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139화 (139/400)

139화.  < 지각생(運刻生). (1) >

1.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는 주인공들은 마치 별자리와 같이 반짝였다.

나는 밤하늘에 빛나는 성좌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에게 별이란 주인공들. 그들이 펼치는 이야기야말로 나의 찬란한 별자리였다. 아. 우주에 별빛이 무수했고, 삼라만상에 이야기는 무한했다.

-조금 더 이야기를 보고 싶다.

나는 무심코 별빛에 손을 대었다.

-조금만 더.

단지 그뿐이었다.

2.

도서관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만생의 대도서관. 한 권 한 권이 세계를 담아낸 곳. 수많은 세계에 무수한 인물이 살았으며, 인물마다 이야기를 품었다. 그중 하나의 책, [레판타 아이김]이라는 세계의 두 인물이 이곳에는 있었다.

"......."

살천성은 조용히 원장님을 내려보았다.

“나를 죽인 사람 중 한 명이라고 말했나?”

“네. 김율 씨.”

“이상한 말이로군.”

살천성의 목소리는 삭막했다.

“나의 죽음은 153년 7개월 9일 전에 벌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나를 죽인 자의 이름은 검제다.”

살천성이 품안에서 낡은 수첩을 꺼내었다. 그 일기장은 [김율]이 도달한 종착역. 자신이 지나친 과거를 흔적으로 남겨놓을 뿐, 결코 기억하진 않겠다는 천명.

“일기장에 기록된 검제의 인상착의는 그대와 다르다.”

설령 백귀환생에 잡아먹혀도 내 스켈레톤들이 끝끝내 단검만은 놓지 않듯.

살천성 역시 한 권의 낡은 수첩만은 가지고 있었다.

"그대는 검제의 후인(後人)인가?”

"......."

“내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검제는 누군가에게 사과하는 성격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사과를 받으려는 성격도 아니다.”

원장님은 깨달았을 것이다.

“나는 판단한다. 그대는 검제의 후인이 아니며, 나를 죽인 사람 중 한 명도 아니다. 그대가 내게 사과해야 할 까닭 또한 없다.”

자신이 이미 늦었다는 것을.

“따라서 나는 그대의 사과를 받지 않겠다.”

"......."

“무엇보다 나의 이름은 레판타 아이김이다. 이명은 살천성이다. 그대는 나를 보며 김율이라 불렀지. 그러나 내가 김율이라고 불린 기록은, 일기장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다.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것은 아닌가?”

“김율 씨.”

원장님의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

“김율은 당신이 레판타 아이김이라고 불리기 전에 가졌던 이름입니다. 당신이 그 일기장을 얻기도 전에, 한참 예전의 과거에 가진 이름입니다. 당신이 본래 살던 세계는……."

“소용없소이다.”

누군가가 내 옆으로 다가와 중얼거렸다. 도서관장이었다. 그는 살천성과 원장님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애툿한 광경이오. 그것은 본좌도 인정하겠소. 한 쪽은 시간이 봉인된 피해자. 다른 한 쪽은 시간이 박제되어버린 방관자라. 아아,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구료….”

나는 도서관장을 돌아봤다.

[ 방구석 도서관장이 환희하며, 절망합니다.]

도서관장은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슬퍼하는 것 같았다. 기뻐하는 것도 같았다. 도서관장의 눈매는 처량하게 내려앉았으나 그의 숨결은 붉게 상기되었다.

“허나, 사왕이여. 너무나도 많은 것이 늦어버렸소. [살천성]은 절대로 구제받을 수 없다오.”

"......."

“이제 와서 사과를 받은다 한들 의미가 없다오. 살천성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오. 외형도 사고방식도 이미 김율이던 시절과는 완전히 달라진 거요. 어찌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사과받을 수 있겠소? 어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용서할 수 있겠소이까?”

“당신.”

나는 나직하게 말했다.

“제가 회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요?”

도서관장이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오.”

“어떻게? 제가 회귀하면 당신도 같은 시간을 겪습니까?”

