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111화 (111/400)

111화.  < 그녀가 사랑하는 방법.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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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달려 들어서, 그녀를 껴안았다.

“라비엘.”

수많은 말이 입안에서 감돌았다.

나는 [미안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었다.

당신에게 씻기지 않는 상처를 남겨서 미안하다고.

정말로 미안하다고.

어쩌면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나를 믿어주어서 고맙고, 나를 기다려주어서 고마우며, 무엇보다 나를 사랑해주어서.

나 같은 것을 사랑해주어서.

하지만 내가 입에 담고 싶은 말은 사죄가 아니다. 감사도 아니다. 내가 그녀에게 사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으며, 감사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다시 만난 오늘밤에, 나는 사죄나 감사를 바치고 싶지 않았다.

‘여태까지 말해본 적 없는 말을.’

그녀에게 단 한 번만 바칠 수 있는 것을 말하고 싶다. 나의 삶에서 단 한 번밖에 말하지 못할 언어를 선물하고 싶다. 나의 처음. 나의 마지막. 나의 시간을 라비엘 이반시아에게 바치고 싶다.

그래서. 그러므로. 그러기에.

나는 라비엘의 손을 잡았다.

“우리, 결혼해요.”

청혼請婚.

"......."

라비엘은 천천히 턱을 끄덕였다.

“나는 많은 이름으로 불린다. 황제 폐하께 은백합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제국에는 이반시아의 공녀라는 칭호를 바쳤다. 그렇지만 나의 이름, 라비엘은, 다만 그대에게 불리기 위하여 언제나 빈자리로 놔둘 것이다.”

우리는 키스했다.

깊이.

4.

우리 두 사람은 새벽에 깨어났다.

창문이 푸른 색깔로 창백하였다.

숨소리가 들리어서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라비엘이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

나 역시 라비엘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움직여서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서늘한 손가락이 감겨왔다. 아름다운 사람. 우리는 서로 숨소리를 나누었고, 손가락을 겹쳤으며, 이마를 맞대었다.

“라비엘은 천재예요.”

새벽이었다. 새벽이란 시간에, 모든 만남이 밀회(密會)가 되고 모든 소곤거림이 밀어(蜜語)가 되었다. 그래서 새벽을 함께하는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속삭였다.

“굉장해요. 제가 트라우마를 엿보는 걸 역으로 이용하다니. 그걸로 저한테 기억을 전달하다니… 정말로, 굉장해요. 저라면 절대 그런 방법은 떠올리지 못했을 거예요.”

“그대는 타인의 아픔을 신성시하는 면이 있지.”

라비엘의 손길이 내 귓볼을 스쳤다.

“그대도 대단하긴 마찬가지다. 대체 무슨 수로 탑을 설득했는가? 뭇 성좌들에게도 탑은 신성불가침의 관리자와 같다. 그대의 혀가 달콤한 줄은 알았어도 설마 탑을 설득할 정도였다니.”

“음. 사실 저도 잘은 기억 안 나요. 꿈처럼 어렴풋하게 떠오르긴 하지만요. 아마도 탑의 높으신 분들과 만나고 나면 이런 식으로 기억에 장막이 쳐지나 봐요.”

“그대가 성공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지. 나의 연인은 꽤 유능하다.”

“그리고 제가 사랑하는 연인은 천재예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로군.”

우리는 이마를 맞대어서 부비었다.

서로에게 감탄할 수 있다.

한 점의 허영도 허세도 없다.

이 사실이 나는 마냥 행복스러웠다.

“언제 결혼할까요?”

“재촉하는 것인가?”

“그런 말투는 조금 비겁하다고 생각합니다.”

라비엘이 작게 웃었다. 아찔했다. 등골에서 정전기가 일어나 머릿속까지 파고들었다. 어떤 음악도 라비엘이 작게 웃는 소리만큼 아름답진 못했다.

“먼저 황태자 전하와 파혼하는 것이 절차다.”

“아."

확실히.

라비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와 나는 약혼으로 매여 있다. 지금 상황에서 그대와 결혼하는 것은 법적으로 곤란하지.”

“음, 사실 저는 법적인 결혼은 아무래도 괜찮아요. 둘이서라도 함께 작게 식을 여는 걸로 충분하거든요.”

“아니. 나는 상관있다.”

