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 마경(魔境).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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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판타 아이김의 눈동자를 본 순간, 잠깐, 말문이 막혔다.
‘뭐 저런 눈을 하고 있지?’
나는 여태껏 각양각색의 인간을 만나봤다. 설원보다 더 차가운 검을 휘두르는 분을 만났다. 백은(S銀)보다 더 서늘한 심장을 품은 분을 만났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가 지닌 눈빛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하얀 백지장.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걸 넘어서- 아예, 아무런 기억조차 스미지 않은 눈동자. 감정의 파편은커녕 흔적조차 없었다.
“어….”
[ 반짝이는 너무나도 오랜만에 만난 인연에 감동합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망설일 때, 성검이 먼저 반응했다.
[그러나 반짝이는 아직 전(前) 주인이 어째서 자신을 배신하였는지 납득하고 있지 못합니다. 감격하기 전에 일단 분노에 사로잡혀야 하는 것 아닌지 고민합니다!]
“……특이한 검을 가지고 있군.”
레판타 아이김이 내 허리춤을 내려봤다. 그곳에선 성검이 부르르 떨면서 자기 의사를 격렬하게 표시하고 있었다. 레판타 아이김의 무표정한 눈길에 일말이나마 호기심이 엿보였다.
“마검인가. 아니면 에고 소드인가. …이곳에선 특이한 아이템을 가지고 있다는 걸 최대한 숨기는 편이 좋다, 이방인. 막 50층에 입장한 초보자들의 스킬과 장비를 노리는 하이에나들이 많다.”
‘어라?’
나는 의아스러웠다.
이상했다. 레판타 아이김의 말투는, 꼭 [수호의 여신]을 처음 보는 듯한 어조였다. 만약 눈앞의 청년이 진짜 살천성이라면 이 성검의 정체를 꿰뚫어 보지 못할 리 없었다.
“저기요. 혹시 이 검을 알아보지 못하겠습니까?”
나는 허리춤에 메인 성검을 풀어젖혀서 레판타 아이김에게 보여주었다. 칼자루를 살짝 빼내자, 칼날에서 환한 빛이 윤기처럼 흘렀다.
"음."
그러나.
레판타 아이김은 성검의 빛, 한때 자신이 수족처럼 부렸던 성좌의 징표를 직면하고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미간을 좁혔다.
“모르겠군.”
조각상 같은 얼굴이 옆으로 기울었다.
“보아하니 나와 인연이 있는 아이템 같다만.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내게서 과거의 인연은 기대하지 않는 편이 현명하다는 게 옳을 것이다.”
“예?”
그리고 레판타 아이김은 내가 예기치 못한 말을 흘렸다.
“나는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이방인. 일주일보다 더 된 과거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남자는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3.
-이런 황무지에서 계속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위험하군. 따라와라. 비교적 안전한 술집을 내가 알고 있다.
레판타 아이김은 그렇게 말하고 나를 안내했다. 나로선 50층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이므로, 얌전히 그의 안내를 받았다.
“어이….”
“저길 봐. 살천성이다.”
술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나는 몇몇 헌터들과 마주쳤다. 아마도 저들 전원이 이세계에서 무위를 휘날리는 헌터들이리라. 하지만 그런 헌터들조차 살천성을 보자 쭈뼛, 어깨를 떨면서 한 걸음 물러섰다.
“미친놈이 또 뭔 지랄을 하려고….”
“마탑의 거미들이 오늘은 얌전하려나?”
“쉿. 저놈이랑은 엮이지 않는 게 좋아….”
수군수군거리는 것은 비단 헌터들만이 아니었다.
[‘외로운 구도자’가 처음 보는 존재에게 흥미를 느낍니다.]
[‘미궁에 거하는 눈’이 살천성의 동행자에게 경계심을 표합니다.]
[‘영원한 평야의 군마’가 당신을 알아봅니다.]
[‘수면에 비친 연꽃’이 당신을 관찰합니다.]
수많은 성좌들.
지금까지 내가 만나온 성좌들은 한정되어 있었다. 각 층을 다스리는 지배자가 아니라면 내게 접촉을 꾀하는 성좌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것 역시 50층부터 달라지는 것일까?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성좌들이 우르르 존재감을 드러냈다.
“……귀찮아.”
레판타 아이김도 성좌들의 메세지를 감지했는지 차갑게 중얼거렸다.
