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 비와 진흙과 불. (1) >
1.
어린 지정족은 ‘비’가 무엇인지 몰랐다.
나이가 오래된 이들. 할머니들에 이르러선 ‘비’가 무엇인지 알았다. 이따금 늙은 지정족들은 모닥불에 둘러앉아 수군거렸다.
-비는 까만 하늘에서 내리는 물이다.
늙은 지정족이 손톱에 숯을 묻혀서 그림을 그렸다.
●. 그것은 밤을 의미했다. 어둠을 뜻하기도 했다. 지정족이 산와족의 노예가 되어 이곳, 대공동(大空洞)에서 살게 된 이후로는 가장 익숙해진 글자.
-‘비’가 내리면 온세상이 물기로 가득해진다. 시냇물에 가지 않고 우물에 가지 않고도 어디서든 물기를 맡을 수 있다.
-모든 마른 땅이 순식간에 묽어진다. 묽어져서 진흙이 된다. ‘비’가 내리면 단지 땅을 걷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감촉이 발가락을 감싸온다.
노인들은 ‘●~’를 땅에 그리며 이야기했다.
어두운 밤하늘에 내리는 비.
-고륵.
꿈만 같은 이야기였다.
하늘을 뒤엎는 물, 땅을 메우는 진흙이라니.
대공동에서는 물과 진흙을 구하기 어려웠다. 물은 하루에 두 번씩 길러오는 것만 허락됐다. 대공동의 땅은 자갈과 모래로 이루어져서, 아무리 물을 섞어도 진흙을 만들기 힘들었다.
-가끔씩 동굴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지 않는가.
늙은 지정족이 속삭였다.
-그것이 비다.
-하지만 동굴을 가득 메울 정도의 물은 안 떨어지는데?
-천장에 뚫린 구멍이 비좁기 때문이다. 케르. 바깥세상은 다르다.
-바깥에도 세상이 있나?
-이곳은 구덩이다. 작은 구덩이다. 우물이다. 동굴을 빠져나가면 세상이 너무도 드넓어서, 여기는 기껏해야 한줌밖에 안 된다.
-케르르. 거짓말 같다.
어린 지정족에게 대공동은 세계였다. 대공동의 천장은 높았으며 지하는 깊었다. 지하는 아무리 파고들어도 끝이 없어 보였다. 그런 대공동이 한낱 우물에 불과하다?
역시 믿기지 않은 이야기다.
-언젠가 백사자께서 돌아오실 거다. 고르.
-한때 이 세상은 천지가 나무로 뒤덮여 있었다. 우리는 세계림(世界林)에서 살았다. 하지만 신의 노여움이 들이닥쳐 세계림은 불타올랐다. 불은 끊이지 않았다. 10일 동안 불은 커졌으며, 100일 동안 커진 그대로 타올랐다. 그때 백사자께서 우리를 인도하셨다.
-백사자께서 다시 돌아와 우리를 이 우물로부터 구해주실 것이다.
-케케륵케르.
시간이 흘러 늙은 지정족은 죽었다.
‘구루’를 기억하는 자는 모두 쓰러졌다.
이제는 가장 늙은 자도 비를 알지 못했다. 넘쳐 흐르는 진흙에 코를 박아본 지정족이 이따금 생겼으나, 그것은 콜로세움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대가로 주어진 사치였다. 결코 하늘을 뒤엎는 ‘비’가 내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케륵케.
비.
-케르륵.
진흙.
시냇물에서 떠오는 두 동이의 물항아리를 보면서, 지정족은 비에 대한 소원을 가졌다. 모래에 물을 짓이겨 발라 만들어낸 흙을 살갗에 바르며, 지정족은 진흙에 대한 소망을 키웠다.
이곳이 아닌 다른 어딘가.
지금이 아닌 다른 어떤 삶.
-구루.
우리의 고향.
2.
슬라임폴리스.
산와족이 어두운 문명을 이룩해낸 도시 곳곳에서 함성이 터졌다.
[흡혈종이 산와족에 대항하여 봉기합니다!]
[새기족이 산와족에 대항하여 봉기합니다!]
[귀인족이 산와족에 대항하여 봉기합니다!]
[요정족이 산와족에 대항하여 봉기합니다!]
