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 동향(同鄕).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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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님, 정신을 차리셨나요?
김■은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폐허가 되어버린 황무지.
그곳에 칼 한 자루를 들고 김■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여긴……?
-방금 전까지 격전을 벌이셨어요.
칼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신의 목소리. 자신을 소환한 성좌의 음색이었다. 여신을 알아볼 수 있었지만, 김■은 어딘지 모르게 머릿속이 멍했다.
어쩌다 여기에 오게 되었는가.
꼭 기억에 그을음이 낀 것 같았다. 떠올리려 해도, 손가락으로 파내려 해도, 자꾸만 검은색 먼지만 버석거리는 그을음.
-용사님께선… 적의 함정에 빠지셨어요.
여신이 울먹였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기습을 받아버려서, 그대로 싸웠다가는 필패여서…. 용사님께서는 처음으로 구원검(救援劍)의 힘을 쓰셨습니다.
-구원.....
-예. 무언가를 버리면, 버리는 만큼 구하는 힘이에요. 용사님께선 [이름의 한 글자]를 버리셨어요.
김■은 그제야 그을음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랬구나. 맞아. 그랬어.
이름에서 한 글자를 영원히 버렸다.
원래 자신이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지, 이제 김■은 떠올리지 못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대가로 눈앞의 풍경을 얻었다. 자신이 휘두른 일격에 주변이 온통 폐허로 변해버렸다.
사악한 계략과 모략을 꾸며서 자신을 습격한 무리는, 흔적도 안 남기고 증발했다. 이번에도 용사는 살아남을 수 없는 역경에서 살아남았다.
-……괜찮은데?
김■이 중얼거렸다.
-어차피 좋아하는 이름도 아니었는데. 겨우 한 글자만 버려서 이만한 힘을 얻다니.
자기 이름에 이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사실에 김■은 가볍게 놀랐다.
이름뿐만 아니라, 이세계에 넘어오기 전까지 살았던 인생엔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적어도 김■은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
-휘야.
-예, 용사님….
-조금 더 빨리 이 세계를 구할 수 있겠어.
무가치한 시간을 버려서 가치 있는 풍경을 손에 넣는다.
김■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 전에, 내 이름을 새로 만들자.
레판타 아이김.
레판타란 고대어로 ‘황야의 인간’을 뜻했다.
김■이 스스로 레판타를 칭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사람들이 그를 레판타라 부르며 숭앙하기 시작했다.
김■은 황야에서 온 인간이 되었다.
2.
마법사들이 훑고 지나간 대지는 황무지였다.
폐허로 변해버린 그곳을, 나는 한 줄기 바람이 되어서 가로질렀다.
은발의 남자가 그런 나를 담담히 바라보았다.
마천신공魔天神功.
제일식第一式.
아사유검飯死流劍.
굶주림에 절명한 아이의 손짓이 검로에 실린다. 하늘을 할퀴는 손톱. 가장 원초적인 동작이자 가장 원초적인 비명으로, 나는 살천성의 머리를 가른다.
“……감각 극대화. 한 시간을 버린다.”
살천성이 검을 쥐었다. 차앙! 칼날과 검신이 맞부딪혔다. 살천성은 내 공격을 막아내고, 무표정하게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푸른 눈동자.
“기이한 검술이군.”
다른 한 손으로 그는 일기장을 들고 있었다.
“오러를 내공으로 운용하여 펼치는 무공인가? 정통 무림인은 내공심법에 집착한다고 한다. 아마도 너는 정파가 아니라 사파에서 이 검술을 익혔을 테고, 그곳이 네가 말한 마교일 것……"
나는 검을 휘둘렀다.
마천신공魔天神功.
제이식第二式.
갈사비검渴死痛劍.
황무지에 메마른 바람이 불었다. 퀘퀘한 모래먼지가 흩날렸다. 갈사(渴死). 지천에 바닷물이 널렸는데도 한 모금을 마시지 못해 메말라 죽은 자가 있었고, 그에게 세상은 사막이었다. 나는 하나의 사막을 불러들여 살천성에게 휘몰아쳤다.
