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145화 (145/400)

145화.  < 친구. (1) >

1.

“도와준다고?”

“응. 뭐, 너무 선심 쓰듯이 얘기하면 안 되겠지만….”

반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표정이 다양한 아이였나?’

약간 낯설었다. 생각해보면 1학년 때부터 같은 반이었지만 반장과는 별로 이야기를 나눠본 적 없었다.

“나 이번에 학생회장 출마하잖아. 대학교 추천받으려고 나가는 거지만… 아무튼 회장은 회장이니까. 반에서 생긴 문제 정도는 해결해 봐야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진 몰라도 한 번 김율한테 물어볼게. 김율 핸드폰 번호 알아?”

“어…. 잠깐만.”

전화번호를 뒤져보는 동안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반장이 김율의 번호를 모른다는 것. 나와 함께 동영상을 돌려본 동급생들은 모두 김율 번호를 안다. 즉.

‘반장은 범인이 아니다.’

이것도 전부 연기일 가능성이 있지만.

‘그럴 리가 없지. 평범한 범생이인데. 얘가 녹음파일을 구할 방법도 없고.’

반장은 안전패다. 확실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아” 하고 반장이 말했다.

“아니다. 이런 얘긴 전화로 하면 좀 그러겠다. 그냥 내가 내일 등교하고 나서 김율한테 몰래 물어볼게. 그걸로 됐지?”

“어어. 그러게. 전화는 아니긴 하지. 음, 도와주려고 해서 고맙다.”

“고마우면 여친 말고 나한테 깨끗한 1표 부탁해.”

“……오냐.”

어차피 여자친구랑은 오늘부로 끝났다. 내가 여친과 헤어졌다는 걸 반장은 모르는 듯했는데, 이 또한 용의선상에서 반장을 지우는 데 한몫했다.

‘그래.’

나는 희망을 품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아무것도 안 끝났어! 날 지지해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걔를 이용해서 작전을 세워나가면 돼. 이런 분위기도 잠깐이다…. 시간이 좀만 지나면 친구들도 평소대로 돌아올 거다.’

그날부터 반장은 정말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 건지 알 순 없었지만, 그동안 쌓아올린 [모범생] 이미지를 적극 활용하는 것 같았다.

“좋아. 김율이 얘기 듣고 왔어.”

다음날 점심시간에 반장이 말했다. 오늘도 나는 식당에 내려가지 않았다. 동급생들이 나를 은근히 따돌리는 분위기는 계속되었고, 난 거기에 휘말리기 싫었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우리 둘이 비밀회의를 가졌다.

“진짜? 뭐래?”

“친구들 보는 앞에서 네가 정식으로 사과하래. 일대일 사과는 절대 안 받겠대. 네가 뭘 잘못했고 얼마나 잘못했는지, 애들도 다 알 수 있게 진심으로 사과하면, 자기도 용서해준대.”

이런 미친놈.

‘그게 무슨 사과고 용서냐?’

단순히 나한테 망신을 주려는 거잖냐. 동급생들도 그렇거니와 김율도 다를 게 없다. 좁쌀만한 권력이라도 맛보고 싶어서 이 지랄을 떠는 거다.

“사과에서 ‘진정성’이 안 느껴지면 용서는 없다고 세 번이나 말하더라. 으음. 얼굴에 표정 하나 없는 게 너한테 엄청 화난 거 같았어.”

‘돌아버리겠네.’

그냥 100만 원 주고 끝낼 순 없으려나?

거지 새끼니까 받을 거다.

“진정성이 뭐야? 뭐 어떻게 해야 진정성이 느껴지지?”

“글쎄. 나도 그건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다른 애들이 보는 앞에서 사과하는 게 중요하다니까. 한 번 미리 사과문을 써보면 어때?”

반장이 살짝 귀찮다는 느낌으로 말했다.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복잡하다는 사실을 비로소 눈치챈 걸까.

젠장. 이쪽은 학창생활은 물론이고 장래까지 달려 있다. 인생이 걸렸단 말이다. 이왕 착한 척을 하기로 결심했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라!

“그러게. 사과문을 써봐야 겠다. 하아….”

나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황은서. 인생 연기를 펼칠 순간이다.

“진짜, 내가 왜 멍청하게 김율을 괴롭혔지? 애들이 다 하니까 나까지 별 생각 없이 끼어들었지 뭐냐. 젠장.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자아. 어서 나한테 동정심을 느껴라. 날 동정해라. 난 인간적인 놈이야. 후회도 할 줄 알고 잘못을 뉘우칠 줄도 안다. 그렇지만 죽을죄를 짓진 않았다! 어서 나를 불쌍하게 여겨라!

