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106화 (106/400)

106화.  < 1DAYS.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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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공녀.”

“무엇인가?”

“우리 딱 열흘만 정신줄 놓고 휴가를 보내요.”

나는 제안했다.

“공녀처럼 열심히 산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최선을 다했잖아요. 그러니까 앞으로 열흘만 진지한 거 다 내려 놓고, 회귀 스킬 파바박 써서….”

“평범한 사람은 할 수 없는 유희를 즐기겠다?”

“바로 그거죠.”

"음."

은백합 영애는 담담했다.

“아무리 난장판을 벌여도 하루 전으로 돌아가면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테니, 우리로선 아무런 손해를 볼 게 없으렷다.”

“역시 공녀. 제가 한 마디 하면 열 마디를 알아들으시네요.”

“조금 불성실한 놀이법 아니겠느냐?”

“까짓거 불성실해지죠.”

“으음. 내가 아주 나쁜 남자를 연인으로 두게 되었군…."

“열흘, 콜?”

은백합 영애는 부채를 꺼내어 지폈다.

“열흘이면 아쉬울 것 같으니 보름으로 하지.”

"콜."

우리는 지난 삶에 분풀이하듯 놀았다.

소르므윈 아카데미는 수도 근교에 있다. 조금만 마차를 타서 가면 휘황찬란한 놀거리가 즐비하다. 그리고 우리 사랑께서는 제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귀족 가문의 제일 잘 나가시는 후계자다.

“어디 좌석으로 드릴까요?”

간단히 말해서, 권력과 돈이 넘쳤다.

이 세상에서 제일 잘 나가는 영애인 것이다.

공손한 연극단 직원에게 공녀는 툭 말했다.

“극단을 하루 고용하마.”

“예?”

“하루 종일 극단을 사겠다고 말했느니라. 알아듣지 못했느냐? 내가 세 번 얘기해야 귀에 들어가겠는가. 똑같은 말을 세 번 반복시키는 것이 여기 극단의 연기 연습법인가.”

“아, 아니요! 죄송합니다! 바로 극단주에게 문의를 넣겠습니다!”

연극과 오페라는 하루 대관이 기본.

“공자여. 내가 예전부터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이 있다.”

“뭔가요?”

“6개의 극단을 동시에 고용한다.”

은백합 영애는 말투가 담담했다.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 장난을 저지르는 악동처럼 재밌어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무대 위에서 동시에 연극을 펼치게 하는 것이다. 3개 연극은 비극, 2개 연극은 희극, 나머지 하나는 오페라가 좋겠군.”

“어. 그냥 난장판이 될 거 같은데요?”

“정확하다. 난장판이 보고 싶다.”

“그럼 보죠.”

수도에서 제일 몸값이 비싼 극단 6곳을 불러들였다. 이반시아 공작가의 적녀가 부른다니 알아서 설설 기지 않는 극단주가 없었다.

뭐? 이런 폭거를 저지르면 이반시아 공작가에 대한 평판이 떨어지고 명예가 실추된다고? 괜찮다. 우리는 회귀자 커플이다. 하루 놀고 하루 돌아가면 그만이다. 어쩔 건데.

“아아. 어마어마한 난장판이군. 이걸 보고 싶었다….”

내 연인께선 깊이 만족한다는 듯 부채를 지피셨고,

“푸흐하하하학!!”

나는 배꼽을 잡고 뒹굴었다.

진지하게 비극적인 대사를 읊는 배우 옆에서 어릿광대들이 희극을 벌였다. 6개 연극이 동시에 상연되자 세상에서 제일 진지한 대사도 웃기기만 했다. 배우들은 러닝타임 내내 진땀을 흘렸다.

“수도에 있는 도박장을 쓸어버리죠!”

“훌륭한 아이디어다. 받아들이마.”

우리 두 사람은 귀족 전용의 카지노로 출격했다. 가면무도회처럼 가면을 써서 신분을 감추는 곳이었다. 하지만 우리 애인님이 어떤 분인가? 달빛처럼 흘러내리는 은발을 알아보지 못할 귀족은 아무도 없었다.

