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 친구. (2) >
‘야아, 사람이 가만히 앉아서 뒈지라는 법은 없구나!’
전화위복.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우정이란 걸 느껴본 듯하다.
‘어려울 때 손 내밀어주는 사람이 진짜 친구라더니.’
그래. 반성하자. 내가 그동안 너무 오만했다.
사람이 살면서 실수를 할 수도 있다. 너무 애들을 믿었다! 친구 중 한 명이 녹음파일을 빼돌려서, 나한테 엿을 먹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괜찮아. 아직 살아갈 날은 많이 남았어.’
난 이제 고등학교 2학년에 불과하다. 이제부터 살 날이 60년도 더 된다. 앞으로도 실수들을 저지를 것이며, 그때마다 좌절할 위기를 겪을 거다.
‘하지만 언제나 반전의 기회는 있다.’
그러니 쉽게 실망하지 말자. 너무 일찍 모든 걸 포기해버리지 말자. 나 자신을 믿자. 친구를 믿자! 쓰레기 같은 가축 새끼들과 다르게 나는 강하다! 강한 인간이다.
‘인생은 경험이다.’
이번엔 [좋은 경험]을 한 셈 치자.
‘차라리 사회로 나가기 전에 당해봐서 다행이야. 맞아. 그렇게 생각하자고. 사업이 실패한 것도 아니다. 경찰에 잡힌 것도 아니다. 그냥 애들한테 따돌림 좀 당한 거잖아? 그것도 선거만 끝나면 풀어질 테고.’
정말로 좋은 경험이다.
‘여자친구한테 미안하다는 얘기도 사과문에 슬쩍 끼워놓자. 대놓고 언급하면 싫어할 테니까 아는 사람만 알아듣게.’
음. 고객들한테도 민폐를 끼쳐서 죄송하다고 말하자.
‘내가 진정으로 사과해야 할 사람은 사실 고객들이지. 김율이 아니다. 김율이랑은 사과를 받든 말든 그거로 끝이지만, 고객들은 언제든 다시 내 손님이 되어줄 수 있는데. 정성을 들여서 사과하자.’
학생회 선거 당일---.
나는 마침내 걸작을 완성했다.
+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저는 2학년 5반 황은서입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
제가 선거에 출마하지도 않았으면서 오늘 연단에 올라온 이유는, 여러분께 고백할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서고등학교 학생 여러분!
저는 무서운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저 황은서는, 학급 친구를 왕따하는 데 동참했습니다.
(잠깐 2초 멈춤.)
학급 친구가 왕따당하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았습니다. 대처는커녕, 애들한테 끼어서 저 자신도 왕따에 참여했습니다. ‘장난’이라면서 몸을 쳤습니다. ‘농담’이라면서 욕을 하거나, 비웃었습니다.
(사이.)
신서고 학생 여러분.
지금까지 저는 그것이 잘못인 줄 몰랐습니다. 그저 친구끼리 치는 장난이고 농담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장난’으로 사람을 상처입혀선 안 되고, ‘농담’으로 사람을 비웃어선 안 됩니다.
잘못을 잘못인 줄도 몰랐다는 것.
모르면서 상처를 줬고, 모르면서 비웃었다는 것.
그것이 저의 가장 큰 잘못입니다.
이번에 학생회 선거에 출마한 후보가 저에게 잘못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저는 ‘내가 뭘 잘못했냐’고, 장난 좀 치고 농담 좀 한 게 무슨 잘못이냐며, 후보의 말을 안 들었습니다. 그러나 후보는 2주일 동안 방과후 교실에 남아서 저와 이야기했습니다.
‘너는 사과해야 한다.’
‘너는 사과할 수 있다.’
‘진심으로 사과하면, 친구에게도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반장을 향해서 인사함.)
후보의 노력과 격려 덕분에 오늘 저는 이자리,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같은 반 친구에게 저지른 잘못을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제가 오늘 사과한다고 해서 친구가 받은 상처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좌중을 둘러봄.)
