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 성전.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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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단심문관異端審問官.
이명 보유자. 탑이 세워진 초기부터 활동한 이른바 1세대 헌터. 온갖 나라에서, 나라가 세워지지 않은 지역에서, 나라가 망해버린 지역에서, 수많은 인간들이 밀어닥쳤을 때, 단호히 과격주의자들을 사냥하여 탑을 안정시킨 금발의 싸이코패스.
“저는 성좌를 이계의 신격으로 해석합니다!”
지금에 이르러선 지구상의 모든 종교를 ‘만신전’ 하에 두어 관리하고 있는 대종교전의 스페셜리스트가 활짝 웃었다.
“신격이란 간단히 말해서 법칙입니다! 가령 우리 세계인 지구에 존재하는 법칙이라면 물리법칙이 있겠군요! 이 물리법칙이란 건 어디든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윈도우 운영체제 같은 것이어서, 그렇게 특별할 것은 없습니다만! 그래서 우리 세계에도 딱히 특별한 것은 없지요!”
어.
“핵이랑 총이 있잖아요?”
“말했듯 물리법칙은 어디든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기반입니다! 그러니 그 둘은 기술만 충분히 발전한다면 어느 세계에서든 튀어나올수 있는 것들입니다!”
다만 마법이니 이적이니 하는 것들이 보편화된 곳이라면 순수하게 물리법칙에만 근거한 기술 발전이 어렵긴 할 거라고 이단심문관은 이야기했다. 그러나 어쨌든 핵이랑 총이 다른 세계에서 발명될 수 없다는 건 아니라고도.
‘하긴 핵전쟁으로 멸망한 묵시록도 있었지. 지금 우리네 23층이 된 우주 철기사 연대기도 SF였고….’
그런가-. 지구는 세계 중 최약체인 것인가-.
탑이 솟아나기 전까지는 마법도 스킬도 보편화 되어있지 않았다니 알만했지만, 그래도 우리 고향 푸른 별 지구가 약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요상했다. 이게 애향심? 아니, 애성심(愛星心)이라고 해야하나?
“하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총과 핵도 충분히 강력한 병기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 둘을 쏟아버리면 어지간한 성좌의 사도들은 싸그리 물리칠 수 있습니다!”
“과연.”
라비엘이 부채 끝으로 자신의 입가를 툭, 두드렸다.
“물리법칙은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기반인 만큼. 물리력 또한 기본적으로 통용된다는 것인가.”
“정확한 이해입니다! 물리적 실체를 갖지 않은 자, 어떤 식으로도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노릇. 그리고 물리적 실체를 가졌다면, 물리적인 공격이 통하는 것 또한 지당한 결과입니다! 그 물리력을 온전히 받아들이는가, 경감시켜 받아들이는가 하는 효율성의 문제가 남긴 합니다만!”
둥실둥실 떠다니던 검제가 자그마한 감탄사를 발했다.
-허. 저놈 똘똘하네.
‘검제 양반 보기에도 맞는 소리예요?’
-그치. 그러니까 살천성이 오러로 반짝이 뚝배기 깨고, 나도 칼만 수련했는데 어디 가서 안 밀린 거지. 그 뭐냐, 흑룡 길드 지배하는 애도 아귀를 빔으로 지지미 할 수 있었던 거고. 물리력이라는 건 굉장히 강력한 법칙이걸랑.
[반짝이가 시무룩하니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 물리법칙에 얼마나 천착(路着)할 수밖에 없는가, 또는 일탈할 수 있는가에 따라 해당 성좌의 격이 결정된다고 보면 돼.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때마침 이단심문관이 그것을 해설했다.
“방금 제가 말한 이 ‘물리력을 경감시켜 받아들인다’는 부분이 의외로 중요합니다! 이것은 물리법칙에 따르기는 하되 완벽하게 구속되진 않는다는 이야기니까요!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면---”
“---성좌들은 각자 자신들만의 법칙을 갖고 있어서, 그 사도들 또한 그런 자신들만의 법칙으로 물리법칙에 대항하기 때문이란 거로 군.”
