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 유토피아.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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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좌가 침묵했다. 온몸이 피 칠갑으로 물든 [불멸하는 행복 전도사]는, 가만히 입술을 사려물었다. 그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수면의 잔물결이 아니라 깊은 해류의 요동인 양, 성좌는 길게 침묵했다.
“……사왕.”
성좌가 침묵하니 덩달아 사도들의 군세도 멈추었다. 초장부터 쉼 없이 몰아친 전쟁터에 잠시간 여유가 생겼다. 그 사이, 성기사가 내게 다가왔다.
“악인들과 죄인들을 전부 집행하겠다니. 무슨 뜻인가?”
성기사의 뒤편에서 다른 동료들도 나를 바라보았다. 의아함. 아연함. 혹은, 충격. 저마다 다른 감정을 담은 채 눈동자들이 이곳으로 향했다.
“말 그대로입니다.”
나는 시선을 담담히 받아냈다.
“여러분이 탑을 경영하면서 여러 사람을 숙청했다는 거, 압니다. 지금도 암암리에 벌어지고 있겠지요."
"......."
“저는 여러분께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이 틀렸으니 고치라고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여러분보다 탑을 더 잘 경영할 자신도 없고 실력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앞으로 꼭 누구를 죽여 없애야겠다면 차라리 그냥 저한테 데려오십시오.”
“아하?”
이단심문관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한 번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두 번의 까딱거림이 끝나자 이단심문관은 내 말을 이해했다는 듯 방긋 웃었다.
“그렇군요! 아니, 왜 이걸 지금까지 떠올리지 못했을까요! 정말로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사왕!”
흑룡주가 눈썹을 찡그렸다.
“무슨 소리야?”
“생각해보십시오. 사왕의 능력은 단순히 대상자를 소환시키는 것만이 아닙니다. 생전의 기억을 그대로 안겨줄 수 있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사왕을 [움직이는 감옥]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아하핫, 웃는 소리가 적막해진 평야에 흘렀다.
“식량이 들지 않습니다! 자원이 소모되지 않습니다! 만일 연쇄살인마를 사왕이 거두었다고 해보십시오. 그저 사왕이 [다시는 살인을 저지르지 마라]고 명령하는 것만으로도 살인마는 영원히 범죄를 금지당합니다!”
"......."
흑룡주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백작과 성기사도 마찬가지. 그들은 당황하면서도, 이단심문관이 제시한 이점들을 빠르게 계산했다.
“사왕의 스킬을 감옥으로……"
“네! 아하핫. 범죄자들이 상당히 두려워하겠군요. 그리고 운율이 맞아서 아름답지 않습니까? 사왕(死王). 말 그대로 죽어야 할 자들을 수감하고 수속하는 왕이니, 이보다 적절한 이명이 없겠습니다!”
“상련주로서 의견을 제시하자면.”
백작이 부채를 꺼내 아랫입술을 톡톡 두들겼다.
“나쁘지 않구먼. 자네들도 알겠지만 탑은 바깥세상보다 범죄율이 상당히 높아. 감옥은 만성적으로 수용 인원 과다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 많은 감옥들을 유지하는 비용도 만만찮네.”
“옳은 말씀이군요. 만신전주로서도 당연히 찬성입니다!”
이단심문관은 싱긋 웃었다. 즉석에서 최고 길드장 회의가 열린 것이다.
“감옥의 목적은 [범죄자 격리]와 [재범 방지]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뛰어난 교정 프로그램을 동원해도 [재범 방지]가 100% 이루어지긴 힘듭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아름다운만큼 어려운 것이니까요. 그러나 사왕은 완전히 재범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
성기사는 머뭇거렸다.
“나는… 모르겠다. 효율적이라는 건 인정하지. 그래도 석연치 않아. 사왕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지게 하는 것 아닌가?”
“사왕은 이미 마교와 정파의 무림인 이천 명을 수용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모르는 사람들도 담고 있겠지요! 이미 이천 명을 담고 있다면, 그 이상의 숫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니야. 기권이다.”