저는 그동안 학급 친구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한테도, 학교의 많은 분들한테도 폐를 끼쳤습니다. 쉽게 생각하고 쉽게 말했습니다. 그런 저에게 실망을 느끼신 분들도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좌중을 향해 고개를 숙임.)
잘못했습니다.
(고개를 숙인 채 말한다.)
죄송합니다.
(여기부턴 연설문을 내림.)
(진정성이 느껴지게 연설문을 안 본다!)
(줄줄 외워야 함! 중요!!)
앞으로 다시는 가벼운 마음으로 ‘장난’을 치거나 ‘농담’을 하지 않겠습니다.
항상 생각하고 또 생각하겠습니다.
저를 기준으로 생각하지 않고, 친구들을 기준으로, 상대방을 기준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스토리텔링 강화. 주변 환기.)
제가 따돌린 친구는, 매일 아침마다 일찍 등교해서 학교 뒤편의 사육장에 갔습니다. 사육장에 가서 아무도 돌보지 않는 병아리와 토끼를 돌보았습니다.
성실한 아이입니다. 정말로 착한 친구입니다.
그렇게 성실하고 착한 친구를 괴롭혔다는 데, 저는 깊이 죄책감을 느낍니다.
(실질적인 것처럼 느껴지는 행동 약속.)
오늘부터 저는 친구를 대신해서, 아니, 친구와 함께.
매일 아침 6시 30분마다 등교하여 사육장을 돌보겠습니다. 오늘부터 졸업하는 그날까지 단 하루도 빼먹지 않겠습니다. 주말이라고 해서 쉬지 않고, 휴일이라고 해서 거르지 않겠습니다.
(왜? 그럴싸한 이유.)
이것은 친구에게 사과하기 위해서뿐만이 아니라, 저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매일매일 곱씹기 위해서입니다.
(ㅋ.)
이 자리에서 한 번 사과한다고 해서 잘못이 없어지진 않습니다. 없어져서도 안 됩니다. 신서고등학교 학생 여러분! 만일 제가 하루라도 빼먹는다면 저를 질책해주십시오.
저는 아직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뀌고자 합니다. 제가 저 자신을 바꾸도록 노력해준, 기호 2번 후보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름보단 기호를 언급하는 게 더 좋을 듯??)
신서고등학교 학생 여러분.
기호 2번 후보는 제가 오늘 이곳에 올라오도록 만들었습니다. 설득했습니다. 한 명의 학생을 설득하기 위해서 2주일이라는 시간을 들였습니다.
(2 강조.)
저는 이것이 말로만 하는 ‘소통’이 아니라 진정한 ‘소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소통이란 노력입니다. 소통이란 시간을 들이는 것입니다. 소통이란 주변 사람을 바꾸는 것입니다.
(절대 연설문 보지 말고 쌩으로.)
(사람들이랑 일일이 눈 마주치기.)
기호 2번은 노력하는 후보.
여러분에게 시간을 들이는 후보.
주변의 친구들을 바꾸는 후보입니다.
(마무리.)
여러분은 학창시절을 어떻게 기억하시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되도록 학창시절을 기쁘게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즐겁게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저희 모두가 기쁘고 즐거워지기 위해선, 저희 중 누군가가 괴로워하면 안 될 것입니다.
아주 조금이라도 더 나은 학교생활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더 즐거운 학창시절로 남기 위해서.
기호 2번에게, 여러분의 한 표, 부탁드립니다.
(마이크에서 떨어진다.)
(쌩목소리. 큰 목소리로.)
김율아!
그동안 미안했다!
정말로 미안했다!
앞으로 잘 지내면 좋겠어!
(머리를 숙여서 사과 겸 인사.)
(퇴장.)
+
완벽하다.
“음. 좋아. 괜찮네….”
