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161화 (161/400)

161화.  < 동굴의 불. (1) >

1.

동굴은 공기가 찼다. 서늘했다. 고블린들은 코를 킁킁거릴 뿐, 차가운 수증기가 살에 들러붙어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림 잡아서 천 명에 이르는 고블린이 모두 침묵했다.

-오늘 검투에서 위대한 전사가 한 명 죽었다.

그 가운데 누군가가 나직하게 말했다.

-전사의 이름은 갸리다. 케르. 흰색 갈기 부족 전사장 오로간과 고르헤의 딸이며, 백사자께 문신을 물려받은 대전사(大戰士) 고르기르의 자손이다.

목소리를 흘리는 자는 드러나지 않았다. 군중에 파묻혀 있었다. 동족의 그림자와 동굴의 그늘에 기대어서, 어느 고블린은 말하고 있었다. 연단에 서서 하는 말이 아니었으므로 그것은 연설이 아니었다.

-깔깔한 녀석이었다. 케륵.

-어릴 때부터 남 패고 다니더니 결국 자기가 처맞아 죽더군.

한 명의 연설이 아니기에 고블린들은 자유로이 발언했다. 어두운 동굴 속. 여기저기서 고블린들이 한마디씩 끊어 말을 던졌다. 말의 파편들이 모여져 누군가의 인생이 단편으로 조립되었다.

-갸리는 자기가 때린 건 기억하지 못했다.

-자기가 맞은 건 죽어도 안 잊었지. 케르르.

-코에 독기를 달고 사는 아이였다. 기억나는군. 어릴 때 고르헤가 갸리에게 문신을 발라주려 했다. 하지만 갸리는 고개를 도리질치고, 자기가 알아서 그리겠다며 남들 문신을 보고 따라 그렸다.

-케르. 갸리는 언제나 고개를 도리질치는 자였다.

한 인생이 품앗이로 모아졌다. 천 명의 단편. 천 개의 엽편이 ‘갸리’라고 불리는 어느 고블린의 이야기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깨달았다.

‘……장례식이구나.’

오늘 콜로세움 경기에서 고블린 한 명이 죽었다. 그 지정족의 이름이 갸리였다. 갸리와 알고 지낸 사람, 한 번이라도 갸리와 대화를 나눈 사람은 지금 이곳 지하로 모여든 것이다.

-갸리에겐 사람에게 고개질을 치는 것과 세상에 칼질을 치는 것이 같다.

-그걸 같은 것으로 여기는 아이였다. 케륵.

-그래서 검투사가 되었겠지.

모닥불이 일렁였다.

동굴 벽에 그림자가 새겨졌다. 그림자 속에서 고블린들은 구분되지 않았다. 군체(群體)였다. 울룩불룩한 그림자들이 아가리를 벌려 소곤거렸다.

-갸리의 칼에 죽어나간 동족이 36명이었다.

-잔인한 아이.

-산와족이 검노의 낙인을 찍었을 적에 갸리는 케르케르 웃었다. 그걸 훌륭한 문신이라 생각한 것이다.

-무서운 아이.

-칼질을 행복으로 아는 아이였지만, 갸리에게 허락된 싸움터는 검투장밖에 없었다. 갸리에게 허용된 대적자는 동족밖에 없었다. 고륵. 행복한 칼질로 동족을 죽일 수밖에 없다는 게 갸리의 불운이었다.

-케르르륵.

-어려운 말이다.

-불행한 아이.

모닥불이 일렁였다.

-갸리는 우리의 동족인가?

그림자들이 대답했다.

-고르.

-갸리는 문신을 그리는 자다. 그림을 그리는 자다. 진흙을 사랑하고 빗물을 그리워하는 자다.

-갸리는 우리다.

늙은 목소리가 말했다.

-갸리는 구루로 돌아갈 것이다.

구루.

내게도 익숙한 말이었다.

숨을 죽인 채 고블린들의 장례를 지켜보던 나에게, 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지정족의 구루 교의(敎義)를 목격했습니다.]

눈앞으로 글자가 이어졌다.

+

[구루 교의]

분류: 종교. 백사자 신앙.

