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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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세계가 조금씩 좁아진다.
처음에는 시외. 그다음엔 시내로.
[트라우마의 구현도가 떨어집니다.]
[자료를 복구할 수 없습니다.]
도시의 변두리부터 좀먹은 어둠이 서서히 길거리까지 잠식했다. 꾸물럭. 꾸물. 어둠은 살아서 움직이는 촉수 같았다. 나는 저 불길하고 어두운 안개를 공허(空虛)라 부르기로 했다.
“……오늘은 좀 일찍 등교할 거야.”
많은 것이 안 보이게 되었다. 사람들의 얼굴이 안 보였다. 교회의 첨탑이 안 보였다. 상가에 나무껍질처럼 다닥다닥 붙은 간판들이 안 보였다.
세계는 공허로 얼룩졌다.
“사육장에 가서 토끼들한테 먹이를 줘야 해.”
하지만 비로소 보이게 된 것도 있다.
“사육장?”
“응. 학교 뒤편에 있는… 하긴.”
살천성이 한숨을 쉬었다.
“너 같은 애가 알 리가 있나. 아무튼 토끼도 키우고 닭도 키우는 곳이 있어. 그 아이들 밥을 줘야 하거든.”
‘그런 곳이 있나?’
기억을 되살피면, 보육원에도 뭔가 축생을 키우는 장소가 있었다. 금방 사라졌지만 말이다. 과거엔 중학교 고등학교에도 사육장이 마련되어 있었던 걸까.
“걔네들 밥을 왜 네가 줘. 따로 담당자가 있어야지 않아?”
“……원래는 사육부가 있었어. 왜, 작년에 외국인 여자가 밤에 학교로 침입해서 갓난아기랑 같이 투신했잖아? 갓난아기는 하필 사육장에 떨어졌고. 그 사건 이후로 사육부 입부 신청이 뚝 끊겼대.”
금시초문. 하지만 살천성의 어조는 꼭 굉장히 유명한 사건을 읊는 듯했다. 아마 이 학교에선 이런저런 사건이 벌어진 모양이다.
“외국인 여자가 왜 다른 나라 학교에서 아이랑….”
“여기 선생이 해외로 출장나갔다가 사고 쳐서 만든 아이였대.”
"......."
“고등부가 아니라 중등부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살천성이 중얼거렸다.
“아무튼 이제 사육부는 없어. 중학교 반장 아이들이 번갈아서 사육장을 담당하는데… 중딩들이 이런 일에 성실히 매달릴 리가 없잖아? 경비원 아저씨랑 나. 중등부의 어떤 아이. 이렇게 세 명이서 거의 먹이를 줘.”
그건….
내가 전혀 몰랐던 세상의 구석진 장소였다.
사육장.
거기에는, 토끼와 닭들이 비좁은 우리에 갇혀서 얼마 안 되는 공간을 주어진 세계의 전부로 삼고 있었다.
제대로 관리가 안 되는 건가. 닭통 냄새와 토끼 소변 냄새가 진동을 했다. 무성의하게 한번에 대량으로 부어진 사료들은, 비에 젖었다가 마르기를 반복해서, 역시나 악취를 풍겼다.
“아. 진짜. 또 누가 하는 척만 하고 갔네.”
살천성이 눈쌀을 찌푸렸다.
“이럴 거면 차라리 담당을 빼먹든지. 안 하느니만 못한데.”
“도와줄까?”
“됐어. 어차피 마무리는 내가 다해야 돼.”
살천성이 소매를 걷어부쳤다.
“그냥 거기 서 있어. 아니면 먼저 교실에 가시든지.”
살천성은 오래되어 썩은내 나는 보풀 더미를 솎아냈다. 큼직한 포대자루에 지푸라기를 버렸다. 창고에서 빗자루와 갈퀴를 가져와 청소했다.
무척 익숙한 작업인 양.
살천성은 고무 호스를 들어 사육장에 물을 뿌렸다.
촤아아아아-
많은 것이 안 보이게 된 세상, 공허로 녹슬어 좁아진 세계, 신서중고(神模中高)의 뒤편에서 어느 고등학생이 6시 40분 경에 뿌린 물이 산산이 흩뿌려졌다. 고요했다. 물은 새벽의 색깔을 닮았다.