반장이 사과문을 읽고 평했다. 괜찮다? 이게 괜찮은 레벨인가? 눈이 삐었네. 단단히 삐었네.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걸작이다. 여기에 얼마나 많은 심리 기술이 들어갔는데 그걸 못 알아보냐!
너그러운 내가 참아야지. 어휴.
“외워서 말해야 할 부분이 꽤 많은데. 할 수 있겠니?”
“당연하지. 어제 밤 새가면서 달달 외웠어. 눈 감고도 할 수 있다.”
“믿음직하네, 황은서. 내가 친구 하나는 잘 두겠어.”
반장이 내 어깨를 두들겼다. 새끼.
“그럼 우린 먼저 리허설 체크하고….”
반장은 자신의 공약과 비전을 PPT로 띄울 계획이다. 그럴려면 강당이 어두워져야 했다. 다행히 버튼을 누르고 좀만 기다리면 커튼이 자동으로 움직여, 강당은 꽤 어두컴컴해졌다.
리허설 도중에 여자친구와 눈이 마주쳤다.
"......흠."
여자친구는 아는 척도 안 했다. 하지만 나는 구태여 고개를 숙였다. 여자친구에게 사과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여자친구는 의외라는 듯 눈을 치켜떴다.
‘기다려.’
나는 마음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이 황은서 컴백 데이다.’
선거 연설 시간이 다가왔다.
전교생이 강당에 모였다. 바글바글거렸다. 여자친구는 초조한지 강당 뒤편에서 이리저리 걸어다녔다.
반면 반장은 무덤덤했다. 조금도 긴장하지 않은 것처럼 바른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조차 살짝 긴장했는데 얘는 심장이 얼마나 단단한 거야?
“야. 넌 긴장 안 되냐?”
“안 해.”
반장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긴장은 준비가 덜 된 사람이나 하는 거지. 내가 오늘을 위해서 얼마나…. 얼마나 준비했는데. 이런 무대를, 이런 날을 얼마나 상상했는데. 긴장 따위를 해서 망칠 리가 없잖아.”
차가운 목소리였다.
"......."
잠깐이지만 목덜미가 서늘했다. 그만큼 반장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며칠 전부터 방과후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반장이 이런 목소리를 내는 건 처음이었다.
‘뭐야? 자기도 평소랑 다르면서.’
괜히 면박을 당한 거 같아 엉거주춤하게 서 있을 때, 우리 근처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저, 저기.”
낯익은 얼굴이었다.
“슬슬 시작해서… USB 제출하실 거….”
얼마 전에 날 협박하려 든 방송부장이 쭈뼛쭈뼛거렸다. 방송부장은 우리와 시선이 마주치자 어깨를 움츠렸다. 하. 아마 나한테 너무 심하게 대했다는 걸 본인 스스로 느꼈겠지.
“응. 여기.”
반장이 방송부장에게 USB를 건넸다.
방송부장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USB를 받았다.
"이, 이거에 든 파일을 띄우면 되는 거지…?”
“그래. [리허설]대로만 하면 돼.”
“리허설대로만…. 그러면….”
“그러면 당신 할 일은 끝나는 거지.”
반장이 빤히 방송부장을 올려봤다.
“왜? 더 볼일이 있을 거 같아?”
“아니! 어, 없어! 그냥 물어본 거야. 미안! 수고해!”
방송부장은 USB를 챙긴 채 후다닥 연단 아래로 내려갔다. 연단 아래에는 노트북과 프로젝터 등, 보기만 해도 어지러운 방송장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뭐지?’
방송부장의 행동이 퍽 수상하다. 원래부터 이상한 애긴 했어도 저렇게 말더듬이 심하진 않았는데.
“이제부터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수상한 행동을 파헤칠 시간이 없었다. 교장과 선거위원회(작년 학생회장이 대표로 나왔다) 위원장이 잇따라 주절주절 말보따리를 풀었다. 전교생이 모여 소란스러웠던 강당도 어느새 조용해졌다.