[순인종이 산와족에 대항하여 봉기합니다!]
함성 하나하나는 미약하여, 산와족이 불어젖히는 나팔 소리를 이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 문제였다. 다섯 곳에서 타오른 다섯 갈래의 함성은 도시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끼우우.”
흑룡주의 신수. 흑조가 날개를 퍼드득, 펼쳤다. 나한테 새소리를 알아듣는 재주 따윈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가 전하려는 말을 이해했다.
‘도와주러 왔어. 사왕.’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흑룡주가 도와주면 싸움이 쉽죠.’
지금까지 나는 여러 번 흑룡주와 합을 맞춰보았다.
흑룡주 본인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가을비의 마왕]을 토벌하면서 수백 번이 넘도록 그녀의 전투 방식에 익숙해진 것이다.
우리 두 사람의 콤보를 이겨낼 헌터는 없었다.
“그르륵!”
나는 포효하며 사냥개에게 달려들었다. 화르륵! 마천신공이 펼쳐지면서 주변을 불태웠다. 사방에서 불길이 덮쳐들자, 사냥개는 신성 술식을 써서 회피했다.
‘지금입니다!’
그러나 공간전이를 쓸 줄 아는 헌터는 이단심문관 한 명뿐만이 아니었다. 파앗! 이단심문관이 도망친 곳으로 흑룡주가 곧바로 따라붙었다. 이단심문관은 내 공격에 쫓겨서 미처 후방을 신경쓰지 못했으며, 흑룡주는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꽈직!
흑조의 날카로운 발톱이 사냥개의 황금털을 할퀴었다.
“카르-!”
사냥개는 피를 흘리며 비명을 질렀다. 사냥개가 목을 비틀어 흑조의 날개를 물어뜯었다. 흑조와 사냥개가 진흙탕에서 얽히듯 나뒹굴었다.
이번엔 내 눈에 빈틈이 읽혔다.
‘공수교대.’
나는 단번에 뛰어서 사냥개의 허리를 덮쳤다. 황금의 털가죽으로 억센 이빨을 깊이 박았다. 내 아가리에서 핏물이 물씬 흘렀으며, 동시에, 사냥개의 아가리에선 비명이 터졌다.
일방적인 유린.
사냥개가 다치는 모습에 고블린들이 환호했다.
-케케륵케르!
-백사자께서 황금견(黃金犬)을 물리치신다!
-구루로! 고향으로 돌아가자!
사냥개의 상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고블린들은 의기양양해졌다. 반면에 산와족들은 당황했다. 노예의 대규모 반란에도 신속하게 대처했으나, 신수가 다치는 광경에 그들은 정신을 못 차렸다.
[슬라임폴리스의 광산 구역이 해방됩니다.]
고블린들이 점차 산와족을 몰아냈다.
-증원군은 언제 오는 거냐! 라임!
-다, 다른 곳에서도 노예들이 소동을 피워서….
-뿔쟁이들이 난동을 부리고 있다! 라이무! 지원이 필요하다!
-부둣가에서 생선들이 날뛴다!
-지원은 말도 안 된다. 여기도 급하다!
-다른 폴리스에 원군을 요청….
-물길이 막혔는데 어떻게 원군을 요청하냐! 박쥐 새끼들도 미쳐서 날뛰잖나!
달팽이들이 필사적으로 대항했다.
그러나 산와족의 문명을 반석에 올려둔 노예들이 이번에는 그들의 더듬이를 잡았다. 땅길에서 지정족. 물길에서 새기족. 공중에서 흡혈종. 길거리에서 귀인족과 요정족, 순인종.
달팽이들이 노예를 부린 곳마다 불길이 치솟았다.
[슬라임폴리스의 유흥 구역이 해방됩니다.]
[슬라임폴리스의 신전 구역이 해방됩니다.]
노예로 붙잡힌 종족들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다. 여섯 종족은 저마다 다른 말을 썼다. 지금까지 노예들이 하나로 단합하지 못한 채 산와족의 촉수 아래 무릎을 꿇은 것도 이 때문이겠지.
“그륵!”
“끼우우!”
하지만 말이 안 통하는 것은 신과 사람도 똑같았다. 말보다 훨씬 더 강력한 계시, 신수가 종족들을 이끌었다. 나와 흑룡주가 이단심문관을 몰아붙이는 동안 다른 동료들은 슬라임폴리스를 마음껏 휘저었다.
