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 그가 사랑하는 방법.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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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람들이 일상을 관리하듯 나는 나의 죽음을 관리했다.
언제나 내게는 조금 더 쉽게 죽는 방법이 있었다. 오러로 뇌를 감싼다. 터트린다. 일순간에, 고통 없이도 목숨을 끝낼 수 있겠지. 쉽고 간단하고 편리하다.
그래서 그렇게 죽지 않았다.
‘쉽고 간단하고 편리하므로.’
쉬움. 간단함. 편리함. 세 가지에 익숙해지면 인간은 방심한다. 마음이 아무리 날카로운 칼날 같아도 녹이 슬고 만다.
‘염제가 나한테 죽게 된 것도 결국은 방심해서다.’
나는 좀 더 고통스러운 죽음을 자처했다. 나의 단검에 의지하기를 고집했다. 내 감각과 판단력을 생생한 날것처럼 유지하기 위해. 그랬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를 것이다.
"괜찮아요. 순식간에 끝날 거예요.”
나는 은백합 영애의 손으로 천천히 오러를 흘려보냈다. 생소한 감각이라서 그럴까? 은백합 영애는 내 붉음을 받으면서 눈썹을 움찔거렸다.
“……따뜻하구나.”
“예."
“꼭 온수가 혈관을 타고 스며드는 것 같다. 만일 이것이 그대의 체온을 닮았다면, 집사여. 그대는 나보다 조금 더 따뜻한 온도를 가진 것이겠다.”
은백합 영애가 내 눈동자를 보았다.
“불안하군.”
"......."
“지금까지 회귀를 거듭하면서 불안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나를 잃어버리지만 않으면 된다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그대를 잃고 싶지 않다. 내가 먼저 회귀하게 되어 그대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게 되면….”
은백합 영애가 중얼거린 말이 기뻤다면 나는 개새끼인 것일까. 그녀가 나로 인해 불안감을 느껴서 행복하다면.
그래. 아마도 개새끼일 것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나 오직 그녀를 위한 개새끼다.
“제가 같이 있을게요.”
우리가 서로의 체온을 느끼는 와중에도 세계는 멸망하고 있었다.
쩌저저어억-
쾅 소리와 함께 땅이 갈라졌다. 깨트려진 틈새에서 핏물이 왈칵, 터졌다.
지하에서 뻗어나온 악마들, 은백합 영애의 사역마들이었던 그것들은 이제 영애의 통제를 벗어나 날뛰었다. 그 숫자는 바다를 이루는 물방울들과 같았고 그 물방울 하나하나의 크기는 태산과 같았다.
“어?”
먼 곳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악마다! 악마가 나타났다!”
“운이 나쁘군.”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약속된 열흘. 소원으로 고정된 은백합 영애의 사랑이, 사랑이, 반쪽짜리 성좌로는 도저히 붙들어맬 수 없게 된 영원한 사랑이 폭주하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 그러나, 은백합 영애는 여전히 은으로 심장을 도금한 것처럼 담담히 나를 보았다.
“실수는 용납하지 않겠다.”
“네."
“만일 내가 0.1초라도 그대보다 먼저 죽거나. 그대가 나보다 0.1초라도 빨리 죽는다면. 나는 영원토록 그대를 용서하지 않겠다. 지금 내가 한 말을 똑똑히 그대의 심장에 새기도록. 그대에게 허락한 기회는 단 한 번인 것이다.”
“네."
"다시."
[은으로 도금된 심장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다시 사람을 믿게 만든 것에 책임을 다해라.”
"......."
나는 조금만 더 강하게 공녀의 손을 잡았다.
“네."
지상에서 악마들이 날뛰는 동안, 노을진 하늘이 깨졌다. 거울처럼 산산조각 났다.
쏟아져 내리는 피의 홍수.
지상은 점점 빨갛게 범람했다. 울려퍼지던 비명은 익사하듯 거품소리와 함께 가라앉았다.
이 세상을 멸망에 이르게 한 것은 은백합 영애의 폭주만이 아니었다.
[‘폐허를 추수하는 소’의 사도가 현현합니다.]
언젠가 그녀가 언급한, 다른 성좌들의 사도들.
[‘영원한 평야의 군마’의 사도가 현현합니다.]
[‘불멸하는 행복 전도사’의 사도가 현현합니다.]
