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159화 (159/400)

159화.  < 위대한 달팽이 제국. (2) >

3.

태초에 ‘라임’이 있었다.

‘라임’이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백성들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라임’께서는 백성들 가운데서 으뜸인 백성들을 고르셨나니, 백성들 스스로 자신들이 선택받은 종자임을 깨우치도록 증거를 내리셨다.

-이 천하에 백성이 많고 또 많다 하여도 ‘라임’, 두 어절을 온전히 발음하는 족속은 오직 너희뿐이로다. 내 너희만이 거룩한 이름을 부르도록 허락하리니. 아아! 이것이 너희의 권능이로다. 너희는 ‘라임’을 선택받은 증거로 여기어, 먹을 때나 똥쌀 때나, 입을 때나 벗을 때나, 잠들 때나 깨어날 때나, 언제나 ‘라임’을 읊조려서 너희의 삶과 목소리 한가운데 내 존재를 증명토록 하여라…….

“……이게 대체 원 똥싸는 소립니까?”

내 질문에 이단심문관이 활짝 웃었다.

“제가 만든 성전(聖典)입니다!”

“성전이요?”

“예! 산와족의 발성기관은 매우 특이합니다. 일곱 종족 중에서 오직 산와족만이 [라임]을 발음할 수 있지요! 그러기에 저는 이 발음을 신의 이름으로 정했습니다.”

이단심문관은 탓, 하고 가볍게 지하도시에 착지했다. 나를 비롯한 동료들이 그를 따랐다. 이단심문관은 싱글벙글거리면서 ‘달팽이 문명’이 밟아온 역사를 소개했다.

“귀인족도 요정족도 [라임]을 정확히 발음하진 못합니다! 단순히 발성기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만, 저는 이것에 신화적인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달팽이들이 꾸물꾸물 기어다녔다. 그들은 우리의 몸을 통과해서 지나쳤는데, 꼭 우리가 투명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이쪽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산와족은 하늘의 간택을 받은 증거로써 [라임 ]을 읊조릴 수 있다고 말입니다!”

“왜……?"

성기사가 입을 열었다.

“왜 이런 짓을 했는가? 이단심문관. 종교의 두려운 점은 누구보다 네가 잘 알고 있다. 함부로 신의 이름을 오용하다가는 돌이킬 수 없게-.”

“앗. 함부로 오용하지 않았습니다. 매우 주의를 기울여서 의도적으로 이용했습니다!”

"......."

“이용은 오용과 다르고, 악용과는 더욱더 다릅니다.”

이단심문관은 방긋 웃었다.

“여러분. 어차피 종교는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란 언제 어디서나 원인을 찾으려 드는 존재지요. 자기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 이 세상이 존재하는 원인을 찾으려 듭니다. 신(神). 이 한마디의 단어는 모든 궁극적 원인을 채워주는 마법입니다!”

이단심문관이 기둥을 가리켰다. 거대한 기둥. 지하도시 한복판에 세워진 그것은 동굴의 밑바닥부터 솟아나와 천장을 관통했다. 기둥에는 이집트 벽화와 같은 그림들이 줄지어졌다.

내가 아까 읽은 ‘성전’도 바로 이 기둥에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성기사. 당신이 무엇을 지적하는 건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지금 시대에는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이들은 왜 비가 내리는지 모르고, 왜 심장이 뛰는지 모르며, 왜 물을 마셔야만 살 수 있는지 모릅니다.”

이단심문관의 입가에 싱긋 미소가 그려졌다.

“그 두려움에 대해서 생각해보십시오.”

“두려움……?”

“예. 두려움입니다.”

이단심문관이 말했다.

“자신의 몸안에서 심장이 뜁니다. 박동이 들립니다. 그러나 이들은 왜 심장이 뛰는지 알 수 없습니다. 상처를 입으면 피가 흐르고, 피가 적어지면 죽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왜 피가 흐르는지 모릅니다. 어째서 빵은 맛있는지, 어째서 허기가 채워지면 행복해지는지, 왜 소금을 먹어야만 살 수 있는지, 이들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단심문관은 기도하듯 양손을 모았다.

“이들에게 세상은 미지의 괴물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아니. 자신의 몸속에조차 괴물들이 도사리고 있지요. 아무것도 모른 채 단지 살아지는 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자신의 삶에서 철저히 무지하고 무력하다…. 여러분. 저들의 두려움을 아시겠습니까?”

깡!

어디선가 돌을 캐는 소리가 들렸다.

광활한 동굴 저편에서 광부들이 돌소금을 캐고 있었다.

“신(神)은 이 무지와 무력을 해소시켜줍니다. 이제 비는 미지의 괴물이 아닙니다. 신의 눈물이지요! 세상은 이따금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깡! 까앙, 깡!

달팽이 광부들이 점액을 흘리며 돌소금을 캤다. 달팽이들은 촉수로 뾰족한 돌맹이를 잡아 휘둘렀다.