산와족들은 도시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갔다.
[슬라임폴리스의 성문 구역이 해방됩니다.]
[슬라임폴리스의 병영 구역이 해방됩니다.]
전세가 기울었다.
광산 구역에서 출발한 반란군은 어느덧 부두 구역까지 진출했다.
동굴의 내부와 외부를 이어주는 강물에서 인어들이 첨벙거렸다. 새기족 어노(魚奴)였다. 인어들은 목에 메인 밧줄을 끊어버리고 배들을 침수시켰다.
-이, 이것들! 하등한 생선 주제에!
산와족 관리관이 촉수를 높이 들어서 내리쳤다. 찰싹! 채찍질에 맞은 인어가 비명을 지르면서 수면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나 인과부적이었다. 수십 명의 인어들이 갤리선 바닥을 잡고 흔들, 흔들, 헤엄쳤다.
-아아아악!
달팽이들이 갑판에서 미끄러졌다. 첨벙! 미끄러진 달팽이는 강물에 떨어졌다. 그러자 주변에서 헤엄치고 있던 인어들이 몰려들었다.
-오지 마! 오지 마! 생선들이, 악! 아아악!
스무 명의 인어들이 한 입씩 달팽이를 베어먹었다. 마치 상어 떼거리가 펭귄을 사냥하는 것 같았다. 달팽이는 촉수를 휘저으며 발악했지만 물 속에서 인어들을 쫓아낼 순 없었다. 잠시 뒤, 수면에는 텅 빈 달팽이 껍질만 남았다.
[슬라임폴리스의 부두 구역이 해방됩니다.]
우지끈!
거대한 부두에 메여 있던 갤리선들이 침몰했다. 갤리선에 실려 있던 소금 포대도 함께 가라앉았다. 고블린들이 밤새도록 잘게 깎아둔 돌소금들은, 강물에 빠지자 흔적도 없이 사르륵 녹아내렸다.
사냥개는 그 광경을 곁눈질로 지켜보았다.
"......."
수십 척에 이르는 갤리선들이 무너졌다. 선박 잔해들 사이로 분홍빛 돌고래가 솟구쳤다. 성기사가 빙의한 신수였다. 촤아악! 돌고래는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수면 아래로 잠수했다.
새기족들이 환호하며 꼬리로 물장구를 쳤다.
[슬라임폴리스가 반란군에 의해 함락됩니다.]
사냥개가 입을 벌렸다.
“카르르."
아마도 이단심문관은 아하핫, 웃었을 것이다.
그가 200년에 걸쳐 만든 지하세계가 침몰하고 있었다.
“카르륵, 카르."
사냥개가 뒷걸음질을 쳤다. 뚜욱. 걸음을 옮길 때마다 끈적한 피가 흘렀다. 아름다운 황금털은, 이미 사자의 이빨과 흑조의 발톱에 찢겨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산와족도 마찬가지.
-라이므….
-라임….
달팽이들은 겁에 질려 사냥개의 뒤에 숨었다. 달팽이의 껍질은 고블린이 내려친 돌망치에 움푹 파였다. 더듬이가 끊어지거나 촉수가 잘린 달팽이도 즐비했다.
도시 곳곳에서 산와족들이 쫓겨나 사냥개 주변으로 도망쳤다.
-크그르.
당연히, 산와족을 몰아세운 노예 종족들도 몰려왔다.
피범벅이 된 귀인족이 사납게 소리쳤다.
-저 새끼들을 죽여!
-우리가 당한 짓을 그대로 돌려줘라!
도깨비를 닮은 귀인족들은 이마에 외뿔이 박혔다. 본래 유니콘처럼 우뚝 솟아나 있어야 할 외뿔들은 중간에 뚝 부러져 있었다.
노예 된 증거.
달팽이들은 낙인을 찍듯 귀인족의 뿔을 부러트렸다. 뿔과 더불어서 노예의 긍지와 자존심도 꺾었다. 대가가 따랐다. 긍지가 꺾인 곳에 곰팡이 같은 원망이 피었고, 자존심이 망가진 구석에선 독버섯 같은 원망이 자랐다.
-개같은 놈들…….
