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 프롤로그. (4) >
도서관은 순식간에 밝아졌다.
빛은 마치 하얀 물살과 같았다. 살아서 움직였다. [■■■■■]. 하무스트라의 묵시록에서 끊임없이 빛물이 흘러나왔다. 빛의 물결은 우리 주변을 덮쳤으며, 책장들 사이로 쏟아졌다.
빛이 범람했다.
[스테이지 클리어.]
묵시록에선 빛을 게워내길 멈추지 않았다. 촤악! 화아아! 빛물은 순식간에 수위가 불어나서 대도서관의 책장들을, 빌딩만큼이나 드높은 서가들을 침몰시켰다. 지난 수천 년 동안 단 한 번도 빛이 비추지 않았을 금서(禁書) 심처마저 환해졌다.
하얀 홍수.
새하얀, 연못.
[금일.]
세상을 함몰시킨 빛의 홍수 한복판에 우리는 서 있었다.
[30층 스테이지가 클리어되었습니다.]
멀리서 헌터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꺄아아아악!”
“뭐, 뭐야?!”
갑작스럽게 범람한 빛물살에 당황한 것일까. 다행히도 도서관엔 믿음직스러운 동료들이 있었다. 많았다. 놀라서 경악하는 헌터들이 있는가 하면, 그들을 다독이는 사람들 또한 있었다.
비록 책장에 가려져 얼굴은 안 보였지만.
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하나하나 다 알아들었다.
“아이고오! 나 죽네! 안 그래도 요즘 눈이 캄캄한데 시력이 아예 마이너스를 찍어버리겠네! 에구구, 에구. 이눔아! 어린 것이 늙은이를 보면 알아서 보약도 좀 만들어서 선물하고 그래라!”
약왕(藥王).
“에. 하, 하지만 약은 필요한 분들에게 먼저 나눠져야 하는걸요. 죄송하지만 약왕님은 별로 필요하신 분도 아니구…. 안경이나 새로 맞추시는 게 어때요…?”
약제사(藥劑師).
“아아, 이건 스테이지 클리어란 녀석이다. 단순한 빛이지. 너희는 이런 거 경험해본 적이 별로 없겠지만 말이야. 나는 벌써 몇 번이나 봐버렸거든. 신비란 건… 익숙해질수록 평범해지는 법. 경거망동하지 말라구.”
“우오오옷! 스승님!”
“믿고 있었다구 젠장……!”
독사(毒能)와 그 쫄따구들.
“어라? 라? 30층은 저절로 클리어되는 것이었을까요? 아핫. 시간을 아껴서 다행입니다만. 만신전 소속 길드원은 전원 전송을 준비하십시오! 바빌론으로 돌아가자마자 밀린 일처리에 들어가겠습니다!”
이단심문관(異端審問官).
“곤란하군. 사서의 업무는 경험해본 적 없다.”
“제가 겉핥기로나마 알고 있습니다. 김율 씨. 도와드리겠습니다.”
“……부탁하지.”
살천성(殺天星)과 원장님.
그뿐만이 아니었다. 흑룡주, 백작, 성기사의 목소리도 있었다. 때로는 멀리서. 때로는 꽤 가까이서. 묵직한 양장본들이 꽂힌 서가 너머로부터 사람의 목소리가 흘렀다.
그렇다. 도서관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소곤거리는 소리가 내게는 전부 들려왔다. 마치 빛의 물살이 소리를 빨아들이는 것처럼.
내 곁에선 자그마한 도서관장이 떨고 있었다.
[모두에게 다시 한 번 알립니다.]
[금일, 30층 스테이지가 클리어되었…….]
치지지지직-
탑의 목소리에 노이즈가 섞였다.
안 그래도 떨고 있던 도서관장은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경고!]
[비정상적인 공략이 감지되었습니다.]
[‘방구석 도서관장’에게 경고가 주어집니다.]
"으."
도서관장이 내 옷소매를 잡았다.
“사, 상관없소. 30층 스테이지는 ■■■■■로 정해졌소. 본좌는, 21층부터 30층 스테이지까지를 주관하는 관리자로서 이를 보증하며. ■■■■■를 다스리는 성좌로서 스테이지 클리어를 인정하오….”
[다시 한 번 경고합니다.]
