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165화 (165/400)

165화.  < 비와 진흙과 불. (2) >

3.

발을 내디뎠을 때는 무심코 눈을 감았다.

“그르륵.”

동굴의 어둠은 짙었다. 어두운 만큼 걷힐 적에 드라마틱했다. 한 걸음 발을 내딜 때마다 한 줄기 조명이 밝혀지는 듯한 착각.

빛이 우리를 덮쳤다.

-케, 케르!

고블린들이 얼른 고개를 떨궜다. 오래도록 이어진 동굴 생활은 지정족의 생리를 변질시켰다. 얇아진 눈꺼풀. 비대해진 눈알. 고블린들은 빛에 약해진 것이다.

한동안 우리는 발등을 내려보며 걸었고.

-.......

바람이 불었다.

다음 순간, 노을이 펼쳐졌다.

-하늘.......

고블린들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바깥세상은 이미 저녁.

노을에서 배어 나온 기름기가 붉게 흘러내렸다.

-하늘이 빨갛다.

노예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끝없이 이어진 하늘을 올려보았다. 사람이 태어나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야 당연한 권리일 테지만, 동굴의 노예들에겐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려보는 호사였다.

-노인들이 말한 게 정말이다. 하늘이다.

-왜 하늘이 빨간 건가? 고륵. 피를 흘리는 것인가.

-붉어….

-세상이 불에 타고 있다.

어안이 벙벙해져서. 두려워져서. 혹은 알지 못할 환희에 잠겨서, 고블린들은 수군거렸다. 그들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세상을 보았다.

[지정족이 노예에서 해방됩니다.]

[지정족의 스테이터스가 변화합니다!]

내 눈앞으로 글자들이 떠올랐다.

+

[지정족]

멸종등급: B (위험도 주의)

잠언: ‘우리는 불이다.’

설명: 지정족은 모든 능력이 하위권에 걸쳐 있는 종족입니다. 지정족 개개의 능력은 보잘것없습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군체(群體)가 되어 하나로 뭉칩니다!

지정족은 아주 적은 숫자의 문자만 개발했습니다. 이 문자들은 제일 비천한 자부터 제일 고귀한 자까지, 지정족 전원이 알고 있습니다. 최소한의 언어. 최소한의 문자. 지식은 지정족을 분열시키지 못합니다.

‘우리는 불이다.’

불은 여러 갈래로 타오를지언정 언제나 하나로서 타오릅니다. 지정족은 ‘하나’가 되기 위해서 많은 문화를 고안했습니다.

이들은 밝은 대낮보다 어두운 밤에 ‘집회’를 엽니다. 지정족의 외양은 어둠 속에 파묻히고, 개개인은 구분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집회에 참여한 지정족은 모두 ‘익명’이 되어 발언하는 것입니다.

지정족의 불이 계속해서 타오르게 하십시오!

특성: [혈화(※)], [구루 교의], [기록의 유산], [탐욕갑(※)]

진화체: 불명. 총 2번의 진화가 있습니다.

이명: 고블린 등.

※주의! 사라질 위험에 처한 특성들이 있습니다.

+

‘아아. 역시.’

나는 미간을 좁혔다.

‘제사장이 죽으면서 [혈화]가 실전될 위기에 처했네요.’

배후령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오러를 쓸 줄 아는 거에 더해서 하필이면 붉은색 오러를 써야 한다는 게 조건이니까. 까다롭지.

‘그치요… 으음. 이번 스테이지는 일단 오러부터 어떻게 해주어야 겠습니다.

-방법이 있냐? 그 문명 상점인가에서 오러 사려면 오지게 바가지 써야하잖냐.

‘네, 그렇죠. 그러니까 다른 걸 살 겁니다.’

나는 생각했다.

‘문명 상점 오픈.’

주르륵.

상점에 진열된 아이템이 떴다.

+

[신탁 메세지] - 20p

[동물에 빙의] - 40p

[꿈에 등장] - 100p

[사냥감 탐색] - 5p

[황동급 정착지 탐색] -80p

[부족급 장군(뽑기)] - 100P

[황동급 기술 발명(뽑기)] - 1.000P

+

여태까지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아이템을 나는 구입했다.

‘[꿈에 등장] 아이템을 1개 사겠습니다.’

짤랑, 하고 동전이 떨어지는 효과음이 울렸다.