“김율이 나한테 화내는 것도 당연해. 얼마든지 애들을 말릴 수도 있었는데, 하아……. 이제 와서 미안해지네. 마음만 같아선 전교생 앞에서 사과하고 싶다. 진짜.”

"......."

반장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물처럼 깊은 눈동자. 쉽게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하지만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아이디어가 떠올랐어.”

반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

“네가 김율한테 용서받을 방법이 생각났어. 잠깐만 기다려. 나 교무실 좀 다녀올게.”

반장은 후다닥 교실을 뛰어 나갔다. 어이가 없었다. 뭐하는 자식이야, 쟤? 나는 빈 교실에서 멍하게 벗겨먹는 고●스 빵을 뜯어먹었다. 빵을 반쯤 갉아먹었을 때 반장이 돌아왔다.

“좋아! 선생님한테 확인받고 왔어.”

“뭘?”

“학생회장 연설 말이야. 후보가 아닌 애도 연단에 올라갈 수 있냐고 여쭸거든. 딱히 안 된다는 규정은 없다고 하시더라.”

반장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새 화장실까지 다녀왔는지 입가에 물기가 묻어 있었다.

“네가 말했잖아. 할 수 있으면 전교생 앞이라도 사과하고 싶다고. 안 그래도 네 여친 이기려면 연설문을 어떻게 짜야 할까 고민했는데, 잘 됐어.”

“어….”

“잘 들어봐.”

반장이 자리에 앉아 노트를 꺼내들었다. 휙, 휙! 예스러운 필기체가 지면에서 춤추었다.

“황은서 네가 김율한테 미안하다는 요지의 사과를 해. 그러면 내가 마이크를 넘겨 받아서, [제가 학생회장이 되어서 만들고 싶은 학교란, 서로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하는 학교입니다]라는 식으로 연설을 이어나가는 거야. 알겠어?”

잘 모르겠다.

"스토리를 입히는 거지. 그냥 단순히 공약들만 내세우는 연설이 아니라!”

"......."

“네 여친 연설이 어떨지 몰라도, 걔, 엄청 부자잖아. 빤히 보여. 아마 사비를 들여서라도 전교 화장실에 향수를 설치하겠습니다, 휴지 떨어지는 일 없게 하겠습니다, 그런 거로 꼬실 거야. 공약 대결로 가면 나한테 승산이 제로니까…. 그래. 스토리로 싸움을 걸자.”

반장의 노트에 문구가 적혔다.

+

문제를 해결하는 학생회!

대화를 이어주는 학생회!

학생 여러분의 비상 소통 창구가 되겠습니다!

+

“어어어….”

반장이 눈을 반짝였다.

“어때!”

무지 느끼한데.

“이제 시대는 스토리텔링의 시대거든! 화장실 향수, 휴지, 그런 건 이제 질렸어. 초등학생 때부터 맨날 들어온 공약이잖아. 이게 먹힐 거야. 스토리로 가자!”

"음."

하긴. 학생회 선거가 원래 느끼한 말들이 나오는 행사지. 소통이니 뭐니 그럴싸한 말이라면 아무거나 갖다 붙인다. 지금 반장이 내놓은 아이디어가 나빠 보이진 않는다.

‘그보다, 이 새끼…….'

난 새삼스러운 눈으로 반장을 봤다.

‘자기 선거 말고는 아예 관심이 없구만?’

아무리 반장이라지만 왜 나를 이렇게 도와주나 싶었다. 이기적인 새끼. 처음부터 끝까지 선거에 날 이용해 먹는 것만 생각하는군.

반장 이놈은 지금 반에서 벌어지는 일에 무관심하다. 김율이 뭔 짓을 당했는지, 내가 왜 생까지는지, 그냥 흥미가 없다. 선거에 써먹을 수 있겠구나 판단해서 관여할 뿐. 심지어 선거에 출마하는 이유조차 대학교에 잘 들어가기 위해서다!

‘그래.’

하지만, 난 지금 반장을 보면서 완전히 의심을 거뒀다.

‘이런 새끼가 오히려 말이 통하지.’

반장은 나와 동류(同類)다. 미래를 보고 있다. 장래를 염려한다.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서 좋은 인생을 살겠다는 의지가 있다. 서울대 추천권을 받겠다며 진지하게 학생회장을 노리는 놈이 얼마나 있겠는가.

‘나랑 비슷하다.’

괜히 별다른 이유도 없이 착한 척하거나, 그런 놈들보다는 훨씬 믿음직스럽다. 사회에 나가서도 분명히 성공할 녀석이다.

“그런데 선거 며칠 안 남았잖아? 진짜 나 때문에 연설문 바꿔도 괜찮겠냐.”

“괜찮아. 이기는 게 중요한 걸.”

반장이 미소를 지었다.

“포스터 만들고 그런 거까지 다 합치면, 선거에 쏟아부은 시간만 20시간이야. 20시간 공부하는 걸 포기하고 달렸는데 지면 안 되지.”