“콜을 불러라.”

“코, 콜”

은백합 영애가 콜하라 하면 상대방은 움츠러들면서 콜을 불렀고.

“죽어라.”

“다, 다이.”

은백합 영애가 죽으라 하면 상대방은 얌전히 카드를 내려놓았다.

"판돈을 올려라.”

"레, 레이즈….”

"더 올리거라.”

"리 레이즈으….”

올리라 하면 올려지더라.

“올인해라. 너희 모두.”

“올… 인……"

가히 홍해의 기적에 비견될 만한 기적이 초호화 도박장에 강림했나니. 나는 우리 연인님을 위해 [백합교]를 창설하고 그 성전의 첫 구절에 도박장 장면을 서술하기로 마음먹었다.

아,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다른 이를 파멸시키는 악역 영애의 모습이란 얼마나 아리따운가.

“이 , 이건 폭거입니다!”

대략 열여섯 명의 귀족이 울면서 다이아몬드 반지와 목걸이까지 우리한테 상납했을 무렵, 도박장 주인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카이저 수염을 기른 아저씨였다.

“아무리 공녀님이라 해도 가게에서 이러실 수는….”

“호오. 내가 누구인지 아는가? 기이한 일이군. 이 가게에선 고객들의 신분을 철저히 숨기고 설령 알아채게 되더라도 침묵하는 것이 미덕이며 규율이라던데, 내가 헛소문을 들어버린 모양이다.”

“모, 모릅니다! 물론 모릅니다만……"

“감히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목이 달아나고 싶은가?”

"......."

도박장 주인이 입을 뻐끔거렸다. 이 아저씨도 귀족이었지만 혈통의 급이 달랐다. 허겁지겁 달려오자마자 1분도 안 되어서 격침되었다.

"어허. 이 양반 보게. 아가씨께서 하문하셨거늘 어찌 대답하지 않느냐!"

참고로 나는 그런 은백합 영애의 곁에 바싹 붙어 있었다. 그리고 간신배처럼 알짱거리며 호통을 쳤다. 우리 연인님 곁이 참 따숩더라.

“네놈이 지금 아가씨의 하문을 우습게 아는 것이냐! 세 치 혓바닥을 놀려서 아가씨의 가문을 능멸할 속셈이냐!”

“아, 아니옵니다. 그럴 리 있겠사옵니까. 다, 단지 소인이 작은 영업을 하는데 거기에 조금만 더 배려를 해주십사……"

“아이고. 아가씨, 안 되겠습니다. 이 자가 오만함이 하늘을 찌릅니다. 불경죄로 목을 치시지요!”

“히익?!”

은백합 영애는 느긋하게 부채를 지폈다.

“괜찮다. 비록 뢰베 남작이 지하실에 몰래 약 제조실을 만들어서 수도 전역에 불법 마약을 유통시키고 있다고는 하나, 그것으로 목을 떨어트려서야 되겠는가.”

움찔.

카이저 수염 아저씨가 어깨를 떨었다. 방금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인지 의심하는 표정. 곧 그의 낯빛이 새파래졌다. 방금까지 당황하던 게 거짓말이라는 듯, 남자는 진심으로 경악하고 있었다.

“무, 무슨 말씀이온지……"

“앉아라.”

"......."

“거기 앉아서 나와 열 판을 놀면 오늘 하룻밤은 넘어가겠다.”

결국 우리는 도박장 주인의 지갑까지 탈탈 털었다. 우리는 산더미처럼 쌓인 금화와 보석을, 제국의 길거리에 마구잡이로 뿌렸다.

꿈과 같은 날들이었다.

미몽(述夢)이되 미몽(美夢)인 나날.

우리는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놀고 싶은 대로 놀았다. 수도에서 가장 호사스러운 숙소를 대절하여, 가장 호화로운 방에서 소일했다. 나는 은백합 영애를 안고 어마어마한 크기의 침대에 뛰어들었다.

“음.”

