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 신이 되다. (1) >
1.
화산은 이 세상에 붉음을 덧칠했다.
콰르르르르-
용암이 산꼭대기부터 집어삼켰다. 부글부글 흘러넘치는 탄산음료처럼 용암은 걷잡을 수 없었다. 산정부터 산등성이까지 우거진 수풀. 그 초록이 순식간에 타올랐다.
수많은 종족들이 비명을 질렀다.
“나는 너희의 도우미에 불과해.”
재앙을 배경으로 둔 채 공녀가 하품했다.
“너희는 달라. 너희는 저 아이들을 돌보는 수호성(守護星). 너희 스스로 결심해서 다음 스테이지를 개방했고, 앞으로 보살필 종족을 골랐어. 노력해줘.”
“노력하라고 말해도…. 난감하군.”
성기사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는 화산과 원시인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표정에 조급함이 묻어났다.
“간섭할 수단이 전혀 없잖나. 목소리도 전달되지 않는다.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다. 무슨 수로 저 아이들을 대피시킬 수 있는가."
우리 탑의 자경단 부단장은 기본적으로 선한 자. 생전 처음 보는 종족들이라 해도 도와주고 싶겠지.
다른 동료들도 대동소이했다. 대체로 다들 안절부절못했다. 지금 순간에도 용암은 원시림을 덮치고 있었다.
“음.”
보다못해 내가 나섰다.
“공녀님. 스테이지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한테 [종족 포인트]란 걸 나눠주셨죠.”
“그런데?”
“괜히 주셨을 리가 없지요. 어딘가 쓸데가 있으니까 나눠주신 걸 겁니다.”
나는 차분히 말했다.
“저희의 도우미로서, [종족 포인트]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려주십시오. 되도록 빠르고 직관적으로.”
"......."
공녀가 빙그레 웃었다. 공녀의 눈은 ‘정답이야’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반응을 보고 동료들도 눈을 치켜떴다. 내 지적이 유효하다는 걸 그들도 알아차린 것이다.
“아하…. 모종의 아이템이나 기술을 구매하는 방식입니까.”
“우리도 포인트를 쓸게! 포인트로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들을 제시해주렴!”
“하아.”
공녀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래서 눈치 빠른 전사가 한 명 있냐 없냐로 스테이지 공략이 갈린다니까? 뭐, 사왕 말이 맞아. 이건 확실히 도우미의 업무에 속해."
스르르륵!
알림창이 뜨면서 우리 눈앞으로 홀로그램이 표시되었다.
[문명 상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홀로그램은 기나긴 상품 목록을 담고 있었다.
+
[신탁 메세지] - 20p
[동물에 빙의] - 40p
[꿈에 등장] - 100p
[사냥감 탐색] -5p
[황동급 정착지 탐색] - 80p
[부족급 장군(뽑기)] - 100P
[황동급 기술 발명(뽑기)] - 1.000P
ㆍ
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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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케이.’
이제부터 실전이다.
지금까지 나는 과거 염제가 거쳐간 ‘공략본’을 참조했다. 염제는 인터뷰에서 자기가 어떻게 스테이지들을 공략했는지 가끔씩 떠벌렸고, 그 인터뷰 모음집이 일종의 공략본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이 공략본을 제법 잘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고 세부적인 공략법까지 다 아는 건 아니야.’
[문명 상점]이 존재한다는 건 안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상품을 구매해야 작금의 난관을 뚫을 수 있는지는 모른다. 순전히 나의 힘으로. 내 머리를 굴려서 알아내야만 한다.
‘어떻게 해야 확실하게 고블린들을 안전한 곳까지 인도하지? 역시 [신탁 메세지]를 구입해서 소통을 시도해봐야 하나?’
나는 고민했다.
그때, 성기사가 급하게 입을 열었다.
“질문이 있다. [신탁 메세지]란 종족에게 직접 메세지를 전달하는 것인가?”
사람 생각이 비슷한지 성기사도 나와 똑같은 아이템에 눈독을 들였다. 공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응. 맞아.”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메세지가 전달되는가?”
“너희도 이미 알고 있는 방식이야. 성좌가 너희한테 메세지를 전하는 거랑 똑같거든.”