“오오! 역시나 영민한 이해입니다! 과연 사왕의 부군이로군요!’’
“당연한 소리다.”
내 부군이 사랑스러운 말을 입에 담았다. 그것만으로도 라비엘이 이 자그마한 전술회의를 빛내고 있노라고 나는 자신할 수 있었다.
-좀비야, 집중하자? 지금 이 세계가 망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순간이거든?
[반짝이가 펄쩍 뛰어올라 용사님의 뒷목살을 후려칩니다.]
워메.
이런 사랑을 모르는 가엾은 양반들 같으니라고.
-아, 지랄 좀 하지 말라고 좀비야.
[반짝이가 용사님을 썩은 생선 같은 눈으로 쳐다봅니다.]
‘반짝이 너 눈 없잖아.’
[반짝이는 자신의 칼집 장식으로 붙어있는 보석을 보라고 말합니다.]
그 말에 따라서 반짝이의 칼집 장식을 보니, 뭔가 보석 색깔이 흐릿하게 변해 있었다.
음.
‘알았습니다, 자중할게요.’
-집중도 좀 하고.
‘옙.’
1. 성좌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법칙을 갖고 있다.
2. 사도들 또한 그 법칙을 따른다.
“가령 어떤 법칙을 갖고 있나요?”
“흠! 예를 들면, 그렇군요. 바비트라는 성좌가 있습니다.”
일명 ‘사랑의 신’이라고 이단심문관은 부연했다.
“이 성좌는 [세상의 모든 것을 로맨스로 해석]합니다. 바비트가 지배하는 세계에선 권력과 재력이 의미 없습니다! 얼마나 강한 로맨스력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인간의 강함이 정해집니다.”
“로맨스력이요? 그게 뭡니까?”
“음! 백문이 불여일견이군요.”
이단심문관은 양손으로 수인을 맺었다.
“신성 술식, 정신(情神).”
파아앗!
이단심문관의 손에서 빛이 퍼져나갔다. 하얀빛만이 아니라 불그스름한… 약간 핑크색? 아무튼 좀 짙은 향수 같은 안개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아핫, 지금 이곳에 일시적이지만 바비트 신의 성역(星域)을 강림시켰습니다! 아무 행동이나 취해보십시오, 사왕!”
"음...."
나는 뻘쭘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늦은 밤. 이단심문관과 나 그리고 라비엘, 세 사람은 공작가의 숙소에 있었다. 열흘 뒤에 다가올 침략전을 대비하여 작전회의를 펼치는 것이다.
“...핑크빛 안개가 낀 걸 빼면 별로 달라진 게 없는데요?”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그 때였다. 이단심문관이 툭, 내 발목을 걸어 넘어뜨렸다. "어?” 하고 비틀거리면서 내 몸이 기울어지는데, "음” 하고 하필이면 라비엘의 팔뚝을 잡아버렸다.
“어어?” 우리 두 사람은 방바닥에 넘어졌다.
“호오.”
라비엘이 빤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라비엘에게 덮쳐진 모양새가 되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공자여.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런 애정행각은 남사스럽다만.”
“어. 어….”
나는 당황스러웠다.
“아, 아니! 아니! 아닙니다, 라비엘! 저는 그냥 넘어지려 했는데…!”
“아하핫.”
이단심문관이 방실거렸다.
“로맨스물에서 자주 보이는 구도로군요!”
“이단심문관 씨, 이건……?”
“바비트 신의 성역에선 모든 행동이 로맨스로 이어집니다! 넘어져도 단순히 넘어지지 않고, 근처의 사람을 끌어드리지요. 음. 가령 사왕이 와이셔츠를 입고 있고 물을 마신다면, 95%의 확률로 물을 엎질러서 와이셔츠 속살이 비추게 됩니다! 그걸 보고 주변 사람들이 두근거리는 것은 필연이군요!”
맙소사. 뭐냐 그게. 코스믹 호러잖아?
