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99화 (99/400)

99화.  < 당신의 심장.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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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멍.

-좀비야. 어이, 김좀비.

이 세상에는 [멍]이라는 의성어가 있다. 그것은 개소리를 뜻하기도 하고, 머리가 멍해진 걸 뜻하기도 한다.

멍.

-김좀비 씨? 김뱁새 씨? 소교주 씨? 여보시오, 사왕 양반. 내 말 안 들려?

나는 멍하다. 멍과 나를 구분할 수 없다. 내가 멍멍이고 멍멍이가 나다.

지금 내게 떠오르는 광경은 오직 하나뿐.

붉은 카펫. 빨간 눈동자. 파란 향기. 목소리. 손길.

-이, 이 새끼. 치였군. 제대로 치였어. 저 눈빛. 제갈세가 잡놈이 빙궁주한테 반했을 때의 그 눈깔과 똑같아.

사랑이란 뭘까…?

공자 왈, 사랑이란 백합꽃이었다.

은백합 영애님.......

-미안하다. 좀비야. 이게 다 내 잘못이다. 급수가 달라. 달라도 너무 달라. 나 때문에 네가 급에 안 맞는 인간을 사랑하게 생겼구나.

멍하게 쳐다보니, 배후령은 손가락으로 코를 파고 있었다. 뭘까. 사람이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취할 수 있는 자세 중에서 가히 최악의 포즈였다.

아, 이 양반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지 참…….

-근데 솔직히 개재밌네. 더해라, 더.

내가 멍하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살….’

-어?

‘자살하면 쫌전이랑 같은 일을 한 번 더 겪을 수 있겠죠…?’

-미친 새끼…. 그래도 자살 회귀에 대한 걸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만큼의 정신머리는 아직 남아있구나. 그나마 다행이다. 이거 다 탑안에 방송되고 있다는 거....

“자살……"

-그 정신머리가 빨리도 날아가는 거 보소! 이런 미친 새끼! 야! 반짝아!

[반짝이가 필떡 뛰어올라 용사님의 대가리를 후려칩니다.]

“아아아악!”

나는 머리를 감싸 안고 정원의 잔디밭을 뒹굴었다.

“제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알아요! 근데, 그런데 자꾸 영애님 얼굴이 떠오르는데 어떡해요!”

-이미 영애‘님’이 되었느냐. 지랄이 한 발 장전되는구나….

“아, 오늘은 절대 세수하면 안 되겠다. 세수하더라도 귓등은 씻지 말아야지. 아직도 백합 향기가 좀 나는 거 같지 않아요? 제 귓등 냄새 좀 맡아보실래요?”

-두 발….

“황태자 그 라면사리는 전생에 세상을 몇 번이나 구했길래 영애님한테 사랑을 받는다죠? 아, 제기랄. 인터넷. 인터넷이 필요해요. 인터넷이랑 컴퓨터. 빨리 눈에 띄는 모든 글마다 ‘나도 황태자처럼 되고 싶다’는 댓글을 남겨야만……"

-세 발 시발….

“아아, 사랑! 달콤한 독이여! 거부할 수 없는 중독이여! 나의 심장이여!

-난 알았어. 이 새끼가 사랑을 하게 되면 우주에서 제일 지랄맞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알면서도 조언했다는 점에서 난 참 나쁜 놈이야.

“저 혼자 이러는 게 아니에요!”

[인물에 대한 몰입이 심화됩니다.]

[현재 당신의 몰입률은 21%입니다.]

“보세요! 이 몸의 원래 집사도 몰입도가 자꾸 올라가고 있다고요. 저랑 집사랑 똑같은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건데, 이게 무슨 뜻이겠어요? 집사도 은백합 영애님한테 반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어. 그 집사, 원래 금사매인지 보라매인지 좋아하지 않았냐?

“하. 뭘 모르시네. 사랑이 꼭 한 사람을 파야 하나요? 사랑은 그런 게 아니거든요? 사랑은, 사랑이란 건 말이에요. 사랑은 그러니까…… 사랑이에요.”

-와아. 첫사랑을 하게 된 지 반나절도 안 지난 놈이, 와….

나는 잔디밭에 대 자로 뻗었다. 대낮. 아카데미 수업시간. 이단심문관도 황태자도 은백합 영애님도 지금은 수업을 받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은백합 영애님을 구할 수 있을까요? 아니, 구한다니. 내 주제에 무슨 말이람. 그냥, 어떡해야 영애님을 기쁘게 해드릴까요?”

-너의 지랄을 세상에 출하시킨 장본인으로서 책임감을 갖고 조언하자면.

배후령이 끙 소리를 냈다.

-아직은 그걸 생각할 때가 아니란다, 아가야.

“그러면 뭘 생각할 때일까요, 어른아?”

-좀 더 상대방을 더 알아야 돼.

