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 살아남는 것. (3) >
-언젠가 연락해올지도 모른다 싶었다. 잘 살고 있더구나.
“이제 와서 연락을 드려서 죄송해요. 조금 더 빨리….”
-한창 자기 일 하면서 살기 바쁜 나이지. 네 나이대가.
전화기 너머에서 잔기침이 흘렀다. 쿨럭. 원장님은 목청을 쓸었다.
-가끔 모르는 사람들이 와서 네가 우리 보육원 출신이냐고 묻더라. 난 처음엔 네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줄 알았단다. 네 동기가 동영상을 보여줘서 오해는 풀었지만. 참. 사왕(死王)이라고 했니? 네이밍 센스 하고는.
“제가 직접 지은 이명은 아니에요. 탑에서….”
-그래. 오랜만에 목소리 들으니 그래도 마음이 놓이는걸.
"......."
-공자야?
-무슨 일 있는 거니?
나는 전화기를 꽉 잡았다.
가슴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목구멍 아래로 억눌렀다.
“여쭈어볼 게 있어서요. 원장님.”
-말해보렴. 아니, 잠깐만. 얼마나 진지한 얘기니? 그것부터 알려다오.
“무척 진지해요. 아마도 제가 원장님께 말씀드린 것 중에 가장….”
-그럼 2분만, 아니 3분만 기다리려므나. 내가 지금 소파에 누워 있거든. 일어나서 커피도 가져오고 좀 제대로 된 자세로 들으마. 3분만 끊지 말고 기다려.
“예."
생각해보면.
얼마나 지난한 삶이었을까.
한 명의 선인이 탄생하기 위해 그가 거쳐야 하는 악의들에 대해 상상했다.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선인들을 다 모으면, 능히 모든 악의를 전시할 수 있으리라.
“그, 보육원은 요즘 어때요? 몸 괜찮으세요?”
-말 돌리는 거 보면 정말 어지간히 진지한 얘기인가 보네. 괜찮아. 너 있을 때보다 선생님들도 늘었다. 난 이제 말이 원장이지 하는 일은 별로 없어. 후원금도 늘었고…. 아, 밥도 조금 맛있어졌어.
“다행이네요.”
-응. 지금 원장실에 앉았단다. 슬슬 말해보렴.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원장님. 혹시 학창 시절… 신서중고등학교란 곳을 졸업하셨나요?”
-.......
침묵이 가라앉았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나는 수면이 찰랑이는 소리를 엿들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원장님이 커피를 홀짝인 것이다. 원장님은 흑색의 물을 삼키고 있었다.
-응. 신서고를 나왔어. 지금도 그렇지만 꽤 명문이야.
“혹시.”
차라리 아니기를.
“고등학교 2학년 때, 반장을 하셨어요?”
트라우마가 꾸며낸 허상이기를. 내가 엿보았다고 생각한 과거의 광경들은 모두 다 거짓이어서, 원장님께선 그저 평범히 좋으신 분이고, 크게 불행하지 않은 학창 시절을 보내셨기를.
바랐다.
한동안 정적이 이어졌으며.
-맞아.
원장님의 목소리가 흘렀다.
-반장을 했었지. 벌써 수십 년이 넘었구나.
"......."
-.......
원장님도 나도 입을 다물었다. 나는 앞으로 말하게 될 것들로 인해 심장이 욱씬거렸다. 불온한 공기. 원장님 역시 불길한 기색을 느끼신 듯했고, 그래서 입술을 닫으셨다.
“원장님.”
-말하렴.
“2학년 반장을 하실 때. 혹시. 학교 옥상에서.”
-.......
“그런 사람이, 있었나요?”
숨소리가 멈추었다.
-그래.
원장님은 말했다.
-있었단다.
악몽은 현실로 증명되었다.
-한 번도 제대로 얘기를 나눠본 적 없지만. 응. 있었어.
내가 걸은 학교 복도도, ■■이 내려다본 옥상 철문의 쇠사슬도, 황무지같이 삭막한 운동장도, 하얀 섬처럼 플라스틱 쓰레기장 한복판에 둥둥 떠 있던 판자집도, 전부, 한 점의 거짓 없이 진실이었다.
