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 히어로.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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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王.
"어….”
나는 입꼬리를 들었다. 사람이 예상치 못한 사태를 마주치면 본능적으로 미소를 짓는다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흑룡주, 이단심문관, 독사, 성기사, 백작. 그들과 차례대로 눈이 마주쳤다.
"…농담이시죠?”
"물론.”
물론, 이라고 흑룡주가 말했다. 나는 그 뒤로 ‘물론 농담이야’ 같은 말이 이어지길 원했다. 하지만 흑룡주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내용은 내 예상과 완전히 달랐다.
"물론 우리가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군주제를 택할 리는 없어. 사왕. 당신은 모르겠지만 지금 탑의 시스템은 우리가 정말로 심혈을 기울여서… 실패와 좌절을 거듭하고, 거듭해서 만들었거든.”
"저희는 저희 나름대로 무정부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핫. 탑에서 활동하는 ‘길드’란 사실 조합의 일종으로써……"
"그만. 그런 이야기는 사왕에게 도움이 안 된다.”
성기사가 이야기를 끊었다.
“왕이란 단순한 상징이다. 그렇지만 상징은 현실적인 힘을 갖지. 김공자. 너는 이미 현실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너의 이름을 보고, 너의 인격을 믿고, 하루에만 10만에 이르는 민중이 입탑한다.”
"......."
“이건 지금까지 흑룡주도 해내지 못했다. 네가 처음이다. 탑의 헌터가 이만한 힘을 가지게 된 건 전례가 없어!”
나는 그제야 성기사가 평소보다 흥분했다는 걸 알았다.
성기사는 언제나 침착하고 차분했다. 그녀가 언성을 높인 것은, 이제는 모두에게 망각되어버린 [12층의 사건]. 모두가 의심암귀에 빠져 서로를 없애려 들었던 그때뿐.
그런 성기사가 흥분하고 있었다.
성기사만이 아니었다.
이단심문관을 제외하고 거대 길드장 전원, 기묘한 열기에 감겼다. 열기가 자칫 열광으로 타오르지 않도록, 길드장들은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선 그들의 흥분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예전엔 이만한 인구 유입을 감당할 수 없었어. 식량이 부족한걸. 그렇지만 지금의 [우리]는 충분한 땅과 무역로를 확보했으니까… 어렵겠지만, 먹여 살릴 수 있어.”
“무엇보다 우리는 [경험]이 있네.”
백작이 말했다.
“자랑은 아니네만 이곳에 있는 길드장 모두가 혼란을 겪어봤지. 성기사는 망국의 유랑민이라네. 흑룡주는 내전으로 개판이 되어버린 나라의 고아고, 이단심문관과 독사는 어린 시절부터 마피아와 폭력배의 손에서 굴렀지. 본인은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마을에서 태어났네. 이곳에 모인 사람들 전원이 ‘난세의 전문가’들일세.”
“맞아.”
흑룡주가 뇌까렸다.
“이 세상에서 오직 우리만이 이런 난국에 대처할 수 있어. 어느 나라도, 바깥세상의 어느 국가도 불가능해. 하지만 [우리]는 가능해! 우리는 이것보다 더한 혼란도 극복한 적이 있어!”
"......."
나는 침을 삼켰다. 길드장들의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오래된 세상을 버리고 신세계로 도망쳐온 그들. 그리고 신세계의 정점에 오른 길드장들은, 아직도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자는 열망을 버리지 않았다.
“사왕. 우리는 할 수 있어.”
꿈.
“바깥세상의 어느 나라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자. 조금 더 좋은 곳을. 바깥에서 내쫓기어 도망쳐온 사람들에게, 조금은 숨을 놓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주자!”
이상.
“우리는 사회가 망한다는 게 무엇인지 알아. 그러니 망하지 않을 수 있어.”
남미의 어느 나라에서 도망쳐온 성기사.
“우리는 사람들이 쪼개어져 전쟁한다는 게 무엇인지 알아. 그러니 내전을 피할 수 있어.”
전화에 휩싸인 흑해(黑海)에서 살아남은 흑룡주.
“우리는 폭력이 무엇인지 알아. 그러니 폭력을 이용할 수 있어.”
동유럽의 마피아 조직에서 길러진 이단심문관.
중원의 삼합회에서 자라난 독사.
“우리는 가난이 무엇인지 알고, 그러니 가난을 이길 수 있어.”
인도의 어느 쓰레기 마을에서 태어난 백작.
“보여주자. 사왕.”
흑룡주가 말했다.
“조금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사람들한테 보여주자!”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길드장들을 바꾸어 놓은 장본인은 다름 아니라 나였다.
이전 세계에선 이런 일이 없었다. 염제가 랭킹 1위를 독식하던 세상에서… 탑은 여전히 탑에 불과했다.
희망을 잃어버린 자들의 도피처.
범죄자와 사형수의 낙원.
