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 프롤로그. (1) >
만상의 대도서관.
책장들이 늘어뜨린 그림자들은 겹쳐지고 사위면서 복잡한 그물망을 이루었다.
“나는, 모르겠다.”
살천성의 목소리는 그 속을 헤매었다.
“어렵다. 헤아리기 힘들다. 내가 그리도 많은 목숨을 죽였는가? 나로 인해 사라진 생명들이 그렇게도 많다는 말인가. 단 한 명의 죽음을 책임지는 것도 불가능한 일인 것을, 그토록 여러 세계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살천성이 더듬거리는 손으로 낡은 일기장을 꺼냈다.
김율이 살천성을 흔적으로 남기게 되었듯, 살천성은 기억이 지워져 가는 삶에서도 일기를 남겼다.
“수호의 여신, 심처에 잠거한 노인, 멀어버린 눈의 추종자.”
그것은 살천성이 죽여온 성좌들이었다.
가로줄이 직직 그어져 붉어진 이름들을 살천성은 나직이 읊었다.
“일곱 소음 속에 움튼 큰 뱀, 우주를 음유하는 황새, 서리새벽에 절명한 마녀, 영멸을 꿈꾸는 사자, 시독화(屍毒花), 그믐을 삼킨 달, 대호에 머무르는 황룡……."
이름들이 흘러내렸다. 호명은 그칠 기미가 안 보였다.
수백에 이르는 성좌를 하나씩 다 부르고 나서, 살천성은, 천천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모르겠다. 알 수 없다. 그러나 김율의 몸에 들어가서, 김율이 세상에 울분을 느끼고 저주를 토할 적에, 나 역시 김율에게 동감했다. 동의한 것이다. 김율은 자신을 여기까지 몰아세운 자들에게 복수하길 원했다.”
살천성은 잠시 침묵했다.
“그런가.”
그가 중얼거렸다.
“나 역시, 세계들의 복수를 받아야 마땅하겠군.”
탁.
살천성이 일기장을 덮었다.
“설령 내 목숨을 끊는다 한들 그것으로 충분한 사죄가 되지는 못하겠지. 영원한 고통. 내가 영원토록 고통받는 것만을, 저 세계들은 바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고통만 받아서는 그 의미가…. 어찌 고통을 받아야 이미 죽어버린 목숨들에게 사과할 수 있겠는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서관장.”
내가 부르기만을 기다린 듯 방구석 도서관장이 빼꼼, 책장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도서관장의 뺨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어서 오시구려! 지난 묵시록들과 달리 이번에는 본좌 또한 여러분을 직접 관음하진 못했소이다. 이제 막 허겁지겁 [등천도시 이야기]에 새로이 등재된 외전 추가분을 읽은 참이라오. 어허, 참으로……."
“됐고. 이리 오십시오.”
“사왕은 날이 갈수록 본좌에게 엄해지는구료….”
도서관장이 비실비실 날아왔다.
“자. 왔소. 본좌가 무엇을 하길 바라시오? 바란다면 내가,”
“[레판타 아이김 서사시]를 건네주세요.”
“아아……. 바란다면 내가, 라고 말하긴 했소만 알고 계시오? 본좌가 소장하고 있는 책들은 죄다 본좌의 성유물이라오. 이 만생 속에 오직 본좌만이 빚어낼 수 있소. 이리 귀한 책들은 감 내놔라 배 내놔라 하는 식으로 대하면 곤란하다오……."
물론 드릴 것이오만, 하고 도서관장이 책을 건넸다.
“살천성.”
“음.”
“이 책에는 당신의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당신이 이세계에 처음 떨어져서, [수호의 여신]을 만나, 레판타 아이김이 되어 살천성이 되기까지. 일생이 전부 기록되어 있어요.”
"......."
"당신은 기억을 잃었지만 영원히 잃어버린 건 아니에요. 다시. 되찾으십시오."
도서관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살천성은 말없이 [레판타 아이김 서사시]를 보았다. 도서관장은 ‘아아,’ 하고 작은 날숨을 흘리며 우리 두 사람을 바라봤다.
내가 한 말의 의미를 저 성좌는 바로 이해한 것이다.
살천성은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다시]라면.”
“예. 방금 김율의 과거를 엿본 것처럼.”
“……처음부터?”
“처음부터.”
“나의 일생을, 수백 년에 이르는 생을, 처음부터 다시 엿보라는 말인가.”