“다 꺼져라. 남아서 귀찮게 구는 성좌가 있다면, 당장 오늘부터 그 녀석의 사도를 찾아서 죽이겠다. 전쟁을 원한다면 계속 알짱거리시지. 마지막 경고다.”
레판타 아이김이 중얼거리자 뚝, 성좌들의 메세지가 끊겼다. 우리 주위를 옭아매는 공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평소보다 더 시끄럽군. 하아….”
레판타 아이김은 작게 한숨을 쉬고 나를 바라보았다.
“너한테 관심을 가진 놈들도 있는 것 같다. 이방인, 성좌들한테 무슨 짓이라도 벌였나?”
“어. [영원한 평야의 군마]를 따르는 사도 한 명을 죽인 적은 있습니다.”
“……마호스의 사도를?”
레판타 아이김의 음색이 바뀌었다. 그는 품속에서 낡은 수첩을 꺼내서 뭔가를 읽더니, 의외라는 듯 눈썹을 구부렸다.
“보기보다 제법이군. 마호스의 사도들은 한 명도 예외없이 무위가 뛰어나다. 더해서 귀찮은 가호를 두르고 있지. 쉽지 않은 상대였을 텐데… 어떻게 죽였나?”
“그거랑 관련해서도 할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술집에 들어갔다.
레판타 아이김이 ‘비교적 안전한 술집’이라고 묘사한 그곳은, 굳이 말하면 노천 술집이었다. 벽이 없었다. 야외에 테이블들과 바(bar) 만 놓여 있었다. 사방이 탁 트였는데, 웃기게도 문짝은 덩그러니 서 있었다.
“...여기가 안전한 술집입니까?”
“시야가 벽에 가려지지 않는다.”
레판타 아이김은 담백하게 이 술집의 장점을 거론했다.
“언제 어느 때 기습을 받더라도 후퇴할 수 있지. 건물째로 테러를 당해 갇히게 될 위험도 없다. 그만큼 저격을 당하기 쉬워진다는 게 단점이지만. 주인장, 늘 마시던 거로 주게.”
“어이. 너 때문에 건물이 날아간 뒤로 가게를 노천으로 운영하게 되었다는 건 알고 있냐…?”
대머리 바텐더가 욕지거리를 웅얼거렸다. 레판타 아이김은 태연히 테이블에 앉았다.
“미안하다. 기억하지 못한다.”
“어이, 젊은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저 미친놈이랑 연관되지 마. 쟤를 죽이려고 벼르는 사냥꾼만 이 근방에서 600명이 넘어. 자살을 희망하는 거 아니라면 엮이지 마셔.”
레판타 아이김이 다시 수첩을 꺼냈다.
“정확히는 1127명이다. 실질적으로 나를 위협할 수 있는 헌터는 3명에 불과하다. 그중 한 명은 154년 전에 실종된 이후 소식이 끊겼군. 엄밀히 말해서, 이방인은 나와 함께하지 않는 것보다 나와 함께하는 편이 더 안전하겠다.”
“미친놈….”
대머리 바텐더가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살천성은 50층에서 또라이로 유명한 모양이다.
“그래서, 내게 할 말이 무엇인가?”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니 제가 좀 난감하긴 합니다만.”
나는 천천히 그동안에 겪은 일을 말했다.
당신이 건국한 아이김 제국이 멸망할 뻔했다는 것. 멸망의 원인은 다름 아니라, 당신이 [수호의 여신]을 봉인한 바람에 [가을비의 마왕]이 성장할 틈을 내줬기 때문이라는 것.
당신이 벌인 짓들 때문에 [천마실록]이 멸망해버리고, [소르므윈 학원 이야기]도 위험에 빠졌다는 것….
모든 걸 얘기했다.
"......."
레판타 아이김은 정체불명의 빨간색 음료를 마시며 주의 깊이 내 목소리를 들었다. 이야기가 이어지는 내내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이따금 수첩을 꺼내서 뭔가를 확인할 뿐.
"…과연.”
레판타 아이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이야기는 잘 들었다. 그리고 일기장을 통해서 검증해본 결과, 네가 말한 얘기들은 대부분 진실이라고 판단한다.”
"일기장이요?”
"나의 기억을 저장하는 창고지.”
레판타 아이김이 수첩을 보여주었다.
그곳엔 빼곡히 글자가 적혀 있었다.
"평범한 수첩처럼 보이겠지만 이래 봬도 [위대한 강아지]라는 성좌의 성유물이다. 무한한 지면과 편리한 검색 기능을 갖췄어. 나는, 내가 매일 무엇을 했는가 여기에 적어둔다. 덕분에 기억상실증에 걸렸긴 해도 나의 인생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지.”