지금처럼 흑룡주가 눈을 반짝이며 [새로운 세상]을 말하는 모습을, 나는 이전 세계에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어느 잡지의 사진에서도. 어느 인터뷰의 영상에서도.
흑룡주는 언제나 차갑게 식어버린 눈동자를 간직한 인간이었다.
나로 인하여 그녀는 바뀐 것이다.
"......."
가슴이 두근거렸다.
“제가,”
스승님이 꿈꾸던 천하.
“제가 해야 할 일을 말해주세요.”
나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래. 응. 그렇게 말해줄 거라고 생각했단다.”
흑룡주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녀의 시선엔 나에 대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당신은 언제나 당신인 대로 있어주면 돼. 그게 제일 중요한 일이야. 정치에 익숙해지는 일이야 우리가 차근차근 가르쳐줄 수 있으니까.”
“아하핫. 좀 삐딱하게 보면 실권은 저희가 독점할 테니, 사왕은 계속 얼굴 마담의 역할만 하라는 얘기가 될 수 있습니다만!”
“……뭐. 부정하진 않을게. 하지만 나도 이 자리, 다른 사람한테 넘길 수만 있으면 얼른 넘겨버리고 싶거든? 지금 하루에 강력범죄가 몇 건씩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줄까?”
“앗, 종교의 탈을 쓴 범죄도 굉장히 잦습니다! 최근 열흘 동안 극단주의자들의 테러가 21건이나 사전 발각되었습니다!”
“이런 얘기는 그만하자. 괜히 우리 신세가 처량해질 뿐 아니겠니….”
음.
내가 나로 있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라.
‘그렇다면.’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관장님! 도서관장! 어디 있습니까!”
내 목소리가 거대한 도서관에 울려 퍼졌다. 그러자 집채만 한 책장의 뒤편으로, 빼꼼, 작은 그림자가 고개를 들었다. 오랜만에 보는 성좌 [ 방구석 도서관장]이었다.
“아니. 거기서 뭐 하세요? 이리로 좀 와봐요.”
“하, 하지만… 하지만 말이오오….”
도서관장은 입술이 우르르 떨렸다.
“본좌 같은 미물이 감히 사왕의 존안을 배알해도 되겠소? 사왕의 눈이 더러워질 것이오. 본좌는 부디 없는 존재로, 도서관에 떠다니는 먼지 따위로 취급해주시오….”
“아, 또 지랄하지 마시고요. 얼른 오기나 해요.”
"으. 윽. 으읏...."
도서관장은 힘없이 둥실둥실 날아왔다. 긴 옷소매가 나풀거렸다. 꼭 풀 죽은 말티즈 강아지의 귀처럼 생겼군.
“말씀하시구려….”
“다음 스테이지로 공략할 책을 꺼내주시죠.”
“어떤 묵시록을 바라시오?”
“동화요.”
"......."
도서관장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저희한테 주어진 묵시록 중에서 동화책은 한 권밖에 없죠. 그걸 주십시오.”
“……흐음. 과연. 기이한 인연이구려.”
도서관장의 표정이 바뀌었다. 언제 날 보고 황송하여 떨었냐는 듯, 눈꼬리가 히죽 반개한 것이다.
“좋소. 그대가 말한 묵시록은 이것이라오.”
도서관장의 주위를 맴돌던 장서들 중 한 권이 휙, 날아들었다. 도서관장이 표지를 펼치자 묵시록에 대한 정보가 떠올랐다.
+
[나와 우리들의 희생양]
장르: 동화
난이도: A급
제한 인원: 2명 이상
※현재 연재가 중단되어 있습니다.
소개: 이 세계의 인류는 유토피아를 창조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유토피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동력이 필요했어요. 바로 어떤 죄도 짓지 않은 무고한 아이가 고통을 받았을 때 내지르는 비명이었거든요.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1천 7백만명의 완벽한 행복을 위해서라면 1명의 무고한 아이가 참아주어야겠지요? 세심하게 발전된 고문기술과 연명치료 덕분에, 아이 한 명당 약 5년치의 비명을 뽑아낼 수 있었습니다. 효율적이네요!
연중 사유: 유토피아 창조로부터 11만 8천년이 흘렀습니다. 결국 무구한 아이들은 모조리 소모되고 말았습니다. 동력을 잃어버린 유토피아는 정지하고 말았습니다.
+
‘그래.’
이 묵시록이다.
나는 이걸 처음 봤을 때부터 줄곧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여러분. 저는 다음 스테이지로 이 묵시록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응?"
길드장들이 돌아봤다.
그중에서 흑룡주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동화책? 미안하지만 사왕, 그 동화 세계에는 별다른 자원도 영토도 없었을걸. 난이도도 [A급]으로 측정되어 있고…. 굳이 공략할 필요가 있을까?”
“예. 있어요.”
나는 흑룡주의 눈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저희는 탑에 얼마나 유용할 것인가를 기준으로 묵시록을 골라왔어요. [천마실록]에 보관된 무공 비급들은 탑의 전력을 강화시킬 거고. SF 세계와의 교류는 저희 과학력을 크게 발전시키겠죠.”