“방어 강화. 대가로, 물의 맛을 버린다.”
사막의 바람을 마주하며 살천성은 눈을 깜빡였다. 차앙! 이번에도 내 검로는 그의 검극에 가로막혔다.
“이런 식의 싸움은 좋지 않다. 사왕이여.”
사막을 닮은 목소리가 흘렀다.
“너는 정의로운 인간이다. 그대의 정의가 올바른 논리 위에 구축되어 있다면, 너는……"
“바라야.”
나는 기도문을 읊었다.
“바라야.”
내가 허락한 오직 하나뿐인 기도를.
붉은 오러가 울부짖는다. 나의 피가 들끓는다. 내가 쌓아올린 기억들이, 수집해온 죽음의 풍경들이, 걸어온 인과들이 기도문에 답한다.
“아가바라야.
지천이 바닷물인데도 마시지 못한 죽음이 있었다. 바닷물에 침몰되어 숨이 가로막힌 죽음이 있었다. 사람이 죽는 방법은 그토록 다양 하여서, 내가 언젠가 눈에 담은 골목길, 내가 언젠가 밟아본 땅바닥은, 모두 누군가의 죽음이 기록된 장소였다.
그러므로 천하의 본질은 마(魔)라.
마천신공魔天神功.
제삼식第三式.
익사만검潮死滿劍.
"......."
은발의 남자가 검을 휘둘렀다.
“요격 강화. 바다의 냄새를 버린다.”
“어디까지 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내 목숨이 이어지는 한.”
나는 이빨을 꾹 물었다.
‘이제 알겠다.’
나는 파상공세를 펼치면서, 파상공세를 하나씩 막아가는 살천성을 노려보았다. 은발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깨달았다.
'이 자는, 내가 도달할 수 있는 결말 중 하나였어.’
마공을 극한까지 연마한 용사.
150년 전에 배후령은 이 용사와 마주했다.
그래서 내 스승과 싸울 적에- 배후령은 일갈한 것이다.
『난 이놈한테 기뻐하는 방법들을 가르쳐줄 거다.』
자기 자신을 버리기만 할 뿐인 인간이 어떻게 되는지.
배후령은 직접 보아서 알고 있었으며, 알았기에 스승님과 싸웠다.
만일 나에게 배후령이 없었다면.
만일 내가 라비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만일 내가 [나의 기억 따위는 얼마든지 희생해도 좋다]고 여겼다면.
그랬다면 결국, 나는 눈앞의 남자처럼 되었겠지.
“레판타 아이김!”
나는 검을 휘둘렀다.
마천신공魔天神功.
제사식第四式.
동사접검凍死接劍.
살천성이 검을 휘둘렀다.
“따뜻한 바람과 차가운 바람을 버린다.”
우리 두 사람의 검이 교차했다.
“정의를 말했습니까!”
“정의를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제가 정의롭다면,”
“내 목숨을 위협할 리 없다고,”
“당신은,”
“내가,”
우리 두 사람의 목소리가 부딪혔다.
“말했습니까!”
“말했다.”
부딪힌 목소리가 서로를 밀었다.
나는 성난 파도처럼 외쳤다.
“그렇다면 당신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레판타 아이김의 목소리는 비처럼 퍼져 나의 외침을 덮었다.
“나의 정의. 그것은 성좌를 박멸하는 것,”
“어째서입니까!”
대답해줄 수 없다고 레판타 아이김은 말했다.
하지만 배후령이 말했던 대로, 레판타 아이김은 지금 수다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버릴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 그는 입을 열었다.
"-성좌는 인간에게서 선택의 자유를 앗아가는 존재다.”
그가 정의를 말했다.
“선(善)이란, 인간의 자유에 기반한다. 따라서 그것을 침해하는 성좌는 악(惡)이다.”
그가 선과 악을 말했다.
“[불멸하는 행복 전도사]란 성좌를 물리쳤다고 말했지. 그러면 알 것이다. 그곳에 사는 인간들은 선택의 권리조차 없이 성좌에게 감염당하여, 강제적으로 행복해졌을 것이다.”