한편, 흑룡주는 물끄러미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검은색 눈동자엔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정말로 괜찮겠니?”
나는 그녀가 후회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흑룡주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들의 세계에 나를 끌어들였다는 책임감.
“괜찮아요.”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고마웠다. 내가 원해서 뛰어든 일인데도 책임감을 느끼다니. 흑룡주는 다정하고 고귀한 사람이다. 언젠가 그녀의 본명을 듣게 될 날도 오겠지.
나는 고개를 돌려 성좌를 올려보았다.
"어쩔 거냐?”
-.......
“우리와 계속 싸우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다. 하지만 결과는 정해져 있어. 네가 자랑하는 유토피아는 내가 거둬들인다.”
한참을 침묵한 성좌가 말문을 열었다.
-……나는 [수호의 여신]의 파편일 뿐만 아니라, 백만의 사도를 거느린 [불멸하는 행복 전도사]다. 나를 거두게 되면 사도들도 모조리 너에게 수속된다. 묻노니, 네가 사도들을 사병(私兵)으로 써서 패악질을 부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겠느냐.
“안 써.”
나는 딱 잘라서 단언했다.
“네가 라비엘의 세계를 침략했을 때도 난 오직 마교의 교인들만을 소환했다. 나는 정파의 강호인들도 죽였기에 그들 역시 소환할 수 있었지만, 안 했어. 도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 마교 소교주의 명령에 따라선 안 돼.”
-.......
“백만이든 천만이든 네 사도들은 여태껏 그래온 것처럼 이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아라.”
성좌가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
무력으로 압도당하고, 논리로 제압당했을 때, 비로소 사람은 마지막 심중에 남은 한마디를 흘린다.
어린아이의 모습을 뒤집어쓴 성좌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아, 레판타 아이김 님…….
성좌의 몸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저는 다시 한번 당신을 만나기 위해…….
하늘에서 핏물이 내렸다. 피가 땅바닥에 떨어져서, 고였고, 서서히 칼의 형태로 굳어졌다. 칼에는 입이 없어서 성좌는 미처 유언을 다 남기지 못했다.
[희생검이 당신의 처분을 기다리며 말합니다.]
다만 칼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탑이 옮겨줄 뿐.
[제 이름은 희생.]
[누군가의 고통을 다른 사람들의 행복으로 치환할 수 있습니다.]
[고통받는 자가 숭고하고 순수할수록, 행복은 가중됩니다.]
나는 땅에 박힌 칼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나의 성검을 들어서, 피로 얼룩진 칼을 내리쳤다.
[수호의 여신이 자신의 조각을 흡수합니다.]
칼이 부서졌다.
[수호의 여신의 존재가 한층 더 뚜렷해집니다.]
그것과 동시에 우리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던 사도들도 녹아내렸다. 지평선까지 뒤덮고 있던 십만, 백만의 어린아이들이 허물어졌다. 허물어지는 동안에도 아이들은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싸아아아-
사도들이 무너지면서 붉은색 물을 흘려, 지평선은 순식간에 새빨간 수평선으로 변했다.
[스테이지 클리어.]
[금일, 28층 스테이지가 클리어되었습니다.]
얕은 피 바다.
종아리까지 차오른 핏물을 흑룡주는 멍하게 내려봤다.
“……정말, 스테이지를 공략하는 데 필요한 건 정보구나. 약점만 알고 있으면 얼마든지 쉽게 깰 수 있어. 적군 한복판에 떨어졌을 때는 멀리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나 빨리….”
“어잉?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스켈레톤들과 더불어 사도들을 상대하고 있던 독사가 어리둥절해했다. 우리 중에서 유일하게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기 할 일만 한 양반이었다.
“왜 갑자기 이놈들은 빨간 물감이 되고 난리인데? 어?”
성기사가 한숨을 쉬었다.
“변하지 않는 너의 모습이 참 보기 좋다. 독사….”