“상대방을 안다.”

-음 연애할땐 계속 눈도장 찍고 그러는 게 중요하걸랑 남 사이에 그러자면 남사스러워진단 말야. 근데 넌 지금 전속 하인이잖아. 가만히 있어도 서로 같이 있는 시간이 확보된다고. 지리적 이점을 취하고 있는 거지.

“지리적 이점……"

-그래. 그러니까 마음 놓고 좀 더 상대를 관찰해라.

“하지만….”

-하지만?

“얼마 안 가서 멸망하잖아요. 이 세계.”

-흠.

배후령이 팔짱을 꼈다.

-그게 참 문제긴 하지.

배후령의 말투는 미묘했다. 마치 내가 언급한 ‘문제’와 배후령이 말한 ‘문제’가 다른 것 같았다.

하지만 마침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기에, 나는 배후령에게 왜 어조가 미묘하냐고 물어보지 못했다.

문제의 정체는 바로 그날 밤에 밝혀졌다.

4.

구름이 달을 삼켜 어둡기 그지없는 밤이었다.

숙소에 밝혀진 촛불들이 힘겹게 어둠을 들어올리고 있었지만 역부족이라는 건 역력했다. 소르므윈 아카데미는 어둠 속에 침전하고 있었다.

“그대가 기특한 짓을 보여준 대가라고 생각해도 된다.”

그런 속에서, 은백합 영애는 직접 등잔불을 들고 길을 앞장섰다.

나는 그녀의 그림자를 밟지 않고자 조심하면서 홀몸으로 그 뒤를 좇아갔다.

“그대에게 나의 비밀을 알려줄 것이다.”

"......."

은백합 영애는 잠옷을 입고 있었다. 하얀 원피스는 그 품이 낙낙했다. 옷자락이 펄럭일 때마다 내 심장이 따라서 널을 뛰는 것은, 배후령이 말한 것처럼 나의 지랄이 장전됐기 때문일까? 그러나 지랄이라기엔 이 감정은 너무나 포근한 거 아닐까?

“따라와라.”

은백합 영애는 걸었다. 밤의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뒤따르면서 등잔불에 비춘 그녀의 손가락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은백합 영애가 문득 말을 걸었다.

“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시선이 느껴지는군. 궁금하다.”

"......."

“비록 임시에 불과하다지만 그대는 나의 전속 하인이다. 주인이 묻는 말을 거부해서야 불충밖에 더 되겠는가? 내가 궁금하다고 말했으니, 그대는 마땅히 대답해야 할 것이다.”

나는 머뭇거렸다.

“그것이……"

“말해라.”

“……공녀님의 손을 잡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말을 꺼내자 마자, 내 입에서 혓바닥이 움직인 게 아니라 심장이 튀어나온 것 같았다.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었다.

반짝이로부터 공비어천가를 들었을 때도 이 정도로 창피하진 않았다. 진짜. 낯이 뜨거워져서 죽을 것 같았다.

“흐음.”

바로 그 때, 내 왼손을 무언가가 감았다.

은백합 영애의 손이었다.

살결. 감촉. 서늘한 온도. 마릇한 손가락이 깍지를 낀 순간, 나는 그녀의 손아귀에 내 심장이 쥐였다고 착각할 뻔했다. 머릿속에 꽃향기가 자욱했다.

단지 손을 쥐었을 뿐인데도.

“고, 공녀님.”

“오늘 하루 내내 나에 대해서만 생각하였는가?”

입안의 혀가 바싹 탔다.

“내 손길과 향기를 그리워했느냐. 상상했느냐.”

“그러니까……"

“대답해라.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손을 놓을 것이다.”

“새, 생각했습니다.”

“똑바로.”

머리가 어질거렸다.

“오늘 하루 종일, 공녀님에 대해서만 생각했습니다.”

꽃향기가 목소리 되어 내 귓가에 소곤거렸다.

“잘 말했다. 그대는 나의 충성스러운 종자다.”

[인물에 대한 몰입이 심화됩니다.]

[현재 당신의 몰입률은 29%입니다.]

이제.

뭐가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그냥 모르겠어.

“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무엇이 안 된다는 말인가?”

생각.

생각을 하자.

“저는, 이 세계의 바깥으로부터 온…… 어디까지나 집사의 몸을 빌린,”

“그래서?”

[은으로 도금된 심장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대는 나를 ‘인간’으로 본다지 않았는가?”

“저는……"

“거짓이었나?”

[은으로 도금된 심장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결국 그대 역시 다른 사도들처럼 나를 한낱 ‘원주민’이나 ‘토착민’으로 여기는가? 아니, 그대를 보냈다는 하무스트라의 용어로 말하자면 ‘등장인물’로 여기는가?”

[은으로 도금된 심장이 당신을,]

“나는,”

나는 간신히 말했다.