‘이 새끼. 역시 사고방식이 나랑 비슷하네?’

더욱더 믿음이 간다.

동류라는 생각에 친근감마저 느껴진다.

“알겠어, 반장.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은 확실하게 도와줄게. 대신 너도 나 도와줘야 한다? 반 애들한테 내가 화해하고 싶단 말 좀 전해줘. 그동안 미안했고, 될 수 있으면 다시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응. 좋아. 서로 윈윈 해야지.”

우리 두 사람은 손을 잡았다.

“잘 부탁한다.”

“나야말로!”

나는 반장의 선거를 도왔다. 대놓고 앞에서 도와주진 못해도, 연설문을 손봐주고 선거 문구를 같이 짰다.

반 친구들의 따돌림은 변함이 없지만.

어찌됐든 [학교에서 할 일이 있다]는 것만으로 심리적 안정이 많이 된다.

“헤에. 글 잘 쓰네?”

반장은 내 사과문과 연설문을 읽고 만족했다. 방과후. 노을이 저미어든 2학년 5반 교실에 우리 둘만 남았다.

“이제 네가 연기만 잘하면 우리가 무조건 이기겠다.”

“연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연기?”

“응? 황은서 너 사실 김율한테 하나도 미안하지 않잖아.”

“아, 괜찮아. 뭐라고 탓하는 거 아니니까. 난 사과하는 마음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과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 애당초 사과하는 마음이라고 해봤자 그게 뭔지도 모르겠어.”

반장은 내 사과문을 펄럭펄럭 넘겼다.

“쪽팔린 걸 무릅쓰고 전교생 앞에서 사과해주는 거잖아. 그거만큼 진정성 있는 사과가 어딨어? 아무리 미안하다 미안하다 말하고, 아무리 미안함을 느낀들 뭐해. 진짜 행동이 뒤따라야지. 그런 점에서 황은서 네가 다른 애들보다 백배천배 나.”

음.

으음....

“내가 어제도 김율한테 슬쩍 물어봤거든. 혹시 지금까지 제대로 사과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냐고. 그런데, 없다더라? 심지어 어떻게 하면 용서해주겠냐며 물어본 사람도 너 혼자라던데? 참. 우리 반 애들도 염치가 없지.”

“반장… 너….”

정말로 말이 통하는 애구나.

좀 감동했다.

“아, 물론 내 입장에선 잘 됐지. 만약 은서 네가 [내 여자친구 찍어! 무조건 여자친구 찍어!] 하고 말하고 다녔으면 난 수십 표는 잃어버리니까. 네가 은따당하는 거 불쌍하긴 한데 솔직히 난 좋아.”

“와아, 이런 쓰레기 새끼….”

“응. 고마워. 원래 사람은 다 쓰레기 아니야?”

나는 웃어버렸다. 맞는 말이다. 여자친구한테 차인 이후로 모처럼 웃음이 나왔다.

‘진짜 뭘 좀 아는 녀석이네.’

인간은 쓰레기다. 짐승이다. 만일 인간이 얌전해 보인다면 단순히 짐승에서 가축으로 전락해서 그럴 뿐. 이걸 되도록 빨리 알아차리는 놈만이 살아남는다.

[현재 당신의 몰입률은 100%입니다.]

그러면 염소 새끼가 아니라 하이에나가 될 수도 있다. 운 좋으면 사자까지 된다.

성공할 수 있다.

인간 관계가 어렵다고 하소연하는 놈들은, 사람을 자꾸 사람으로 보려 해서 그런다. 축생으로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친구가 없는가? 너랑 붙어 있어봤자 볼 이득이 없어서다. 하다못해 같이 놀면 스트레스라도 풀려야지. 친구가 많은가? 너랑 있으면 얻을 이익이 많아서다.

그뿐.

진정한 우정이란 오직 진정한 이익에서 나온다.

‘얘랑 있으면 적어도 손해는 안 보겠다.’

나는 씩 웃었다.

“반장. 우리 친구 먹을래?”

반장이 코웃음을 쳤다.

“일단 학생회장에 당선되고 나서. 지금도 연설문이 괜찮긴 한데 좀 더 다듬어봐. 나 지금 반 애들이랑 너 사과시키려고 고생하고 있거든? 당선 안 되면 헛수고야.”

“알았어. 알았어! 오케이. 내가 진짜 연설문 끝내주게 써준다! 진짜 그냥, 사과문 읊으면서 눈물 콧물 다 흘린다! 우리 반장 신서고 학생회장으로 만드는 데 나 황은서, 아예 몸을 불사지르마!”

“예. 말씀 잘 들었고요. 잘 부탁할게요, 은서 씨.”

우리는 쿡쿡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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