“어허. 일이 그런 식으로 돌아가진 않는다오. 특히 당신이 가진 [회귀자의 태엽시계]는 무척이나 특별하여서, 설혹 성좌라 하더라도 그 위엄에 쉬이 범접할 순 없소. 다만 성좌들이 그러하듯 본좌도 깜찍한 권능을 지녔을 뿐이오.”

도서관장이 손가락을 튕겼다. 탁! 그러자 한 권의 책이 날아왔다.

+

[등천도시(登天都市) 이야기]

+

그건, 대도서관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성좌가 보여준 책이었다.

“기억하시오? 그대들의 세계가 담긴 책이라오. 아직 멸망하지 않았으니 묵시록이라 부를 수는 없지.”

도서관장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이제 한 번 짐작해보시구려. 본좌가 과연 누구를 [등천도시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지정했을 것 같소?”

"......."

과연.

“저로군요.”

“그렇소. 정답이라오!”

“제가 겪는 사건들이 모조리 그 책에 기록되고 있는 겁니까? 그래서 제가 어떤 스킬을 가졌고, 제가 언제 어떻게 회귀했는지, 당신은 전부 알고 있는 거고요?”

“아아.”

도서관장은 히죽거리며 [등천도시 이야기]의 페이지를 넘겼다.

“라비엘 이반시아와 그대가 나눈 시간의 입맞춤… 그 사랑과 교감은 실로 달콤했다오!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난관을 풀었더구려. 본좌가 정말이지 좋아하는 장면이 되었소.”

"......."

“물론 그대가 이번에 겪은 ‘트라우마’도 이 책엔 적혀 있소. 그러기에 특별히, 이명을 지니지 않았음에도 저 인간의 출입을 허락했던 것이오.”

도서관장이 말한 저 인간이란 원장님을 뜻했다. 지금도 원장 선생님은 필사적으로 살천성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었고 무슨 일을 겪었는지. 하지만 살천성의 무표정한 낯은 변하지 않았다.

“그대는 분발하였소. 사왕.”

도서관장이 말했다.

“노력했소. 애를 썼소. 최선을 다했소. 그러나 살천성은 이미 늦어버렸다오. 제아무리 등장인물들이 최선을 다한다 해도 최고의 결말에 도달하기란 어려운 법. 이것이 살천성에게 허락된 노말 엔딩이라오.”

도서관장은 슬퍼하고 있었지만.

그보다 조금 더 기뻐하고 있었다.

“배드 엔딩을 제외하면, 살천성이 그나마 도달할 수 있는 엔딩이지. 애석하게도 살천성 본인은 모르겠지만 말이오. 그대의 노력, 원장의 후회, 모든 것이 무력하구려. 아아. 살천성은 성좌들을 죽여나가는 살육병기로 남을 것이오. 영원히….”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렇소. 어떠한 수를 쓰더라도.”

도서관장은 천천히 [등천도시 이야기]를 품속에 집어넣으려 했다. 그 순간, 나는 손을 뻗어서 도서관장의 손목을 잡았다. 도서관장이 움찔했다.

“그렇게 자신이 넘친다면.”

나는 도서관장을 빤히 내려보았다.

“우리, 내기할까요.”

“내기…?”

“저는 김율의 시간과 살천성의 시간을 이을 겁니다. 김율이 살천성이 된 것처럼, 살천성이 김율이 되도록 할 거예요. 그러면 원장 선생님의 사과를 받을 수도 있겠지요.”

“오활하구려. 말씀드리지 않았소이까? 단순히 불가능한 일……."

“그러니까.”

나는 도서관장의 손목을 더 강하게 쥐었다.

“내기하자고.”

"......."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 중 한 명이라면서요. 살천성이. 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천성의 기억을 되찾아줄 겁니다. 당신도 도우세요. 뭐, 돕는다고 해서 너무 전력을 다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레판타 아이김 서사시]에 절 보내줬던 것만큼만 도와주면 됩니다.”

“으흠.”

성좌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 도와드렸는데도 실패한다면? 본좌는 무엇을 얻게 되오?”

"저를 10년 동안 마음대로 다루십시오.”