기원: [동족의식(C)]

설명: ‘구루’는 모든 지정족의 고향입니다. 구루는 황금시대가 몰락한 이후, 지정족이 최초로 세운 마을입니다. 구루는 지정족의 나라입니다. 구루는 따뜻한 시냇물이 흐르고 부드러운 진흙이 게워지는 곳입니다.

구루.

그곳은 백사자(白觸子)가 마지막으로 머무른 땅입니다.

지정족은 이승과 저승을 따로 두지 않습니다. 단지 ‘구루’와 ‘구루가 아닌 곳’을 구분할 뿐입니다. 지정족들이 삶에서 기대하는 것이란 빗물과 진흙, 많은 고기, 편안한 잠자리며, 이것들은 전부 현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지정족에게 내세의 신앙은 불필요합니다.

모든 동족의 고향.

이들은 구루로 돌아가길 원합니다.

※단, 시간이 지날수록 구루에 대한 기억은 흐릿해집니다.

※이대로 방치하면 ‘구루’는 한없이 추상적인 장소로 변모합니다! 그 경우, 구루는 ‘이 세상이 아니라 다른 어딘가에 존재하는 공간’이라는 개념으로 바뀔 것입니다.

※지정족이 구루를 잃어버린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구루 교의가 ‘저승’에 대한 교리로 바뀔 가능성이 있습니다!

+

"......."

나는 설명창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이해하기엔 어려운 말들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오직 나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있었다.

“별 생각 없이 지은 이름이었는데. 구루.”

심장이 따끔거렸다.

“……이 아이들에겐 어마어마한 의미가 되어버렸어요."

뭔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 들었다.

정말로 이상했다. 나 없이도 고블린들이 스스로 자라났다는 게 뿌듯했다. 그러나 내가 아무런 생각 없이 던진 말 한마디가 이 아이들에겐 하나의 의미가 되었다는 것, 의미로 굳어버렸다는 것, 거기에 매달려서 살게 되었다는 것이 두려웠다.

조마조마한 마음.

나는 이 아이들이 걱정되었다.

“아이들……."

그렇구나.

“이게 아이들을 보는 느낌이군요.”

지금까지 나는 아이를 가진다는 걸 상상해본 적 없었다. 나 자신이 누군가의 부모가 된다는 걸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나는 지정족에게 부모와 같은 역할을 해버리고 말았다.

-글쎄? 나도 새끼를 쳐본 적은 없어서 잘 모르겠네.

"......."

마음이 술렁거렸다.

-케륵.

늙은 고블린이 걸어나왔다. 동굴 한복판엔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늙은 고블린이 모닥불 앞에 서자, 여태껏 가리의 단편을 주섬주섬 던지던 지정족들이 입을 다물었다.

정적.

늙은 고블린은 정적이 좀 더 투명해질 때까지 기다렸고.

“……어?"

타오르는 모닥불에 양손을 집어넣었다.

“잠깐만요. 저거, 혹시 분신 자살을 하려고……."

-아니야. 잘 봐라, 좀비야. 손이 불에 안 타잖아.

배후령이 내 걱정을 가로막았다.

-쟤는 오러를 쓸 줄 아는 놈이다.

“네?”

-저 녀석. 오러 사용자야. 양손을 오러로 감싸고 있어.

배후령의 말이 맞았다.

불꽃에 가려저서 잘 안 보였지만 분명히, 희미하게나마 고블린의 쭈글쭈글한 손에는 오러가 감돌았다. 붉은색 오러였다. 늙은 고블린은 양손을 모닥불에 파묻었다.

화르르륵!

불꽃이 치솟았다.

그저 타오르기만 하던 모닥불이 기묘하게 구부러졌다. 노인은 무표정하게 오러를 써서 불을 매만졌다. 늙은이의 손길 끝에서, 불꽃은 승천하는 용처럼 솟아올랐고, 소용돌이치듯 빙글빙글 휘돌았으며, 와락 만개하는 꽃과 같이 펼쳐졌다.

-.......

-.......

고블린들은 말없이 변화무쌍하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마치 무대를 지켜보는 관객처럼 고블린들의 눈은 고요했다.

화르륵. 화륵!