라비엘은 내 뺨을 쓰다듬었다.

“이곳은 내가 사는 세계다. 제국은 내가 충성하고 돌보는 국가다. 나의 세계와 나의 국가라면 마땅히 나의 결혼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설령 그대가 여기서는 평민 출신이라 하여도, 내 연인이니, 모든 제국민은 그대를 축복해야 한다.”

“어. 하지만 사람들한테 그런 반응을 기대하긴 좀 어렵지 않을까요…?”

“괜찮다. 공자여.”

라비엘은 담담했다.

“축복하지 않는 제국민은 내 손에 죽는다.”

어쩌지? 너무 멋있다. 또 반했다. 계속 반하고 싶다.

“알겠어요. 라비엘의 세계에서 결혼식을 올려요. 그렇지만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라.”

“황태자와 파혼하긴 파혼하더라도 절대 라비엘이 파혼을 당하면 안 돼요. 뭣도 모르는 놈들이 라비엘에 대해서 안 좋게 수군거리는 거,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내 연인을 손가락질하는 놈이 있으면 그놈의 손가락을 분질러버릴 거고, 험담하는 놈이 있다면 혀를 잘라버릴 것이며, 모함하는 놈이 있다면 죽여버릴 거다.

농담이 아니다.

지옥을 맛보여주마.

“누가 봐도 이건 황태자가 잘못했다는 것이 명백해야 합니다. 라비엘이 파혼해버리세요.”

“오호. 지금 내게 제국의 국본을 모욕하라는 말인가? 이반시아 공작가의 적자이자 나라를 위해 그림자에서 암약하는 이 나에게?”

“예."

“쉬운 일이군.”

우리 두 사람은 잠시 키스하는 시간을 가졌다.

인생이 좀 더 풍족해졌다.

“계획, 있으십니까?”

“당연하다. 누구에게 묻는 것이냐. 태자 전하가 금사매와 밀회할 때마다 내 서고의 서랍에는 서류가 한 장씩 쌓인다. 그렇게 보관하기 시작한 서류가 어언 수백 장에 이른다. 알리바이와 증인도 모두 마련해두었다. 법정으로 끌고 가면 필승이다.”

어쩌지? 너무 멋있다. 또 반했다. 계속 반하고 싶다.

“물론 정말로 법정까지 갈 필요는 없다. 황실에선 이런 일이 거론되길 원하지 않을 테니. 나는 그저 증거 서류를 지참하여 황제 폐하께 접견을 청하면 된다.”

“언제 황궁에 가실 생각인가요?”

“되도록 빨리.”

라비엘은 조용히 나의 앞머리를 넘겼다.

“공자. 나와 결혼하고 나면 이제 그대는 이반시아 공작가의 부인(夫人)이다. 황실에서 직접 칭호를 내리게 되겠지. 그리고 나는 그대의 부군(婦君)이 된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공식석상에서 나는 그대를 부인이라 말할 것이다. 그대는 나를 부군이라 부르리라. 괜찮겠는가?”

“계급사회잖아요. 이반시아 가문의 주인은 라비엘이에요. 저는 어디까지나 이방인에 불과하고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국에서 제국의 법도에 따를 뿐. 저는 그런 거 하나도 신경 안……"

“괜찮다고 하니 다행이군.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러니 시험 삼아서 부군이라고 불러보아라.”

멈칫.

“왜? 부끄러운가?”

"......."

“부끄러워하는군. 부끄러워할 줄 알았다. 내가 먼저 시험을 보여주마.”

라비엘은 눈웃음을 지었다.

“부인.”

심장이.

"......."

나는 침을 삼켰다. 목구멍에서 타액이 끈적하게 맺혔다. 서서히 입을 열려고 했는데, 잘 안 되었다. 윗입술이 아랫입술과 몇 번이나 미끄러진 끝에야 간신히 소리를 내었다.

“……부, 군."

라비엘이 눈을 깜빡였다.

침묵이 가라앉았다.

내 연인님의 붉은 눈동자가 빤히 나를 바라보았다. 뭐랄까? 얼굴이 꼭 고슴도치의 발바닥을 봐버린 사람 같았다. 요컨대 무슨 얼굴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공자.”

“네."

“다시 한 번 불러보아라.”

"......, .......부군?"