그가 권리를 말했다.
“[영원한 평야의 군마]는 어떠한가? 그 성좌의 말발굽 아래에서 세계는 다만 전장이 된다. 투기장이 된다. 일상에서 주고받는 대화조차 첨예한 언쟁으로 변한다. 거기에 인간의 자유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그가 자유를 말했다.
그 빗물 닮은 목소리를, 나는 모조리 집어삼키며 외쳤다.
“인간이 자유로워야 한다고 말했습니까!”
“그렇다.”
“그렇다면,”
나는 검을 휘둘렀다.
“당신은 뭡니까!”
“나는,”
“일기장에 적힌 대로 움직일 뿐인 기계입니다! 거기에 무슨 자유가 있다는 거예요!”
“유효한 지적이군.”
살천성은 오른손으로 검을 휘두르면서도, 왼손으론 일기장을 놓지 않았다. 그의 무심한 눈길이 일기장을 훑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 한 사람의 자유를 버려서 다른 모든 이의 자유를 구할 수 있다면 마땅히 그러해야 하노라고. 나는 그렇게 결심했고, 결심한 순간만큼은 자유롭게 결심했다. 그러므로……"
“웃기지 마!”
마천신공魔天神功.
제오식第五式.
독사격검毒死擊劍.
“그렇게 하는 당신이 방금 말한 성좌들과 다를 바가 뭐냐고!”
"......."
살천성이 멈칫했다. 그러나 멈칫했을 뿐. 세상의 독을 긁어모아 휘두른 내 일격을, 살천성은 재빠르게 방어했다.
“모든 꽃의 향기를 버린다.”
“일주일 동안 꽃향기를 맡고, 노을을 보고, 마시고, 먹고, 바람을 느끼고, 그래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어! 당신은 그저 버리고 버릴 뿐이다!”
“……성좌들은 세상에 악영향을 끼친다. 그들은 자신의 심상(心象)과 사상(事象)을 인간들에게 전염시킨다. 그 속에서 오직 인간은 하나가 된다. 거기에 선택의 여지란 없으므로,”
살천성이 일기를 읊었다.
“나는 인간들에게 적어도 선택의 자유를 주기 위하여, 성좌들을,”
“그게,”
마천신공魔天神功.
제육식第大式.
병사유검病死流劍.
“당신이 하는 짓이랑,”
마천신공魔天神功.
제칠식第七式.
장사타검杖死打劍.
“다를 게 뭐냐고 묻고 있다!”
“……일주일 동안 꾼 꿈들을 모두 버린다. 상처를 입었을 때의 고통을 버린다. 아침과 낮, 저녁, 밤의 풍경을……"
“일기에 적힌 대로 움직일 뿐이면서! 차라리 성좌가 낫다! 성좌는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적어도 알고 있지, 당신은 그저 문자에 따라 행동할 뿐이잖나!”
마천신공魔天神功.
제팔식第八式.
소사연검燒死連劍.
“당신의 이름은 [하늘의 성좌를 죽이는 자]가 아니다!”
살천성.
“당신은, [하늘을 죽이는 성좌]다!”
殺天星.
“성좌를 죽이는 것이 당신의 유일한 사명이고 의무라고 한다면- 먼저, 자신부터 죽도록 해라! 살천의 성좌!”
마천신공魔天神功.
제구식第九式.
자결검自決劍.
내 검은 살천성을 꿰뚫었다. 그러나 칼끝이 베어버린 것은 살천성의 몸이 아니었다. 일기(日記)였다. 살천성이 끝내 눈길을 떼지 못한, 낡디 낡은 수첩.
그 한복판을 나의 칼날이 갈랐다.
"......."
수많은 페이지가 허공에 날렸다.
그의 하루와 하루가 꽃잎처럼 흩어졌다.
“……1초를, 버린다.”
살천성이 중얼거렸다.