“이제 소금은 미지의 돌덩어리가 아닙니다. 태초의 지모신(地母神)이 갈갈이 찢겨져 죽으면서, 머리카락은 숲이 되었고, 피는 바다가 되었으며, 이빨은 소금이 되었습니다. 소금은 신의 유해입니다. 따라서 신성하고, 따라서 먹어도 안전합니다. 아핫! 오늘날로 따지면 신화는 각각의 식품에 위생증명서를 찍어주는 셈이지요!”

양손을 모아 기도하는 이단심문관의 자태는 경건해 보였다.

이단심문관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그침 없는 시냇물처럼 읊조렸다.

“그리고 신은 말해줍니다. 너희는 나로 인하여 태어났노라고. 나는 너희를 신경 쓰며, 고로 너희는 신에게 신경 쓰이는 존재라고. 아시겠습니까? 신으로 인하여 비로소 사람들은 공란(空構)으로 비워져 있던 삶의 원인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

“여러분! 상상해보십시오."

이단심문관이 빙그레 웃었다.

“이제 자신의 몸속에서 들려오는 심장의 박동은 더 이상 미지의 괴물이 흘리는 신음이 아닙니다. 신께서는 자신의 자태를 빌리어서 사람을 디자인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박동은 신께서 의도하신 음율이며, 나는 언제 어디서나 신이 작곡한 음악을 엿듣는 것입니다.”

이단심문관이 하아, 숨을 흘렸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단심문관은 지하도시를 둘러보았다 .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

달팽이들이 모여 이룩해낸 문명을 돌아보며 이 [자그마한 신]은 기뻐하고 있었다.

“이제 사람은 살아지는 대로 살아가는 존재에서 벗어납니다. 마침내 미물에서 탈출합니다! 드디어 이들의 삶에는 방향이 생깁니다.”

우리는 아무 의미도 없이 이 세상에 떨어진 게 아니다.

우리는 신께 사랑을 받는다.

“인간은 끊임없이 신전을 짓습니다. 거대한 불가사의를 지어다가 봉헌합니다. 자신들이 신께 사랑받고 있다는 증거물을 이곳 지상에 강림시킵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황홀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 시대의 인간들은 세계에 구애하는 것입니다!”

"......."

“모든 사랑에는 증거가 필요합니다. 노력이 필요하지요. 이들은 두려움에 파묻혀서 질식하는 대신, 발버둥치고 발악하여, 신들에게 사랑을 받고자 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 사랑이 어두운 오해라 할지언정, 때때로 사람은 살기 위해서 오해를 필요로 합니다. 저는 이들을 축복합니다!”

이단심문관이 기도를 풀고 양팔을 벌렸다.

“여러분은 종교를 필요악이라고 여길지 모르겠습니다만. 모든 필요악은 필요선에서 태어납니다. 아직 이들에겐 신이 있어주어야 합니다! 신이 있어서 이들은 숨을 쉬고, 살아가며, 사랑합니다.”

그것이 이단심문관의 신념(信意)이자 신념(神意)이었다.

“인간이란 한 잎의 꽃에 눈물을 흘리기 위해서라도 꽃을 사랑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신은 이들에게 무한한 이유를 선물해주지요! 고대의 신은 결코 인간성을 말살하지 않습니다. 신이 있기에 비로소 사람은 자신을 이해하고 세상을 사랑합니다!”

한동안 침묵이 있었다.

멀리서 돌소금이 캐어지는 소리가 까앙, 까앙, 울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지하세계’를 살펴보았다.

-노예들! 어서 움직여라! 라임!

-쉬는 시간은 진즉에 끝났다. 라임! 얼른 실어서 부두로 옮겨라!

달팽이들이 돌벽에 들러붙어 촉수를 휘둘렀다. 찰싹! 지게를 짊어진 노예들이 무릎을 굽혔다. 이미 채찍질에 익숙해진 걸까. 노예들은 신음을 흘리면서도 다시 발을 내디뎠다.

-하나, 둘. 하나, 둘….

그중엔 독사가 인도하는 종족. 이마에 외뿔이 박힌 귀인족(鬼人族)이 있었다. 도깨비들은 무거운 짐을 나르는 데 쓰였다.

-쉬익. 쉭, 쉬이이…!

성기사가 인도하는 종족. 새기족(認籍族)은 동굴 바깥으로 이어지는 강물에서 헤엄쳤다. 인어들은 수영하면서 직접 갤리선을 이끌었는데, 그들의 상반신에는 밧줄이 꽁꽁 매여서 뱃머리에 묶였다.

-피르르르! 바아! 피르!

흑룡주가 인도하는 종족. 흡혈종(吸血種)은 동굴에서 쉬지 않고 날아다녔다. 박쥐들은 뒷발에 두루마리 편지나 여타 잡스러운 물건을 꽉 쥐었다. 동굴의 서쪽에서 동편으로, 박쥐들이 종횡무진하며 주민들한테 짐을 배달했다.

“아."