"......."
"네가 말한 대로.”
레판타 아이김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과거에 나는 아이김 제국이란 나라를 건설했다고 한다.”
마치 ‘남’의 이야기라는 듯이.
“그곳에서 나는 평생을 함께한 성좌 [수호의 여신]을 봉인했다. 네가 언급한 [천마실록]이란 세계는 236쪽에 기록되어 있는 세계와 흡사하군. 거기서 [대호에 머무르는 황룡]을 죽였다. [소르므윈 학원 이야기]라는 세계는 3215쪽에 기록된 곳과 유사하다.”
"......."
“가보로 여신의 파편이… 희생검이 대물림되었다고 했나? 확실히. 나는 그 세계에서 어느 여식과 동침한 적 있다. 아마도 네가 만난 라비엘 이반시아라는 여인은, 나와 그 여자의 먼 후손일 가능성이 높다. 나와 같은 은발이라고 했으니… 아마도 틀림없겠지. 기연이군.”
뭔가.
“너에게 [흑역사 들추기]나 [역사가] 같은 스킬이 있어서, 내 과거를 읽어냈을 수도 있겠으나.”
뭔가 아니 야.
“나에겐 읽어낼 과거 자체가 부재한다. 이 성유물을 훔쳐서 읽었을 가능성도 없다. 나만 알아볼 수 있는 암호로 쓰여 있으니까. 따라서, 이방인. 나는 너의 증언들이 모두 사실이라고 인정한다.”
나는 눈앞의 남자에게 죄를 물으러 왔다.
당신의 알량한 신념 때문에 무고한 사람이 피해를 봤다고. 무수한 사람이 희생당했다고, 당당히 말하러 왔다.
하지만 이게 무엇인가?
“그래서.”
기억하지도 못하는 죄를 어떻게 묻는단 말인가.
“나에게 어떤 보상을 원하는가?”
내 심장에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무슨 보상이요?”
“내 잘못을 지적해준 데에 대한 보상이다.”
“…무슨 잘못을 하셨는지 아시구요?”
“물론.”
살천성이 말했다.
“내 잘못은 모두 두 가지다. 첫째는 성좌가 사라진 세계에서 또 다시 새로운 성좌가 탄생할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죽은 성좌가 세계에 저주를 걸 수 있다는 사실을 경시 여겼다는 것이다.”
나는.
“그게 다입니까?”
“성좌의 죽음으로써 다른 세계로부터 성좌가 침공할 수 있다는 부분은 의도한 바이다. 어떤 성좌가 아무리 많은 세계를 지배한다고 해도 결국 그 성좌를 죽이면 끝나는 일이니까. 성좌의 개체수를 줄이는 데에는 문제가 없는 셈이다. 그러므로 나의 잘못은 앞서 말한 두 가지로 그친다.”
말을 마친 살천성은 펜을 꺼내어 수첩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입력했다. 차후 같은 오류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이 조언에 감사를 표하고자 나는 보상을 입에 담은 것이다.”
조언.
감사라고.
“강호에서 살던 민초들은, 강시로 변해서 죽었습니다.”
움찔.
허리춤에 메여서 가만히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성검이 한 차례 떨었다.
심장에서 올라온 노기가 나의 목소리를 염했다.
“그중엔 죽어가는 순간에도 남에게 폐를 끼치기 싫다며 배를 띄워 스스로 수장한 노인이 있었어요. 마지막까지 살려고 발버둥치며 또래 아이들을 챙긴 개방의 아해가 있었습니다.”
"......."
“하나하나가 지독한 죽음이었습니다. 뭣 좀 물읍시다, 살천성. 거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무것도.”
레판타 아이김이 말했다.
“말했듯, 성좌의 사후까지 챙기지 못한 것은 틀림없이 내 오류다. 하지만 실수는 벌어지기 마련이다. 말했듯 그 실수를 교정해준 데에 대한 보상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하."
내 몸을 두른 붉은색 오러가 조금 더 진해졌다.
“그럼 그 보상으로, 여기서 저한테 죽어달라 말하면 죽어주겠습니까?”
“그건 줄 수 없는 보상이군.”
은발의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나에겐 모든 성좌를 박멸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 의무를 수행하기 전까지, 나는 계속하여 작동해야만 한다.”