“당신이 무슨 짓을 했고, 어떤 생각을 했으며, 당신이 어떤 세계를 짓밟았고, 그 세계에 어떤 목숨들이 살았는지.”
"......."
“우선 기억해내는 것이 모든 일의 첫 걸음입니다. ‘잊지 마라.’ 김율이 목숨을 걸고 한 말이지요. 당신도 일생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정적.
“이해했다.”
정적.
“옳은 말이라고, 나는 판단한다.”
그리고 침묵.
"......."
살천성은 나로부터 [레판타 아이김 서사시]를 넘겨받았다. 그것을 넘겨받기 위해 살천성은 일기장을 도로 집어넣어야만 했다. 하루와 하루가 낱장들로 기워진 일기장 대신에, 처음부터 끝까지 기술된 일생이 그의 손에 쥐어졌다.
“과연.”
살천성은 책을 받아든 채 중얼거렸다.
“단지 자신의 삶을 반복한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간단히 지옥이 되는군. 사람마다 하나의 지옥을 짊어진 것인가.”
살천성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원장님이 앉아 있었다.
“반장.”
반장이라고 불린 원장님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침묵에는 수십 년의 간극이 담겨 있었다.
“……예. 김율 씨.”
김율이라고 불린 살천성 역시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에는 수백 년의 간극이 놓여 있었다.
한 사람이 버텨온 수십 년과 다른 한 사람이 버려온 수백 년이 도서관의 조용한 공기 속에서 내려앉았다.
“김율은 당신을 용서하고 싶다 생각했으며.”
살천성이 말했다.
“그리고, 나 또한 김율과 같은 생각이다.”
“나는 당신이 용서받길 원한다.”
원장님은 입술을 닫았다.
원장님은 눈을 감았다. 하지만 ‘원장님은 눈을 감았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이미 원장님께선 몸을 제어하지 못하고 계셨다. 입술을 닫은 게 아니라 입술이 닫히었고, 눈을 감은 게 아니라 눈이 감기었다.
"......, ......."
숨소리에 가까운 신음이 원장님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감사합니다.’ 원장님은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원장님은 그렇게 말씀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원장님은 모든 말을 참아냈다. 참아내지 못한 것들은 신음이 되어 흘러내렸다.
“……내가……."
신음은 말이 아니라 파편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파편이 그리고 싶어 했던 그림을 알 수 있었다.
“제가, 조금만… 더……."
제가 조금만 더 잘 살았다면.
제가 조금만 더 권력을 가졌다면.
어린 시절에 제가 조금만 더 똑똑했다면.
"......."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벼락과 같은 진동이 온몸을 꿰뚫었다. 원장님의 꾹 다물어진 입술, 감겨진 눈, 바닥을 짚은 양손의 손등. 오래된 살갗. 팔의 떨림. 구부러진 전신을 보고, 무언가를 깨달았다.
‘아.’
원장님은 비명(悲鳴)을 지르고 있었다.
‘내가 증명해야 될 것.’
이 세상에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증명하고 싶은 것.’
천하가 짐승과 인간으로 혼적한데, 그 중에 외따로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이 섬처럼 있어서, 어쩌다 나의 귀에 들리고 어쩌다 나의 눈에 들어온다.
나는 다만 비명들을 증명하고 싶은 것이다.
‘이곳에 사람이 있다.’
나의 마천(魔天).
‘여기에 사람이 살고 있다.’
마천신공의 결을 처음으로 꿰맨 누군가도, 최초로 그림자의 교리를 설파한 어느 교인도, 분명히. 틀림없이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분노한 것이다. 슬퍼한 것이다. 굶주리는 자들을 보고, 목마른 자들을 보고, 아홉 갈래의 인생과 아홉 가지의 죽음을 보고, 이것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낀 것이다.
"......."
증명하고 싶다.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
이곳에 사람이 있다는 걸, 존재한다는 걸, 이 세상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새기고 싶다.
‘잊지 마라.’
원장님의 저 모습을 내 마천에 담아내고 싶다.
그뿐만이 아니다.
불지옥 저택에서 나를 향해 웃음을 던진 아이들의 춤. 마을의 한복판에서 어미의 시체와 아기의 시체들을 끌어 안은 채 하늘을 향해 울부짖은 아귀의 목소리. 지명이 지워진 설원에서 칼부림을 춘 스승님의 자태를. 라비엘. 라비엘을.
‘잊지 않아야 한다.’
마천신공(魔天神功) 제1식은 굶주림을 담았다.
‘이제는 나의 마천을 담아야 해.’
