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 연극.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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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달에 모래가 묻어 조금 붉었다.
하늘에 먼지가 끼면 붉은색이 되고, 사람이 피를 흘리면 역시 붉게 되는데, 나는 그 우연한 일치가 불안했다.
‘달이 피를 흘리는 것 같아.’
나는 불안한 마음을 그림자처럼 끌면서 걸었다.
멀리서, 하인들이 조잘거리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영애!”
“이곳은 이반시아 공작가의 거처입니다!”
"아무리 태자 전하의 총애를 받으신다지만 이 시간에……"
나와 함께 걸어가던 은백합 영애가 툭 중얼거렸다.
"불청객이 따로 없군.”
그 말투에선 이단심문관, 아니, 금사매 영애에 대한 경멸이 엿보였다.
“이런 시간에 들이닥친 걸 보면 새삼 나와 티타임을 가지려는 것은 아니렷다. 집사. 이것은 미리 예정된 방문인가?”
“아닙니다.”
나도 당황스러웠다. 벌써 자정이 넘어버린 시간 아닌가? 이단심문관이 지금 은백합 영애를 만나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저께, 우리는 얘기를 나누었다.
[당분간 은백합 영애의 전속 집사로 일하겠습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그녀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도, 이번 스테이지를 공략하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음.」
이단심문관은 잠깐이지만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여느 때처럼 활짝 웃은 것이었다.
「네! 임무를 위해서니 어쩔 수 없지요.」
「전 괜찮습니다. 다녀오십시오, 사왕!」
그렇게 우리는 합의했다.
합의했을 텐데.
“나의 집사를 데려오십시오!”
우리가 걸어갈수록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집사! 여기에 있는 거, 다 알고 왔어요!”
숙소의 정원.
어두운 밤하늘도 꽃밭에 머무르는 봄을 다 가리진 못했다. 하얗게 만발한 목련들은 고개를 떨구어, 자기 몸에 매달린 봄의 무게를 버거워하고 있다. 달이 붉었다. 목련잎에 비칠 때 달빛은 불그스름했다. 그래서 정원엔 자목련이 만개한 것 같았다.
“아!"
목련 한 잎이 떨어졌다.
“역시 여기 있었군요! 집사!”
이단심문관은 대문의 경비병을 밀쳤다. 경비병들은 남작 영애의 몸에 함부로 해코지할 수 없어서 머뭇거렸다.
그들이 머뭇거린 동안, 이단심문관은 치맛자락을 말아올린 채 성큼성큼 정원으로 걸어 들어왔다. 꾸짓. 아까 떨어진 자목련이 이단심문관의 구두에 짓밟혔다.
“밤이 늦었는데도 좀처럼 돌아오지 않아 걱정했답니다.”
"......."
“정말. 주인을 걱정하게 해서 결국은 행차하게 만들다니, 하인으로서 실격 아닌가요?”
이단심문관을 본 순간에 나의 불안감은 정점을 찍었다.
머리카락.
달빛에 비친 이단심문관의 금발은 어제보다 더 자라나 있었다.
“아가씨......."
“당신은 제게 한 명밖에 없는 집사이자 소꿉친구예요. 평범한 하인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요. 그걸 알아달라고 부탁하면 너무 채신머리가 없어 보일까요?”
머리카락뿐만이 아니다. 얼굴. 외모. 아직까진 이단심문관의 흔적이 남아 있어도, 어딘지 모르게 그의 모습이 낯설다.
‘신성술식을 써서 외형을 바꾼 건가?’
왜?
“아무튼 이런 곳에 있으면 안 돼요. 정원의 꽃밭에도 독이 감도는 것 같은걸요. 자! 집사. 어서 저와 같이 돌아가도록 해요.”
“무례한 것.”
이단심문관이 내게 다가오려 하자, 은백합 영애가 막아섰다.
