩니다.]

오케이.

나는 다시 은백합 영애를 바라보았다.

“저도 회귀자예요.”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공녀님과는 조금 회귀의 성격이 달라요.”

“무엇이 다른가?”

“공녀께서는 삶의 마지막 10일을 반복한다고 말씀하셨지요. 저는 죽으면 하루 전으로 돌아갑니다.”

"......."

“그냥 평범하게 돌아가는 것도 아니에요. 누군가가 저를 죽이면, 저는 그 사람의 트라우마를 엿볼 수 있어요.”

“트라우마?”

“예."

집무실에 내 목소리가 조곤조곤 흘렀다.

“사람이 제일 가슴 깊은 곳에 간직한 상처, 기억, 장면 따위가 보입니다. 소중한 뭔가가 파괴당한 것이 상처라면 그 파괴당하는 기억이 보여요.”

말을 조심히 고를 필요가 없었다. 그저 입을 열기만 해도, 혀를 내버려 두기만 해도, 저절로 내가 전하고 싶은 말이 흘러나왔다. 은백합 영애에게 나의 비밀을 얘기하면서 문득 깨달았다.

“저는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어요.”

나.

누군가한테 내 이야기를 말하고 싶었구나.

똑같은 처지인 사람한테. 나와 비슷한 삶을 사는 사람한테.

"......."

은백합 영애는 조용했다. 내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그녀의 눈동자가 차분해졌다. 영애가 내 말을 진지하게 듣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일종의 스킬. 기술이지요. 저는 제가 남을 쉽게 이해하는 데 익숙해질까 봐 두려워요. 제가 제일 신뢰하는 사람 중 한 명이 말했어요. [절대 스킬에 익숙해지지 말라]고. 그런데….”

“그러한데.”

“저 혼자 일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해가 아닐 것이고.”

“그렇다고, 사람들을 내버려 둘 수도 없어요. 왜냐하면….”

“나마저 포기하면 그들이 말라서, 비틀어지고,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

“설령 위선에 불과할지라도 내가 여기에 있음을, 당신들을 생각하며 이곳을 지키고 있음을 알려주고 싶다. 그것이라도 가능한 삶이란 얼마나 축복받은 것인가. 안 그런가?”

나는 목이 잠깐 막혔다.

"……예.”

"어리석다.”

은백합 영애가 눈을 감았다.

"이해는 한순간이지만 책임은 영원하거늘.”

자청해서 지옥으로 들어가는군.

은백합 영애는 그렇게 중얼거린 뒤 침묵했다.

[ 방구석 도서관장이 ‘장면 스킵’의 종료를 알립니다.]

공작가의 영애가 눈을 떴다.

"좋다. 금사매 남작 영애의 시종이여.”

그녀는 책상에 뒤집어둔 모래시계들 중 한 개를 잡았다. 유리에 미끄러지는 모래알들을 내려다보며, 은백합 영애는 조용히 말했다.

"너에게 사랑을 알려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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