제1식에 아이들의 춤을.
제2식에 아귀의 절규를.
제3식에 스승님의 검을.
제4식에 라비엘의 희생을.
제5식에 원장님의 침묵을.
‘담고 싶다.’
담을 수 있을까? 내가?
굶주림 하나를 담아내기도 그토록 어려운데, 한 사람의 생을. 아니. 여러 사람의 생을 정녕 담아낼 수 있을까.
‘일생을 바쳐서라도.’
입지(立志).
나의 생에 뜻이 세워졌다.
‘여기에 사람이 살았다는 걸 증명하자. 이곳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걸 증명하자.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죽었는지 증명하자. 짐승들의 소음을 담아내고 사람의 비명을 담아내자. 만일 그가 웃었다면, 그 웃음의 진동까지.’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아직 내가 이곳에서 마무리를 지어야 할 일이 있다. 많다. 마천신공의 식을 처음부터 다시 짜는 일은, 내 경지에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어마어마한 심력과 노력이 들어야 이루어질까 말까 할 거다.
‘……그래. 서두르지 말자. 당장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우리들의 관음자를 쳐다봤다.
“도서관장. 아니, 하무스트라.”
도서관장이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하악, 하악, 거리면서 살천성과 원장님을 쳐다보고 있던 도서관장은 움찔거렸다.
“지, 진명이라니. 부끄럽소! 이명으로 불러주시오.”
“살천성이 원할 때면 언제든 [레판타 아이김 서사시]를 읽을 수 있도록 해주세요. 굳이 스테이지 공략 형태를 띌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이 세계를 관음하는 것과 똑같이, 살천성도 그럴 수 있게 허락해주십시오.”
“아. 으흠. 음.”
도서관장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힘겹게 생각에 잠겼다.
“그럴려면, 본좌의 권능을 나눠줘야 하오만…. 사도로 만들어야겠구려. 으흠. 거리낌 없이 사도를 양산하는 성좌들도 있으나, 본좌는, 쯤. 사도는 어색하다고 할지… 취향이 아니라고 할지….”
그야 이명부터 [방구석 도서관장]인 양반이 부하나 친구를 만들 리가 없지. 책갈피 메이드 같이 이상한 시종들이나 부리고.
“싫어요?”
“싫은 게 아니라……."
“백귀환생으로 거뒀다지만, 어차피 다른 살천성도 [인형술사의 퍼레이드]로 복사된 인형들이죠. 다를 게 있습니까?”
“으흠, 음. 다를 것도 없소만……."
“당신이 선택하세요.”
“선택이라 하오면……?”
“지금까지 당신은 살천성의 이야기를 사랑했지요. 하지만 당신의 어법에 따라 말하자면, 이제 살천성한테는 분기점이 생겼습니다. 두 가지 루트가 발생한 셈이에요.”
“분기점.”
“예."
나는 도서관장과 눈을 마주쳤다.
“루트 1. 이 루트에서 살천성은 나와 만나지 못했습니다. 만난 기억이 없어요. 평소와 똑같이 50층에 머무릅니다. 기억이 1주일치 쌓이면 성좌를 사냥하러 떠나죠.”
인형 루트.
살천성이 영원히 [인형술사의 퍼레이드]를 벌이는 루트다.
“루트 2.”
그리고 나와 만난 살천성이 이곳에 있다.
“살천성은 이제 김율을 알아요.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김율부터 시작한 레판타 아이김의 일생을 천천히 되짚으면서 살아갈 것 입니다.”
힘들겠지.
“책 속에 빙의하여, 수백 년에 걸쳐 걸어온 길을 똑같이, 다시 걸어갈 거예요.”
괴로울 것이다.
“그 루트에는 저도 있고, 원장님도 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일생을 전부 삼킬 필요는 없어요. 천천히.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 만큼만, 한 입씩 삼키면 됩니다. 도중에 쉬어도 괜찮아요.”
하지만 그것이 살천성의 삶이다.
언젠가 이윽고, 김율의 삶이 될 무엇이다.
“당신이 바라는 살천성의 루트를 선택하십시오.”
"......."
도서관장이 살천성을 바라보았다.
성좌의 침묵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살천성. 그리고 사왕의 양육자여.”
도서관장이 빙그레 웃으면서 살천성과 원장님을 향해 양팔을 벌렸다.
이 날, 누군가의 에필로그가 끝났을 것이고.
“혹시 도서관 사서(司書)로 취업하실 의향이 있소?”
누군가의 프롤로그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