[‘꿈에 등장’을 구입합니다.]

[100 종족 포인트가 소모됩니다!]

[현재 당신이 가진 종족 포인트는 70입니다.]

‘오케이.’

이 아이템을 사용할 고블린 역시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나는 한 젊은 고블린을 돌아보았다.

동족의 엉덩이를 베개 삼아 쿨쿨 잠든 그 고블린의 이름은 고르케였다.

‘맑은 물이라는 뜻이었지.’

맑은 물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블린, 고르케는 잠꼬대를 중얼거렸다.

-케륵케.

비.

-케르륵.

진흙.

-구루.

여기가 아닌 어디를 그리며 잠든 고르케를 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이템을 사용했다.

‘[꿈에 등장].’

파아아앗!

시야가 소용돌이치더니 주변이 하얘졌다.

4.

잠시 뒤, 나는 벌판 한복판에 서 있었다.

“호오?”

펼쳐진 벌판에는 끝이 없었다. 쏴아아아. 그 끝없는 벌판 위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물을 받아마신 벌판은 질어지고 짙어졌다.

진흙 벌판 한 가운데 고르케는 입을 앙 벌린 채 누워 있었다.

쏟아지는 빗물이 고르케의 입안을 적셨다.

-고르르. 고르르르.

고르케는 행복하게 빗물을 받아삼켰다.

이 세상에서 더는 바랄 게 없다는 얼굴.

그것이 고향을 그리는 젊은 고블린의 꿈속 풍경이었다.

“과연…."

나는 여러모로 납득되었다.

“고블린이든 인간이든 욕망이랄 건 별로 다를 것도 없군.”

-고륵?

내 목소리가 들린 걸까.

고르케가 팔베개를 풀고 머리를 휙 일으켰다.

-누구냐!

“내 소리가 들리느냐. 내 모습이 보이느냐. 고르케여.”

-고르…? 순인종?

고르케가 얼빵한 낯짝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는 최대한 근엄하고 진지한 자세를 취했다.

“순인종이 아니다. 가련한 꼬마야. 내 이름은 케케륵케르. 너희가 신성하다 받들어 모시는 백사자요, 너희를 약속의 고향인 구루로 이끄는 존재이니라.”

-케륵…? 케케륵케르라고? 말도 안 된다!

고르케는 콧방귀를 뀌었다. 크푸홈! 고블린은 코가 커서 콧방귀를 뀌면 정말로 방귀를 뀐 것만큼이나 효과음이 웅장했다.

-케케륵케르께서는 사자이시다. 아름다운 갈기를 가지고 계시며 두꺼운 가죽을 뽐내신다. 그런데 넌 뭐냐? 삐쭉삐쭉한 검은색 머리털에 살가죽은 빼빼 마르지 않았냐. 케케륵케르께선 너처럼 못 생기지 않으셨다!

“아니, 이 시벌놈이?”

-시벌? 케륵? 그게 뭔 뜻이냐?

“땅바닥에 구멍을 판 다음 머리부터 거꾸로 처박을 새끼란 뜻이다.”

-이, 이 순인종 입이 굉장히 더럽다. 케르. 너처럼 천박한 것이 백사자이실 리 없다!

“고르케야. 내가 너희에게 문자를 가르쳤다. 내가 너희에게 사냥하는 법을 가르쳤노라. 케케륵케르가 나고 내가 케케륵케르이거늘, 어찌 의심하느냐.”

-증거를 보여라!

“좋다.”

나는 진흙에 구덩이를 팠다.

그리고 고르케의 발목을 잡아서 머리부터 땅구멍에다 처박았다.

“이제 네 눈에 증거가 좀 보이더냐?”

-케르르르?! 케르르! 악마다! 악마가 나타났다!

“뭐라고? 안 보인다고? 어쩔 수 없구나. 내 너를 갸륵하게 여겨서 좀 더 증거를 보여주마.”

나는 진흙을 한줌씩 떠서 땅구멍에 넣었다.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진흙과 비가 뒤섞여 고르케는 그야말로 전신 머드팩을 했다.

그가 비명을 질렀다.

-믿는다! 케륵, 난 믿는다! 너 틀림없이 케케륵케르다!

“음. 말귀를 빨리 알아 처먹어서 심히 좋도다.”

나는 고르케를 구멍에서 빼냈다.

고블린은 머리에 흙을 뒤집어쓴 채 오들오들 떨었다.