공녀가 손가락으로 옆머리를 꼬았다.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가 여러분에게 예시를 보여줍니다.]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음성 메세지였다.
“벌써 여러번 겪어봤지?”
“말했잖아. 너희는 성좌가 되는 걸 체험하는 거야. 아, 참. [신탁 메세지]는 일회용 상품. 메세지를 구매해도 딱 1번밖에 못 보내니까 주의해! 메세지를 받는 사람도 1명으로 한정되어 있어! 더 보내고 싶을 때는 또 구매하면 돼.”
성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신탁 메세지]를 1개 구매하지.”
공녀는 불길한 미소를 지었다.
“응. 무슨 일이 있어도 환불은 절대 불가야.”
나는 공녀의 미소를 보고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걸 직감했다.
그러나 이미 구매가 완료됐다.
성기사는 자신이 선택한 종족인 새기족(認籍族)을 내려봤다. 새기족은 인어였다. 인어들이 아가미를 뻐끔거리며 강물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용암이 동쪽에서 흘러들고 있으니… 남쪽은 안 되겠군.”
성기사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급한 와중에도 침착해지려고 애쓰고 있었다. 새기족 중에 우두머리로 보이는 인어를 지목한 뒤, 성기사는 자신이 보낼 신탁을 선언했다.
“[전력을 다해 서쪽으로 헤엄쳐라!]”
부르르!
인어 우두머리가 펄쩍 물장구를 쳤다.
-꺄우? 꺄우꺄우?
인어는 깜짝 놀랐는지 꼬리로 수면을 두들겼다. 저 녀석 입장에선 갑자기 머릿속에서 신의 목소리가 울려퍼진 것이다. 당연히 놀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 인어, 반응이 묘했다.
“……어?"
인어는 서쪽 물길로 헤엄치지 않았다.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멤돌 뿐. 귀중한 포인트를 썼는데도 졸지에 무시당해버린 것이다. 성기사가 멍한 얼굴로 인어를 쳐다봤다.
“잠깐만. 얘기가 다르다! 어째서 신탁을 듣지 않는 건가!”
“글쎄?”
공녀는 모르는 척 베개에 옆얼굴을 기대었다.
“너희도 성좌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예 알겠습니다’ 하고 재까닥재까닥 반응하진 않잖아? 그거랑 비슷한 거 아닐까.”
“무슨......!”
“아니면 말고. 참, 이제 정말 시간 얼마 안 남았어. 이대로 놔두면 31층부터 종족들이 전부 멸종해버릴지도 몰라? 그러면 너희의 탑 공략기도 여기서 끝나는 거야.”
얄미워도 공녀의 말이 맞았다.
쿠르르르르-
이제 용암은 산자락까지 흘러내렸다. 용암뿐만 아니라, 화산이 폭발하면서 쾅쾅 솟구치는 바위덩어리들도 위협적이었다. 바위 하나라도 부족에 직격해버리면 피해가 커질 터.
‘왜? 어째서 신탁이 먹히지 않았지?’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공녀가 우리를 속였나? 아니야. 탑의 도우미가 일부러 우리를 속였을 가능성은 적어. 진실을 말해주진 않을지언정 거짓말을 하진 않을 거다. 혹시 정말로 인어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 건가?’
고민하는 가운데, 고블린들이 허둥지둥거리는 모습이 내 눈에 포착됐다.
-케르르!
-케륵! 케르륵!
고블린들이 울부짖었다. 하늘에서 유성우처럼 쏟아지는 바위덩어리를 보며 저 원시의 종족은 당황하고 있었다.
"......."
그 순간.
“아."
나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너무나도 당연한 진실을.
“신탁이 잘못된 게 아니에요!”
"음?"
“성기사 씨의 신탁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요! 문제는 쟤네들한테 있죠!”
나는 동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모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 중 성기사는 [신탁 메세지]를 한 개 더 구입할지 말지를 고민하다가 멈칫했다.
“무슨 소리인가, 사왕?”
“메세지는 더 구입하지 마세요.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왜 그런지 이유를 알아야……."
“당연하죠! 쟤네들, 아직 [언어]가 완성되지 않았을 거잖아요!”
성기사의 눈이 커졌다.
“뭐라고?”