“성역이란 요컨대 세계를 재해석하고 사람을 세뇌시킵니다. 저희가 아까 전까지 있던 대도서관도 마찬가집니다! 도서관장은 세계를 [이야기의 집합체]로 해석하고, 그곳에서 저희는 [이야기의 등장인물]로 강제됩니다.”
파앗.
이단심문관이 다시 수인을 맺자, 방바닥에 깔린 핑크빛 윤무가 사라졌다. 나는 얼굴을 붉히고 라비엘의 밑에서 벗어났다.
이단심문관이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그네들만의 법칙을 갖고 있는 자들을 우리가 쓸 수 있는 법칙들로 물리치는 것. 저는 이것을 성전(聖戰)이자 성전(星戰)이라 정의합니다!”
성전(聖戰)이자 성전(星戰).
“음. 그럼 열흘 뒤에 벌어질 성전에선 어떻게 대처하는 편이 좋습니까?”
“그건 정확히 어떤 성좌들을 상대하는지 알아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바에서 유추하실 수 있으시겠지만, 해당 성좌가 가진 법칙에 따라 대처법도 달라지니까요!”
“확실히. 전쟁에 앞서 적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은 더없이 중요한 일.”
부채끝을 입에 문 라비엘의 말에 이단심문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니 묻겠습니다만, 열흘 뒤에 쳐들어오는 건 정확히 어떤 성좌들의 사도입니까?”
음.
“어떤 성좌들인지 말씀드리면 아실 수 있나요?”
“진명만 알면 100% 가능합니다! 제 스킬, [만신전(萬神典)]을 통해 살펴볼 수 있으니까요!”
그 말에 나는 눈앞의 청년… 아니, 현재 금사매의 몸에 빙의해 있으니 여인… 하여간 이 인물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13층에서 아귀와 싸우던 무렵이었지.’
내가 한창 나 예언가 오케이를 날려댈 무렵, 이단심문관이 비록 스킬빨이지만 이계의 종교에 대해서도 빠삭하다고 흑룡주는 말했었다.
좋다.
“수식언… 그러니까 성좌들의 이명을 통해 진명을 유추할 수도 있나요?”
“유명한 존재라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야.
“[폐허를 추수하는 소], [영원한 평야의 군마], [불멸하는 행복 전도사]입니다."
"흠."
이단심문관은 턱을 짚었다.
“[폐허를 추수하는 소]는 무티아로군요. 주로 관장하는 분야는 [파괴]와 [재창조]입니다. 단순하지만 강력하지요.”
파괴와 재창조.
“대충 어떻게 싸우나요?”
“그렇네요. 물리력을 아주 강력하게, 자기 의지대로 행사할 수 있습니다! 이걸 통해 광범위한 지역을 찍어 눌러 박살 내거나, 거꾸로 특정 존재의 물리적 결합구조를 해체시켜버리거나, 아. 그렇게 해체 후 재결합을 통해 골렘을 만들어낼 수도 있겠군요. 굉장히 드뭅니다만, 시간에 그 힘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시간 역시 물리적인 것이니까요!”
역시 금사매 영애의 ‘2회차 여주’ 특성은 무티아의 힘을 이용해서였던가.
바깥 성좌의 사도가 이 세계에는 이미 와있던 셈이었다.
‘방구석 도서관장이 이 세계를 묵시록으로 택한 것도 그래서려나?’
방구석 도서관장 식으로 말하자면, 자신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깥 성죄가 이미 손을 댄 이야기이기에, 자신 역시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얻었다는 걸까?
아니면 라비엘이 말했듯 그냥 이 세계에 성좌가 없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후자보다는 전자가 방구석 도서관장의 성향에 가까워 보이기는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이단심문관은 계속하여 말했다.
“[영원한 평야의 군마]는 마호스의 이명입니다. 주로 관장하는 분야는 [결투]와 [전쟁]. 이 또한 쌈박하지만 강력한 힘이지요!”
결투와 전쟁 .
“결투 신청을 거부할 수 없게 되거나 그런 겁니까?”