첫 번째 날.

은백합 영애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으흠,”

두 번째 날.

은백합 영애는 입꼬리를 올렸다.

“……아하.”

세 번째 날에 이르러서, 은백합 영애는 미소를 지었다. 비웃음이 아니라 단지 기뻐서 짓는 웃음이었다. 내 연인의 미소는 마치 웃는 방법을 처음 배운 어린아이처럼 순수했다.

“공자여.”

은백합 영애가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행복하신가요?”

“이 세상에 그대가 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살아도 된다.”

나는 행복해졌다.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한 최소의 단위는 2인이었다.

“오늘부터 일기를 쓰겠어요.”

“내게 보여주기 위해서인가.”

“제 동료 중에 악기를 잘하는 분이 있어요. 그분한테 음악을 배우겠습니다.”

“내게 들려주기 위해서로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겠습니다.”

하루는 경비대를 매수하고 윽박질러서, 수도에서 제일 붐비는 길거리를 1시간 동안 싹 비웠다. 우리 두 사람이 전세를 놔버렸다.

하루는 궁전에 출두하여, 황제 앞에서 할 말 하지 못할 말 다 늘여놓았다. 은백합 영애가 “아드님을 잘 관리하소서, 폐하. 망나니가 따로 없나이다.” 라고 말했을 때 황제는 그만 옥좌에서 미끄러졌다. “폐하?!” 주변의 관료들이 야단법석을 떨었다.

하루. 그리고 하루.

우리는 시간을 휴가지로 삼아 여행했다.

‘꼭 신혼여행 같아.’

라는 말을 나는 입에 담지 않았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뜨거웠으니까. 하지만 분명히 은백합 영애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 믿었다.

마지막 날.

"......."

"......."

마지막 하루에 우리는 어디론가 떠나지 않았다.

단지 수도 광장의 분수대에 나란히 앉았다. 낮부터 저녁까지.

서로 손을 잡은 채 가만히, 광장에 무수히도 오가는 사람들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과일가게와 주점 사이의 골목으로, 신문팔이 소년이 바삐 뛰어갔다.

“저희, 참 나쁜 짓 저질렀네요.”

한나절 만에 영애는 입술을 열었다.

“그래. 악독한 개자식들이다.”

나는 영애의 손을 강하게 쥐었다.

여행은 이미 사랑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더 사랑하기 위해서 가는 것이었다. 하루를 보름 동안 반복한 지금. 나는 그녀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더 사랑하고 싶었다.

“우리 두 사람밖에 모르지만요.”

“공범이군.”

작은 웃음소리.

[인물에 대한 몰입이 심화됩니다.]

[현재 당신의 몰입률은 81%입니다.]

행복의 증거물.

“라비엘. 제가 마차에서 말씀드린 거 기억나세요?”

“그대가 내게 한 말은 모두 기억한다.”

“제가 믿어달라고 할 때 절 믿어달라고 했던 거.”

“물론이다.”

“그 약속을 들어주세요.”

은백합 영애는 나를 보았다.

“무언가 수상한 일을 꾀하는 모양이군. 공자. 순순히 토로하는 편이 그대의 심장에 좋을 것이다.”

“저는 이제부터 몰입률을 99%까지 올릴 거예요.”

"......."

이번에 하루를 여행하면서 은백합 영애와 나는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정말로 많은 얘기를. 내가 어떤 세계에서 왔는지. [묵시록]이란 어떤 것이고 [몰입률]이 무엇인지. 은백합 영애는 내게 들어서 알았다.

“거의 완전히 집사가 될 필요가 있어요. 이 세계에서 태어나 이 세계에서 살아온 사람이 되어야만 해요.”

“어째서인가?”

“그 이유를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은백합 영애는 턱을 짚었다.

“……내게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오직 그대만 마음속으로 알고 있어야 계책이 성공한다는 얘기렷다.”

“예."

“지금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내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겠고.”

“맞습니다.”

은백합 영애는 하아, 한숨을 쉬었다. 한방 당했다는 느낌이었다.