찢어진 하늘의 틈새로 이계(異界)의 존재들이 강림하고 있었다.
이 세계의 반쪽짜리 성좌, 은백합 영애. 그 방벽이 무너진 틈을 노려, 공략(攻略) 따위의 체면치레조차 집어치고 본격적인 침략(候略)에 나선 것이다.
“하여간, 무드란 것이 없는 족속들이다.”
그들의 형상은 그들을 보냈을 성좌만큼이 나 각양각색이었다.
“그러게요.”
그래서 나는 쉽사리 그 모습들을 기억할 수 있었다.
“교훈을 줘야겠어요.”
“어떤 교훈을?”
“남의 연애에 끼어들면 뒤진다는 교훈.”
“마음에 드는군.”
은백합 영애는 웃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그 말대로였다. 어차피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영애님.”
노을이 깨져버린 하늘. 끝없이 쏟아지는 피.
지하에서 기어올라오는 악마들과 하늘로부터 강림하는 침략자들. 그 모든 종말의 풍광을,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은 다만 혼자서 감당해왔다.
오늘까지는.
“집사.”
은백합 영애가 말했다.
“나를 죽여다오.”
세상은 이제 빨개져서 오직 영애와 나, 우리를 태운 나룻배, 반경 3미터의 수면만이 붉은 물감에 파묻히지 않았다. 붉게 물든 호수에선 무수한 혓바닥과 입술이 솟아나와 우리에게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편한 죽음을 허락했다.
우리 두 사람의 전신을 가득 채운 오러를, 불살랐다.
마천신공魔天神功.
제구식第九式.
자결검自決劍.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찰나의 비틀림도 없이.
[당신은 죽었습니다.]
우리는 죽었다.
[24시간 전으로 회귀합니다.]
4.
눈을 떴을 때, 나는 하얀 나무의 그늘에 기대어 있었다.
저녁이었다.
하늘이 누렇게 익어갔다.
이곳에서 눈을 뜬 것이 이상하진 않았다. 은백합 영애의 전속 집사가 되기로 결심한 날부터, 쭉, 저녁이면 영애를 데리고 산책했으니까.
내가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눈을 떴는가?”
소곤.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야 정신을 차리다니.”
옆을 돌아보았다.
“참 괘씸한 집사로다.”
은백합 영애는 환한 노을을 등지고 서 있었다. 손에는 양산을 들어서, 그녀의 발밑으로 그림자가 졌다. 하아아아-. 바람이 불어서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을 헤집어놓을 때 나는 무심코 숨이 멎었다.
‘성공했을까?’
심장이 두근거렸다.
‘내가 실패한 걸까?’
아직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어서, 나는 그저 은백합 영애만을 바라봤다.
양산 손잡이를 비끄러지게 잡은 그녀의 손가락. 바람에 흐트러진 옆머리를 가볍게 쓸어넘기는 손짓. 평소처럼 꾹 다물린 입술. 은백합 영애의 한 동작 한 동작이 내게는 너무도 큰 진동으로 다가왔다.
“집사여. 그대는 내게 조금 거짓말을 했다.”
은백합 영애가 입을 열었다.
“그대는 나에게 같은 시간을 보낼 것을 약속했다. 그렇지만 내가 그대보다 아흐레나 일찍 회귀해버리지 않았는가.”
아.
“비록 가짜 연애라고는 해도 사랑하는 이를 9일이나 홀로 내버려 두다니. 몹시 괘씸하여서 죄가 크다.”
성공했다.
“나 혼자 그대를 아흐레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의 불안은 온전히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지. 곁에 있어준다 맹세했으면서 지키지 못했으니, 이것이 태만이고 태업 아니겠는가?”
성공했다.
“이번에 그대가 저지른 죄를 벌충하려거든 상당히 고생해야 할 것이다.”
성공했다.
“음. 목이 마르군. 집사여, 그대가 가져온 차를 내게……"
은백합 영애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내가 일어나서 그녀의 몸을 안았기 때문이다.
그녀를 껴안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
바람이 불었다. 은백합 영애가 들고 있던 양산이 떨어져, 잔디밭을 굴렀다.
이미 그녀를 껴안고 있었는데도 부족했다. 조금 더. 더. 더욱더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다. 나는 그것이, 은백합 영애의 몸이 아니라 심장을 안고 싶어서임을 알았다.
