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 연극.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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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나는 말을 더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당분간 은백합 공녀님의 곁에 머무르려고 합니다.”
침묵.
“……그거야말로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네요?”
금사매 영애의 눈꼬리가 올라간 채 정지했다. 감정이 얼어붙은 탓일까.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서늘함을 황태자도 느끼어서, 그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저는 지금 같이 가달라고 부탁했어요. 집사. 상처를 자랑하는 건 취향이 아니어도, 공녀의 아래에서 집사를 풀어주기 위해 조금 모욕적인 일도 감수했지요.”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저의 청을 거절하겠다?”
입안에서 쓴맛이 오른다.
이게, 이단심문관을 잃어버리게 된 나의 착잡함인지, 아니면 원래 주인의 부탁을 거절하게 된 집사의 반항심인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 다만 파란색 눈동자. 금사매의 것이 되어버린 저 눈동자를 바라보는 일이 괴롭다.
[인물에 대한 몰입이 심화됩니다.]
[현재 당신의 몰입률은 42%입니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죄송합니다.”
"......."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습니다.”
“만능의 문장이네요. 글쎄. 단순히 집사가 공녀한테 홀린 것은 아니고요?”
나는 묵묵히 자세를 지켰다. "하,” 금사매가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아니라 은백합 영애에게 보낸 비아냥이었다.
“알겠어요. 공녀님. 이번에는 또 얼마나 원대한 계책을 꾸미시는지 몰라도, 저와 집사의 우정을 흔들 수는 없을 테니까요. 아무쪼록 저의 집사를 잘 부탁드리지요.”
“착각은 자유다. 내 눈앞에서 꺼져라, 남작 영애.”
“예. 꺼지지요.”
금사매 영애는 태자의 품에 안긴 채 손을 뻗었다. 그리고 황태자의 뺨을 쓰다듬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속삭임을 가장했을 뿐, 다른 사람들에게도 모두 들리는 성량으로.
“저와 같이 꺼져주실래요, 태자 전하?”
“아. 아아.”
황태자가 얼굴을 붉혔다.
[인물에 대한 몰입이 심화됩니다.]
[현재 당신의 몰입률은 43%입니다.]
두 사람은 호위병들과 함께 돌아갔다.
자정이 넘어서 벌어진 소동은 그렇게 일단락된 것이다.
3.
순식간에 정원이 고요해졌다.
“아가씨......."
하인들이 슬픈 얼굴로 주인을 걱정했다. 축객령을 내린 쪽은 분명히 공작가였는데, 분위기만 보면 꼭 이쪽이 축객을 당한 것 같았다.
“밤이 늦었구나.”
은백합 영애가 말했다.
“고생이 많았다. 이제 들어가거라.”
“아가씨께서는 어쩌시려는 것이온지……"
“잠시 여기서 꽃을 보다 들어가겠다. 혼자 있고 싶으니, 다들 물러나라.”
은백합 영애는 잠옷 차림으로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낮이 아니라 밤에 태어난 사람처럼 그녀의 몸은 어둠에 잘 녹아 있었다. 시종들은 주인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숙소로 돌아갔다.
“공녀님.”
오직 나 혼자만 남아서 그녀에게 다가섰다.
-좀비야. 지금 저 사람 약해져 있다! 분위기만 봐도 처량하지 않냐? 무표정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약해져 있는 거다. 잘 됐다, 야! 위기가 기회야! 골키퍼 사라졌다. 안 그래도 고단수랑 연애하는 거 힘든데 얼른 지금 다가가.
‘닥치시고요.’
귀신은 변함이 없었다. 변함없이 분위기를 파악하지 않았다.
“그대도 들어가서 쉬어라. 집사.”
“저는 하루이틀 밤새워도 멀쩡해요. 공녀야말로 지치신 거 아닙니까?”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다만……. 그래, 조금은 지치는군.”
은백합 영애는 한숨을 쉬었다.
