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 신이 되다. (2) >
2.
내 인도에 따라 고블린들은 무사히 탈출했다.
-케르르! 케루!
-케케륵케르!
고블린들이 기뻐하며 깡총깡총 뛰었다. 그 모습은 초록색 침팬지들. ‘케르륵’ 대신 ‘우끼끼’라고 울었다면 누가 봐도 영락없이 원숭이로 착각했을 거다.
‘짜식들. 귀엽네.’
-네 눈엔 쟤들이 귀엽냐…? 어?
배후령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좀비 너 진짜 눈이 삐어버린 거 아냐?
‘검제 씨. 마음의 눈으로 보십시오. 제겐 고블린들이 장차 취하게 될 모습이 보입니다. 너무도 숭고하고 아름다운 모습 말이에요. 아직 다가오지 않은 그 미래의 모습이 제게는 보인다 이 말입니다.’
-아아, 난 이제 이 새끼를 감당할 수가 없다…. 나는 무력하고 무능해서 이 새끼가 혓바닥을 놀리기만 해도 정신이 아득해지는구나….
그때, 다른 종족들도 탈출에 성공했다.
흑룡주는 흑조(黑鳥), 하나의 우아한 블랙 스완이 되어서 흡혈종을 인도했다. 아까 숲을 빠져나오면서 위를 쳐다보자, 퍼드드득! 수많은 박쥐들이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박쥐들은 삼각편대를 이루어서 흑조를 뒤쫓았다.
‘오. 멋진데?’
흑조가 날아갈 때 잠깐 나와 눈이 마주쳤다. 새까만 눈동자에선 짐승의 야성미가 아니라 흑룡주의 지성이 감돌았다. 펄럭! 흑조가 날개를 크게 펼쳤다.
-이히오!
그리고 흑조는 순식간에 지평선 저편으로 날아갔다.
동료들 역시 신비한 동물로 변신해서 대탈출을 이끈 것이다.
[퀘스트 클리어!]
[당신은 시원의 대해림에서 무사히 종족을 피난시켰습니다.]
[퀘스트 달성에 대한 보상으로 300 종족 포인트가 주어집니다! ]
[현재 당신이 가진 종족 포인트는 855입니다.]
보상도 짭짤했다.
‘최초로 원시 종교 어쩌고를 만들었다고 500포인트. 퀘스트 보상으로 300포인트. 나쁘지 않네요.’
-흐음. 많은 거냐?
‘초반에는 이 정도로 충분합니다. 당장 포인트가 딸려서 말라죽을 일은 없어요.’
-니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더 고블린 갓 김공자 님 속에서는 말이야.
‘넵. 그러니 얘네가 먹고 살 곳부터 구해줘야겠습니다.’
-제기랄 대미지가 1도 없냐 왜….
나는 마음속으로 구매할 상품을 골랐다. 문명 상점 이용은 사자에 빙의한 상태로도 가능했다.
[‘황동급 정착지 탐색’을 구입하시겠습니까?]
나는 주저없이 쇼핑을 질렀다.
‘예.’
메세지가 연달아 떴다.
[‘황동급 정착지 탐색’을 구입합니다.]
[80 종족 포인트가 소모됩니다!]
[현재 당신이 가진 종족 포인트는 775입니다.]
화아악!
머릿속에서 영상이 펼쳐졌다. 한 번의 강을 넘고 세 번의 시냇물을 지나면 바로 그곳에 고블린한테 제법 적절한 정착지가 있었다.
‘적절한 습기, 적절한 사냥터…. 그냥저냥 괜찮네.’
좋아, 이제 안내해주는 일만 남았다.
“고륵! 고르르, 크르, 고르!”
‘좋아! 나를 따라와라!’
나는 씩씩하게 사자의 앞발을 디디며 나아갔다. 아기 오리들처럼 고블린들은 뭣도 모르고 마냥 좋아서 내 뒤를 따라왔다.
그러기를 엿새째.
드디어 머릿속 영상이 알려준 정착지에 도착했다.
-케르르르!
고블린들이 좋아라 하며 시냇물에 몸을 던졌다.
[지정족이 이곳을 무척 마음에 들어합니다!]
[지정족 사이에서 고향을 잃은 슬픔이 옅어집니다.]
고블린들은 온몸에 흙을 묻혀가며 냇가에서 뒹굴뒹굴 굴렀다. 저게 쟤네들 취미였다.