“…갑자기 뭐야. 너, 혹시 나한테 반했냐?”
“아하핫. 그럼 재밌겠지만 아마도 아닐 겁니다. 자경단 부단장은 이미 옛날부터 사귀고 있는 사람이 있거든요!”
독사가 외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 진짜? 누군데?”
“거기까지 말씀드리긴 어렵군요. 직접 알아내십시오!”
아무도 독사한테 알려주지 않았다. 분위기를 보니 공공연한 비밀처럼 다들 아는 모양이다. 나도 궁금해져서 [인물창]을 띄워 심리 상태를 읽어볼까 혹했지만, 너무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일이라 참았다.
“야아, 야.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속도였구먼!”
백작이 다가와서 내 등을 쳤다.
“최소한 하루 정도는 밑 빠진 독에 돈 부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만! 역시 사왕일세. 자네가 신인이던 시절부터 제일 먼저 눈여겨본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백작은 무사히 기습 작전을 돌파했다는 거에 기뻐하고 있었다. 기쁜 마음에 잿물 뿌리긴 싫지만, 나는 이대로 쉬어갈 생각이 없었다. 애초부터 이 스테이지는 발판에 불과했다.
“죄송합니다. 백작님. 아직 공략은 안 끝났어요.”
“흠? 무슨 말인가. 28층이 공략됐다고 알림말이 뜨지 않았나.”
“예. 28층은 끝났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전 오늘 안에 30층까지 전부 깨버릴 작정입니다.”
그 말에는 멍하게 피바다를 내려보던 흑룡주도, 도대체 누구랑 사귀는 거냐며 성기사한테 끈덕지게 들러붙은 독사도, 앞으로의 일을 궁리하는 것처럼 보인 이단심문관도, 모두가 일제히 나를 돌아보았다.
“오늘? 하루 안에?”
흑룡주가 놀랐다. 그게 진짜로 가능하겠냐고 의심하는 어조가 아니었다. 흑룡주는 더 이상 내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단지 내 상태를 걱정할 뿐이었다.
“사왕. 아니, 김공자. 당신 요즘 너무 무리하고 있어. [소르므윈 학원 이야기]에 돌입하고 나서 하루도 쉰 적 없잖니!”
‘아.’
하긴 흑룡주가 보기엔 그러겠다.
나야 라비엘과 신혼여행을 빙자하여 온갖 깽판이란 깽판은 다 치고 다녔지만, 그건 오직 라비엘과 나, 두 사람만이 비밀스럽게 공유한 장난이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나는 정말로 쉴 새 없이 달려온 거구나.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쉬는 기간을 가지렴. 인간은 스트레스에 마모되는 짐승이야. 일하는 시간과 쉬는 시간을 머리 써서 잘 짜놓지 않으면, 언젠가 확 주저앉아. 정말이란다. 당신이 아직 젊어서 모를 수 있는데….”
나는 미소를 지었다.
진심으로 다른 이를 걱정해주는 모습이란 건, 보면 참 예뻤다.
“맞아요. 제가 좀 무리하고 있죠.”
“그치? 그러니까 공략은 당분간 쉬고….”
“그러니까 딱 오늘 하루 안에 끝내버리고 쉴게요.”
흑룡주가 이마를 짚었다.
“내 말을 전혀 안 듣고 있잖아! 좀 쉬어! 제발!”
“흑룡주. 하루에만 십만 단위로 탑에 인구가 늘고 있어요. 입탑한 사람들 가운데 100명 중 99명이 착한 사람이라 쳐도, 1명은 범죄자겠지요. 그럼 하루에만 범죄자가 1000명씩 늘어나는 거예요.”
"......."
“범죄자 10명이 모이면 조직폭력배예요. 100명이 모이면 마피아죠. 1000명이 모이면 군벌입니다. 지금도 하루에 군벌이 하나씩 생겨나는 꼴인데, 저희가 언제까지 묵시록 공략에만 매달릴 순 없어요.”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하루라도 빨리 끝내버리고 탑 경영에 복귀해야 합니다. 그게 저희를 위한 거고, 거주민들을 위한 일이고, 새로운 입주자들을 위하는 길이에요.”