“벌써 14회차다. 140일 동안 나는 황태자 전하를 바로 세우고자 노력했다. 나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운명이라 받아들인다해도, 태자 전하께선 장차 제국의 황위에 오르실 분. 저분이라도 잡아드려야 나라의 안위가 위태로워지지 않을 터인데…. 힘들군.”
“이제 혼자가 아니시잖아요.”
세상에 회귀자는 당신 한 명이 아니다. 그런 뜻을 담아 말했다.
“제가 있습니다.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곁에 단 한 명이라도 있으면, 인간은 어떻게든 버틸 수 있어요.”
“그런가?”
“예. 의외로 그러더라고요.”
은백합 영애가 밤하늘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이 나를 바라봤다.
“그대는 한 가지 착각을 하고 있다.”
착각?
“나는 최후의 열흘을 반복한다. 그대는 죽으면 하루 전으로 돌아간다. 얼핏 보면 똑같은 회귀처럼 보이고, 우리 두 사람이 시간을 공유할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러하지 못하다.”
나는 은백합 영애의 말을 막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아마도 생중계 되어 탑의 사람들에게 보일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이미 나는 다음 회차를 결심하고 있다.
“집사여. 우리 둘 중에 누군가는 [먼저] 회귀해버리고 만다.”
은백합 영애는 허리를 굽혔다.
“내가 먼저 회귀하면 그대는 지금의 삶을 잊어버리겠지. 그대가 먼저 회귀하면, 정반대로 내가 지금의 일을 망각한다.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에게 시간이 잡아먹히는 것이다.”
스윽, 슥.
그녀는 회초리로 땅에 평행선을 그렸다.
“우리는 영원히 마주치게 되지 못할 평행선이다.”
가슴이 욱신거렸다.
“내가 그대를 이해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대 역시 나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단지 이해할 뿐.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대는 나를 책임질 수 없으며, 나도 그대를 책임질 수 없다.”
은백합 영애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나와 똑같은 시간을 나누고 싶다던 그대의 고백은 격렬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실제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그러기에 더 아름답게 들린 것일지도 모르지.”
“만약, 이루어질 수 있다면요?”
나는 은백합 영애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만약? 만약이란 없다.”
“전 제가 한 말을 지킵니다. 반드시. 단순히 공녀의 마음을 얻고 싶어서, 실제로 행할 수 없는 일들을 프러포즈에 써먹은 게 아니에요. 헛된 말을 풍선처럼 부풀려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건 저의 성격이 아닙니다.”
"......."
“만약 공녀님이 영원한 열흘에서 벗어나도록 제가 도울 수 있다면. 돕는다면, 어쩌실 건가요?”
밤새가 끼익 울었다.
“……오만하구나. 나는 내 삶을 살아가는 데 나로도 충분하다.”
“그러시겠지요. 저도 그런걸요. 그래도 저는 공녀를 돕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돕고 싶다는 말도 오만인가요? 그러면 저는 기꺼이 오만한 인간이 되렵니다.”
은백합 영애가 입술을 다물었다. 그녀 역시 그녀의 방식으로 황태자를 도우려 하고 있었다. 인정하든 말든, 우리 두 사람은 닮은 꼴이다.
“내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이번 세상이 끝날 때 저와 함께 있어 주세요.”
“그것뿐인가?”
“예."
이단심문관이 몰입도를 100퍼센트 찍은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이 스테이지를 부숴버릴 비법을. 상당히 변칙적이고 트리키한 해결책이지만… 아마도 가능할 거다
내가 제정신을 똑바로 차리기만 한다면.
“그리고 되도록, 제가 당신을 지금보다 더 좋아하도록 유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공녀한테 헤롱거려서 빠져나오지 못할 정도가 되면 딱 좋아요.”
“그걸 지금 나한테 부탁하는가?”
“괜찮아요. 전 쉬운 남자거든요. 공녀께서 손만 잡아주셔도 심장이 마구 뛰어요.”
은백합 영애가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뻔뻔하군…. 알았다. 사랑을 알려주겠다고 말했으니, 그 말에 대해선 책임을 져야겠지.”