[스테이지 클리어가 선언될 시 ‘방구석 도서관장’에게는 막대한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그럼에도 스테이지 클리어를 진행할 것인지 확인합니다.]
내 옷소매에 구겨지는 힘이 조금 더 강해졌다.
"......."
도서관장은 어깨를 수그리고 있었다. 평소, 도서관장은 품이 낙낙한 옷을 입고 다녀서 실제보다 커 보였다. 지금은 아니었다. 작았다. 이 세상에서 도서관장이 차지하는 면적은 보잘것없었다.
내 품에 기댄 채, 도서관장은 나를 올려보았다.
“……상관없소.”
그건 탑에게 건네는 말이었으며 내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본좌는,”
하무스트라가 말했다.
“나는 이 탑에서 살아갈 것이오. 부탁드리겠소……. 본좌의 타천을 인정해주시구려. 만생(萬生)의 주인이여.”
정적.
[모두에게 다시 한 번 알립니다.]
탑의 목소리에서 노이즈가 걷혔다.
[금일, 30층 스테이지가 클리어되었습니다.]
환호성이 터졌다. 여전히 도서관은 빛무리에 잠겨 있었으나, 헌터들한테도 스테이지 클리어 선언이 들린 것이다. 마침내 자신들이 성공했다는 생각에 헌터들은 기뻐했다.
오직 하무스트라와 나에게만 들린 목소리도 있었다.
[방구석 도서관장이 더는 권한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등급 조정에 착수합니다.]
그것은 어느 예전엔가 내가 한 번 들어본 문구.
아귀가 가을비의 마왕이라는 허물을 잃어버렸을 때 들려온 말과 똑같았다.
[방구석 도서관장의 이명을 박탈합니다.]
아귀는 그때 비명을 질렀었다. ‘안돼!’ 자기가 성좌의 지위를 잃어버린다는 것에 경악했다. 절대로 타천(墮天)하지 않으려고 발악도 했다.
하무스트라가 지금 보여준 반응은 달랐다.
말없이, 두 눈을 꾸욱 감았다.
[다시 한 번 알립니다.]
[방구석 도서관장의 이명을 박탈합니다.]
[방구석 도서관장의 권한을 박탈합니다.]
나와 하무스트라의 손에 들린 묵시록이 흘러내렸다. 어쩌면 ‘녹아내렸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뚜욱. 뚝. 책표지가 물컹물컹한 슬라임처럼 변해서 흘렀고, 종이들은 낱낱이 촛농이 되어 떨어졌다.
[그대에게 행운이 함께하기를.]
그리고 묵시록은 빛이 되어 사라졌다.
"......."
한동안.
하무스트라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고요히 숨을 뱉었고 차분히 숨을 내쉬었다. 작은 상반신이 오르락거리고 내리락거리기를 반복하면서, 두려움에 차 떨던 하무스트라는 천천히 진정하였다.
“아하….”
하무스타라가 폴짝, 제자리에서 뛰었다.
“이거 보시오, 사왕.”
기나긴 옷소매가 펄럭였다. 옷소매는 너무 길어 바닥에서 떨어지지 못했다. 하무스타라가 폴짝, 폴짝, 제자리뛰기를 할 때마다 옷소매는 아주 살짝 위로 들렸다가 도로 바닥에 엎어졌다.
“비행할 수가, 없소.”
하무스트라가 나를 돌아보며 웃었다.
“이제 공중을 날 수가 없구려. 본좌, 높은 곳에서 세계들을 내려보고 구경하는 게 취미였는데. 종일토록. 때로는 수십 일 동안 가만히 지평선을 내다보는 게 취미였는데. 취미가 사라졌소….”
“예."
“많은 것들이 사라져버렸소.”
“예."
“꿈을 이루었는데. 이야기에 직접 등장하고 싶다는 꿈을 이루었는데, 기쁘지만, 기쁘지만은 않구료. 두렵소. 무섭소. 본좌는 그대들을 사랑하오. 애정한다오. 그대들이 본좌를 좋아해주지 않을까 봐, 그것이 두렵소.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소….”
“하무스트라.”
나는 하무스트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딴 건 불가능하니까 꿈 깨시고요.”
"......."
“차근차근 가자고요. 취미가 사라졌다니 새 취미부터 만들죠. 어때요? 성좌에서 타천한 기념으로 뭐 하고 싶은 거 없어요?”