“얘네들 진짜 원시인이에요. 그런 애들한테 [전력을 다해 서쪽으로 도망쳐라]고 말해봤자 어떻게 알아듣겠어요? 애초에 [서쪽]이 어딘데요?”
“아, 과연!”
“예! 아마 번역도 제대로 안 될 겁니다. [어휘]가 딸릴 테니까요!
그제야 성기사도 맹점을 눈치챘다.
다른 동료들도 눈이 커졌다. 내 지적이 옳았다. 원시인에 비해 우리의 언어는 지나치게 발달되었다. 아무리 원시인들이 알아듣고 싶어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맙소사. 그럼 정말로 신탁이 쓸모없잖아?”
흑룡주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쪽으로 가라]고 말하면 듣겠지만, 이번에는 우리가 [저쪽]이 어디인지 지명할 수가 없고…. 저 아이들이 어디까지 우리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지 확신할 수가 없어.”
“아니요. 분명히 방법이 있을 겁니다.”
탑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결코 공략이 불가능한 스테이지를 준비하지 않는다.
나는 확신을 품고 다시 한 번 [문명 상점]을 보았다.
+
[신탁 메세지] - 20p
[동물 빙의] - 40p
[꿈에 등장] - 100p
[사냥감 탐색] - 5p
[황동급 정착지 탐색] - 80p
[부족급 장군(뽑기)] - 100P
[황동급 기술 발명(뽑기)] - 1.000P
+
그리고.
한 가지 공략법을 떠올렸다.
언어로 전달하지 않으면서도, 원시인들을 안전구역으로 대피시킬 방법.
“공녀님!”
“응.”
“[사냥감 탐색]으로 원하는 사냥감을 탐색할 수 있습니까? 가령 제가 호랑이를 원한다면, 제일 근처에 있는 호랑이를 탐색할 수도 있나요?”
공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가능해. 이 세계에 호랑이는 없지만 최대한 비슷한 짐승을 찾아줄 순 있어. 다만 원시인에 직접 빙의하는 건 금지야. 그러려면 상위 등급의 아이템이 필요해.”
오케이.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사냥감 탐색]을 1개 구매하겠습니다.”
흑룡주는 이해하지 못하고 나를 말리려 들었다.
“사왕? 지금 상황에서 웬 느긋하게 사냥을……."
“설명은 좀 있다가 드리겠습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사냥감 탐색’을 구입합니다.]
[5 종족 포인트가 소모됩니다!]
[현재 당신이 가진 종족 포인트는 95입니다.]
내 손안에 동색 카드가 생겼다.
나는 카드를 확인하자마자 공녀에게 요구했다.
“공녀님. 이 근처에서 ‘제일 색깔이 특이하면서’ ‘발이 빠르고’ ‘그럭저럭 큰’ 짐승을 탐색해주십시오. 하얀 사슴이라거나, 하얀 사자라거나. 아니면 흑마(黑馬)라던가. 아무거나 상관없습니다!”
“……헤에.”
공녀가 재밌다는 듯 눈을 빛냈다.
“조건이 상당히 두루뭉술하지만. 좋아, 찾아줄게. 아직 너희는 초보자이기도 하고.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빡빡하게 굴기 싫거든.”
공녀가 손가락을 휙, 움직였다.
그러자 내 손에 들린 카드가 녹아내렸다.
[당신의 ‘사냥감 탐색’이 소모됩니다.]
카드는 녹아내리면서 동색 빛가루로 변했다. 빛가루는 마치 자기 의지를 가진 듯 쏜살같이 움직였다. 그것이 향한 수풀 사이에, 한 마리의 거대한 짐승이 웅크리고 있었다.
하얀색 털을 가진 사자였다.
다행히도 고블린 부락에서 상당히 가까운 위치.
“상점에서 추가로 아이템을 구매하겠습니다.”
나는 거침 없이 말했다.
“[동물 빙의]를 삽니다.”
메세지가 연달아 떴다.
[‘동물 빙의’를 구입합니다.]
[40 종족 포인트가 소모됩니다!]
[현재 당신이 가진 종족 포인트는 55입니다.]