“나는…… 아니 저는. 그러니까 제 본래 주인은 금사매 영애님입니다.”

[인물에 대한 몰입이 심화됩니다.]

[현재 당신의 몰입률은 30%입니다.]

“그런 저는, 잠깐 임무를 위해서 은백합 공녀님의 시중을 들기로 했을 뿐, 그러기에……"

“그 또한 이상한 말이로군.”

은백합 영애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오늘 하루 나에 대해서만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것은 뒤집어 말하면 금사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아닌가?"

“그건,”

“거짓이었나?”

[은으로 도금된 심장이,]

“아닙니다. 거짓이 아닙니다, 저는,”

머리가.

숨이.

“하다면 그대의 주인은 이미 금사매가 아니라 나 아니겠느냐?"

“그건……"

“나를 주인님이라 불러보거라.”

손깍지가, 조금 더 강해졌다.

“단 한 번이라도 괜찮다. 진심을 담아 불러보아라.”

“그대가 주인님이라는 말을 입에 담으면, 상을 내리겠다.”

상(實).

“달콤한 상을 약속하마.”

어째서일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달게 절었다.

나도 모르게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공자야.

나직한 부름.

[반짝이가 부르르 떨어 용사님의 정신을 되찾게 합니다.]

성좌의 경고.

이 둘이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 나른한 중독감, 모두 기시감이 있었다.

지하실에서, 시종들을 문초하던 은백합 영애를 보았을 때 느꼈던 것과 같은 감각.

위험하다는 직감.

“으흠?"

은백합 영애가 나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 속에 붉은 눈동자가 나를 본다.

“왜 그러느냐.”

속삭임.

“상이 필요치 않은가?”

상.

“단 한 번이면 된다.”

단 한 번…….

한 번이라면. 시험 삼아서 한 번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위험하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그렇지만. 무언가 일이 잘못되어도, 나에겐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렇다…… 내겐 그런 힘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번쯤은 위험을 감수할 만한 힘이 내게는, 아니, 생각해보면 위험을 감수한다는 것도 올바른 말은 아니다. ‘이 말을 입에 담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 왜 랭커들 사이에 배신자가 생겼을 때, 그리하여 가을비의 마왕을 처음 상대했을 때와 지금 이 상황도 어떻게 잘 맞춰보면 비슷한 부분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괜찮지 않을까? 한 마디 하는 것쯤은. 잘못되면 그냥 시간 한 번 되돌리면 되니까. 그냥 그 정도로 끝나는 일이니까. 나한테는 그런 능력이 있으니까.

그러면 한 번쯤은, 정말로 한 번쯤은 그런 말을 입에 담는다고 해도…….

「하지만 형씨는 내가 염제라는 걸 알잖아.」

「그럼 뒈져주셔야지.」

목덜미가 식었다.

「사왕님.」

「믿고 있어요.」

손끝이 얼었다.

「주군.」

머리가,

「나의 제자야.」

정신이, 퍼뜩 들었다.

눈앞이 개였다. 정신이 맑아졌다. 마치 지금껏 멈춰 있던 것을 보강하려는 것처럼 사고가 빠르게 돌아갔다.

내가 쉬운 마음으로 복종해도 되는 인간인가?

그만큼 내 어깨에 걸린 무게가 가벼웠던가.

아니다.

나는 아귀의 주군이다.

그리고 마교의 소교주다.

유수하처럼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살아왔다.

그러기에, 한 번의 죽음도 당연한 것으로 만들지 않고자 연금성주와 눈밭을 달려 도망쳤던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공녀님.”

나는 은백합 영애의 손등에 내 손바닥을 얹혔다. 설령 말에 불과하더라도.

말에 불과하기 때문에 더욱더.

“무엇이 죄송하다는 말인가?”

“저는 공녀님을 진정한 주인으로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사랑의 기쁨을 배우고 싶다. 배우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나 자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배우려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누군가와 일방적인 관계를 맺을 수는 없다.

“만일 정말로 저의 심장을 얻고 싶으시다면. 공녀께서는 다른 방법을 쓰셔야 할 거예요.”

“말해라. 들으마.”

“당신을 저의 주인으로 섬길 테니, 당신도 저를 주인으로 삼으세요.”

"......."

“저의 판단보다 당신의 판단을 귀중히 여길게요. 당신의 조언을 저의 신념보다 무겁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저 자신을 제일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게요.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나는 은백합 영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손과 손이 맺어져 있었기에, 우리 두 사람의 거리는 무척 가까웠다. 붉은색 눈동자. 나는 그것이 심장의 색깔과 똑같다는 것을 알았다.

“당신도 저를 그렇게 대해주세요.”

"......."