동굴은 거대했으나, 거대한 허공이 모조리 칠흑이었다. 불꽃은 유일한 유채색으로 빛나 모든 이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아.’

그리고 나는 이해했다.

‘저건, 그림이다.’

그렇다.

노인은 불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불꽃이 타올랐다.

타오를 적에 저마다 다르게 타올랐다.

양갈래의 불이 아가리를 벌리듯 쩌억 나뉘어서 높이, 위로, 동굴 천장까지 치솟았다.

▲.

그것은 분노였다.

불의 우듬지가 천장에 부닥쳐서 산산이 흩어졌다. 불티가 꽃잎처럼 쏟아졌다. 천천히. 느릿하게. 어두운 동굴 속에서 불티들은 반짝, 반짝, 거리다가 이윽고 사라졌다. 사라지고 남은 자리에 어둠이 남았다.

▼.

그것은 슬픔이었다.

모닥불에서 불꽃이 끊임없이 타올랐다.

자잘하게. 다섯 갈래로. 다섯 개의 손가락으로.

하지만 불꽃의 손가락은 천장까지 닿지 못했다. 쏟아져 내리는 불티를 미처 잡아주지 못했다. 하늘에서 흘러내리는 불티와 땅에서 치솟는 불꽃 사이에는, 도저히 메울 수 없는 한 뼘의 허공이 있었다.

▲.

그것이 갸리의 죽음이었고 이들의 장례였다.

고블린들이 소리 없이 울었다.

불꽃을 지켜보는 지정족은 누구나 불의 의미를 알았다. 그것은 그들의 문자였다. 글자였다. 그림이었다. 가장 미세하게 흔들리는 불꽃, 힘없이 사그라드는 한점의 불티조차, 지정족에겐 하나의 명백한 손짓이었다.

노인은 불을 불사질렀다.

[당신은 지정족의 혈화를 목격했습니다.]

일렁이는 불꽃 속에서 글자가 비치었다.

+

[혈화]

분류: 예술.

기원: [원시 패셔니스타(E)]

설명: 혈화는 지정족 특유의 예술입니다. 산와족에게 정복당해 공동도시(空洞都市) 슬라임폴리스로 끌려온 이후, 지정족들은 진흙을 구하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림 문자를 표현하기 곤란해진 것입니다.

‘그려야 한다.’

하지만 지정족의 미의식(美意識)은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싶다.’

오히려 불타올랐습니다.

지정족은 진흙의 대체제로 불을 골랐습니다.

어두운 동굴에선 그림을 알아보기 힘듭니다. 하지만 불꽃을 쓰면, 동굴의 어둠은 돌연 거대한 도화지로 바뀝니다. 지정족은 동굴 생활을 받아들이고 이용한 것입니다.

‘아름답다.’

흙의 종족은 불의 예술에 매료되었습니다.

‘고르.’

동굴의 불.

지정족은 이것을 혈화(穴火)라 이름붙였습니다. 때로는 동굴의 그림이어서 혈화(穴書)로, 때로는 불꽃을 피에 비유하여 혈화(血火)나 혈화(血書)로 부릅니다.

불은 타오른 다음 사라집니다.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따라서 산와족들의 감시를 피하기 좋습니다.

혈화를 지켜볼 때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는 것이 예의입니다. 이 역시 산와족들에게 현장을 들키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고요한 불에 행운이 함께하기를.

※단, 오러 사용자만이 혈화를 시연할 수 있습니다.

※지정족 가운데 오러를 사용할 줄 아는 자는 극소수입니다! 그중 붉은색 오러를 쓰는 ‘제사장’은 1명밖에 없습니다. 제사장이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할 경우, 혈화 예술은 쇠퇴합니다.

+

노인이 불꽃 속에서 손을 저었다.

화르르르... 르... 르...

한때 거세게 타올랐던 불이 조금씩, 점차 사그라졌다. 더는 천장에 부딪혀서 깨지는 불티도 없이. 더는 장작에서 타올라 울부짖는 불꽃도 없이. 불은 자취를 남기지 못하고 조용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꺼졌다.

●.

밤이 찾아온 것이다.

-.......