“예! 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전투 열광을 광범위하게 흩뿌린다거나, 전술과 전략에 대한 지혜를 얻는다거나! 아. 거꾸로 ‘전쟁 자체를 금지’함으로써 강제적으로 평화 구역을 만들어내는 것도 가능합니다! 이 또한 굉장히 드문 경우입니다만!”
“전쟁을 관장하는 자가 평화 또한 관장한다… 뭔가 이상하게 들리네요.”
그런 내 중얼거림에 라비엘은 살짝 웃었다.
“이상할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평화란 [전쟁이 중지된 상태]를 이름함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전쟁을 강제할 수 있는 자는 당연히 평화도 강요할 수 있는 법이다.”
“역시나 정확한 이해입니다!”
이단심문관이 활짝 웃어 보였다.
“[불멸하는 행복 전도사]는 진명을 모르겠군요! 아직 그렇게 유명하지 않은 성좌인 모양입니다!”
정체불명이라.
‘유명하지 않다는 건 약하다는 뜻이니 그 부분은 이점이려나?’
고뇌에 잠겨 있자니 반짝이가 부르르 떨었다.
[반짝이는 ‘수호의 여신’에 대해서도 아는지 한 차례 여쭤봐달라고 요구합니다.]
‘반짝아…. 니가 회의에 집중하라매….’
[반짝이는 몹시 중요한 사안이라고 조언합니다! ]
‘너 왜 이래….’
[반짝이는 어디까지나 이단심문관이 갖고 있는 성좌들에 대한 정보가 정확한 것인지 판단하기 위함이라고, 사심은 일절 없노라고 선언합니다!]
음.
“그… 좀 다른 이야기인데. [수호의 여신]에 대해서는 혹시 아시나요?”
“오호.”
이단심문관은 빙긋 웃었다.
“[수호의 여신]은 휘야의 수식언입니다! 주로 관장하는 영역은 그 이름대로 [수호], 그리고 [불사(不死)]가 있겠군요! 상당히 강력한 신격입니다만, 현재는 모종의 일로 힘을 잃은 상태라고 제 스킬 만신전에는 나와 있습니다.”
[반짝이가 이 사람은 진짜이니 믿을 수 있다며 반짝거립니다!]
“공자여. 갑자기 그 칼은 왜 그러는가? 눈이 부신다만.”
“잠시만요. 좀 싸맬게요….”
[반짝이가 그만둬달라며 비명지릅니다.]
아무튼 그렇게 전직 성좌 반짝이에 의해 이단심문관의 정보가 정확하다는 것이 (내게만) 판명된 가운데, 라비엘이 부채 끝으로 자신의 턱을 짚었다.
“곤란하군… 각기 다른 타입의 적이 한 체씩. 총 3체의 적인가.”
“사도에 따라 해당 신격의 어느 권능을 얼마만큼 빌려올 수 있느냐도 나누어지니, 한 층 더 복잡해지겠습니다만!”
“그럼에도 대체적인 경향성은 파악할 수 있군. 정보 공유에 감사한다.”
“아핫, 이 세계를 구하는 것은 곧 우리들의 탑에도 보템이 되는 일입니다! 마땅히 돕는 것이 효율적이지요!”
“그러한가.”
“예! 그리고 제 또다른 스킬인 [신성 술식]은 진명을 아는 신격의 힘은 거의 빌릴 수 있습니다! 거기에 여러분의 강점을 더한다면 분명 길이 보일 겁니다!”
우리의 강점.
라비엘과 내가 서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입술을 열었다.
“사랑이네요.”
“사랑이군.”
우리보다 싸움을 잘하는 사람이야 널리고 널렸을 것이며, 우리보다 똑똑한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단 한 가지. 우리가 누구보다도 깊이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할 수 있다.
“……헛?”
이단심문관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이상합니다. 사왕. 두 분이서 알콩달콩하는 모습을 보니까 심장 부근이 아릿해지고 저릿해집니다.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느낌입니다만 대체 뭘까요?”
“심근경색입니다.”
“몰입률이 올랐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이건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요?”