“아닌 밤중에 난동을 부린 것만으로도 태형(答刑)에 처할 중죄다.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감히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더냐. 당장 무릎을 꿇고 네 잘못을 고하거라.”
“어라. 회초리로 제 종아리라도 때리실 셈인가요?”
이단심문관이 싱긋 미소 지었다.
“만약 때리실 거라면 확실하게, 강하게 때려주시지요. 공녀님. 저의 종아리에 남은 상처자국을 태자 전하께 보여드리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거든요. 태자 전하와 제가 나누게 될 추억이 하나 더 늘어나겠어요.”
“마, 망측한……!”
공작가의 시종들이 떨었다. 공식적으로 황태자의 약혼자는 은백합 영애였다. 약혼자 앞에서 종아리와 추억을 운운한 것이다. 하인들이 얼굴을 붉히며 이단심문관을 노려보았다.
은백합 영애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움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하인들이 멈칫했다.
나도 순간적으로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러하겠군.”
그만큼 은백합 영애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학창 시절에 추억을 쌓으려는 네 마음씨가 곱다. 하긴, 남작 영애의 나이엔 똥밭에 굴러도 그걸 추억이라 미화하지 않는가. 네가 고운 추억을 쌓고 싶다니 제국의 귀족으로서 도와주마.”
은백합 영애가 왼손을 들었다.
“회초리를 가져 오거라.”
시종들이 떨었다.
“소, 소공작님.........."
“이곳에서 그리 부르지 말라고 명했을 것이다.”
“행여 태자 전하께서 이 일을 아시면……"
“공작가의 숙소에서 난리를 피운 것을 이대로 고이 보내주겠는가. 고이 보내주면, 그것이 소문이 되어 가문의 이름이 더러워지지 않겠느냐. 법도가 모든 것에 우선하며, 태자 전하께선 법도를 수호하셔야 할 장본인이다.”
하인들이 숨을 삼켰다. 납득한 얼굴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라고 하인들은 말없이 항변했다. ‘그렇지만 태자 전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도 입 밖으로 항변을 꺼내진 못했다.
“내 왼손이 아직 비어 있다.”
은백합 영애의 목소리가 흘렀다.
“회초리를 가져오라. 똑같은 명령을 다시는 말하지 않겠다.”
자목련 떨어진 길 위로 하인들의 구둣발이 바삐 움직였다. 숙소에서 회초리를 찾아 가져오기 위해.
하인들은 자기 얼굴이 달빛에 비추는 것조차 두려운지 모두 머리를 숙였다. 이곳에서 오직 두 사람. 은백합 영애와 이단심문관만 고개를 똑바로 들고 있었다.
“아가씨.”
결국 내가 이단심문관에게 가까이 다가설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왜 이런 시간에 오신 것입니까?”
“제 것을 돌려 받으러 왔지요. 당연한 말을 하게 만드네요.”
이단심문관은 방실거렸다.
“오늘 아침부터 아무리 기다려도 집사가 안 돌아오잖아요. 처음엔 급한 일이 생겼나 보다 넘겼는데, 공녀의 곁에 집사가 있더라는 소식을 얼핏 들어버렸어요.”
이단심문관이 뺨을 짚었다.
“저는 바로 깨달았지요. 보나 마나 공녀가 집사의 약점을 잡고 협박한 거 아니겠어요? 그게 공녀의 특기니까요. 불쌍한 집사. 황태자 전하와 저 때문에 이리 치이다니……"
"......."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걱정하지 마세요.”
이단심문관의 미소는 여전히 해맑았다.
“이제 저는 공녀한테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을 거랍니다. 그것이 태자 전하의 총애가 되었든, 집사의 충성이 되었든. 회초리? 얼마든지 때리라지요. 제가 집사를 구해드릴게요. 어차피 때리면 때릴수록 상처 입을 사람은 공녀인걸요.”
“아니……, 죄송합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이단심문관에게 조금 더 가까워졌다. 우리가 나누는 말을 주변에서 듣지 못하도록. 다행히도 그런 내 행동을 막는 사람은 없었다.