“다시 한 번만.”

음.

“부군……?”

라비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었다. 어깨가 살짝 움츠러든 것이다.

‘이건 대체 무슨 반응이지?’

처음엔 라비엘이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하길래 몰랐는데, 곧 깨달았다. 설마. 어쩌면? 혹시나. 아니, 세상이 무너져도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지만.

“라비엘. 지금 부끄러워하고 있습니까?”

“으음….”

라비엘이 침음을 흘렸다.

“미치도록 사랑스럽군. 내 남자는……"

부끄러움은 순식간에 전염되었다. 미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서 입술이 말랐다. 그래도 내 머리는 쌩쌩하게 돌아갔다. 이때 [그러는 라비엘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귀엽습니다]라고 반격하면 최고다. 여태껏 라비엘한테 당한 만큼 데미지를 돌려줄 수 있다. 그런데,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아서.

대신 나는 타협하기로 했다.

“부군.”

일방적인 공격보다는 쌍방의 애교.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는 무승부로 퉁치기로. 그런 내 작전을 파악한 걸까. 라비엘도 입술을 열었다.

“……부인."

“부군.”

“부인"

“부군!”

“부인……"

“사랑해요.”

“사랑한다.”

“저의 부군......."

“나의 부인."

이하 무한재생.

정신을 차려보니 새벽이 아침이 되었습니다.

-씨발. 개같은 놈….

배후령이 나한테서 등을 돌린 채 중얼거렸다. 제딴에는 우리 둘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기 위한 자세였다.

-개같은 커플. 개또라이 같은 닭살들. 쌍또라이 커플. 씨이-바알, 내가, 어? 네놈이 집사놈한테 몰입해서 제정신 홀딱 잃어버렸을 때 얼마나 절절하게 네놈을 불러줬는데. 어? 정신 차리자마자 나한테 고맙다는 말도 없이 자기 연인이랑 콩닥거리기만 해? 어? 내가 아주 쌍, 만만해 보이지? 진짜로 확 성불해버려? 어?

[반짝이가 검제에게 위로의 말을 건넵니다.]

-아아. 이제 나한테는 너밖에 없구나! 반짝아!

귀신과 검이 수수께끼의 우정을 쌓았다.

‘당신들한테도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만 더 나의 사랑을 사랑하고 싶다.

5.

사랑 속에서 나는 이번 스테이지의 목적을 되새겼다.

[이 세계의 멸망을 막을 것.]

그리고 이 세계가 멸망하는 1차적인 원인은 내 부군의 아티팩트, 성검의 파편과 그 소원의 폭주에 있었다.

‘다시 말해 성검의 파편을 회수하면, 이 세계가 악마로 인해 멸망할 위험은 사라질 거야.’

하지만 그것만이 이 세계가 멸망에 이르는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다.

- ‘폐허를 추수하는 소’의 사도.

- ‘영원한 평야의 군마’의 사도.

- ‘불멸하는 행복 전도사’의 사도.

마지막 날, 찢어진 하늘의 틈새로 강림하던 이계(異界)의 존재들.

다른 성좌들이 보내었던 사도들의 침공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분명히 오겠지.’

지금 당장 스테이지 클리어 메시지가 뜨지 않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내 부군은 심장에 성검의 파편을 박아넣어 반쪽짜리 성좌로 각성했었어.’

말하길, 성좌란 세계의 대표자. 세계를 수호하는 방벽.

즉, 이 세계에는 반쪽쯤 되는 방어막이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 내 부군은 자신의 심장에 성검을 박아넣지 않았다. 따라서 성좌로서의 각성 역시 없었다.

다시 말해 온전한 의미 그대로, 지금 이 세계에는 성좌가 없었다.

“결혼식은 지금으로부터 한 달 뒤로 잡아두겠다.”

지금으로부터 한 달 뒤.

“제가 빙의했던 시점에서 딱 열흘 뒤의 일이군요.”

“그렇다. 일부러 맞추었지.”

본디 이 세계가 멸망을 맞이하던 날을 내 부군은 구태여 결혼식 일자로 잡은 것이다. 세계의 최후였던 시간을 부정하고 우리의 출발 지점으로 삼겠다는 뜻.

늠름하여라.