“미안해요.”
아흐레나 혼자서 기다리게 만들어서.
“아니다.”
은백합 영애가 나의 등을 안았다.
“이제는 괜찮아졌다. 나와 마지막 날을 보내지 않은 그대를 지켜보는 것도, 아주 재미없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군.”
“거짓말이네요.”
“그래, 거짓말이었다. 별로 재미없었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기다리는 걸 아주 잘한다.”
“미안해요.”
“용서하마.”
은백합 영애는 나의 목을 쓰다듬었다.
[인물에 대한 몰입이 심화됩니다.]
[현재 당신의 몰입률은 71%입니다.]
미친 듯이 사랑하고 싶다.
“울고 있는가?”
“아니요.”
“거짓말이로군.”
“예."
“나는 거짓말이 싫다. 농담을 하는 건 괜찮지만, 내게 거짓말을 입에 담지는 마라. 나도 그대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으마. 말뿐만이 아니라 손짓과 눈짓으로도 거짓을 꾀하지 않을 것이다.”
“울고 계신가요?”
"......."
“말하기 싫을 때는 묵비권을 쓰도록 해요. 캐묻지 않는 겁니다. 다그치지도 말고. 상대가 말해줄 때까지 천천히 기다려준다면 좋겠어요."
"음."
다행이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서.
그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어서 다행이야.
“부탁이 있어요. 공녀.”
“무엇인가?”
키스해도 될까요.
꾹 참았다.
얼굴이 안 보이는 것도 다행이다.
“정말로 죄송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면 안 될까요?”
“무례하군. 얼마나 더 기다리라는 말인가?”
“8일.”
“어째서?”
“7일.”
“으음?"
“6일.”
"......."
"하루씩 줄여나갈게요.”
"......."
“첫날에 함께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침묵.
“……발칙한 것.”
은백합 영애는 내 귀에 소곤거렸다.
“결국은 나를 아홉 번 더 죽이겠다는 말이렷다.”
“혹시, 아팠나요?”
“아프지 않았다. 그대 말대로 일순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미 나의 목숨을 한 번 거두었으면서 더 거두겠다는 그 심보가 고약하다.”
“키스해도 될까요?”
"......."
"......."
미안.
참지 못했다.
은백합 영애는 고개를 움직여, 나와 눈을 마주쳤다.
붉은색.
이제부터 내가 가장 사랑하게 될 색이 그곳에 있다.
“묵비권을 행사하마.”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키스했다.
서로 껴안았다.
숨결에서 숨결로, 입술에서 입술로, 나는 내 심장의 온도를 바치면서 오러를 흘렸다. 내 오러의 색깔이 붉은색이어서 또한 다행이었다. 숨소리가 섞였다.
그리고.
[당신은 죽었습니다.]
[24시간 전으로 회귀합니다.]
다음 순간에 눈을 떴을 때도, 은백합 영애는 내 곁에 있었다. 우리는 말을 나누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많은 말을 나눈 것일지 몰랐다. 은백합 영애는 나의 손을 잡았고, 나는 그녀에게 키스했다.
[당신은 죽었습니다.]
[24시간 전으로 회귀합니다.]
조금 더 당신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당신은 죽었습니다.]
[24시간 전으로 회귀합니다.]
영원히 평행선을 그릴 것이라고 말한 은백합 영애에게, 나는 내 고개의 각도를 조금 더 숙였다. 키스했다. 우리 두 사람의 시간이 겹쳐지기 전에, 우리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다.
숙소의 서늘한 복도에서.
[당신은 죽었습니다.]
[24시간 전으로 회귀합니다.]
어두운 지하실에서.
[당신은 죽었습니다.]
[24시간 전으로 회귀합니다.]
하얀 목련잎 아래에서.
“공녀님.”
나는 하아, 숨을 흘렸다.
“오시기 전에, 양치를 하고 오셨지요?”
“묵비권을 행사해도 좋은 질문으로 보이는군.”
“치사합니다. 공녀만.”
“이 세상에서 치사하게 굴어도 용서받는 순간이 두 종류 있다. 하나는 전쟁을 벌일 때고 다른 하나는 사랑을 나눌 때다. 더구나,”
나는 죽으면 24시간 전으로 돌아가지만, 은백합 영애는 무도회장의 첫날로 돌아간다.