오로지.
『죽지 말아줘. 제발. 부탁이야.』
『같이. 둘이서 같이, 다른 세상을 살자.』
오직 결말만 거짓이었다.
『응. 반장. 이 세상에서, 같이 살아남자.』
가장 거짓이어야 할 것들은 진실이었고.
가장 진실이어야 할 무언가는 꿈에 불과했다.
그것이 ■■과 원장님의 이야기였다.
“원장님….”
나는 간신히 말했다.
“그 사람의 이름, 기억하세요?”
이 세상에서 아무도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는 황야에서 건너온 자였다. 제국인들은 그를 공경하는 마음에 레판타라는 이름을 바쳤다. 그는 별자리를 죽이는 자였다. 탑의 사람들은 그를 살천성이라 불렀다.
그는 바깥세상에서 버려진 사람이었다. 아무도 그를 기억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기에, 이제 와서는 한 사람만이 그의 이름을 증언했다.
-김율(金律).
한 사람에 의해 누군가가 호명되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김율이란다. 공자야.
"......."
나는 두 눈을 감았다.
학교 복도에서 성기사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교실 맨 뒷자리. 창가에 앉은 학생, 기억하세요?』
『알다마다. 같은 반 친구 아닌가. 아마도 이름이,』
노이즈가 걷힌다.
『김율이었지.』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난 너한테 미안하지 않아, 김율.』
교실 창문에 바람이 불어올 때면 하얀 커튼에 가려질 만큼 작은 아이였다.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는 조용히 낡은 공책을 꺼내어 들여다보는 아이였다.
열리지 않을 걸 알면서도 철문의 쇠사슬을 당겨보는 아이였다.
『미안해, 김율. 미안해.』
수십 년 전에.
아직 내가 태어나지 않은 시간.
『미안해요.』
그런 아이가 이 세상에 있었다.
-공자야?
그리고 수십 년을 살아온 사람이 있다.
-혹시 지금 울고… 아니. 아니란다. 음. 아무튼, 김율 얘기는 어디서 들은 거니? 알고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
장학금을 받아 학교에 다닐 만큼 똑똑했다. 명문이란 곳에서 반의 1등을 고수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하루에 네 시간, 다섯 시간을 자가면서 공부했다. 그리하여 자기가 꿈꾸는 대로 미래를 그려나갈 사람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그 사람은 어떤 꿈을 꾸었을까.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었을까.
-네가 어떻게 그 아이를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정말로.
하지만 그 사람은 보았다.
인간을 목격했다.
짐승들을 목격했다.
죽음을 본 것이다.
『아무도 너를 신경 쓰지 않아. 아무도, 아무도. 아무도….』
그 순간, 한 사람의 시간은 멈추었다.
모든 이가 누려야 마땅할 선택의 자유가 사라졌다.
원장님에게 남은 삶이란 단지 무언가를 증명하는 여생이 되었다.
[그때 그곳에 김율이라는 아이가 살아 있었다]라고.
“원장님, 여기에 있어요.”
-무슨 말이야?
“김율이요. 원장님의 동창이요. 그 아이요.”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산자락 아래에 있는 쓰레기장에서 살았잖아요. 김율.”
-.......
“교실 맨 뒷줄. 창가 자리. 거기에 앉았잖아요.”
-.......
나는 말했다.
“교복 와이셔츠 깃에 때가 묻어 있고. 왜, 그때 학생회장 하던 학생이랑 사귀던 남자놈이 나쁜 새끼였잖아요. 친형이 가수를 하던 놈인데. 원래 김율이 가지고 있지도 않은 핸드폰을 억지로 떠넘겨서, 반 아이들 전체가 문자로 괴롭혔잖아요.”
-.......
“학교 뒤편에 사육장 있던 거 아세요? 토끼 기르고 닭 키우고. 그거, 원래 사육부에서 담당해야 하는데 외국인 여자가 갓난아기랑 투신하는 바람에 아무도 안 돌보게 됐어요. 그래서 김율이 돌보게 됐는데.”
-어떻게.
원장님의 목소리는 흔들렸다.