어미들은 자갈을 파내고 맑게 고인 진흙을 어린 자식의 등에 발라줬다. 꼬맹이들이 케르르! 케르르! 웃었다. 진흙의 근질근질거리는 느낌이 참을 수 없이 좋은 걸까?
-아마 저렇게 해서 자기들 체향을 없애려는 거겠지. 고블린들 악취가 좀 심하냐? 그나마 진흙을 덕지덕지 바르니까 한결 낫구먼.
‘호오.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군요.’
-그런 것도 몰랐냐, 더 고블린 갓 김공자?
‘신은 하찮은 것 하나하나 신경쓰지 않습니다. 오직 위대한 계획만을 염두에 두지요.’
-미친 놈….
뭐라는 거야.
나는 앞발을 꼰 채 누워서 머드 축제를 구경했다.
흐뭇하게 보고 있자니 탑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곳을 지정족의 새로운 정착지로 삼으시겠습니까?]
‘예엡.’
[새로운 정착지가 개척되었습니다!]
[이곳 정착지의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이름이라…. 라비엘 신전이라고 짓고 싶은데 발음할 수가 없네. 얘네도 발음을 못할 테고.’
나는 시무룩한 얼굴로 땅바닥을 긁었다. 으음. 이거, 이, 사자 발톱이 땅을 긁으면서 찌극찌극거리는 느낌이 내 시무룩함을 달래주는 군….
-야. 어째 너 점점 더 짐승을 닮아간다…?
‘착각입니다.’
때마침 파리 비슷하게 생긴 벌레가 위이이잉 거리며 내 주변을 맴돌았다. 아. 참고로 내가 빙의한 동물도 사자 비슷하게 생겼을 뿐이지 완전히 사자랑 똑같진 않다. 편의상 그렇게 부를 뿐.
나는 꼬리를 움직여서 타닥! 파리를 잡았다. 꼬리는 정확히 파리 몸땡이에 명중. 파리는 날개를 파닥거리지도 못하고 내 옆구리에 부닥쳐 즉사했다.
이번 임무 동안 내 새로운 취미가 되어준 파리 사냥이다.
이게 은근히 꿀잼이더라.
-역시 짐승이 되어버렸는데, 이 새끼…?’
-저한테 짐승남 같은 매력이 있다는 뜻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죠. 아무튼 뭐, 제 울음소리를 따서 [구루]라고 합시다.’
그리하여 나는 포효했다.
“구루-!”
그 포효에 탑이 반응했다.
[지정족의 새로운 정착지를 ‘구루’라 명명합니다.]
[지정족이 멸종의 위험에서 벗어났습니다!]
[이제 당신은 스테이지 클리어를 선언할 수 있습니다.]
[지금 스테이지 클리어를 선언하겠습니까?]
-으와, 드디어 클리어가 떴구나! 이 지긋지긋한 고르륵 존에서 마침내 벗어날 수 있게 됐다! 야 뭐해! 빨리 클리어 선언해!
‘아, 뭐래요. 그렇게 탑을 모르십니까?’
-알지! 알아! 그냥 여기서 빨리 벗어나고 싶을 뿐이야!
‘기각하겠습니다.’
종족대전(種族大戰).
31층부터 40층까지 이어지는 이 테마는, 높은 층으로 올라갈수록 시대가 흐른다. 31층이 구석기 시대라면 32층이 신석기 시대가 된다든지. 그런 방식이다.
여기서 내가 클리어를 선언하면 다음층에선 수백 년, 어쩌면 수천 년이 흐른 뒤의 고블린들과 만나게 된다.
‘해놓을 수 있는 건 다 한 다음에 넘어가야죠.’
나는 천천히 고블린 종족의 스테이터스를 둘러봤다.
인도하는 동안 몇 번이나 훑어보았지만, 확실히 해두어야 하는 문제였다.
‘고블린의 특성이 [종족차별의 희생자], [동족의식], [탐욕갑]이었지.’
차례대로 정보를 열람해봤다.
+
[종족차별의 희생자]
랭크: F
효과: 지정족은 외모가 추합니다! 보는 이로 하여금 혐오를 불러일으킵니다. 이로 인하여 지정족은 모든 편견과 오해에 시달리며, 다른 종족과 건전한 관계를 맺는 데 크나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주의하십시오! 차별 받는 자들의 심장에는 증오가 고입니다. 지정족들의 증오가 커지면 커질수록 이들 역시 다른 종족을 무조건 적대하게 됩니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기 전에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단, 역사의 전개에 따라 이 특성은 변화할 수 있습니다.