차라리 기계에 가까운 말이었다. 반짝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그것 참 대단하신 의무로군요. 왜 그런 의무를 짊어지신 겁니까?”
“대답할 수 없다.”
“이건 또 예상한 말이구요. 왜입니까? 제가 그 고결한 의무를 이해하지 못할까봐서요?”
“그 또한 대답할 수 없다.”
“아, 예.”
나는 차갑게 살천성을 노려봤다.
“그럼 적어도 이건 대답해줄래요? 그렇게 성좌를 박멸해야 한다면서 왜 성좌의 성유물은 쓰고 계십니까?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은데요.”
“그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군. 모든 성좌를 박멸한 다음 파기할 예정이다.”
“성좌를 죽여도 다시 성좌가 생겨날 수 있다는 걸 가을비의 마왕 건으로 알게 되셨는데요. 그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이 있다.”
“뭔데요?”
“말할 수 없다.”
살천성이 일기장을 들여다보았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는군. 본제로 돌아가지.”
“저는 이게 본제인데요.”
“내겐 아니다. 보상을 말해라.”
보상.
“앞서 말한 것처럼 죽어줄 수는 없다. 내 의무는 아직 끝나지 않은 바, 보상으로 성립할 수 없는 까닭이다."
아마도 그는 일기장의 첫 번째 페이지에 적힌 글들을 읽는 것 같았다.
“관둘 수도 없다. 의무를 버린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자기가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기 전에 적어놓은 제 1쪽을.
“그러니 그 밖의 보상을 말해라. 들어주겠다.”
"......."
그래.
세상에 대화로 끝날 일이 그리 많지는 않겠지.
나는 단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도중에 멈추었다. 대신에 품안에 고이 접어둔 손수건을 꺼냈다. 라비엘의 푸른 향이 묻은 그 손수건에 잠깐 코를 묻었다.
음.
“……좋습니다.”
분노가 가라앉았다.
나는 사고를 맹렬히 가동했다. 어떻게 하면 눈앞의 헌터- 나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헌터를 [사냥]할 것인지.
내 머리는 곧 대답을 도출해냈다.
“그럼 부탁을 한 가지만 들어주시죠.”
간단한 일이다.
나보다 강한 헌터를 사냥하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므로.
“무엇인가?”
“제가 [50층에 있는 동안엔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지켜주십시오.”
나는 손수건을 집어넣었다.
“단순히 목숨만 지켜달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제 몸과 정신이 훼손당하는 것도 철저히 지켜주세요. 물론, 절 강제적으로 50층에서 퇴거시키는 꼼수는 금지합니다.”
“……신변을 호위해달라는 부탁인가?”
“비슷하네요.”
살천성은 고민에 잠겼다.
그가 만년필을 잡아들어 툭, 툭, 테이블을 두들겼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지금까지 네 이야기를 들어본 결과, 너는 지극히 정의로운 인간이다. 단지 정의로울 뿐만 아니라 무력과 지모를 갖추고 있지. 방금 제안은 너의 성격과 맞물리지 않는다.”
“아하. 부탁을 못 들어주겠단 소리입니까?”
나는 비웃었다.
“죽지도 못하겠고. 의무를 버리지도 못하겠다면서. 이젠 50층에서 절 지켜달라는 부탁도 못 들어주겠다? 굉장하네요. 당신. 그럼 대체 무슨 보상을 해줄 수 있다는 건데요?”
“……너의 제안에 어떤 함정이 숨어 있는가 염려할 뿐이다.”
“함정이 있으면, 뭐요? 실력에 자신 있어 보이던데. 재주껏 돌파하십쇼.”
"......."
레판타 아이김은 골똘히 일기장을 내려봤다.
“알겠다.”
그는 만년필을 움직였다. 스윽, 슥. 일기장에 그의 손길이 스몄다.
“네 제안을 1쪽에 기록하지. 내 존재가 다할 때까지, 너의 제안은 내 사고논리와 행동논리가 되어 나를 움직일 것이다.”
오케이.
걸려들었다.
‘검제 양반.’
나는 배후령을 돌아봤다.
-엉?
‘150년 전에 저기 마탑을 한 채 무너트렸다면서요.’
이곳에 떨어지자마자 눈에 띄인 배경.
잿빛 하늘에 치솟은 첨탑들을 가리켜서, 배후령은 말했었다.