“아가씨."
"예."
나는 침을 삼키고 이단심문관한테 속삭였다.
“이단심문관 씨. "
정적.
“예?”
심장이 두근거렸다.
입술이 말랐다. 혀가 안 움직였다. 단어를 하나씩 꼬아서, 한 줄의 문장을 엮는 일이 이다지도 어려웠나.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봄이 오면.”
“예?”
심장이.
“이단심문관 씨……"
“아까부터 무슨 말인가요, 집사?”
“지난번처럼 장난치는 거면 정말 화낼 겁니다. 진심이에요. 저 지금 진심으로 묻고 있는 거니까요. 제대로 대답해주세요. 몰입률, 얼마까지 올랐습니까?”
이단심문관은 눈을 깜빡였다.
“흐응? 집사야말로 장난을 치는 것 같네요. 옛날생각이라도 난 걸까요. 아니면, 공녀랑 하루 같이 있었더니 조금 머리가 이상해진 걸까요? 집사도 참. 제가 부드러운 아량으로 이해해드릴게요.”
“봄이 오면……"
“이미.”
이단심문관이 웃었다.
“봄은 와있답니다. 집사.”
아니.
“아름다운 계절 아닌가요?”
금사매 영애가 웃었다.
“며, 명령하신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숙소로 흩어졌던 하인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고개를 숙인 채 은백합 영애한테 회초리를 바쳤다.
얇았다
나는 그들이 저택에서 제일 가녀린 회초리를 찾아 동분서주했을 것임을 짐작했다. 그것이 시종들이 주인에게 바칠 수 있는 충성이었을까.
“다시 찾아와라.”
하지만 은백합 영애는 냉혹했다. 하인들이 움찔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 찾아와라.”
명령은 네 번 반복됐다. 반복될 때마다 회초리의 굵기가 거칠어졌다. 하인이 입술을 꽉 깨물며 가져온 네 번째 회초리를, 은백합 영애는 왼손으로 쥐었다.
“금사매 남작영애.”
“본명으로 부르시지요? 공녀님.”
“실비아 에비나일.”
“예, 라비엘 이반시아 님.”
달과 해가 마주보았다.
“너는 사사로이 공작가의 영역을 침범하여 난동을 부렸다. 어떠한 사죄의 말도 입에 담지 않았다. 제국에 엄연히 위가 있고 아래가 있거늘, 네 발칙함이 참담하다. 폐하께서 하사하신 이름으로 너를 치죄하마.”
“죄요? 저의 죄는 제가 제일 잘 안답니다.”
금사매 영애는 방긋 웃었다.
“감히 변두리 남작가의 태생이면서 국본께 제일 깊은 총애를 받은 것이 저의 죄이지요.”
그건. 태자의 약혼자에게 해도 될 말이 아니다.
“사랑을 받아서 죄송합니다.”
남작 영애는 양손으로 치맛자락을 가볍게 말아쥐었다. 목련 흐드러진 정원으로 한 송이의 금사매가 내려앉았다. 눈앞에 있는 백합에 머리를 숙인 것이다.
예법은, 완벽했다.
“라비엘 이반시아 님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아서 죄송합니다.”
"......."
“사죄가 되었을지요?”
바람이 불었다.
“그런데, 라비엘 이반시아님. 저는 궁금해요. 이것이 정말 저의 죄일까요? 사랑은 받아야만 의미가 있는 법.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가 나누어진 것이 정말로 저만의 책임일까요? 어쩌면……"
어쩌면, 다음의 말을 금사매는 잇지 않았다. 대신 웃음을 흘렸다. 검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꽃잎이 떨어졌다.
은백합 영애는 조용히 왼손을 들었다.
“지독한 것.”
밤공기가 회초리에 찢어졌다.
"-----."