+
‘일단 이게 문제고.’
만약 다음층에 올라갔더니 고블린이 다른 종족들과 죄다 적대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면? 그래서 평범한 판타지 세계에서 그러하듯 우리 고블린들이 [공공의 적]으로 여겨지면?
끔찍하다.
기껏 살려 놓은 결과가 공공의 적이라니.
‘이건 떠나기 전에 반드시 해결해야하고… 다음은 동족의식.’
+
[동족의식]
랭크: C
효과: 지정족은 동족의식이 매우 강합니다. 한 명의 지정족이 죽었을 때, 똑같은 고블린을 제외하면 이 세계의 어느 종족도 눈물을 흘려주지 않습니다. ‘몬스터가 죽었군! 경사로세!’ 오히려 축배를 들 뿐.
고블린은 고블린.
어쩔 수 없는 운명입니다.
세상에 믿을 건 오직 동족밖에 없다는 생각 아래 지정족은 똘똘 뭉칩니다. 지정족 사회에서 제일 금기시되는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같은 지정족을 배신한다’ ‘같은 지정족을 죽인다’ 등등.
어지간한 불행이 없는 이상, 지정족이 내분해서 자멸할 일은 없습니다!
※단, 역사의 전개에 따라 이 특성은 변화할 수 있습니다.
+
몇 번이나 보는 거지만 이건 좋은 특성 같다.
하긴 아무리 고블린이라 하더라도 좋은 특성 하나쯤은 있어줘야지.
-마냥 좋기만 한 특성은 아닌 거 같은데….
‘네? 그래요?’
-아니, 그냥 한번 말해봤어. 다음 특성 열어라 빨리.
‘드디어 고블린의 매력을 느끼기 시작하신 건가요?’
-빨리 끝내고 가고 싶어서 그래….
정말이지 솔직하지 못한 반응이다. 아기자기하게 종족을 키우는 맛을 느낀 것이 뻔히 보이는데.
-아니라고....
좌우간 그렇게 한 마리의 사자와 한 명의 귀신이 나란히 앉아서 마지막 설명창을 들여다봤다.
+
[탐욕갑]
랭크: B
효과: 지정족은 탐욕이 넘쳐 흐릅니다. 자신들이 못 생기고 추하다는 자괴심 때문일까요? 지정족은 자기 스스로 인정받기보단 자신이 가진 소유물로 인정받으려 합니다. ‘케륵! 나는 따뜻한 진흙을 발랐다!’ ‘케르륵! 나는 시냇물 위쪽의 명품 진흙으로 온몸을 도배했다!’
더욱 잘난 것에 대한 욕망.
더욱 멋진 것에 대한 열망.
지정족들의 심장에서는 열등감과 자괴심, 인정욕구가 뒤섞여 막강한 탐욕을 이룹니다. 어쩌면 지정족은 반짝거리는 보물을 탐하게 될 지 모릅니다. 어쩌면 노예들을 잡아다가 누구의 노예가 더 예쁜지 자랑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지정족은 탐욕스러우며, 이 탐욕에 지정족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들의 ‘탐욕’이 어떤 식으로 변할지는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단, 역사의 전개에 따라 이 특성은 변화할 수 있습니다.
+
"......."
나는 심사숙고에 들어갔다.
‘역시 저랑 좀 비슷해요.’
-어? 뭐가?
‘아뇨. 그냥 혼잣말입니다. 음.’
나는 천천히 사자의 육중한 몸을 일으켰다.
슬금슬금 냇가로 다가가니, 진흙을 묻힌 고블린 꼬맹이들이 날 발견하고 몰려왔다.
-케르르르.
-케케륵케르?
인간에 비해서 고블린은 안면 근육이 적었다. 입이 지나치게 컸다. 광대가 솟아나왔다. 결과적으로 표정을 알아보기 되게 어려웠다.
“크르르.”
나는 앞발을 들어서 냇가의 바위를 후려쳤다. 고블린들이 깜짝 놀라서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몇 번이나 앞발을 내리쳤다.
얼마 가지 않아서 발톱이 다 부러졌다.
-엉? 뭐 하냐?
‘기다려보세요.’
너덜너덜해진 앞발로 나는 진흙을 꾹꾹 눌렀다. 먹을 빨아들인 붓처럼 사자의 털이 진흙으로 흥건해졌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내 행동을 고블린들이 조마조마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크릉."