“그런 식으로….”
흑룡주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식으로 말해버리면, 내가 뭐라고 말할 수 있겠니….”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씩 웃으면서 흑룡주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쉴 때 확실히 쉴 거니까요. 아마 저만큼 잘 쉬는 사람도 없을걸요? 제가 라비엘이랑 쉬는 모습을 만약에 보게 되면, 흑룡주, 깜짝 놀라게 될 겁니다.”
“신혼부부의 깨알 쏟아지는 모습 따윈 보고 싶지 않거든…?”
“정 마음에 걸리시면, 저 반지 준비하는 거나 나중에 도와주세요. 라비엘한테 반지를 선물해야 하는데 제가 이런 분야에 영 잼병이라서요.”
“하아아.”
흑룡주가 이마를 감싼 채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래…. 세상에서 제일 예쁜 반지를 선물해야겠지. 정말. 어쩌다 내가 이런 아이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코디하게 된 건지….”
“언제나 항상 고마워요.”
“됐어. 고마운 거로 따지면… 아니, 이런 말은 하지 말자. 사람들 보는 앞에서 부끄럽잖니. 소르므윈에서 연애하는 거 봤을 때부터 깨달았지만, 사왕 당신은 진짜 창피함을 모르는구나…?”
투덜거리면서도 흑룡주는 내 제안에 따라주었다.
그녀를 비롯한 탑의 수뇌부들도 사실은 알고 있다. 이제 슬슬 경영 일선으로 복귀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그들은 탑을 공략하는 헌터일 뿐만 아니라, 탑을 다스리는 경영자였다.
이제는 도서관에서 보내는 나날을 끝내야 했다.
“전송.”
파앗!
우리는 각자 시차를 두고 도서관으로 귀환했다.
도서관에는 헌터들이 모여 있었다. 우리 여섯 명이 백만의 사도를 손쉽게 압도한 장면을, 헌터들은 똑똑히 생중계로 목격했다. 그 탓일까? 헌터들은 멀리 떨어져서 얌전히 우리를 바라보기만 했다.
압도적인 격차.
최상위 랭커들의 권위는 이로써 단단한 반석에 놓인 것이다.
‘오케이. 좋아.’
이것이 내가 원하는 분위기였다. 권력이 아니라 순전히 실력으로 우리의 랭킹을 증명하는 것. 그것도 [하나된 팀]으로서 증명되는 것. 적어도 당분간은 섣불리 분란을 꾀하지 못하리라.
“흐음.”
그런 우리를 지켜보는 인물이 한 명 더 있었다.
대도서관의 주인, 도서관장은 턱을 괸 채 빤히 우리를 쳐다봤다.
“어서 오시구려. 축하드리오. 아무렴 조금 더 공략에 애를 쓸 줄 알았건만, 그대들이 모여서 내는 시너지가 본좌의 예측을 가볍게 뛰어넘었구료. 설마 하니, 성좌가 멀쩡히 군림하고 있는 세계를 이리도 빠르게 갈무리할 줄은 몰랐소.”
축하드린다는 말과 달리 도서관장의 낯은 무덤덤했다.
‘그럴 수밖에 없지.’
[방구석 도서관장]은 이야기 성애자다.
인물의 고난, 역경, 예기치 못한 난관, 예측하지 못한 해결을 사랑한다. 압도적인 승리나 압도적인 패배는 도서관장의 입맛에 안 맞는다.
그런 도서관장을 꾀어낼 방법을 나는 알고 있다.
‘인물창.’
눈앞에 문자들이 떠올랐다.