소중한 초기 자금이 순식간에 반토막났다. 하지만 상관없다. 당장이라도 원시림을 쓸어버릴 저 용암에서 고블린 종족을 구하는 게 급선무다.
“아!”
내 모습을 보고 이단심문관이 깨달았다.
“과연! 그렇군요. 여러분, 최대한 눈에 띄는 짐승에 빙의하십시오!”
이단심문관은 나를 따라서 [사냥감 탐색]과 [동물 빙의]를 구매했다.
“원시인들은 신비하게 생긴 동물들을 숭앙합니다. 매우 기초적인 신앙이지요! 아하핫. 세계가 멸망할 것 같은 지금 상황에서 ‘하얀 사자’나 ‘검은 사슴’이 나타나면, 그것을 신의 계시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역시 이단심문관. 이해가 빨랐다.
“신비한 동물에 빙의해서 직접 안전구역까지 길을 인도하십시오!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따라올 테지요! 뛰어난 잔머리입니다, 사왕!”
“아."
“확실히….”
“모두 서두르십시오!”
동료들이 나와 똑같은 아이템들을 구매했다.
그런 동료들을 두고, 나는 하얀 사자를 가리키며 [동물 빙의] 카드를 썼다.
“저 동물에 빙의한다.”
싸아아아아!
의식이 흔들리면서 암전되었다.
다음 순간, 눈을 뜨니 나는 달라진 시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크르르…”
내 입에서, 아니. 아가리에서 짐승의 거친 울림이 흘러나왔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뾰족하게 튀어나온 발톱이 땅을 갉아먹고 있었다. 아름다운 하얀색 털이 야생의 흉포함을 가렸다.
“그르으! 그르르!"
‘좋았어, 계획대로다!’
나는 육중한 몸을 일으켰다. 사자의 몸은 인간과 전혀 달랐다. 네 발로 걷는 것이 어색했다. 그러나 계속 헛발질을 해가면서도, 나는 근처에 있는 고블린들을 향해 뛰어갔다.
‘오러를 쓰는 건… 불가능하진 않지만 어렵군. 혈도가 너무 달라.’
쿵! 쿠웅!
나는 마른 숲길을 질주했다. 사자의 앞발로 땅을 내디뎠고 뒷발로 쳤다. 사족(四足) 주행이 어색했지만, 사자의 달리기는 무척이나 빨랐다.
'오.'
신기했다.
‘의외로 기분 좋은데?’
나무가 타오르면서 낸 연기 냄새.
갓 피어난 꽃이 흘린 향기.
바로 가까이서 풍기는 이 악취는… 고블린의 체취겠지. 여름철 무더위에 하룻밤 푹 상해버린 된장찌개 같은 냄새다.
‘으이구. 어째 이 종족은 체취까지 추하냐!’
어느덧 나는 고블린 부락에 도착했다. 강렬한 냄새 덕에 길을 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케르르륵!
-케르, 케륵!
원시 고블린들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어린 고블린은 어미한테 달라붙어 케륵케륵 울부짖었고, 다 큰 고블린들도 땅바닥에 머리를 박거나(무슨 제스처인지 모르겠다) 발을 동동 굴렸다.
오죽 당황했으면 흰사자가 다가온 것도 모를까.
‘참 가엾고 딱한 종족이로다.’
나는 마을 입구에 우뚝 섰다.
"크르르으으으으!!"
그리고 고블린들을 향해 포효했다.
-케륵?!
-케르릅! 케르?!
고블린들이 혼비백산했다. 바닥에 머리통을 폭격하고 있던 고블린들은 허겁지겁 몸을 일으키다가 그만 넘어졌다. 어린 고블린들의 울음소리는 더 날카로워졌다.
‘얼씨구. 잘한다, 잘해.’
고블린들 입장에선 갑자기 대지가 흔들리더니 화마(火魔)가 하늘을 뒤덮고, 마침내 기이한 색깔의 마수(魔獸)까지 등장한 것이다. 그야말로 세상이 종말하는 느낌이겠지.
“그르르르르!"
나는 꼬리를 흔들어서 땅을 탁, 쳤다. 그리고 머리를 휙휙 돌렸다.
‘따라와. 이놈들아! 날 따라와라!’