-공자야, 네가 그걸 어떻게.......
“원장님, 막으려고 했지요. 1학년 때부터 막으려고 하셨어요. 하지만 조사해보니 학교 이사진에 주범의 부모가 있어서 관두셨지요? 원장님이 다니던 교회의 당회장도 있었지요? 세륜교회요. 담임한테 말했지만 장학금 때문에 밀어붙이지 못하셨어요.”
-어떻게…….
“여기에 있습니다. 원장님.”
나는 전화기를 든 채 머리를 숙였다.
“여기에 있어요.”
-.......
긴 침묵이 고였다.
-나흘만.
원장님이 말했다.
-아니. 일주일만 기다려주겠니.
수십 년 전에 시간이 멈춰버린 어느 학생은, 조금 더 늙고 조금 더 지쳐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에 갈게.
4.
일주일은 순식간에 흘렀다.
그 일주일 동안 원장님은 가산(家産)을 정리했다. 탑으로는 누구나 입장할 수 있다. 하지만 바깥세상에서 지니고 있는 물건은 가져올 수 없다. 수십 년에 거쳐서 이룩한 것, 가진 것, 지켜온 것을, 원장님은 버리셨다.
“원래부터 은퇴할 생각이었단다.”
오랜만에 뵌 원장 선생님께선 예전보다 더 늙어 계셨다.
“후임이 되줄 선생은 진즉에 구해놨고. 지역에서 맡은 일감이 몇 개 있긴 하지만…. 탑에 오면 공무원들도 어쩌지 못하잖니? 이젠 알아서들 하라지.”
“어서 오세요. 원장님.”
“이젠 원장님이 아니지만. 마음대로 부르렴.”
원장님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갓 입탑(入塔)한 원장님에겐 당연히 이명이 없었다. 이명이 없는 사람은 아직 대도서관에 출입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방구석 도서관장]과 얘기를 나누어서, 특별히 원장 선생님을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와 보니까 네가 얼마나 출세했는지 알겠더라. 어딜 가도 공자 네 얘기뿐이야. 내가 입탑하니까 도시 입구에서 수십 명이 우르르 몰려와서 안내해주지 뭐니….”
“음. 제가 탑에서 좀 출세하긴 출세했죠. 이래 봬도 랭킹 2위입니다, 원장님.”
“공부는 동기들 중에서 제일 꼴등이었는데….”
원장님이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평강공주가 바보온달을 고치는구나.』
그 눈빛은 트라우마 속에서 보았던 것과 쏙 빼닮았다.
내가 알지 못할 감정에 휩싸인 동안, 원장님은 내 동료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아핫. 사왕을 키우신 분 되는군요! 저는 이단심문관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흑룡주라고 해요. 사왕에겐 언제나 신세를 많이 지고 있습니다. 사왕은 저희 길드의 부길드장이기도 합니다. 혹시라도 탑에서 생활하시는 동안 불편한 점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1층 바빌론의 치안을 담당하는 성기사입니다. 선생님. 바깥에서 보육원을 운영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처음 뵙는 자리에서 말씀드리기엔 어렵습니다만, 탑에도 항상 전문 인력이 필요합니다. 나중에 정식으로 선생님을 찾아뵙겠습니다.”
“예, 여러분.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원장님은 익숙한 듯 헌터들에게 응대했다.
한 차례 환영의 행렬이 지나가고, 나와 둘만 남게 되었을 때 원장님은 말씀했다.
“네 동기 중 한 명이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어서 이런 건 익숙해. 그때도 일주일에 수십 명이 찾아와서 축하드린다느니 뭐라느니 잔뜩 인사하고 갔거든.”
“예?! 누가요?!”
“김한비자. 기억하니? 지금 비례대표 의원이란다. 아마 이름을 개명해서 넌 알지 못했을 거야.”
나는 충격을 먹었다.
4000일을 회귀하기 전에도 듣지 못한 뉴스였다.
고향에 아예 관심을 끊고 살았으니까.
“세상에…. 말도 안 돼요. 걔 그냥 바보였는데…. 이름은 뭐로 개명했대요?”
“김한비.”