『원래 쟤들 탑이 여섯 개였거든?』
『근데 그중 한 개는 내가 무너트렸어.』
『아마 내가 귀신이 되어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면 쟤들이 환장할 거다.』
배후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내 인생에서 참 잘했다 싶은 일이 여럿 있는데, 그중에서도 여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잘한 짓이었지.
‘그거 무너트리면서 뭐라고 말했어요? 기억합니까?’
-오오. 당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기억 하지.
배후령이 실실 웃었다.
-안녕, 병딱들아? 가끔은 환기도 하고 살아야지 너희처럼 맨날 방에 틀어박혀 있으면 사람이 못 써요. 자, 기분이다! 내가 오늘 공짜로 리모델링 시켜주마! 껄껄.
배후령은 과거의 영광을 떠올리다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그건 왜? 뭐 하려고?
나는 시선을 첨탑으로 향했다.
빤히.
물끄러미.
-어? 야? 좀비야?
배후령이 옆에서 말했다.
-거기 쳐다보지 말라니까? 23초 이상 쳐다보면 감지된대도? 지금 네 레벨이랑 수준으로는 절대 저놈들 감당하지 못해요. 아님, 뭐야? 쟤네들한테 부탁해서 살천성 없애려고? 아서라. 살천성처럼 끗발 있는 놈한테는 쟤들도 안 달려들어. 서로 손해거든.
계속해서 저 멀리에 우뚝 선 첨탑들을 바라봤다.
-어어? 어? 야, 김좀비! 당장 시선 돌리라니까?!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아, 아.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으. 거기 누구신데 꼬라봅니까?」
머릿속에서 전음이 울렸다.
배후령이 지적한 대로 첨탑이 나의 존재를 감지한 것이다.
「보아하니 초보자 티도 아직 안 벗은 꼬맹이 같은데. 아직 초범이니까 봐드림다. 앞으로 이 동네에서 발 뻗고 지낼 생각이라면 여기 꼬라보지 마십쇼. 뒈지는 수가 있슴다.」
권태로움에 가득 찬 목소리. 일하기 싫은 티를 팍팍 내는 공무원같이 누군가가 말했다.
「오, 별자리에 미친 놈이랑 같이 있네? 낄낄. 운도 나빠라. 뭐 도와드릴깝쇼? 지금이라면 30년 종속 계약으로 즉석 탈출 스크롤을 전송해드릴 순 있습니다만?」
“안녕."
나는 입을 열었다.
“병딱들아.”
「오잉? 이 씨방새가 지금 간뗑이가 쳐부었나, 어디서….」
“가끔은 환기도 하고 살아야지 너희처럼 맨날 방에 틀어박혀 있으면 사람이 못 써요.”
「.......」
“자, 기분이다. 내가 오늘 공짜로 리모델링 시켜주마. 껄껄."
침묵.
완전한 정적이 감돌았다.
-어매.
배후령이 멍하게 중얼거릴 뿐.
-이 미친 또라이 새끼가?
그 순간이었다.
끼이이이이이익!
다섯 개의 첨탑에서 일제히 찢어지는 듯한 소음이 터졌다. 마치 다섯 손가락의 손톱들이 하늘을 긁어버린 것 같았다. 쨍그랑! 대머리 바텐더가 놀라서 유리컵을 떨어트렸다. 길거리를 오가던 헌터들도 귀를 틀어막았다.
“뭐, 뭐야?!”
“지금 무슨 일이……"
그리고.
-검제에에에에에에에에에!!
잿빛 하늘에 거대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돌아왔구나, 검제! 언젠가 돌아올 줄 알았다! 모든 별자리가 네놈의 죽음을 알려올 때도 우리만큼은, 우리들만큼은 네놈이 죽어도 절대 죽지 않는 개자식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빙의냐! 환생이냐! 됐다! 아무튼 상관없다!
모든 헌터들이 벙쪄서 하늘을 올려봤다.
-죽여버린다! 네놈만큼은 우리가 죽여버린다! 영혼을 갈갈이 찢어서 삼라만상에 흩뿌리고 그 위에 똥을 싸갈겨주마! 죽여! 죽여!! 저놈을 당장 죽여버려! 마탑의 이름과 역사를 걸고 저놈을 지옥까지 쫓아가라!
첨탑에서 수백, 수천, 수만 명의 그림자가 치솟았다.
그들은 모두 빗자루에 올라탄 채 상공에서 대열을 이루었다.
“자아.’’
내가 살천성을 돌아봤다.
은발의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약속하셨지요?”
"......."
“저를 지켜주십시오.”
하늘에서 유성우가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