물론 이놈들은 고블린이다. 생긴 것도 고블린이며 두뇌 수준도 고블린. 아무리 신비스러운 동물이 나타나서 영문 모를 행태를 보인다해도, 쉽게 따라오지 않았다. 그저 겁에 질린 듯 멀찍이서 날 지켜보았다.
‘그렇다면.’
나는 비장의 수를 꺼내들었다.
“고르르륵!”
내 아가리에서 인간의 목소리도 아니며 사자의 울음소리도 아닌, 생뚱맞은 울림이 터졌다.
[고블린 상류사회]를 쓴 것이다.
여태껏 답답하게 굴던 고블린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케, 케륵?
“고르르르! 고르륵!”
-케르르르…?
고블린들이 자기들끼리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고 수군거렸다. 꼭 뉘앙스가 ‘쟤 뭐라는 거야?’ ‘모르겠지만 뭔가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하고 쫑알쫑알 떠드는 느낌이었다.
나는 앞발을 굴려서 땅바닥을 쳤다.
“고르르륵! 고르고르! 골고륵!”
‘따라와라, 새끼들아! 좀!’
흠칫. 흠칫.
고블린들이 하나둘씩 일어섰다.
‘좋아. 잘한다! 그렇지! 잘한다, 우리 새끼들!’
나는 콧김을 내뿜었다.
고블린이여. 너희는 명색이 이족보행을 이룩한 생명체다. 설령 지금은 뇌수가 초록색에 물들어버린 원시 부족이라 하더라도 언젠가 눈부신 문명을 이룩할 수 있다!
“가르, 고르르특…!”
‘자, 따라와라!’
나는 멋지게 유턴하여 숲속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고블린들은 주저하면서도 내 뒤를 슬그머니 따랐다. 누가 먼저 앞장서냐를 두고 작게 실랑이가 벌어졌지만, 결국 부락에 있던 고블린 전원이 홀린 듯 나를 뒤따라 나서기 시작했다.
그때.
콰아아아아앙!
내가 무리를 이끌고 탈출한 지 얼마 안 되어, 화산에서 폭발한 암석 덩어리가 고블린 부락에 떨어졌다. 땅바닥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케르르르?!
-케루! 케릅, 케르륵?!
고블린들이 놀라서 엎드렸다. 곧이어 고블린들은 자기네 고향에 끔찍한 일이 펼쳐졌으며, 간발의 차이로 재앙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고블린 종족의 마지막 거주지가 파괴되었습니다!]
[이제 당신은 새로운 거주지로 저들을 인도해야 합니다.]
고블린들이 망연자실하게 나를 쳐다봤다.
얼빵한 낯짝들엔 미묘한 귀욤음미가 도사렸다.
“고르.”
‘훗.’
나는 흰사자의 몸으로 코웃음을 쳤다.
“케케륵케르."
‘고마운 줄 알거라.’
그리고 멋진 자태를 뽐내며 터벅터벅 걸어갔다.
-케르르….
-케, 케륵케르!
고블린들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두려움과 경계심에 가득차서 따라오던 것들이 갑자기 나를 바싹 쫓아왔다.
-케케륵케르!
고블린들이 함성을 질렀다.
-케케륵케르!
-케케륵케르! 케케륵케르!
‘이것들이 뭐라는 거야…?’
나는 드디어 이것들이 말귀를 알아들어서 마음이 좀 놓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쟤네가 뭐라고 지껄이는지 번역되진 않았다.
머릿속에 탑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온 건 그 순간이었다.
[태초의 신앙심!]
[고블린 종족이 원시 종교에 눈을 뜹니다!]
어?
[죽하드립니다!]
[당신의 종족은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원시 종교에 입문했습니다!]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이제부터 고블린 종족은 ‘백사자(白獨子) 신앙’을 가꾸어 나갈 것입니다.]
[당신은 최초로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당신에게 500 종족 포인트가 주어집니다!]
뭐야. 이것들.
나는 떨떠름하게 고블린 무리를 돌아봤다.
-케케륵케르! 케케륵케르!
고블린들은 희안한 구호를 외치면서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허. 나는 어이가 실종되어서 그만 콧김을 흘려버렸다.
‘이놈들 진짜로 날 신으로 아는구만?’
김공자.
내가 고블린들의 신으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