“고르케야. 내 너의 꿈에 나타난 것에는 다 귀한 뜻이 있어서다.”

나는 고블린의 머리에 묻은 흙을 탁탁 털어주며 말을 이었다.

“이 케케륵케르는 너 고르케에게 오러를 가르치고자 하노라.”

-오러?

“제사장이 너희에게 혈화를 보여주지 않았더냐? 그 양손에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지 않았더냐? 그것이 오러다.”

-아. [성스러운 피]를 말하는 거냐.

“성스러운 피라고?”

-우리에겐 육신이 있고 영혼이 있다. 누구나 육신을 가지지만, 영혼은 하나다. 하나로 완전하다. 고륵. 육신의 한계를 딛고 영혼에 도달한 자는 몸뿐만이 아니라 영혼으로도 피를 흘릴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고르케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하다. 이건 케케륵케르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가르침이다. 네가 정말 케케륵케르라면 왜 자기가 알려준 것도 까먹고 난리냐?

“꼬맹아. 나는 그딴 거 가르친 적 없단다. 내가 너희한테 가르친 건 글자를 쓰는 법이랑 숫자를 3까지 세는 법, 그리고 사냥하는 법이다.”

-케르? 숫자를 3까지 못 세는 머저리도 있냐?

이 자식들.

고작 200년 지났다고 해서 과거를 잊어버리다니.

내가 너희한테 아라비아 숫자를 가르치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됐다. 정 의심스러우면 아침에 일어나서 사자 케케륵케르에게 찾아가라! 내가 바로 사자이고, 그 사자가 네 꿈속에 등장한 나임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닥치고 내가 가르치는 걸 익히거라.”

-성스러운 피를 말이냐?

“그렇다. 그럼 바로 수업을 시작하지.”

나는 팔을 들어 고블린을 구타하기 시작했다.

-케륵?! 아프다! 케르르르! 뭐냐, 왜 갑자기 때리냐!?

“원래 오러는 맞으면서 배우는 게 제일 빠르다.”

예전에 배후령이 나한테 알려준 방법이다.

사실 나도 이 방법밖에 몰랐다. 가부좌를 틀고 어쩌고 저쩌고, 정신을 집중해서 이러쿵저러쿵, 그런 상식적인 방법이 있다면 나부터 배우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부터 차라리 죽는 게 낫겠구나 싶을 정도로 널 패겠다. 패는 도중에 계속해서 너의 몸에 오러를 흘려보낼 것인즉슨, 네 몸속에 흐르는 기류를 느끼거라. 느껴서 포착해라. 네 몸에 거미줄처럼 퍼져 있는 혈도를 스스로 알아차려라.”

-케르르! 아프다! 아프다! 케르르륵?!

“허어.”

고르케가 몸을 웅크렸다. 나는 가볍게 녀석의 팔목을 잡아 펴준 다음, 손바닥, 손목, 어깨, 가슴 순서로 두들겼다. 퍽! 퍽! 내 주먹을 타고 고르케의 몸속으로 오러가 흘러들었다.

-케르르르?!

“이게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가르침이다. 집중해라.”

-피밖에 안 남고 살밖에 안 남겠다!

“바로 그것이다. 오러를 너는 성스러운 피라지 않았느냐? 성스러운 피를 보이려면 영혼이 상처를 입어 피를 흘려야하지 않겠느냐?”

나의 이 논리적인 말에도 고르케는 연신 도리질을 쳤다.

-이러다간 죽겠다!

“아니다. 이것은 생시가 아니라 꿈이니. 아무리 구타해도 죽을 만큼 아플 뿐이지 정말로 죽진 않는다. 오러를 터득하기에는 그야말로 최적의 환경이지.”

-케룹!

꿈속 풍경이 바뀌었다. 진흙 벌판에서 슬라임폴리스의 투기장으로. 고르케가 보기엔 현재 상황이 콜로세움의 광경이나 진배없는 것이다.

“오호. 더 잘되었구나!”

나는 기뻐했다.

“자, 고르케야. 저기 검투사들이 너를 노려보고 있다. 안광이 무시무시한 게 네 모가지를 따버릴 수만 있으면 뭐든지 할 기세로구나. 아무리 꿈이라 해도 모가지가 따이면 아프지 않겠는고. 어서 발악하거라!”