“아니… 일단 그 몰입률 관련한 건 좀 주의해주시구요.”
성전 전에 금사매가 이단심문관을 먹어버리면 정말이지 죽도 밥도 안 된다.
내가 이미 말해둔 만큼 라비엘 또한 익히 아는 바였다. 그녀가 말했다.
“방금 말한 ‘사랑’에는 일반적인 의미 외에 다른 의미도 있다.”
“어떤 의미입니까?”
“미안하지만 그것은 공유할 수 없다. 일종의 비밀병기라고 해두지.”
“으으음, 전술을 짜는 데 감안할 수가 없습니다만….”
“괜찮다. 그보다 기초적인 전술과 전법에 대해 논하도록 하지. 나는 이 세계의 권력자로서 결혼식장에 어지간한 경호병력을 원하는 곳에 배치시킬 수 있다. 가령 황제 폐하로부터 특무대를 빌려온다거나….”
“오호. 그 특무대의 전투력은 대충 어떻게….”
그렇게 라비엘과 이단심문관은 마주앉은 채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된다.’
한 때 사랑의 라이벌이었던 이들이, 물론 그 중 한 명은 지금 내용물이 바뀌어 있다지만,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앞으로 함께 싸울 것을 결의하는 모습은 나로 하여금 왠지 모를 낙천감을 불러일으켰다.
‘이건 무조건 돼!’
그렇게 확신을 다지고 있던 내 모습에 배후령이 찬물을 끼얹었다.
-공자야. 정신 좀 차려라. 사도가 셋 쳐들어온다는 거 만만한 일 아니다.
‘대충 어느 정도 위기인데요?’
-12층 시점의 아귀가 대략 1.5마리쯤 쳐들어온다고 생각하면 돼.
이건 또 무슨 신박한 단위람.
‘아귀는 성좌였잖아요. 지금 쳐들어온다는 건 사도고. 아무렴 사도가 성좌보다 약하지 않겠어요?’
-최하급 성좌였지. 니네 탑 랭크로 따지면 대충 D랭크 성좌쯤 되려나?
‘12층 시점의 아귀가요?’
-12층 시점의 아귀가.
잘라 말한 배후령은 귀를 후비적거렸다.
-하긴 뭐, 너니까 걱정은 안 한다만. 아니, ‘너희’니까 걱정을 안 한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말하는 배후령은 라비엘을 흘끗하고 있었다.
나와 긴 시간을 보낸 만큼, 라비엘이 언급한 ‘비밀병기’에 대해 짐작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것은 나도 같았다. 따라서 나도 이 침략 자체를 이겨낼 수 없으리라 여기지는 않았다.
다만.
-그치만 좀비 넌 되도록 희생자 0명 무손실 플레이로 깨고 싶을 거 아냐?
‘네, 그렇죠.’
-그러자면 진짜 궁리를 많이 해야 할 거야. 전술적인 부분은 저 똘똘이랑 네 부군이 맡아준다 치고, 넌 좀 개인적인 싸움 실력 좀 길러 놓고 그래라.
그렇게 말한 배후령은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흠. 그러고 보면 네 랭크도 D였지? 영원히 그 랭크에 머무를 생각은 아니겠지?
당연히 아니다.
5.
그리고 쏜살같이 열흘이 흘러갔다.
“드디어 결혼식날이군요!”
제국에선 결혼식을 저녁에 올린다.
결혼이란 해와 달의 결합. 두 천체가 섞여드는 저녁 하늘이야말로 결혼에 어울린다던가. 노을이 선명하고 붉을수록 결혼날로는 좋게 치는데,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오늘 너무 멋지세요! 공작부인님!”
나는 시종들한테 둘러싸인 채 묘한 감정을 맛봤다.
무려 다섯 명에 이르는 시종들이 딱정벌레처럼 다닥다닥 붙어서 나를 코디해줬다. 쉼 없이 “어쩜 이렇게 고우실까!”
"공작 각하께서도 참 행운이시지!” 하고 주책을 부렸다. 내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저어. 다 고맙고 감사한데요.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것만 어떻게 좀….”