내 시선을 눈치 채고 이단심문관이 미소 지었다.

“이곳은 슬라임 문명의 수도, 라임폴리스입니다. 특산품은 암염(巖鹽)입니다. 신화 속 전승에 따르면 여기는 태초의 지모신이 죽으면서 머리를 떨어트린 곳이지요! 산와족은 이 동굴이 지모신의 [두개골]이고, 돌소금이 지모신의 [이빨]이라 믿습니다! 이 [성스러운 이빨]을 제국 전역에 공급하는 것이 주요 산업으로써, 산와족들은 소금 무역으로 권력을 통제합니다.”

“……대단해. 대단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200년이라니.”

흑룡주가 신음을 흘렸다.

“말이 안 돼. 어떻게 200년이라는 시간을 버틴 거야?”

“흐음? 임무에 들어선 지금 저희는 일종의 정신체 상태가 아닙니까? 200년 쯤이야 간단하지요!”

“아니, 그게 아니라…… 200년이잖아.”

“예! 그 동안 저는 계속해서 하얀 강아지에 빙의했습니다. 강아지가 죽으면 그 후손에 다시 빙의했지요. ”

“내 말은…… 아니다.”

말하다가 말고 흑룡주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다른 동료들도 표정이 크게 안 달랐다.

이단심문관은 방긋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하여, 제가 빙의하는 혈통의 강아지들은 신수(神獸)로 모셔집니다! 황궁과 신전에서 머무르지요. 오늘도 34대 신수가 죽어서, 새롭게 35대 신수에 빙의하려던 참이었습니다만. 공교롭게도 여러분이 돌아왔군요! 다시 한번 환영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

동료들이 입을 다물었다.

이단심문관의 뒤쪽으로는 기둥이 서 있었고, 그 너머에 스핑크스 같은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다. 조각상은 한마디로 말해서 거대한 웰시코기. 이단심문관이 무슨 강아지에 빙의해 왔는지 짐작할 만했다.

그리고.

-케르르륵!

내게 너무도 익숙한 울음소리가 어디선가 들렸다.

-케르르, 케륵! 오늘의 영광을 우리 신성한 백사자께 바친다! 케르!

-위대한 슬라임폴리스의 시민들에게 내 피를 바친다! 고륵!

쿵! 쿵!

두 명의 고블린이 저마다 칼을 들고 방패를 두들겼다. 그들은 평평한 갯벌에 서 있었다. 무수한 달팽이들이 갯벌을 둘러싼 채 환호성을 질렀다.

-라임! 오늘 너한테 전재산을 걸었다, 더러운 곰팡이!

-키르케! 오늘이야말로 본때를 보여줘라! 죽여버려라!

-우! 우! 우! 우!

관중의 함성을 듣고 고블린들이 포효했다.

-고오오오오!

그리고 고블린들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진흙이 튀었다. 고블린들은 단검을 휘둘러 상대방의 방패를 후들겨 팼다. 깡! 까아앙! 거칠고 무서운 쇳소리가 울렸다.

달팽이 관객들이 내지르는 환호성은 더욱 커졌다.

-우우우! 우우!

-껍질 없는 야만족아! 앞발을 휘둘러라! 라이무! 앞발로 찍어버려!

-뭐하는 거야! 발을 움직여야지, 멍청한 새끼! 라임! 라임!

나는 잠시간 할 말을 잃었다.

“……검투사? 검투사예요?”

“네!”

이단심문관의 미소가 만개했다.

“검노(劍奴)입니다!”

고블린이 울부짖으며 칼을 휘둘렀다. 피가 솟구쳤다. 방패로 미쳐 가리지 못한 살갗, 기하학적인 문신이 그려진 몸에 빨간 핏줄이 그어졌다.

“지정족(地精族)은 용맹하면서도 영리하기로 유명합니다! 슬라임폴리스에서, 아니, 슬라임 제국 전역에서 검노로 제일 애호하는 종족입니다.”

자상을 입은 고블린이 비명을 질렀다. 그 틈을 상대는 놓치지 않았다. 단숨에 칼을 역수로 잡아서 고블린의 목에 쑤셔 박았다.

피가 솟구쳤다.

관객들이 환호했다.

-고오오오오!

그 순간.

[32층 퀘스트가 주어집니다.]

내 눈앞에 글자들이 새겨졌다.

+

[위대한 달팽이 제국 - 지정족 편]

난이도: B+

임무 목표: 종족 통일이 임박했습니다. 통일의 주역은 산와족(山禍族). 이들은 고도로 발전된 정부 체계와 종교 조직을 앞세워서, 다른 종족을 차례차례 노예로 복속시켰습니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그들의 점액질 아래 모든 종족이 무릎 꿇을 것입니다.

당신은 산와족의 압제에서 지정족을 구출해야만 합니다!

※단, 인도에 실패할 경우 산와족의 승리로 32층이 마무리됩니다.

+

대탈출.

그것이 이번 스테이지의 임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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