+
이름: 방구석 도서관장
호감도: 98
선호 장르: [퓨전], [로맨스], [추리], [모험], [공포], [역사], [전쟁], [스포츠], [SF], [신화], [동화] …
불호 장르: 없음
선호 캐릭터: [등장인물], [살천성], [사왕]
불호 캐릭터: 없음
선호 플롯: [이야기]
불호 플롯: [연재중단]
심리 상태: ‘하긴, 불멸하는 행복 전도사는 마천신공(魔天神功)과 너무 상성이 나빴소. 운이 안 좋았구려. 쯧쯧. 어리석은 것. 불리함을 예상하고 차라리 다른 성좌들한테 원군을 청했다면 조금은 싸워볼 만했을 터이거늘.’
+
나는 턱을 끄덕였다.
‘떴다.’
도서관장이 선호하는 캐릭터에 나의 이름이 추가되었다.
원래부터 있던 [살천성]에 [사왕]이 더해진 것이다.
도서관장이 스스로 밝혔듯 [살천성]은 그가 최고로 애정하는 캐릭터. 그런 인물과 나란히 내 이름이 등록되었다는 것은, 나 역시 [살천성]과 버금가는 위치로 등극했다는 걸 뜻했다.
“도서관장.”
“음. 다음 묵시록으로는 무엇을 선택하시겠소?”
도서관장이 옷소매를 나풀거리며 미소 지었다.
“원한다면 본좌가 직접 추천해드릴 수도 있소. 동화가 너무 빨리 깨졌으니 이번엔 신화는 어떻소? 장절하고 위험하지만 그만큼 말도 안 되는 보상들이 기다린다오. 아니면….”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는 레판타 아이김이지요.”
내가 도서관장의 말을 끊었다.
“나는 그에 비하면 어느 정도입니까.”
“으흠? 그야 물론… 서로 순위를 매기기 아쉬울 정도요. 살천성과 그대는 정말로 정반대되는 성향이라오!”
도서관장이 턱을 쓰다듬었다.
“뭐라고 할지, 음. 살천성은 삼라만상의 불운과 불행을 모조리 짊어진 것 같은 남자라면… 사왕. 그대는 좀 초코 아이스크림 같은 남자지! 겉보기엔 검은색이어서 쓴맛이 날 거 같은데 정작 먹어보면 엄청 달다오!”
그 비유가 적절한지는 둘째치고.
“저희의 다음 묵시록은 정해져 있습니다.”
“무엇이오?”
“레판타 아이김 서사시.”
"......."
도서관장이 멈칫했다.
“천마실록을 클리어하고 나서 우리끼리 설산에 갔을 때, 당신이 보여줬지요.”
그때, 거대한 용의 시체를 앞에 두고 도서관장은 말했었다. 레판타 아이김에게 살해당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꿈이라고. 그러면서 도서관장은 소중한 듯이, 수십 번 수백 번 읽어서 낡아버린 가죽책을 보여준 것이었다.
[ 레판타 아이김 서사시 ].
지금도 도서관장의 품에는 그 책이 숨어 있으리라.
"사왕......?"
도서관장이 입꼬리를 올렸다.
“예."
“그대가 살천성을 대적자로 여기는 것 알고 있소이만, [레판타 아이김 서사시]는 묵시록이 아니라오…? 본좌는 그대들에게 오직 묵시록만을, 불행하게 연재 중단을 맞이해버린 세계만을 소개해드릴 수 있소.”
도서관장은 입술의 끝이 작게 떨고 있었다.
“[레판타 아이김 서사시]는 아직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라오. 본좌는 절대 개입해서는 안 된다오. 그대의 부탁을 들어줄 수는….”
“하지만.”
나는 도서관장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보고 싶지요?”
"......."
“당신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에겐 살천성이 최고의 캐릭터라고. 나도 그에 버금가는 인물이라고."
만상의 대도서관의 주인.
어느 누구보다 책을 사랑하는 성좌.
바로 그러기에, 나는 이야기 성애자가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을 던졌다.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인물들끼리 함께 있는 장면. 보고 싶지 않습니까.”
내가 선택한 다음 스테이지의 장르.
그것은 크로스오버 (crossover)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