“그럼 기호 1번 학생은 앞으로 나와주시길 바랍니다.”
여자친구가 먼저 연설을 했다.
반장이 예상한 대로, 여자친구는 공약을 남발했다. 하나같이 돈이 드는 공약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자친구는 남발된 공약을 지킬 만큼 부자였으며, 대부분의 학생들도 그걸 잘 알았다.
‘간단하지만 막강하군.’
여자친구는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퇴장했다.
‘괜찮아. 나만 연기를 잘하면 우리가 이긴다. 아니, 반장이 이길 필요도 없어. 나만 잘하면 돼. 중요한 건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김율 한테 사과하는 거다. 그럼 [이만하면 됐다]고 애들도….’
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럼 기호 2번 학생은 앞으로 나와주시길 바랍니다.”
"......."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반장이 보고 있었다.
반장은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좋아.’
가자.
‘혼신을 담아서 연기하자.’
나는 연단에 올랐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내 몸에 들러붙는 시선들의 무게가 더해졌다. 두근. 두근. 나는 필사적으로 심장의 폭주를 억눌렀다.
우우우웅-
두꺼운 커튼이 움직여서 햇빛을 가렸다. 강당은 어두운 그늘에 감싸였다. 방송부장이 프로젝터를 조정하자, 맑은 빛이 무대를 비추었다. 광선이 지나가는 허공에선 먼지 알갱이들이 반짝거렸다.
수백 명의 시선.
수백 개의 숨소리.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2학년 5반 황은서입니다.”
그리고.
“제가 선거에 출마하지도 않았으면서 오늘 연단에 올라온 이유는, 여러분께 고백할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명연설이 이어졌다.
'오.'
한 번 분위기를 잡기 시작하자 긴장감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아니. 긴장감은 여전했다. 하지만 내가 연기를 펼치고 있다는 흥분이 긴장을 압도하여, 내 혓바닥을 자유롭게 이끌었다.
‘된다.’
목소리가 자유자재로 높아지고 낮아졌다.
‘된다!’
표정도 어색하지 않다.
자연스럽게 얼굴 근육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씨발! 되잖아!’
생각해보면 나는 무수한 동영상을 찍었다. 감독 행세를 하며 김율 놀이를 연출했다. 엄연히 그것도 무대였고 작품이었다. 나는 신서중 고등학교에서 어느 누구보다 연기에 능숙한 인간이 되었다.
“신서고 학생 여러분! 지금까지 저는 그것이 잘못인 줄 몰랐습니다…!”
왕따라는 자극적인 소재. 여기에 내 연기력까지 끼어드니, 연설에 관심 없어하던 3학년 학생들조차 전부 나를 바라본다.
“잘못했습니다.”
학생들이 다 나를 바라본다.
“죄송합니다.”
학생들의 숨소리가 흐름이 된 것처럼 손에 잡힌다.
“저는 아직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뀌고자 합니다!”
봐라. 나를 봐라. 황은서는 아직 안 죽었다. 죽지 않는다.
어이없게 녹음파일을 유출시켰지만 그건 실수다. 이렇게, 번듯하게 실수를 커버칠 수 있다. 난 굉장한 인간이다. 고개를 돌려보면 여자친구 역시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날 지켜보고 있지 않은가!
“기호 2번에게, 여러분의 한 표, 꼭 부탁드립니다.”
나는 마이크에서 세 걸음 떨어지고 외쳤다.
“김율아!”
승리를 확신하며.
“그동안 미안했다! 정말로 미안했다!”
2학년 5반 학생들이 모인 곳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앞으로 잘 지내면 좋겠어!”
정적.
강당의 침묵을 깨뜨린 것은 자그마한 소리였다.
짝,
내가 고개를 숙인 방향으로부터 박수가 울렸다.
짝짝, 짝, 짝.