그 시간의 괴리를 그녀는 셈했다.
“그대는 나를 9일, 8일, 7일… 다 더해서 39일간 기다리게 만들지 않았는가? 나의 적당한 치사함은 오히려 그대가 양심의 가책을 덜어내는 데 유용할 것이다. 감사히 여기도록.”
“즉, 39일 내내 키스……"
“잔망스러우니 닥치거라.”
[당신은 죽었습니다.]
[24시간 전으로 회귀합니다.]
다음에 눈을 떴을 때는, 금사매 남작 영애의 개인실이었다.
“사왕!”
아직 금사매가 되지 않은 이단심문관이 방실 웃었다. 나의 시간선은 이어졌고 이단심문관은 안 이어졌다. 그래서 내 몰입률은 그대로인 반면, 이단심문관은 첫날에 가까워질수록 몰입도가 초기화된 것이다.
“은백합 영애가 찾아왔습니다! 아핫. 이렇게 늦은 밤에 무슨 일일까요? 제가 듣기로 그녀는 기숙사가 아니라 따로 마련된 숙소에서 머무른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이 시간에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면 뭔가……"
“지금 어디 계세요?”
“아. 기숙사 앞의 정원에서 기다리겠답니다.”
나는 방문을 열고 뛰었다. 등 뒤로 "사왕?” 하고 이단심문관이 불렀지만, 그에게 대답할 시간이 없었다. 나를 기다려준 사람이 있었다.
좀 더 빨리.
조금이라도 더, 어서.
은백합 영애는 목련(木達) 아래에 서 있었다.
밤하늘에 하얗게 핀 연꽃.
봉우리 진 연꽃은 붉음이 빠진 심장 같다.
"......."
아마도 기숙사 창문으로 몰래 정원을 훔쳐보는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우리는 가까이 다가가서, 껴안았고, 입맞춤했다.
나는 속삭였다.
“그거 아세요?”
“모른다. 자랑해보거라.”
“제 이름은 공자이고, 저는 당신을 공녀라고 부르니까. 저희 두 사람을 나란히 붙이면 공녀와 공자가 돼요. 물론 공녀님 나라의 말에선 다르게 들리겠지만, 그래도….”
“천생연분이라는 말인가?”
“저는 그렇게 생각하겠습니다.”
"우연한 일치에 기고만장하군.”
"당신을 사랑합니다.”
입술이 닿았다.
숨이 섞였다.
시간이 겹쳤다.
[당신은 죽었습니다.]
마침내.
[24시간 전으로 회귀합니다.]
눈을 뜨자 그곳은 화려한 무도회장이었다.
상들리에가 천장에 아롱거리며 수양버들처럼 드리웠다.
그 아래에서 수십 명의 영애와 영식이 짝을 이루어 느릿느릿, 춤을 추고 있었다.
우리가 처음으로 만난 곳.
이단심문관이 뺨을 맞아버린 장소.
우리의 시간이 처음 마주친 스테이지.
1일차.
"......."
"......."
무도회장 한복판에서 우리는 마주보고 서 있었다.
나는 발을 움직였다.
은백합 영애도 발걸음을 내디뎠다.
누가 먼저다 따질 수도 없이, 하얀 상들리에 아래서, 수십 개의 그림자들이 너울거리는 그곳에서, 우리는 입술을 맞추었다.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경악하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무시했다. 무도회장에서 음악을 흘리던 악단들이 멈칫했으며, 영애와 영식들이 춤을 멈춘 채 우리를 바라보았지만, 무시했다.
은백합 영애의 눈동자. 목소리. 그녀의 존재가 가진 윤곽에 다만 몰두했다.
“저희,”
나는 은백합 영애에게 이마를 맞대었다.
“아직도 1일차일까요?”
은백합 영애는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1일차다. 영원히 1일차겠군.”
“영원히?”
“그대와 내가 바란다면.”
그리고 우리는 다시 키스했다.
한 순간을 영원처럼 탐닉했다.
넓디 넓은 무도회장에 우리 두 사람이 흘리는 숨소리만 낮게 흘렀다.
“어라…?”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우리의 뒤쪽에서 이단심문관이 말했다.
“어. 혹시 제가 뭐 놓친 거라도 있습니까?”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