“사실, 두 가지 소원이 있소.”
“말해보세요. 들어줄 수 있으면 들어드릴 테니.”
“일단 본좌에게 존댓말을 쓰지 말아주시오…."
그건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이다.
“오케이. 그럴게. 나머지 소원은 뭔데?”
“본좌의 두 번째 소원은 조금 비싼 것이라오…. 너무나도 굉장한 사치여서, 사왕, 그대가 들으면 경천동지하여 몸서리를 치게 될 게 틀림없소….”
“뭐길래.”
하무스트라가 옷소매로 눈가를 닦았다. 훌쩍거리는 소리가 새었다. 한참 뒤에 옷소매가 내려갔을 때, 하무스트라의 얼굴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화이트 모카 프라푸치노 벤티 쿼드라샷 자바칩 반반 초콜릿 드리줄 추가해서 마셔보고 싶소……."
그것은 정말 어마어마한 사치였고.
다행히도 역시,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이었다.
6.
후일담으로 말할 게 있다.
“과연. 그래서 부인이 죽었던 거로군."
교복을 입은 라비엘이 사이다를 마시며 말했다.
자아.
방금 한 문장에서 얼마나 기적적인 콜라보레이션이 이루어졌는지, 알 사람은 알 거다.
봐라. [교복을 입은] 라비엘이 [사이다]를 마셨다.
우주가 탄생하고 멸망하는 서사시마저 지금 이 한 문장의 숭고함을 따라잡을 순 없겠지. 나는 두 눈으로 직접 천지창조를 목격한 교인과 같은 심정으로 지금 이 감동을 여러분에게 알리…….
“공자여. 몸이 떨고 있구나.”
“떠, 떨지 않는데요.”
“그런가?”
내 품에 공주님처럼 안긴 라비엘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참고로 내가 이 포즈를 유지한 지 슬슬 3시간이 넘어간다. 오러 금지. 스킬 금지. 순전히 근력과 자세로만 버텨야 한다.
“아무리 봐도 떠는 것 같다만.”
라비엘이 입꼬리를 올렸다.
“아. 혹시 내 몸이 무거운가?”
“무겁지 않아요. 라비엘의 몸은 깃털처럼 가벼워요!”
“어느 깃털인가? 공룡 깃털인가? 시조새의 깃털인가?”
“라비엘은 갓 달걀에서 부화한 병아리의 깃털보다 가볍습니다!”
“그럼 다행이군. 하마터면 미안해져서 내 사랑의 품에서 내려버릴 뻔했지 뭔가. 그대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니, 나는 계속 마음을 놓고 그대의 훌륭한 승차감을 즐기겠다.”
라비엘은 사이다캔에 입술을 댔다. 투명한 사이다가 라비엘의 입술에 한 방울 묻었다. 아아, 저 한 방울의 사이다가 증오스럽다. 증발 해버려라. 얼른 증발해서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라….
상황을 설명하지. 여긴 29층. [등천도시-외전]의 세계다.
하무스트라가 예고한 대로 [외전]은 진짜 바깥세상의 역사를 바꾸진 않았다. 정사(正史)에 편입되지 못한 것이다. 신서중고등학교를 중심으로 이 도시만 뚝 떨어져 나와, 외딴 섬과 같은 스테이지가 되었다.
‘신기하게도 이 세계 거주민들은 이상한 걸 눈치 채지 못하지만 말야.’
우리 같은 헌터가 29층에 입장하면, 자동으로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으로 등록된다. 마치 원래부터 이 세계에서 살아온 학생이 된 듯 학창생활을 보내게 된다. 대학교도 있지만, 그게 전부다.
말 그대로 학원도시.
요컨대 학교를 다닐 수 있단 걸 제외하면 완전 쓸모없는 스테이지, 인데…….
“공교육이란 아름답군.”
이게 또 의외로 도움이 되는 모양이다.
“재산이 적은 자들도 마음껏 배울 수 있는 장소라니. 꿈만 같은 제도 아닌가. 앞으로는 우리 제국에서도 인재를 뽑아다가 이곳에 유학 시킬 계획이다. 역시, 나의 사랑은 이반시아 공작가의 달을 자칭할 자격이 충분하다.”
“어. 별로 그렇게 좋은 걸 배우진 못할걸요…?”