김율이 일어나서 손뼉을 치고 있었다. 그렇다. 김율이었다. 내가 사과를 하고 내게 용서를 할 장본인이 기립박수를 했다. 비록 김율은 차갑게 무표정을 지었고, 박수는 열렬하지 않았으나, 기립박수가 뜻하는 바는 하나밖에 없었다.
용서!
김율의 선도에 힘입어 다른 학생들도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손뼉은 쉽게 전염되었다. 좋은 공연을 봤다는 듯, 그만하면 됐다는 듯, 학생들이 손뼉을 쳤다. 선생들까지 손뼉을 치고 있었다.
‘크흑…!’
안면으로 눈물이 밀려왔다.
‘고맙다!’
김율이 용서해준 게 기뻐서가 아니다. 재활용 쓰레기가 용서해주든 말든 뭔 소용인가? 내가 해냈다는 거. 지옥에 떨어졌지만 자기 자신의 힘으로 다시 재기했다는 게 자랑스럽다.
‘고맙다, 나! 포기하지 않아주어서 고맙다! 잘했다!’
짝짝짝짝-
‘너희도 고맙다!’
짝짝짝, 짝, 짝짝-.
‘분위기에 휩쓸리는 가축들이어서 고맙다! 고마워! 계속 가축으로 있어줘! 내가 학교를 졸업해도, 사회에 나가도, 어른이 되어도, 영원히 가축들로 있어다오!’
이 세상 모든 것이 고마웠다.
-어.
강당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소리가 흘렀다.
-선배님.
박수 소리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스피커에서 들리는 소리는 처음엔 소음에 묻혔다. 그러나 방송부장이 음량을 조절했고, 소리는 힘을 얻었다.
-이런 거 찍어도 괜찮아요?
나는 눈물을 닦았다. 잘 모르겠지만 방송부장이 무슨 영상을 틀은 거 같았다. 돌아보자, 강당의 어두운 벽에는 어떤 동영상이 비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동영상에는 낯익은 얼굴이 나왔다.
-몇 명이랑만 돌려보고 지울 거니까.
나였다.
"......."
어?
-안녕하세요, 손님 여러분. 오늘도 여러분이 기다리던 김율 TV가 돌아왔습니다. 아, 김율 TV가 촌스럽다는 쪽지 많이 받았는데요. 저도 동감합니다!
비현실적인 광경이 흘렀다.
영상 속에서, 나는 캠코더를 들고 내 얼굴을 찍고 있었다. 김율을 촬영했다. 아직 본격적으로 [놀이 ]가 시작되지 않은 시간. 애들이 장난 삼아서 김율을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하지만 제가 네이밍 센스가 없어서요. 하하. 여러분이! 쪽지로 직접 시리즈 이름을 지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라?
-자, 서론은 짧게 끝내죠. 오늘은 김율을 어떤 식으로 가지고 놀 거냐! 많은 분들이 응모해주셨습니다. 오늘 응모해주신 분 중, 영광의 당첨을 거머쥐신 분은…. 따, 따, 따, 따라라.
강당에 모인 전교생이 웅성거렸다.
-퀸 님!
선생들이 영상을 쳐다봤다.
-축하드립니다! 아아, 퀸 님의 리퀘스트를 발표하겠습니다. 빠르게 진행. 빠르게. 아하, 바나나우유 두 개를 준비해서. 하나엔 지네를 갈아넣고, 다른 하나엔….
머리가 하얘진다.
“황은서 이 미친 새끼야!”
누군가가 소리친다.
여자친구의 목소리.
연설을 끝마치고 제자리로 돌아갔던 여자친구가, 일어선 채, 소리를 지르고 있다.
“미친 새끼! 또라이 새끼! 너, 이 개 같은----."
여자친구의 목소리가 잘 안 들렸다.
그냥 머릿속이 멍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방송부장을 쳐다봤다.
"......."
방송부장은 머리를 푹 숙인 채 노트북에 연결된 마우스를 쥐고 있었다.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는 반장을 향해서.
"......."
반장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
무척 친절한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