"......."
나는 세상의 빈틈에 펴진 광경을 엿보고 있었다.
[진짜 더러워.]
[수학샘보다 더 더러워, 어떻게 된 게.]
[너 냄새 진짜 심해.]
세계가.
조금씩 좁아진다.
[트라우마의 구현도가 떨어집니다.]
살천성에게, 아니, ■■에게 무의미한 것들부터. 차근차근.
[자료를 복구할 수 없습니다.]
도시를 둘러싼 산들이 어두운 안개에 잠겼다. 이 세상은 포위당했다. 하루가 지날수록 공허가 점점 조여왔다.
길과 길이 끊어졌다.
-■■, ■■ ■!
-■■■.
끊어진 길로 망령들은 끊임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거듭했다. 명멸했다. 사람들이 어디에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 [살천성의 세계]에선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인간은 등장인물이 아니었다.
길가의 보도블럭 빈틈에 잡초가 똬리를 틀었다.
[트라우마의 구현도가 떨어집니다.]
쓰레기장 한켠에는 아직 베이지 않은 은행나무 한 그루,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혔다.
[트라우마의 구현도가 떨어집니다.]
저녁이 되면 붉은 노을이 졌다.
[트라우마의 구현도가 떨어집니다.]
마침내, 공허는 학교를 완전히 둘러쌌다.
"......."
라비엘이 교문에 서 있었다.
교문 너머는 새까만 어둠이었다.
“라비엘.”
하교 시간.
망령들이 걸어가서 흡수되는 공허를 눈앞에 두고, 라비엘은 조용히 멈추어 있었다. 내가 불렀음에도 라비엘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래.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다고 느끼긴 했다.”
다만 나직이 속삭일 뿐.
“생각해보면 외국 이름으로 불러달라는 것 자체가 기이한 일이었다. 반시아. 그것이 내게 주어진 이름이지. 그러나 어째서인지 나는 [라비엘]이라고 불려야만 한다고, 강박관념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 것이다.”
"......."
“무엇보다, 내가 어쩌다 그대와 만나게 되었는지 떠올릴 수 없군. 아니. 떠올릴 수 없다는 표현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나는 작년 학교축제에서 그대에게 고백을 받았다. 그 전부터 그대에게 호의와 호감을 품고 있었지. 우리는 쉽게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라비엘이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나는 과연 그것이 진실인가 의문을 느낀다. 공자여. 그대와 나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야. 우리는 절대로 쉽게 사랑하지 않는다.”
"......."
“내게 키스해라. 당장.”
나는 조심스럽게 라비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왼손으로 라비엘의 턱을 잡아, 살짝 고개를 숙여, 입술을 맞추었다.
“음. 역시.”
라비엘이 미소를 지었다.
“두근거리는군.”
그녀는 내 귓볼을 매만졌다.
“내 사랑에 거짓 따위는 일절 없다. 좀 잘 생겼고 말 좀 잘 한다고 해서, 내가 이토록 그대를 사랑할 리 만무하지. 헌데 고작해야 신서중고 역사상 세기의 커플이라니…. 집어치우라고 전해라. 그대와 나는 삼라만상의 우주를 통틀어서 최강이다.”
“……예.”
“나의 사랑이 거짓된 것이 아니라면 필시 나의 기억이 왜곡되었을 터. 지금 이것은 환각이거나 꿈이로구나. 공자여. 내가 그대를 꿈꾸고 있는 것인가? 그대가 나를 꿈꾸고 있는 것인가?”
“제가 라비엘을 꿈꾸고 있습니다.”
“호오. 참. 신기한 일이군.”
라비엘은 손가락을 굽혀 턱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턱이 아니라 나의 턱을.
“나는 그대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연인이리라.”
“예."
“설혹 꿈을 꾸더라도, 꿈결에 불과한 순간이라도, 그대가 사모하는 자의 자리엔 언제나 내가 있어야 마땅하다. 오로지 나만이 그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
“그렇습니다.”