“그러느라 상당히 고생하게 됐다. 모든 일이 잘 풀려야 한 달 뒤 결혼식을 올리는 게 가능하겠지.”

“가령 어떤 일이 풀려야 하는데요?”

“황태자와 파혼하는 것이 첫 번째. 그리고 내가 아버지의 작위를 계승 받는 것이 두 번째다.”

라비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영애의 신분으로 그대와 결혼하는 것은 어렵다. 법적으로도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 하고, 평민을 혼약자로 들였다면서 괜히 사교계가 시끄러워진다. 귀찮지. 차라리 내가 공작이 되어 그대를 부인으로 맞이하는 게 낫다. 가주(家主)가 되면 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것들이 상당히 많아지니까.”

“어….”

나는 말문이 막혔다.

“라비엘. 저한테 아직 집사의 기억이 꽤 남아서 그런데요. 그… 후계자가 가주로 등극하기란 꽤 어렵지 않아요? 하물며 이반시아잖아요. 고결하고 위대한 이반시아 가문. 라비엘이 원한다고 해서 공작위를 계승 받긴……"

“그래. 만일 내가 라비엘 이반시아가 아니었다면 어려웠겠지.”

라비엘이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나는 라비엘 이반시아다.”

어쩌지? 너무 멋있다. 또 반했다. 계속 반하고 싶다.

“내 가문의 가신(家臣)들은 이미 내게 충성을 맹세했다. 군권도 내게 있다. 아버지가 끝내 권력을 놓치기 싫다면 황제 폐하께 달려가서 읍소하는 방법밖에 없다만.”

쿵.

라비엘은 서류더미를 테이블에 올렸다.

“나에겐 태자 전하의 불륜을 입증할 증거가 차고도 넘친다. 폐하께선 그분이 거느리신 특무대들만큼이나 유능하시지. 실권도 없는 내 아버지에게 의리를 지키느니 응당 황실의 위엄을 수호하실 분이다.”

“충성심이 넘치는 발언처럼 보이지만, 라비엘. 그거. 사실은 약점을 잡아서 황제 폐하를 협박하겠다는 뜻 아닙니까…?”

“부인.”

라비엘이 진지하게 나를 바라봤다. 부인, 이라는 울림에 나는 움찔했다. 우리 두 사람은 새로운 호칭에 익숙해지기 위해 둘만 있을 때도 일부러 [부인] [부군]이라 부르기도 했다.

“예, 부군.”

“그대는 이 세계가 아니라 탑에 직업을 가지고 있지. 좀처럼 내 세계에, 우리 제국에 돌아오지 않더라도 이해할 것이다. 내가 귀족위를 포기할 수 없음을 그대가 이해하듯이 말이다.”

이렇게 들으니까 내가 꼭 타지에서 근무하는 서방 같다….

“하지만 그대가 나와 함께해주어야 할 때가 있다. 연말 행사, 새해 행사 따위가 그것이다. 그리고 공작 부부의 행사는 언제나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그대는 이반시아의 달이 될 것이며, 황후를 제외하면 이 제국에서 제일 고귀한 부인으로 숭앙받을 것이다. 어느 정도는 정치에 노련해져야 한다.”

음. 그러니까.

“황제 폐하에 대한 충성심과 황실에 대한 협박은 공존할 수도 있군요. 부군이 공작가의 주인이 된다고 해서 제국이 손해를 입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부군처럼 유능한 귀족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행운입니다.”

“내 부인은 하나를 알려주면 둘을 아는군. 유능하고 똑똑하며 멋지다.”

“당연하죠. 라비엘의 남자입니다, 저.”

“사랑한다.”

“사랑해요.”

우리 두 사람은 잠시 키스하는 시간을 가졌다.

인생이 좀 더 풍족해졌다.

-시이바아알….

어째서인지 귀신은 점점 더 낯짝이 홀쭉해졌다.

-누구냐. 이 또라이한테 사랑을 가르친 놈은 누구였냐는 말이다. 누가 이놈의 환장과 염병에 사랑이란 이름을 붙였냐…. 이놈은 왜 사랑을 하는가? 이놈이 사랑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여전히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반짝이는 슬픈 마음으로 검제를 지목합니다.]

-내가 쳐죽일 새끼였어. 내가….

그리고 우리는 바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최고의 해피엔딩--- 아니.

최고의 결혼식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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