도서관장이 멈칫했다.

“제 눈썹을 뽑아서 보관하고 싶다 했지요? 하세요. 손톱을 깎고 싶다고 했던가. 그것도 하십시오.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드릴테니, 10년 동안 마음껏 가지고 노십시오.”

도서관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엇이든, 말이오?”

“그래.”

“무, 무서운 말을 하는구려. 사왕. 이래 봬도 본좌는 그대들 앞에선 상당히 예의를 차리고 있소. 만일 본좌가 마음대로 해버리면, 그건, 실로 굉장한 일이 되어버린다오. 당장 책갈피 메이드들만 봐도….”

“내기. 할 겁니까, 안 할 겁니까?”

도서관장이 입술을 달싹였다. 잠깐이지만 그의 눈동자가 탐욕으로 물들었다. 살천성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그가 애정하는 인물이었으므로. 도서관장은 먹잇감을 노리는 뱀과 같이 날 훑어보았다.

“본좌는, 무개입 원칙을 고수하오만.”

도서관장이 침을 삼켰다.

“등장인물이 먼저 요청한다면 얘기가 다르지. [소르므윈 학원 이야기]에 등장한 집사의 소원을 이뤄준 것도 그 때문이오.”

"......."

“좋소. 사왕이여. 그대를 도와드리겠소. 단, 그대가 살천성을 김율로 잇는 데 실패한다면… 그대의 10년을 앗아가서 듬뿍 맛보겠소이다."

오케이.

나는 도서관장의 손목을 잡은 채, 살천성과 원장님한테로 걸어갔다. 뚜벅. 뚜벅. 사람을 물려서 우리들밖에 없는 도서관 구역에 발소리가 울렸다.

-야. 야! 좀비야. 미쳤냐? 왜 그딴 내기를 해?!

배후령이 호들갑을 떨었다.

-너 지금 백프로 이길 자신 있어서 내기하는 거야? 어? 저 은톨이가 너보고 최애캐니 뭐니 받들어주니까 눈이 돌아간 모양인데, 저놈도 성좌야. 성좌. 그것도 급이 되게 높은 별탱이라고! 저런 새끼한테 영혼을 맡기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괜찮아요. 백프로 이길 자신이 있어서 하는 겁니다.’

나는 오래도록 ‘탑’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데에 이유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내게 탑은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세워진 것 같았다. 탑이 있어서, 있어준 덕분에, 바깥세상을 등진 목숨들은 다시 한 번 더 인생을 시작해볼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더 삶을 사는 것.

누군가는 그것을 환생(還生)이라 부를 테고, 누군가는 전생(轉生)이라 부르겠으나.

“살천성.”

어떤 사람들에게 그것은 재회를 의미할 것이고.

“원장님.”

그리하여 멈춰버린 시간들은 재생(再生)되는 것이다.

“저랑 같이 청춘물이나 한 판 찍어요.”

살천성과 원장님이 나를 쳐다보았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살천성이었다.

“무슨 말인가?”

“살천성. 당신은 기억이 사라진 탓에 원장님의 사과를 받아주지 못하고 있어요. 받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만약 사과를 받아줄 수만 있다면, 받아주고 싶을 겁니다.”

"음."

살천성이 일기장을 펼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하다. 잠시 이야기를 나눈 것에 불과하지만, 내 앞에서 무릎을 꿇은 사람은 심성이 매우 곱다. 올곧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올곧음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삶을 인내하면서 얻어낸 올곧음이라 판단한다. 가능하다면 사과를 받아주고 싶군.”

“원장님.”

나는 원장님을 바라보았다. 원장님은 아직도 도서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만약에 원장님께서 김율 씨한테 사과를 할 수 있다면….”

“목숨이라도.”

원장님은 내 말이 이어지는 것을 기다리지도 않고 즉답했다.

“내 영혼이라도 기꺼이 바칠 수 있단다.”

“……예. 감사합니다.”

나는 원장님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늙은 살집이 붙은 손. 그제야 내가 아주 오랜만에 원장님의 손을 잡아보았다는 걸 기억해냈다. 정말로 옛날에, 원장 선생님과 함께 놀이터에서 모래탑을 쌓아올린 기억이 있다.