“상관없다. 교육의 목적은 상식을 공유하는 데 있다. 국가란 한 걸음만 삐끗하면 망상으로 전락해버리는 추상물이어서, 국민들로 하여금 언제나 같은 꿈을 꾸도록 조치해야 한다.”
“같은 꿈……."
“음. 탑의 사람들과 제국민들을 어떻게 자연스레 융화시킬지 고민했다만. 여기서 교육받은 제국민들이 장차 두 세력을 이어주게 되겠지.”
라비엘은 가끔 어려운 얘기를 한다. 멋있어라.
그래서 내가 왜 라비엘을 3시간 넘도록 들고 있느냐면.
“뭐, 정치적인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마. 지금은 그대가 벌 받는 모습을 음미하고 싶군.”
맞다. 나는 현재 벌을 받는 중이었다….
벌을 받는 이유야 빤히 정해져 있다.
“정말로 깜짝 놀랐다. 공자여.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데 어느 순간인가 24시간 전으로 회귀해버리는 것 아니겠는가? 잠시 멈칫 했으나 곧바로 사태를 깨달았다. 아, 과연. 내 부인이 또 어디서 죽어버렸구나, 하고 말이다.”
라비엘이 황금색 카드를 꺼냈다.
+
[어느 회귀자의 사랑]
랭크: EX
효과: 회귀자에게 사랑은 독과 같습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자신이 사랑하는 자와 시간을 나눌 수 없으므로. 그러자, 어떤 회귀자는 염원했습니다. ‘제 연인의 기억을 지켜주세요.’ 그 염원은 탑에 닿아서 이루어졌습니다.
당신은 사랑하는 연인과 시간선을 공유합니다. 연인이 하루를 돌아가면, 당신도 하루를 돌아갑니다. 당신이 하루를 돌아가면, 연인도 하루를 돌아갑니다. 이것은 반지의 맹약. 이것은 시간의 결혼.
두 사람에게 행운이 함께하기를.
※단, 당신과 연인이 서로 사랑할 때만 발동합니다.
+
그렇다.
[어느 회귀자의 사랑]으로 인해 내가 죽으면 라비엘도 24시간 전으로 돌아간다. 살천성에 의해 한 번 살해당했을 적에 라비엘 역시 회귀를 경험한 것이다.
당연히 라비엘은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 수밖에 없다.
이반시아 공작가에서 시종으로 일하고 있는 금사매가 증언한 바에 따르면, 라비엘은 회귀하자마자 ‘어디 사는 개잡놈인지 몰라도 내 부인을 건드렸구나’ 하고 조용히 중얼거렸다고 한다.
무표정. 오로지 무표정하게.
금사매는 그날 우주적 공포를 느꼈다고 전해진다.
“미안해요……."
“아니. 미안해할 필요 없다.”
라비엘이 담담히 말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는가? 죽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쓰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죽었다면 어쩔 수 없지.”
“그, 그치요?”
“아아. 이제 겨우 29층을 공략하는 상황에서 무리하여 50층으로 건너뛰고, 50층에서도 손 꼽히는 강자한테 싸움을 걸어, 마침내 한 층 전체의 어그로를 끌어버렸다고 하여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의 사랑이여. 그대가 한 일은 전부 완벽히 합리적이었다. 어느 부분에서도 만용을 찾아볼 수 없구나. 내가 이해하마.”
“정말로 미안합니다……."
“진심으로 뉘우치는가? 잘못한 줄은 알고 있는고?”
라비엘이 내 뺨을 꼬집었다. 주우욱. 막 빚은 찹쌀떡처럼 볼살이 늘어났다.
나는 감동했다.
‘아아, 라비엘이 뺨을 꼬집어주고 있어.’
눈앞에서 라비엘이 교복을 입고 있다. 교복 입은 라비엘이 내 품안에 안겨 있다. 이게 진짜로 벌일까? 오히려 상 아닐까? 라비엘, 나의 여신은 벌을 빙자해서 내게 잘했다며 칭찬해주고 있는 거 아닐까…?
“안 되겠군, 이 남자….”
라비엘이 한탄했다.
“눈이 맛이 갔다. 원래 살짝 맛이 간 것 같은 눈동자가 매력이긴 했다만. 이건 심하구나.”
“사랑해요. 라비엘.”
“사랑한다. 공자여.”
아. 사이다 향기.
좋다…….
행복해…….