“칭찬하마. 나의 연인이여. 잘도 나를 사랑하는구나.”
라비엘이 웃음을 흘렸다.
“이제 눈을 감아다오.”
"......."
“절대로 눈을 뜨지 말고. 그대의 입술로 나의 이름을 불러라. 알겠는가? 절대로 눈을 떠서는 아니 된다. 제멋대로 눈을 뜨면 혼내줄 것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
“라비엘.”
“그래.”
“라비엘…… 이반시아. 제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나의 턱을 쓰다듬던 손길이 사라졌다.
"......."
눈을 떴다.
라비엘은 없었다.
"............."
그림자로 허물어지는 모습을 내게 보이지 않은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것이 이반시아의 방법이었다.
[트라우마의 구현도가 떨어집니다.]
[자료를 복구할 수 없습니다.]
이제 이곳엔 라비엘의 숨결이 없다.
세계는 그만큼 조금 더 좁아졌다.
-딩, 동, 댕, 동.
교정에 설치된 스피커가 울렸다.
이름을 모르고 형태를 잃어버린 방송부원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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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내에 남은 학생 여러분에게 방송부에서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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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자율학습에 임할 학생을 제외하고 다른 분들은 이제 하교해주시길 바랍니다.
그 순간.
교문 너머에서 도사리고 있던 공허가 출렁, 넘쳤다.
홍수로 순식간에 불어난 하천이 범람하듯이.
"음."
나는 뒷걸음질을 쳐서 물러섰다. 공허에서 촉수와 같은 안개 줄기들이 뻗어나왔다. 줄기들이 순식간에 교문을 옭아맸다. [신서고등학교]라고 적힌 명패가 좀먹혔고, 곧, 교문은 통째로 어둠에 파먹혔다.
‘드디어 무너지는구나.’
트라우마의 세계가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서 뭐 해?”
누군가가 등 뒤에서 말했다. 살천성이었다. 살천성은 해진 가방을 맨 채 우두커니, 이상하다는 듯 나를 보고 있었다.
“하교 안 해? 뭐, 안 할 거면 말고. 안 그래도 슬슬 너희 부모님 눈칫밥 얻어먹는 거 불편했어. 네가 진심으로 나한테 사과하고 싶다는 건 알겠으니까 이제 그만하자. 이런 거. 서로 기분만 이상해지잖아.”
살천성은 교문이 있던 자리를 향해서 걸어갔다. 내 곁을 스쳐 지나가려는 때, 나는 살천성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휙 잡아당겼다.
“아, 야. 앗! 뭐야? 뭔데!”
간발의 차이로 살천성은 공허에 내딛지 않았다. 지금도 흑색 안개가 교문을 넘어, 담장을 넘어, 끊임없이 운동장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저것]에 집어삼켜지면 모든 것이 끝나리라.
“잠깐 나 좀 따라와.”
“또? 이번엔 어디 가려고?”
“네가 조금이라도 더 살 수 있는 곳. 숨을 쉴 수 있는 곳.”
“……뭐?”
“여기는 이미 위험해. 어서 움직이자.”
나는 살천성을 끌고 교정을 가로질렀다.
우리를 뒤쫓듯 공허가 학교를 잠식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김공자. 너, 한 달전부터 너무 이상해진 거 알아? 왜 그렇게 무서워하는 건데? 대체 뭘 그렇게 열심히 하려는 건데? 원래 그런 인간 아니었잖아.”
“어떤 일이 있어도 필사적으로 살기로 약속했거든. 내 스승님은 세계가 멸망해도 검을 휘둘렀어. 내 연인은 세계가 반복되어도 나라를 지켰어. 세상에는 그런 사람도 있는 거야. 나는, 그런 사람들과 같이 있고 싶어서 노력한다.”
“진짜로, 정말로,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자기 자신을 끝없이 버려가면서까지 스스로 옳다고 여긴 일에 투신한 사람도 있었지.”
우리는 교내에 들어섰다.
여전히 공허는 멈출 줄 모르고 밀려들었다.
"......."