모닥불이 꺼지자 동굴은 완전한 어둠에 감싸였다.

어디에도 불빛이 없었다.

노인은 불을 꺼트림으로써, 혈화가 마지막으로 표현할 수 있는 그림을 그렸다. 동굴의 어둠은 더 이상 허공이 아니었다. 노인이 그린 그림이었다.

-.......

고블린들은 ‘밤’을 보았고, 한밤 속에서 나직이 울었다.

-……고르…….

아무도 횃불을 키지 않았다. 지금은 ●이었다. 고블린들은 ●을 받아들였다. 누군가가 돌아가라고 말하지 않았고 명령하지도 않았으나, 고블린들은 스스로 발길을 돌렸다.

잠을 자기 위해서.

고블린들은 자신들이 내려온 길을 더듬으며 걸어갔다. ● 속에선 아무것도 안 보였다.

그러나 자신의 체취가 남아 있었다.

동족의 냄새를 맡아 킁킁거리며, 고블린들은 무리를 지어 귀가했다. 코가 제일 좋은 지정족이 앞장섰다. 다른 고블린들은 그의 손이나 어깨를 잡고 뒤따랐다.

그렇게 고블린들은 동굴에서, 그들만의 신전(神殿)에서 떠났다.

"......."

지하세계의 지하에 세워진 신전에는 나와 배후령.

그리고 늙은 고블린 제사장만이 남았다.

-케르… 케르르….

노인은 기력이 쇠했는지 동굴 바닥에 앉았다. 이곳이 그의 집인 듯했다. 고블린들은 신전을 떠나면서 생선 몇 마리를 남기고 갔는데, 노인은 주저앉은 채 물고기를 뜯어먹었다.

"......."

나는 동굴 속에 신전을 차린 종족을 말없이 보았다.

이곳에서 땅의 아이들은 장례를 치렀다. 동족의 죽음을 묻었다.

나는 이들에게 장례식을 가르쳐준 적 없다. 죽음을 삼키는 방법에 대해서 말해준 적도 없다. 내가 알려준 것은 다만 악취를 가리기 위한 문신이었고, 여섯 가지의 세상을 표현하기 위한 그림이었다.

그것뿐.

그것만으로 지정족은 신전을 차렸다. 스스로 불을 찾았다.

"제가 이 아이들의 부모 같은 걸지도 모르지만…."

나는 입을 열었다.

“이 아이들은 제 것이 아니에요.”

결코 내가 생각한 대로 크지 않았으며, 예상한 대로 자라지 않았다. 이 아이들은 스스로 길을 찾았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웠다.

나는 그것이 자랑스러웠다.

-케르르….

늙은 제사장을 뒤에 두고 나는 지하도시로 올라갔다.

‘아이들에게 무엇을 해줘야 하는지, 이제 알겠다.’

구원이 아니라 응원을.

염려가 아니라 격려를.

‘이 아이들을 응원해주고 격려해주는 거. 그게 내가 할 일이다.’

산와족의 거대한 기둥이 세워진 자리.

어제 헤어진 동료들이 그곳에 모여 있었다. 모두가 나처럼 각자의 종족을 둘러보고 온 것일까. 흑룡주는 묵묵히 땅바닥을 내려보았고, 독사는 인상을 찡그린 채 팔짱을 꼈다.

“아. 오셨군요, 사왕!”

이단심문관이 손을 흔들었다.

“사왕이 제일 늦었습니다! 참. 마음은 정하셨습니까?”

“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역시 당신한테 항복할 수 없어요. 제가 보살핀 아이들이 이대로 글자를 잃어버리고 고향을 잊어버리게 내버려두지 않겠습니다.”

“아핫. 그렇다면?”

“당신의 지하에서 지정족이 빠져나가도록 도울 겁니다. 이단심문관.”

나는 말했다.

“그리고 당신을 32층에서 탈락시킬 것입니다.”

“아하하.”

이단심문관이 빙그레 웃었다.

“사왕이라면 그러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예상한 대로군요! 좋습니다. 저는 산와족을 걸고 사왕은 지정족을 거십시오. 서로 종족을 걸고 전쟁을 벌입시다!”

그것이 우리 두 사람의 선전포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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