-씨발.
불청객이 뒤에서 떠들었다.
-설마 나, 얘네 만날 때마나 이 꼬라지를 보야 되는 거냐? 어? 아니지? 이건 좀 아니지 않아? 사랑은 호르몬 작용이라는데 얘네 둘은 호르몬 레벨부터 쳐돌았나. 내가 전생에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이런 지옥을 맛봐야 되는 건데!
[반짝이는 아마도 당신이 전생에 참 많은 죄를 저질렀을 거라고 지적합니다.]
-씨, 버얼….
모름지기 호걸이란 지방방송을 무시하는 법.
라비엘은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신서중고등학교를 돌아봤다. 내가 누구에게 죽었으며 그 사람이 어떤 과거를 간직했는가, 잃어버렸는가, 되찾았는가. 나의 안내를 받으며 라비엘은 교실과 옥상을 하나씩 눈에 새겼다.
"음."
라비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공자여. 그대가 시간을 바쳐서 이룰 만한 일이었다.”
그녀는 납득해준 것이다. 장장 3시간 동안 팔의 지옥과 뇌의 천국을 맛봐야만 했지만, 팔과 뇌 중에서 뭐가 더 중요한지 따져보면 이건 내 이득이라고 봐야겠지. 개이득.
“그럼 이제 그대를 죽인 놈의 상판을 직접 견식해야겠다.”
“라비엘.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그 사람, 아마도 라비엘의 조상님이기도 해요….”
“더욱더 괘씸하군. 조상이라면 곱게 후인들에게 일을 맡길 일이지 어디서 감히 가문의 달을 건드리는고? 작금의 이반시아는 내 것이다. 가법(家法)에 따라 족치겠다.”
미안하다, 살천성.
미안합니다, 김율.
당신은 이제 뒈졌다.
“그리고.”
라비엘이 미소를 지었다. 신서중고등학교의 옥상. 하늘에 진 노을이 라비엘의 입가를 붉게 비쳤다.
“그대를 길러주었다는 분께도 인사를 드리고 싶구나.”
"......."
“안내해주겠는가, 공자여?”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라비엘을 품에 안은 채 속삭였다.
“전송.”
빛이 우리를 감쌌다.
다음 순간, 우리는 30층 도서관에 서 있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도서관은 모습이 좀 바뀌었다. 우선 출입구역과 출입금지구역이 엄격하게 나뉘었다. 출입구역에는 평범한 책들이 서가를 장식했고, 헌터들은 테이블에 앉아 느긋이 독서를 즐겼다.
평화로운 광경.
헌터들이 앉은 테이블엔 커피잔이나 음료수 컵이 놓여 있었다.
“아."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니던 하무스트라가 우리를 발견하고 얼른 다가왔다. 품이 낙낙한 옷 대신, 하무스트라는 단정한 종업원 복장을 입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사왕. 어허? 은으로 도금된 심장께서도 같이 오셨구료. 이거 참 귀한 손님들께서 한꺼번에 찾아와주셨소!”
도서관 카페.
하무스트라는 일단은 이곳에서 직업을 가지기로 했다. 아직 1층 도시에 내려가서 살아갈 자신이 없지만, 그래도 천천히 헌터들과 교류하며 인간으로서의 생활에 익숙해지기로 결심한 것이다.
“음. 김율 있어? 라비엘이 김율 얼굴 좀 보자고….”
“면상이다. 부인.”
“……라비엘이 김율 면상 좀 보자고 말해서.”
하무스트라가 싱글벙글 웃었다.
“김율의 얼굴은 멀리까지 와서 구경할 가치가 있지. 알겠소. 지금은 아동도서를 정리하고 있을 것이오만, 불러오겠소.”
아직 이야기할 게 많다.
하무스트라가 타천해버린 이후 새로이 대도서관을 담당하게 된 자가 누구인지. 카페를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을 어째서 약왕이 몰빵하다시피 지원하게 되었는지. 그래서 지금도 저기 카페 카운터에서 약왕이 바텐더 옷차림을 한 채 커피를 달이고 있는 것, 등등.
이야기할 것이 많지만.
그건 언제라도 얘기할 기회가 올 것이다.
“그럼 두 분 모두 자리로 안내해드리겠소!”
여태까지 그러했듯.
그 이야기는 지금보다 좀 더 위의 스테이지에서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