나는 제일 근처에 있는 꼬마 고블린한테 다가갔다. 거대한 사자의 그림자가 드리우자 꼬맹이는 옴찔거렸다. 그렇지만 어디로 도망치거나 피하진 않았다.
“고르. 크르릉. 크르, 고르르륵."
‘옳지. 장하다. 그렇게 그대로만 있어라.’
푹.
나는 진흙 묻은 앞발로 살살 꼬맹이의 배를 문질렀다. 유리창을 닦듯 앞발로 곡선을 그렸다. 움찔움찔. 내가 진흙을 묻힐 때마다 꼬마 고블린이 흠칫거렸다.
-어어어….
배후령이 말했다.
-혹시 지금 문신을 그리고 있는 거냐?
그렇다.
‘예.’
나는 꼬마의 몸에 진흙으로 소용돌이 문양을 그렸다.
이 꼬마 한 명한테만 그런 게 아니다. 소용돌이 문양을 끝낸 다음, 다른 고블린들에게도 제각기 문신을 그려주었다.
“고오르.”
인간의 손이 아니라 사자의 발로 그리는 것이어서 서툴렀다. 고운 물감이 아니라 질퍽한 진흙으로 그리는 것이어서 어수룩했다. 그러나 설령 서투르고 어수룩하더라도 그건 틀림없이 그림이었다.
마침내 고블린 전원에게 문신을 그려주자,
-케르르? 케르?
고블린들이 신기하다는 듯 서로의 몸을 두리번거렸다. 얼마 뒤,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애처럼 지들끼리 진흙을 묻히고 놀기 시작했다.
-케륵! 게르릅, 게르게르.
-게르게르!
고블린들이 시냇가에서 첨벙첨벙 뛰놀았다. 냇물에 문양이 지워지면 다른 애들이 새롭게 문신을 그려주었다. 그걸 보고 고블린들이 또 케르륵 웃었다.
[지정족이 미의식(美意識)에 눈을 뜹니다!]
[지정족이 자신의 몸이 뽐내는 아름다움에 그만 넋을 잃습니다.]
탑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지정족의 특성 ‘종족차별의 희생자’가 변화합니다!]
[지정족이 새로운 특성 ‘원시 패셔니스타’를 얻습니다!]
눈앞에 글자들이 떠올랐다.
+
[원시 패셔니스타]
랭크: E
효과: 지정족은 외모가 추합니다! 보는 이로 하여금 혐오를 불러일으킵니다. 이로 인하여 지정족은 모든 편견과 오해에 시달리며, 다른 종족과 건전한 관계를 맺는 데 크나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케륵! 우린 못 생겼다!’ 이에 지정족은 특별한 문화를 발명했습니다. ‘그렇다면 멋진 옷을 입으면 되는 거 아닌가?’ 바로 패션으로 어떻게든 외모를 커버 치려는 것입니다.
지정족은 초록색 피부에 다양한 문신을 그립니다. 문신이 아름다울수록 그 지정족은 동족 사이에서 뛰어난 패셔니스타로 인정받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이제 지정족에게는 패션이라는 문화가 생겼습니다!
원시적인 패셔니스타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아무리 꾸며봤자 고블린은 고블린 아닌가.’
물론 그 패션이 다른 종족들에게 인정을 받느냐 못 받느냐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단, 역사의 전개에 따라 이 특성은 변화할 수 있습니다.
+
오케이.
나는 사자의 아가리로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크르르.”
종족 대전이니 수호성좌니 거창하지만, 역시 그렇다.
쉽게 말해 나는 그냥 이 아이들을 최대한 좋게 양육하면 되는 거다.
"크릉, 크르르르, 고릅, 고르륵!”
‘야, 내가 너희 종족을 승천시켜주마!’
나는 힘차게 포효했다.
-케케르케륵!
-케케르케륵! 케케르케륵!
온몸에 진흙을 묻힌 고블린들이 내 주위를 감싸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
이 모든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배후령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니… 그냥 미친놈들 같은데…. 설마 얘네들, 나중 가면 김공자 버전2가 되어 있는 건 아니겠지? 김공자 같은 또라이가 종족 단위로 생겨버리는 건 아니지? 에이, 설마 아닐 거야. 설마아. 그런 판타지, 그런 지옥도가 현실에 펼쳐질 리 없어….
-케르르르륵!
고블린들의 웅장한 함성이 새로운 정착지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