은백합 영애는 내 손을 잡았다. 부드러웠다. 그녀는 맨손이었다. 손의 감촉이 내 오른손을 감쌌다. 어젯밤, 은백합 영애가 향수를 묻힌 기억이 떠올라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걸로 충분한가?”
[인물에 대한 몰입이 심화됩니다.]
[현재 당신의 몰입률은 44%입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예. 추, 충분해요.”
“맙소사. 내가 홀려놓고 할 말은 아니다만, 그대. 조금 지나치게 순수한 것은 아닌가? 이 험한 세상에서 잘도 살아남았다.”
“죽었어요. 많이.”
"......."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여드리면 공녀도 약간은 가슴이 뜁니까? 예전에 본 잡지에서 그러던데요. 가끔 가다 약한 척을 해야 약발이 돈다고.”
“하."
은백합 영애가 코웃음을 흘렸다. 비록 그녀의 눈은 웃지 않았지만, 그래도 웃음은 웃음이었다. 황태자의 삽질로 인해 많이 우울했을 텐데. 조금이라도 기분이 풀리면 다행이다.
“사랑을 안 지 하루밖에 안 된 아이가 싸움을 거는 것이냐?”
“아까 금사매와 싸우는 모습을 보고 알았어요. 공녀께선 현명하시지만, 상대방이 도발하면 절대 얌전히 넘어가지 않아요. 자존심 때문이려나요? 설령 자신이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도발을 찍어누르지요. 그래서, 저도 도발해보고 싶습니다.”
“…제법 머리가 약삭빠르군.”
“조금 더 도발해볼까요?”
“해보아라. 해볼 테면.”
우리 두 사람은 가까웠다.
더 가까워졌다.
그림자가 서로 포개어졌다.
우리 둘 다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공녀께선 자신을 사랑의 달인인 양 말씀하세요.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사랑받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황태자를 사랑하는 것, 황태자의 사랑을 끌어내는 것, 둘 다 중요하죠. 하지만 공녀께선 후자를 실패하셨어요.”
“흐음.”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금사매 영애가 공녀보다 사랑을 잘하는 걸지도 몰라요. 아무튼 태자한테 사랑받고 있잖아요? 누가 더 사랑에 뛰어나냐를 따지면, 의외로 금사매 영애가 더 고단수일지도.”
“호오.”
“공녀께선 사랑하는 방법을 잘 아십니다. 하지만 사랑받는 방법을 모르세요. 적어도 금사매보다는 모르는 게 확실합니다. 그러니까...."
그 때.
“그러니까?”
은백합 영애의 손이 내 턱을 쥐었다.
"......."
“계속 말해보아라. 그대 목소리, 듣기에 나쁘지 않다.”
[인물에 대한 몰입이 심화됩니다.]
[현재 당신의 몰입률은 45%입니다.]
“…그러니까 금사매한테 황태자를 빼앗기게 된 것도 당연해요. 태자의 취향과 취미를 좀 더 세밀하게 파악해서 공략했어야.”
“이빨이 정말 하얗구나.”
“……합니다. 그런데, 그러시지 않았어요. 방심하신 겁니다. 그래서, 금사매가 저토록 날뛰게 된 건 일정부분은 공녀의 책임이라 봐야.”
“혓바닥은 빨갛고. 예쁘게도 생겼군.”
은백합 영애가 턱을 끌어당겼다.
그녀의 시선은 내 입안을 올려보고 있었다.
“왜 또 말을 멈추는가? 입술을 다물면 내가 그대의 혀를 볼 수가 없어진다. 구경하는 맛이 있거늘. 계속 말하라.”
"......, ........"
“항복을 인정하는가?”
“예....."
“[공녀한테 헤롱거려서 빠져나오지 못할 정도가 되면 딱 좋아요.]”
그건 방금 내가 했던 말이다.
“정말 무서운 말만 골라서 입에 담는 사람이로군. 그대는. 얼마나 멋진 방법을 떠올렸기에 그리도 자신만만한지 모르겠다만, 참으로 겁이 없다.”