다른 종족들이라고 사정이 다르겠는가.
-우리들한테 흙을 먹여놓고 낄낄거렸어.
-구덩이에 처박아서 소금을 쏟아부어주마!
순인종이 으르렁거렸다.
-아이를 잡아다가 우물에 풀어놓고는 ‘어항’이라면서 길렀다.
-저것들을 콜로세움에 처박아서 지들끼리 싸우도록 하자!
새기족이 물가에서 외쳤다. 저주가 어두운 수면을 타고 일렁거렸다.
-우리의 귀가 길쭉하다며 잡아 뽑았지.
-더듬이를 토막내서 저 새끼들 아가리에 먹여라.
요정족이 말했다.
-피.......
-.......
흡혈종들이 동굴과 건물에 매달린 채 조용히 산와족을 내려봤다. 흡혈종은 말이 별로 없었다. 다만 어디선가 짐승 시체를 가지고 날아 와서 툭, 툭, 떨어트렸다. 산와족이 신성하게 여기는 개들의 목이었다.
여섯 종족은 저마다 언어가 달라서 서로의 분노를 나눌 수 없었다. 그러나 여섯 종족은 산와족의 말만큼은 어느 정도 공통으로 알고 있었다. 노예는 주인의 말을 강제로 배우게 되기 마련이니까.
-죽여라.
누군가가 산와족의 말로 속삭였다.
-죽여.
그 한마디는 어느 종족이나 알고 있었다. 언제나 산와족이 노예들에게 하던 말이었다. 귀인족에서 먼저 새어나온 신음은 순식간에 만국공통의 언어가 되어 동굴에 흘러들었다.
-죽여!
산와족들이 공포에 떨었다.
마침내 여섯 종족은 노예가 된 이후 처음으로, 서로의 마음을 나누었다. 그 마음의 이름은 분노였다.
모든 이가 피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더 많은 피를 원했다.
"......."
나는 부둣가에 몰린 산와족들을 둘러보았다.
‘쟤들을 학살하라고 명령하는 건 쉽겠지.’
반대로 학살을 막는 것 또한 간단하리라.
지금 나는 고블린들에게 신이나 다름없다. 신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학살과 관용, 어느 쪽을 명령하든 고블린들은 복종할 거다.
‘하지만, 이건 내가 명령해서 될 일이 아니야.’
나는 몸을 돌렸다.
‘너희가 선택해라.’
그리고 대공동의 출구를 향하여 천천히 걸어갔다.
-케르?
-케케륵케르…?
등 뒤로 고블린들이 어리둥절해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충분히 따라올 수 있을 만큼 느릿하되, 충분히 배웅할 수 있을 만큼 빠르게 걸어갔다. 길목을 가로막고 있던 귀인족들이 주춤거리며 비켰다.
-.......
-.......
고블린들 사이에서 정적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마치 난해한 신탁을 마주한 신도처럼 고블린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봤다. 내가 그들의 숨소리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동안, 누군가가 발길을 내디뎠다.
-고륵.
발길이 향한 곳은 산와족이 모인 부둣가가 아니라 내 쪽이었다.
내게서 신탁 메세지를 직접 받았던 고블린 수십 명이 먼저 나를 따라왔다.
그다음은 어린 고블린들이 뒤따랐다. 어린아이들은 종족의 원한을 갚는 것보다, 생애 처음으로 보게 된 신의 뒤를 쫓는 걸 더 좋아했다.
-케르르.......
-케케륵케르.
아이가 뒤따르자 어미가 뒤쫓았다.
혈장이 뒤쫓자 다른 고블린들도 하나둘씩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저곳에서 돌망치가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고블린들은 광노(鑛奴)의 증거를 땅바닥에 던져버린 채, 그들이 신으로 모시는 사자의 뒤를 따랐다.
‘그래.’
어두컴컴한 지하세계.
나를 선두로 하여 수천 명의 행렬이 이어졌다.
‘따라올 아이들은 따라와라.’
우리는 지하도시에서 유일하게 바깥으로 나 있는 출입구를 향하여 걸어갔다.
아무도 우리의 앞길을 막지 못했다.
환한 빛이 내리쬐는 입구에 내가 앞발을 내디딘 순간, 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정족이 슬라임폴리스에서 탈출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