“아니요, 아닙니다!”
시종들이 단호히 대응해왔다.
“적어도 오늘만은 공작부인께서 이 나라에서 제일 멋진 신랑이 되셔야 합니다! 아무리 검소함과 겸손함이 미덕이라 해도 그러시면 안됩니다! 오늘은 문자 그대로 아름다움만이 미덕(美德)이니까요!”
아, 이거 예전에 한 번 느껴본 적 있다….
흑룡주랑 거대 길드장들이 내 화보를 찍겠다면서 난리를 피우던 때랑 똑같잖아….
물론 그 때랑 다른 점도 있긴 하다.
“결혼식 축하드립니다. 공작부인.”
멋지게 수염을 기른 노신사가 분장실에 들어와서 인사했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했다. 그런 내 얼굴을 보고 노신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부인의 양아버지 되는 사람입니다. 황실에선 작은 직책을 도맡아 살림을 꾸려가고 있지요. 이반시아의 새로운 공작 각하께 부인의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아….”
세상에. 누구신가 했더니 생전 처음 보는 아버지였다!
“처, 처음 뵙습니다. 음. 저기, 그게….”
“편하게 아버지라고 불러주십시오. 걱정하지 마시길. 공작부인께서 저를 마음속에서 부친으로 모시진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행여라도 제가 부인의 위세에 호가호위하여 공작가를 어지럽히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노신사는 아주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저는 이번 결혼식이 끝나면 자리에서 은퇴할 예정입니다. 부인의 부군께서 제게 많은 배려를 해주셨습니다. 허허. 노후를 걱정할 필요는 없어졌군요.”
"......."
한숨이 흘러나왔다. 라비엘은 이 날을 위해 도대체 얼마나 노력한 걸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 단어를 입에 올렸다.
“……아버지.”
“예. 이반시아의 달이 되실 분이여.”
“제가 사교계에 인연이 없고 정치에 문외한이라서 세태를 모릅니다. 그래서 여쭙고 싶은데, 이번 결혼에 대해서 제국민들이 뭐라고 그러던가요?”
“한마디로 말씀드리자면 파격의 연속이지요.”
노신사가 점잖게 말했다.
“이반시아 공작가의 결혼이라면 국혼(國婚)에 준합니다. 그만한 행사를 한 달 빠듯한 시간 안에 준비한 것부터가 본래는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하물며 황태자 전하와 파혼하신 것이며, 가문을 승계받으신 것이며, 어느 쪽이건……"
그 때 노신사가 입을 다물었다. 분장실 바깥이 퍽 소란스러워졌기 때문이다. 하객들이 웅성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쪽이건 은백합 공작이 황제 폐하를 설득하지 못했다면 불가능했겠지요.”
노신사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공작부인. 부인의 부군께선 참으로 유능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폐하께 충성한다는 것 자체가 제국에 둘도 없는 홍복이지요. 비록 오늘 하루를 위해 맺어진 부자(父子)의 인연에 불과합니다만…. 굳이 제가 한 말씀을 올리자면.”
바로 그 순간, 노신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동시에, 노인의 몸으로부터 거의 검성과 비견될 정도로 강렬한 기세가 뻗어나왔다.
“부인의 부군께서 저의 ‘다른 직위’ 또한 요구하신 것과 식장의 경호 배치를 보면, 오늘 결혼이 썩 순탄치는 않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황실의 시종장.
검, 황실 특무대장이 그렇게 말한 순간, 분장실 바깥의 소란은 어느덧 비명으로 바뀌어 있었다.
-좀비야. 준비해라.
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왔다.
배후령이 말한대로.
[‘폐허를 추수하는 소’의 사도가 현현합니다.]
[‘영원한 평야의 군마’의 사도가 현현합니다.]
[‘불멸하는 행복 전도사’의 사도가 현현합니다.]
두 개의 천체가 뒤섞여 붉어진 하늘.
그 노을이 허물어지면서, 기다리던 적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