여태껏 우리가 공략한 묵시록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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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층: 만상의 대도서관
22층: 천마실록 (장르: 무협, 퓨전)
23층: 우주 철기사 연대기 (장르: SF)
24층: 여명산장 일기 (장르: 추리, 역사)
25층: 소르므윈 학원 이야기 (장르: 로맨스)
26층: 축제도시 아포칼립스 (장르: 스포츠)
27층: 베이커리가(街) 서사시 (장르: 요리, 경영)
+
나는 [소르므윈 학원 이야기]의 임무를 완수하고 나서 보름을 머물렀다. 보름의 시간 동안 다른 헌터들이 26층과 27층을 공략했다. 이명을 가진 헌터들 전원이 힘을 모아서 공략에 매진하고 있으므로.
이제 남은 것은 28층, 29층, 30층.
‘하지만.’
내게는 나 나름대로 짜둔 계획이 있다. 만일 내가 바라는 대로 일이 굴러가면… 이번 28층이 사실상 마지막 묵시록이나 다름없다.
그 계획을 마음에 되새기며 말문을 열었다.
“꼭 자원이나 기술만 저희한테 유용한 건 아닙니다. 이단심문관 씨. 당신이 말했잖아요. 하루에만 십만 명 가까이 탑의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고요.”
“음.”
“지금 저희한테 필요한 것은 구심점이에요. 단합입니다.”
이단심문관이 눈을 깜빡였다.
“동의합니다만, 바로 그러기에 사왕을 옹립하자는 것 아닙니까? 사왕이 바로 탑의 구심점입니다. 저희는 빠른 시일 안에 사왕한테 적절한 지위를 마련해드릴 것입니다! [길드연합장]이나 [평의회장]처럼 멋진 자리를 만들어서 옹립하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저었다.
길드연합의 수장.
그 같은 직함에 혹하는 사람도 있겠지. 겉으로 보기엔 탑에서 제일 높은 권좌에 오른 것처럼 보일 테니.
“그런 눈속임으론 안 돼요.”
“어라. 눈속임이라 말씀하시면?”
“저뿐만이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가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야 해요. 지금 탑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사람은 제가 아니에요. 여러분이죠. 여러분까지 지지를 받아야 비로소 탑은 하나로 뭉치게 되는 거예요.”
"......."
주위가 조용해졌다.
이 단심문관이 미소를 지었다.
“일리가 있군요. 그렇지만 알고 계십니까? 사왕. 저희에겐 원죄가 있습니다. 탑의 혼란을 끝내겠다는 명목으로 굉장한 일들을 저질렀지요. 저지르고 있고요. 안타깝지만 저희에겐 도덕적 정당성이 전혀 없습니다!”
“……이단심문관 말이 맞아.”
흑룡주가 중얼거렸다.
“우리는 깃발이 되기엔 너무 많은 일을 범했단다.”
“지금부터 잘 하시면 돼요. 아니, 제발 잘 해주세요.”
"......."
“저희는 한 팀이에요. 저는 종교적인 문제를 이단심문관처럼 화끈하게 해결할 수가 없어요. 폭력배 문제를 독사 양반처럼 대응할 수 도 없고. 정치, 경제, 치안, 전부 여러분이 하는 것만큼 못할 겁니다. 겸손을 떠는 게 아니라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절대로 여러분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절 믿으셔도 돼요.”
이 유능한 인재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일에는, 자신 있다.
“여러분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제가 중재해드릴게요. 대화가 필요하면 대화할 장소를 만들겠습니다. 절 믿으시고. 한 팀이 되어주세요."
"......."
길드장들이 침묵했다.
나는 그들을 향해 [나와 우리들의 희생양], 한 권의 동화책을 들어 올렸다.
“말씀하신 대로 이 묵시록에는 대단한 자원이 없어요. 비옥한 땅도 없고요. 하지만 [누가 봐도 용납할 수 없는 희생]이 있어요. 여러분. 이런 희생이 용납되어선 안 돼요. 이 세계를 공략함으로써,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세상 사람들한테 보여줍시다.”
그렇다.
이것은 출사표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 탑을 경영할 것인지에 대한 출사표.
우리는 희생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마주할 것이다. 설령 해결할 수 없는 난관이 도사리더라도, 정면으로 돌파할 것이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임을 천하에 보여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신뢰를 얻을 수 있어요. 탑의 거주민들한테 우리를 믿어달라고 부탁할 수 있어요.”
“과연. 정권에 대한 신뢰입니까.”
“예."
나는 길드장들을 한 사람씩 바라보았다.
“마침 이 묵시록은 공략 인원이 2명 이상으로 되어 있지요. 흑룡주. 이단심문관. 백작. 독사. 성기사….”
이 탑에서 제일 화려한 올스타 맴버.
그리고 나의 동료들.
“저와 함께 싸워주십시오.”
이번 묵시록에는 우리 전원이 참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