“……처음부터 이 순간을 위해 내게 [믿어달라]는 약속을 내세웠구나. 역시 보기와 다르게 영악한 남자다. 내 조금 더 경계해서 그대의 말을 들어야 했거늘. 그래.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작전을 실행할 때였다.

2.

먼저 [첫날]로 돌아갔다. 이번 스테이지의 시작점. 무도회가 열린 그 순간으로.

우리 두 사람은 무도회장에서 서둘러 빠져나와, 은백합 영애의 숙소로 갔다.

“일단 저의 두 손과 두 발을 의자에 꽁꽁 묶어주세요.”

은백합 영애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공자여. 우리는 아직 그런 세상으로 넘어가기엔 이르다고 생각한다만….”

“공녀가 뭘 생각하는지 모르겠고 알아서도 안 되겠지만, 지금 저는 제 인생에 아주 만족하고 있으니까 염려하지 말아주세요.”

“믿겠다고 약속했으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군….”

은백합 영애는 내 몸을 의자에 단단히 묶었다.

시험 삼아서 사지를 움직여 보았는데 꿈쩍도 안 했다.

이 정도면 안전하겠지.

-야, 김■비. 너 지금 뭐하는 거냐? 이 형님은 살짝 불안하다?

[반짝이가 용■님의 행동을 염려합니다.]

이미 내 몰입률은 80%를 넘어섰다.

내가 생각하건대, 아마 이 몸의 원래 주인인 ‘집사’는 금사매 영애뿐만 아니라 은백합 영애도 사모했던 것 같다. 어느 쪽이든 간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집사는 묵묵히 자신의 마음을 닫고 있었겠지.

황태자는 은백합 영애와 금사매 영애에게 양다리를. 금사매 영애는 황태자와 집사에게 양다리. 집사는 은백합 영애와 금사매 영애에게 양다리. 이제는 은백합 영애가 황태자와 내게 양다리를 걸치게 되었다.

‘정말 개 같은 로맨스야.’

하지만.

‘고맙다.’

지금은 은백합 영애에게도 사모의 정을 키운 집사가 마냥 고맙기만 했다.

그 덕분에 이런 작전을 세울 수 있었다.

나는 각오를 다졌다.

“제 앞에 거울을 가져다주세요.”

“음.”

은백합 영애는 하인들을 시켜 내 정면에 커다란 거울을 옮겨 놓았다. 의자에 꽉 묶여서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내 모습이 거울에 비치었다.

“인물창.”

거울 표면에 글자들이 미끄러졌다.

+

이름: 김공자

호감도: 90

선호 장르: [무협], [로맨스], [추리], [모험]

불호 장르: 없음

선호 캐릭터: [스승], [연인], [고결한 영웅], [희생자], [노력가], [어린아이], [선인], [스스로 의심할 줄 아는 자], [타인에게 너 그러운 자], [나를 알아주는 자]

+

그 아래로도 글자가 쭉 이어졌다.

나에 대한 거의 모든 것 .

인물창을 눈앞에 띄워놓은 채, 나는 은백합 영애를 올려봤다.

"라비엘.”

"듣고 있다.”

"이제부터 제게 마구마구 키스해주세요. 라비엘을 더 좋아하게요.”

"몸이 묶인 채로 키스를 당하는 것이 취향인가? 취향이라면 좀 더 일찍 말하지 그랬느냐. 참고해줄 수 있었을지도 모르거늘.”

"어느 순간에 이르면, 제가 더 이상 [저]로 남지 않게 될 거예요.”

"......."

몰입률이 90%를 넘어서서 100%로 접근하게 되면.

금사매 남작 영애에게 완전히 몰입해버린 이단심문관을 봤을 때. 금사매 남작 영애로 변모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머리카락]이 자란 모습을 목격했을 때. 나는 깨달았다.

저거다.

저게 바로 이번 스테이지를 내가 바라는 방식대로 깨부술 묘책이었다.

“그 때, 공녀의 손으로 저를 죽이세요.”

은백합 영애가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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