마탑의 거미들과 격전을 펼쳤고, 나와 연전을 벌였다. 일주일 동안 쌓아올린 그의 기억은 전부 소진되었다. 마침내 살천성의 손에서 탄환이 떨어진 것이다.
“1초를--- 버린다.”
그런 종막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살천성은 여전히 작동을 멈추지 않았다. 아직도 그에겐 버릴 것이 남았다. 아니. 버릴 것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1초를 버린다.”
순간과 순간.
끝없이 이어지는 현재를 살천성은 희생시켰다.
희생시키면서 검을 휘둘렀고, 오러를 끌어올렸으며, 자기 자신을 지켰다.
“1초를 버린다.”
그래.
“1초를 버린다.”
그것이 당신의 비명이다.
“1초를 버린다.”
마천(魔天)은 모든 비명에 응답하는 칼.
“1초를 버린다.”
나는 설원의 비명과 심장의 비명, 어린아이의 비명을 더듬어서 여기까지 왔고, 그 끝에는 당연히 그 모든 것을 만들어낸 당신의 비명이 자리하리라.
“1초를 버린다.”
살천성은 중얼거리며 칼을 휘둘렀다. 목소리에 음색이 없으므로, 무색. 눈동자에 마음이 없으므로, 무심. 무색하고 무심한 남자는 은발을 흐트러트리며 계속해서 내 검격을 막아냈다.
“1초를……"
그리고 나의 칼이 그의 어깨를 갈랐다.
“……, 버린다.”
멈추지 않았다.
“1초를.”
멈추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그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다. 종아리에서 핏물이 터졌다. 내 검이 이어질 때마다 잿빛의 황무지에 붉은색이 떨어졌다.
“버린……"
나는 살천성의 품을 파고들었다. 살천성은 돌진을 막지 못했다. 털썩! 내게 떠밀린 살천성이 뒤로 쓰러졌다. 나는 그가 꼼짝 못하도록 덮친 채, 칼을 높이 들어 올렸다.
“레판타 아이김.”
“1초를……"
“너의 비명을 내가 거둔다.”
그리고 나는 살천의 심장을 뚫었다.
"------."
살천성의 입술에서 울컥, 피가 역류했다. 식도가 막혔다. 입이 막혔다. 살천성은 무표정한 눈으로 나를 올려보았다. 올려보면서도 그는 입술을 움직였는데, 목소리가 핏물에 가로막혀 들리지 않았다.
"......를, ....... ......."
그러나 비명은 원래 그런 것이다.
".............."
살천성의 박동이 자리한 심장, 목소리가 자리한 입에서, 피가 흘렀다. 피는 동심원을 이루며 점점 더 주변으로 퍼졌다. 백색과 회색의 중간을 머금은 살천성의 은빛 머리카락이 피웅덩이에 젖었다.
"......."
천천히.
그가 눈을 감았다.
[당신의 존재가 한층 더 뚜렷해집니다.]
작은 목소리가 울렸다.
[사왕의 레벨이 성장합니다.]
[스킬 슬롯이 확장됩니다.]
[이제 당신의 헌터 랭크는 C급입니다.]
[당신에게 행운이 함께하기를.]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당신의 존재가 한층 더 뚜렷해집니다.]
[사왕의 레벨이 성장합니다.]
탑의 목소리가 선언했다.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인과가 한꺼번에 폭발한 것처럼.
[스킬 슬롯이 확장됩니다.]
[이제 당신의 헌터 랭크는 B급입니다.]
[당신에게 행운이 함께하기를.]
사위가 적막해졌다.
나는 조용히, 그의 심장에서 칼을 거두었다. 살천성의 시체는 온순했다. 마치 처음부터 죽음이 예정된 자가 눈을 감은 듯, 그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자신의 피웅덩이에 누워 있었다.
그 순간.
[‘외로운 구도자’가 살천성의 죽음에 경악합니다.]
[‘미궁에 거하는 눈’이 믿기지 않은 사태에 당신을 경계합니다.]
[‘영원한 평야의 군마’가 살천성의 죽음에 놀라움을 표합니다.]
세계들이 경악을 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