-아, 악몽이다. 케르. 끔찍한 악몽이다!

고르케는 울었다.

-케케륵케르시여! 우리를 지옥에서 구원해줬으면서 지금은 어디에 계신 거냐! 악마가 당신의 종자를 괴롭히고 있다! 구해줘라, 케르! 구해줘라!

“어허, 내가 케케륵케르라니까 그러네.”

꿈속에선 시간이 느릿느릿 흘러갔다.

체감상 어마어마한 시간이 흘렀지만 고르케의 꿈은 안 끝났다. 덕분에 젊은 고블린은 수없이 죽음 아닌 죽음을 당했으며, 나는 느긋하게 고르케를 이끌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오오!”

고르케의 손바닥에서 불길이 술렁술렁거렸다.

희미하긴 해도 그건 틀림없이 오러였다.

“보아라, 고르케야! 오러다. 성스러운 피가 너에게 서렸노라!”

-케르르….

젊은 고블린은 자기 손바닥을 내려봤다. 눈길이 훵했다. 뭔가 소중한 걸 잃어버린 것처럼.

-죽여라…. 그만 날 놔줘라, 악마.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원래 죽어도 상관없으면 죽으면서 배우는 게 제일 빠르도다. 평생 무도를 걸어도 오러를 터득하지 못하는 무인이 우주에는 넘쳐 흐른다. 반면에 넌 하룻밤 만에 묘리를 깨우쳤으니 이것이야말로 기연 아니겠느냐?”

-제발 죽여줘라…!

“앞으로 너는 지정족을 위해 열심히 봉사해야 할 것이다.”

나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턱, 고르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고르케가 움찔했다.

-보, 봉사라니?

“제사장이 죽어서 [혈화]를 시연할 사람이 없어지지 않았느냐. 네가 대신하거라. 나는 너희의 문화가 아름답다고 여기나니. 너희의 아름다움이 끊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케르르. 하지만 난, 제사장이 될 재목이 부족….

“그런데 아직 오러가 좀 미숙한 거 같구나. 어떠냐? 고르케야. 앞으로 열흘만 더 고생해서 오러의 궁극을 깨우칠 테냐?”

-되겠다. 고르케! 제사장, 하겠다!

“훌륭하도다.”

나는 만족스러워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는 꿈에서 떠나마. 일어나면 나를 찾아와서 한번 확인해보거라. 내가 정말로 케케륵케르라면 너의 어깨를 두들겨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조용한 새벽.

고블린들은 이미 일어나서 오늘도 귀향길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미들이 강가에서 물고기를 잡았고, 아이들은 생선을 바싹 구웠다. 떠오르는 태양을 가만히 바라보는 고블린도 많았다.

-케륵……!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젊은 고블린이 벌떡 일어났다. 고르케였다. 초록색 이마는 주름이 쭈글쭈글 잡혔으며,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케르르… 사, 살았다? 살았다, 케르?

고르케는 거칠게 숨을 쉬었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확인하려는 건지 고블린은 여섯 번이나 자기 뺨을 때렸다. 마침내 악몽이 끝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르케는 깊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

그것도 잠시.

고르케는 머뭇머뭇거리면서 내게로 다가왔다.

-케케륵케르….

젊은 고블린은 간절한 눈망울로 나를 올려보았다.

-간밤에 악마가 날 찾아와서 희롱했다. 케르. 악마는 감히 케케륵케르를 사칭하며 나를 괴롭혔다. 죽을 거 같았다. 죽는 줄 알았다. 케케륵케르가 악마가 아님을 내게 보여주면 좋겠다….

“크르릉."

턱.

나는 천천히 앞발을 들어서 고르케의 어깨를 짚어주었다.

-.......

고르케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크르르. 고르, 크륵. 그르름.”

‘내 말 까먹지 말고 잘 하거라. 꼬마야.’

사자의 말을 알아들었을 리는 없지만, 고르케는 덜덜 떨었다.

[혈화의 새로운 계승자가 나타납니다.]

[지정족이 특성 혈화를 잃어버릴 위험에서 벗어납니다!]

잘 되었네. 잘 되었어.

-이 새끼….

배후령이 중얼거렸다. 내가 고르케한테 오러를 전수하는 모습을, 배후령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지켜보았던 것이다.

-뭐 그리 무식하게 가르치고 그러냐…. 그러지 마…. 잘 좀 대해주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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