‘원장님 덕분에 가능해진 이야기예요.’

당신께서 잊지 않으셨기에 내가 보육원에서 길러졌다.

‘다른 사람들처럼 원장님까지 김율을 잊어버렸다면, 이런 순간도 올 수 없었어요.’

김율의 삶이 원장님의 삶을 자았다. 원장님의 삶이 나의 삶을 만들었다.

이제 나의 삶이 살천성의 삶을 거두어서, 간신히 세 명이 이곳에 자리하게 되었다.

우리 세 명은 인연(因緣)으로 이어져 있다.

‘절대로… 무의미해지게 내버려두지 않겠습니다.’

조금 늦어버렸지만.

나를 키워주신 분께 은혜를 갚을 시간이 왔다.

“도서관장.”

나는 원장님의 손을 꾹 잡고 성좌를 돌아보았다. 도서관장은 자기가 내기에서 승리할 것을 확신하고 있는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말씀하시구려. 사왕! 본좌가 애정해 마지않는 사냥꾼이여.”

“나와 살천성. 원장 선생님. 이렇게 세 명으로 다음 스테이지를 공략하겠습니다.”

“오호!”

도서관장이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그건 뭐랄까, 기특한 얘기구료. 다소 늦었으나 인제 와서 세 사람의 인연을 다시 쌓아올리겠다는 말씀이오? 어허. 뭐, 가능한 엔딩이긴 하오. 일종의 열린 결말이지!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

“아니.”

나는 남은 한 손을 뻗어서, 한 권의 책을 뺏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등천도시 이야기].

내가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펼친 책.

“저는 다음 스테이지로 이 책을 고르겠습니다.”

“흠……?”

도서관장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미안하오. 이해하지 못했소. [등천도시 이야기]는 이미 지금 이곳에서 실시간으로 이루어지고 있소이다? 스테이지로 만들어서 공략 한들 아무런 의미가 없소.”

“당신이 말했잖아요. 이 책에는 내가 주인공으로 선택되어 있다고. 그래서 내가 겪은 일들이 전부 기록되어 있다고요.”

“그러하오만…?”

“제가 겪은 사건 중 하나로 우리 세 명을 보내주십시오.”

“어떤 사건을 말씀하시는 것이오?”

“트라우마.”

"......."

뚝.

도서관장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나는 눈앞의 성좌를 담담히 바라보았다.

“당신이 방금 전에 말했습니다.”

『물론 그대가 이번에 겪은 ‘트라우마’도 이 책엔 적혀 있소.』

“그 트라우마는 비극으로 끝났지요. 세계가 멸망했어요. 비록 환상에 불과했다고는 해도, 공허에 집어 삼키어져 모든 인물들의 이야기가 끝나버렸습니다. 도서관장. 당신의 분류에 따르자면, 그 트라우마도 흠잡을 데 없는 [묵시록]입니다.”

“아……."

도서관장이 입을 벌렸다.

경악에 잠긴 눈빛으로 도서관장은 나를 올려봤다.

“사왕, 그대, 설마……."

“신서중고등학교의 묵시록으로 저희 세 명을 등장시키세요. 당연히 살천성은 김율로, 원장님은 반장으로. 저는 가해자로.”

기억을 잃어버렸기에 사죄를 받지도 못하고, 용서를 하지도 못한다면.

“그리고 [몰입도]를 허락하십시오.”

기억을 되찾게 하면 그만이다.

마치 이단심문관이 금사매 영애에게 몰입하여 똑같은 인물이 되었던 것처럼.

내가 집사에게 몰입하여서, 점점 더 집사의 기억에 매몰되었던 것처럼.

살천성이 김율에게 몰입하면---.

김율의 기억이 살천성에게 이식될 것이니까.

살천성은 김율의 시절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

“도서관장. 아니, 하무스트라.”

그렇다. 우리는 조금 늦어버렸다.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책을 펼치십시오.”

도서관장은 숨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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