은백합 영애가 조금 더 나의 턱을 잡아당겼다.
나는 마치 중력을 잃어버린 것처럼 그녀의 손짓에 이끌렸다.
“하긴, 14회차나 반복했으니 나도 잠깐은 일탈을 경험해도 좋으렷다.”
“그 말씀은……?”
“개새끼한테는 개새끼로 대하라는 것이 나의 율법이다. 오늘 밤에 겪은 일을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태자 전하께서 내게 조금 지나치게 개새끼가 되신 것 같다. 이대로 당하고만 살 수는 없겠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혹시.
“드디어 황태자를 포기하실 생각인가요?”
“아니. 나의 심장이 별자리 되어 밤하늘에 박혀 있거늘 어찌 그러겠는가.”
단지, 하고 은백합 영애는 소곤거렸다.
“나도 조금 지나친 개새끼가 되어볼까 싶을 뿐이다.”
지나친 개새끼.
내 머릿속에선 염제의 재수 없는 얼굴밖에 안 떠올랐다. 개새끼라는 말을 들으면 자동으로 유수하가 생각났다. 하지만 그런 개새끼가 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은백합 영애는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은백합 영애의 검지가 내 아랫입술을 스쳤다.
“오늘부터 너와 바람을 피우겠다.”
"......."
어.
“저를, 사랑하시나요?”
“아니.”
“조금이라도 사귀어주시려는 마음이 있습니까?”
“아니.”
“그런데….”
“하지만 그대는 금사매가 아끼는 시종이지. 금사매가 한 말을 따오자면, 한 명밖에 없는 집사이고 소꿉친구다. 그대가 나와 사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금사매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황태자 전하께서도 퍽 당황하시지 않겠는가.”
즉.
“두 사람한테 엿 먹이려고 저랑 사귀는 척하시겠다는 건가요…?”
“왜?"
숨결이 가까워졌다.
“싫은가?”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두근. 도저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두근, 심장 소리가 미친 듯이 시끄러워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러니까, 내 사랑인데. 첫사랑인데. 두근. 그걸 이런 식으로는. 바람은 조금. 더 낭만적인 뭔가가 있어야.
“앉아라.”
나는 조심조심, 정원에 앉았다. 달이 구름에 가리어 땅이 어두웠다. 꼭 바닥없는 늪에 무릎을 꿇은 것 같았다.
나와 은백합 영애의 눈높이가 역전되었다.
“그대에게 선택지를 주마.”
은백합 영애가 나를 내려보았다.
“내 제안을 받아들이기 싫다면 눈을 꾹 감아라. 그대가 눈을 뜨기 전에 조용히 사라지겠다. 하지만 만일 내 제안을 받아들여 나와 연인이 된 척 행세하고 싶다면. 이번 삶이 끝날 때까지 연극을 하고 싶다면---."
밤하늘에 빨간 달은 가려졌다.
그것보다 더 붉은 눈동자가 눈앞에 있었다.
“나의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해라.”
이름.
나는.
"라비엘......."
어라.
“라비엘 이반시아.”
왜 내 입이 열려 있지.
“그래. 내가 사랑을 알려준다고 했을 때, 처음으로 내린 가르침을 기억하는가?"
“사랑은 개새끼를 경험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잘 기억하는군.”
은백합 영애의 양손이 내 뺨을 덮었다.
그리고.
“내가 그대의 첫 번째 개새끼가 되어주마.”
달이 불을 삼켰다.
"......."
백합향.
부드럽고 달콤한.
죽을 것 같은, 향기.
[인물에 대한 몰입이 심화됩니다.]
[현재 당신의 몰입률은 50%입니다.]
숨이 막힌다.
예뻐라.
-둘 다 또라이라서 잘 어울리네. 하긴 네가 사귀어봤자 어떻게 평범한 사람이랑 사귀겠냐? 유유상종이야말로 만고불변의 진리지. 배후령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1일 차 축하한다. 뱁새야.
목련잎이 흐드러지며 떨어졌다.
-바람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