“당신이 잘못된 일을 하면 잘못되었다고 말씀드릴게요. 제가 진심으로 생각하는 것, 바라보는 것, 느끼는 것. 모든 것을 당신에게만은 한 점의 거짓 없이 고백하겠어요. 하지만 일방적인 관계는 안 됩니다. 당신에게 저의 심장을 바치면, 저는 무엇으로 숨을 쉬겠습니까? 언젠가 숨이 막혀서 죽겠지요. 당신이 저에게 심장을 주어야만 저는 계속 살아갈 거예요.”

나는 은백합 영애의 손을 조금 더 강하게 쥐었다.

“제가 미치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당신도 저한테 미쳐주십시오.”

그리고 은백합 영애는 손을 뿌리쳤다. 그녀가 뒷걸음질로 두 걸음 물러섰다. 마치 불의의 일격을 당한 사람처럼 말이다.

“…과연.”

다만 은백합 영애의 무표정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다른 얼간이 사도들과는 다르군. 순하디 순한 꼬마라고 여겼다만…. 사랑이 낯설다 하여 삶이 낯선 것은 아닐 텐데, 그만 너무 서둘렀다.”

“저를 유혹해서 부하로 삼으려 하셨지요?”

“내 실수다. 쉽게 봤어.”

은백합 영애는 잠시 입술을 사리물었다. 그 얼굴마저 아름다워 섬뜩했다. 밤의 복도. 하얀 달빛조차 그녀에게 비추니 그늘이 되었다.

“예. 저, 쉬운 남자가 아니거든요.”

“안타깝구나. 내게 모든 것을 바치고 편해지면 좋을 것을.”

“이해와 책임은 다르지 않다고 말씀하셨죠. 일방적인 책임은 일방적인 이해에 불과할 거예요. 저는 그런 걸 원해서 영애한테 다가온게 아닙니다.”

나는 심장이 뛰었지만 참았다.

“그래서 저한테 알려주신다는 비밀은 뭔가요?”

"......."

은백합 영애는 등을 돌려 걸어갔다.

“...내 가문에는 오랜 옛날부터 내려오는 가보가 있다. 장난 같은 전설이 붙어 있는 검(劍)이다. 소원을 빌면 반드시 그 소원을 이루어 주는 칼이라던가.”

복도의 끝.

달빛조차 흘러들기를 그만둔 거기에 커튼 뭉치가 놓였다. 두꺼운 붉은색 커튼이었다. 커튼 뭉치는 꼭 무언가를 감추듯이 덮여 있었다.

“다만 조건이 있지.”

은백합 영애의 손끝이 커튼 자락을 붙잡았다. 휙, 커튼이 거두어졌다. 장막 너머엔 투왈렛 룸에 있을 법한 전신 거울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소원을 빌 때, 칼로 자신의 심장을 찌르는 것이다.”

거울 한복판에 칼이 박혀 있었다.

은백합 영애가 거울 앞에 섰다.

칼날이 박힌 곳엔 우연찮게도, 은백합 영애의 심장이 위치했다.

[반짝이가 자매의 기척을 감지합니다.]

내 허리춤에 차인 성검이 부르르 떨었다.

[반짝이는 저것이 수호 성검의 세 번째 자매검.]

뚜욱. 뚝.

칼이 박힌 거울에선 한 방울씩 피가 흘렀다. 거울을 감추고 있던 커튼은 본래 빨간색인 게 아니었다. 거울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커튼을 빨갛게 물들인 것이다.

[기원(祈願)의 검이라고 말합니다.]

“아직 내가 회귀자가 아니었던 시절이다. 태자 전하께선 금사매 영애와 맺어지게 되었지. 나는 분하고도 분하여서, 가문에 전해지는 검에 기대어 소원을 빌었다.”

“무슨 소원을……?”

은백합 영애의 입술이 움직였다.

-제 사랑이 영원히 이어지게 해주세요.

“그랬더니, 내 삶이 영원해지더군.”

“죽어도 죽지 않는다. 태자 전하를 향한 마음도 변함이 없다. 나의 심장은 그날 이후로 고정되어버린 것이다."

은백합 영애는 내 손을 잡았다.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으로 이끌었다.

심장이 있는 곳. 있어야 할 곳.

“나의 심장을 원한다 말했는가?”

하지만.

그곳에선 박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미안하군.”

은백합 영애가 말했다.

“내게는 그대에게 바칠 심장이 없다.”

[은으로 도금된 심장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거울로부터 흘러내리던 핏물이 고여 자그마한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크기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이전 회차에서 성기사와 백작을 살해했던 존재.

악마의 형상이었다.

어째서 거울에서 흘러내린 피가 저런 것을 이루어내는지, 저것이 소환된 것인지 만들어진 것인지 나는 몰랐다.

“자."

하지만 은백합 영애는 익숙한 태도로 검을 들었다.

“도와라.”

그 검은 조그마한 악마를 향해 겨누어져 있었다.

“오늘의 일과를 해치울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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