복도에는 이매망량이 돌아다녔다. 그렇지만 그중 한 명, 흑룡주의 얼굴을 한 [반장]만이 여자 화장실 앞에 멍하게 서 있었다. 반장은 아직 내가 허물어트리지 않은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지난 트라우마에서 살천성이 투신했을 때, 반장은 유일하게 고개를 숙인 학생이었으므로.
“……이상해라. 왜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는데 묘한 죄책감이 들까.”
흑룡주는 뜬금없이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듯했다. 한참 고민이 많을 시절이기도 했다. 나는 살천성의 손목을 잡은 채 다가가서, 남은 한손으로 흑룡주의 손목까지 잡았다.
"응?"
“당신도 따라와. 지금 여기에 있으면 안 돼.”
“어라? 아, 잠깐. 어? 뭐야? 김공자? 앗, 지금 뭘……?!”
흑룡주는 당황해서 반항하다가 문득 살천성을 발견했다. 놀란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흑룡주는 미간을 좁히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내가 잡아끄는 대로 끌려왔다.
[경고!]
[트라우마의 구현도가 떨어집니다.]
[자료를 복구할 수 없습니다.]
[트라우마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공허가 학교 1층을 침몰시켰다.
나는 두 사람을 끌고 계단을 올랐다. 빠르게. 1층을 넘어서, 2층을 뛰어올라, 3층을 지나쳐, 4층을 건너, 5층을 뛰었다. 등 뒤로 살천성과 흑룡주가 숨을 헐떡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공허는 무서운 기세로 차오르고 있었다.
[■■■ ■■■♪]
[■■■ ■■■♪]
[■■■ ■■■■♪]
층계에 붙은 표어가 침몰되었다. 검은색 안개는 어두컴컴한 수면이 되어서, 1층을, 2층을, 3층을, 4층을, 5층을 집어삼켰다.
이 세계에서 남은 장소란 오직 한 곳.
“후윽 헉… 허억….”
“으. 욱, 나, 속 울렁거려….”
나는 옥상의 철문 앞에 섰다. 자물쇠가 네 겹으로 철문 손잡이를 감싸고 있었다. 교사나 선생이 아니라면 출입할 수 없는 장소이겠지. 하지만 나는 손가락에서 오러를 피어올려, 간단히 쇠사슬을 갈랐다.
“나가자.”
“어…?”
숨을 헉헉 내쉬던 살천성이 멍하게 철문을 봤다.
“열려 있어…?”
“자, 잠깐만. 우리는 옥상에 올라가면 안 돼! 교칙 위반이야!”
흑룡주가 당황해서 소리쳤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공허가 덮치고 있지만 않았으면, 나도 교칙을 조금 더 존중했을지 모른다. 나는 살천성과 흑룡주를 반쯤 억지로 옥상으로 밀어넣은 다음---.
쿵.
철문을 닫았다.
"......."
나는 가만히 철문을 노려봤다. 조용했다. 다행히도 공허는 옥상까진 침범해서 들어오진 않았다. 아마도 아주 잠깐 허락된 평화에 불과 하겠지만, 일단은 공허의 홍수에서 벗어난 것이다.
“좋아. 당분간은 괜찮을 거다.”
“뭐가 괜찮단 거야?!”
흑룡주는 광분하여 날뛰었다.
“우리 학교가 얼마나 옥상 출입에 민감한지 모르니?! 작년에 중등부에서 그 난리가 벌어졌는데! 세상에!”
“괜찮다니까.”
“아아, 내가 여기 온 걸 알면 선생들이… 내신이… 나쁜 새끼! 내 대학교 입시 책임져!”
세상은 완연히 공허에 감싸였다.
옥상 울타리 너머로 아래를 내려다보면, 운동장은 온데간데 없고 시커먼 어둠만이 펼쳐졌다. 교정도. 바로 맞은편에 있는 중등부 본관도.
이 트라우마에는 이제 세 명만이 남았다.
“반장."
“왜!”
“우리 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었지.”
"......."
세 명의 잔존.
가해자.
피해자.
“……그래서?”
마지막으로, 방관자.
흑룡주의 얼굴을 한 반장이 나를 노려보았다.
“나한테 뭐 할 말이라도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