“그냥 마지막에 자만 땐 거잖아요? 역시 바보 아니에요?”
“이제 너도 어른이 되었으니 하는 말이지만, 공자야. 너도 바보였어. 어마어마한 왕바보였지.”
“엑. 저, 그래도 좀 똑똑한 편 아니었습니까?”
“나는 너희들 키우기 전까지는 왜 사람들이 수학을 잘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단다. 사왕아. 탑에선 시험 성적으로 랭킹이 정해지지 않는 걸 참 다행인 줄 알렴.”
배후령이 뒤에서 낄낄거렸다.
-오늘 공자놈 흑역사를 잔뜩 듣게 되겠구만. 좋다, 좋아! 더 말해라!
원장님과 나는 환담을 나누었다.
우리의 대화가 바깥으로 중계되는 걸 막기 위해, 도서관장에게 미리 말해두었다. 도서관장은 내 요청을 들어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책갈피 메이드들이 홍차와 다과를 서빙해주었다.
“영상으로는 봤지만 정말 이상한 세계구나. 여긴….”
원장님은 책갈피 메이드를 수상쩍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래서.”
원장님의 시선은 광활한 대도서관을 한 차례 훑었고, 마침내 내 얼굴에 머물렀다.
“그 아이는, 어디 있니?”
나는 원장님에게 모든 것을 말씀드렸다. 나의 능력에 대하여. 트라우마에 대하여. [레판타 아이김]이라는 사람과 [살천성]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
원장님은 시종일관 무표정하게 내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무표정이 무감정을 뜻하진 않았다. 한 시간이 넘도록, 원장님은 홍차에 입 한 모금 대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믿기 어려운 얘기들이구나. 어느 것이든.”
“예."
“하지만 네가 김율을… 아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어릴 때부터 그랬듯 원장님의 표정은 읽기 어려웠다.
그러나 트라우마를 겪고 난 지금은 알 수 있었다.
원장님께선, 두려워하고 계셨다.
“졸업 앨범에도 김율은 실리지 않았어. 실을 수 없었지. 하지만 나는, 앨범의 어느 자리에도 김율에 대한 흔적이 없다는 것이…. 생각 해보렴. 공자야. 빈 자리라도 마련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
"......."
“왜 앨범 사진들은 또 그렇게 밝게 찍는지. 그놈들은… 그놈은…. 어떻게 웃을 수 있는지,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단다. 그래. 지금도 잘 살고 있겠지.”
원장님은 무심한 눈빛으로 찻잔의 수면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한참 전에 식어버린 찻물을 원장님은 조용히 들이켰다.
그리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괜찮아."
"......."
“그 아이를. 아니, 그 아이의 흔적을 불러주려므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귀환생(百鬼還生).”
그림자가 퍼졌다.
꿈틀.
그늘은 살아서 움직였다. 구정물과 같은 검은색 물이 일렁였고, 뒤이어, 물살이 사람의 형태를 갖추었다. 물결이 은빛의 머릿결로 변하고 웅덩이는 단정한 옷차림을 이루었다.
"......음."
레판타 아이김.
살천성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상정하지 못한 상황이로군.”
은발의 남자는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납치인가? 인형을 납치해서 강제로 각성시켰는가. 무력은… 쓸 수 없군. 인형의 시스템을 손보았거나 매우 강력한 정신마법이 적용 되었다고 추측한다.”
그 남자는 흑발을 잃었다. 이름을 잃었다. 기억을 잃었다. [김율]은 단지 그의 잊혀진 출발점에 불과했으며, 따라서 눈앞의 남자는 [김율]과 완전히 다른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는 레판타 아이김이었다. 살천성이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그를 [김율]이라고 부를 자격이 없었다.
“……김율 씨.”
그 남자의 출발점에 있었던 한 명의 증인을 제외한다면.
살천성이 원장님을 돌아보았다.
원장님은 천천히, 도서관 바닥에 무릎을 굽혔다.
“저는 김율 씨를 죽인 사람 중 한 명입니다.”
"......."
“오래 전부터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정말로….”
원장님이 이마를 수그렸다.
“죄송합니다.”
살천성의 얼굴이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