금사매 영애는 비명을 안 질렀다. 신음도 안 흘렸다. 똑바로 허리를 세웠다. 심지어 금사매의 얼굴에 조각처럼 새겨진 미소. 그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그녀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인물에 대한 몰입이 심화됩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달이 피를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현재 당신의 몰입률은 40%입니다.]
그날 달에는 모래가 묻어 조금 붉었다.
하늘에서 달이 먼지에 파묻히면 색이 붉어졌고, 땅에서 인간이 피를 흘리면 색이 붉어졌다. 쿨럭, 공기가 매캐하여 은백합 영애는 기침했다. 마른 기침이었다.
아무도 아무런 말을 안 했다.
기침 소리와 회초리 소리만 밤의 정원에 울렸다.
“실비아!"
횃불이 흔들렸다.
“실비아! 거기 있느냐, 실비아!”
발소리가 정적을 깼다. 대문 저편. 황태자가 직접 횃불을 든 채 달려왔다. 호위병들이 허둥지둥거리며 태자를 시종하고 있었다. 이런 난동이 벌어지는데 황태자가 모를 리 없었다.
"실......."
대문 앞에서 황태자가 멈췄다.
"......."
그는 정원을 보고 잠시 침묵에 잠겼으며.
"라비엘……!!”
금사매 영애를 부를 때와는 다른 온도의 목소리로 은백합 영애를 불렀다.
"비켜라!"
황태자가 공작가의 경비병들을 밀쳐냈다. 이 중에서 국본의 행차를 막을 사람은 없었다. 태자는 곧바로 금사매 영애의 곁으로 달려갔다.
“어떻게,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저는 괜찮아요, 태자 전하.”
“내가 괜찮지 않다! 바보같이……!”
황태자는 금사매 영애를 살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은백합 영애를 노려보았다.
“독한 것!”
말은 상처가 된다.
“어떻게 실비아를 이리도 가혹하게 대할 수 있는가!”
보이지 않아서 상처를 입히는 사람은 그것을 모른다.
“제국의 법도입니다. 전하.”
“법이 인간보다 중요하겠느냐!”
“개인보다는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네가 독하다는 것이다! 마녀 같으니라고!”
아마도 세상은 그것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으로 나뉠 텐데, 황태자는, 모르는 자였다.
은백합 영애가 기침을 흘리고 숨을 쉬었다.
“저를 벌하시렵니까?”
"......."
황태자의 낯이 일그러졌다. 단지 일그러졌을 뿐. 은백합 영애의 물음에 황태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본인이야 대답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그것은 도피에 불과했다.
태자는 은백합 영애를 책임질 배짱도 없었고 상대할 실력도 없었다.
"가자, 실비아! 이런 곳에 있으면 안 된다.”
“아."
황태자가 금사매 영애를 안아 들었다.
태자의 품에 안기면서 금사매 영애는 나를 쳐다봤다.
"집사."
이단심문관.
“집사도 가지요."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기도하듯 중얼거렸다.
‘인물창.’
차르륵.
눈앞에 글자들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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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실비아 에비나일
호감도: 90
선호 장르: [로맨스]
불호 장르: [정치물]
선호 캐릭터: [나를 사랑하는 자], [황태자], [집사], [선생], [선배], [후배], [동급생]
불호 캐릭터: [라비엘 이반시아]
선호 플롯: [강자의 승리], [진실한 사랑]
불호 플롯: [약자의 패배], [뒤통수]
심리 상태: ‘라비엘 이반시아. 당신에겐 아무것도 주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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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이단심문관(異端審問官)이란 이름이 없었다.
선호 장르란에 표시되어 있던 [동화]라는 글자도, 선호 캐릭터란에 표시되어 있던 [인간]이라는 글자도, 더는 안 보였다.
“집사?”
이단심문관은 금사매 영애라는 배역에 먹힌 것이다.
“저와 같이 갈 거지요?”
그리고 나는 이번 회차의 끝을 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