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168화 (168/400)

168화.  < 주인과 친구 사이. (1) >

1.

산와족 추격대를 떨쳐낸 지 일주일째.

우리는 마침내 고블린들의 고향에 도착했다.

[지정족이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퀘스트 클리어!]

[당신은 슬라임폴리스에서 무사히 종족을 탈출시켰습니다.]

[퀘스트 달성에 대한 보상으로 종족 포인트가 주어집니다….]

32층 메인 퀘스트의 보상인 만큼 포인트가 제법 후했다.

나는 이번 계층 내내 그러했던 것처럼 그 종족 포인트를 딱 100포인트만 남기고 갈무리했다.

‘따로 쓸 곳이 있단 말이지.’

그렇게 갈무리하고 나서, 나는 고블린들의 고향을 바라보았다.

구루.

고블린들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향은… 좀 별로였다.

솔직히 말해서 폐허에 가까웠다.

-뭐, 당연해.

배후령이 어깨를 으쓱였다.

-사람의 손이 안 닿으면 마을은 순식간에 수풀로 뒤덮이지. 나도 원래 고향이 흑도(黑道) 도적 새끼들한테 휩쓸려서 나중에 가봤더니 걍 정글이 됐더라.

‘에, 그런 과거가 있었어요?’

-그럼. 나 과거가 많은 남자야. 내 일대기를 소설로 쓰면 1부 39권에 2부 22권, 외전 13권짜리 대작이 될걸.

‘묘하게 수치가 구체적이어서 기분 나빠….’

-심지어 죽고 난 다음엔 귀신이 되어서 현재는 절찬리에 3부를 연재하고 있지. 네가 뒈진 다음에도 딴 놈한테 빙의해서 외전 2부를 이어나갈 계획이다.

‘좀 끝나라!’

우리는 옛된 고향을 돌아봤다. 잡초와 잡목. 초록색의 식물이 구루를 점령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여기에서 살았다는 흔적은 이미 자취를 감추었으며, 단지 아주 오래전, 고블린들이 만든 돌기둥이나 조각상 따위가 세월과 타협한 증거로써 이끼를 머금었다.

-오.

그 중엔 이상하게 낯익은 조각상도 있었다. 내가 조각상을 본 적이 있어서 익숙한 게 아니라, 조각상이 표현한 주제가 익숙했다.

하얀 대리석. 서툰 손길로나마 정성스럽게 새긴 갈기, 커다란 이빨….

-얘들이 널 조각까지 해놨구만?

나였다.

-백사자니까 대리석을 구해다가 만들었네. 야, 정성이다. 지극정성이야.

‘그러게요.’

나는 천천히 주위를 쳐다봤다. 이 초록색 정글이 뭐가 그리 좋은지, 고블린들은 고르고르 웃으면서 짐보따리를 풀었다. 팍! 퍽! 슬라임폴리스에서 가지고 온 돌망치로 잡목을 후려찍는 고블린도 있었다. 빨리도 살 곳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저는 얘네의 주인이 아닌데 말이죠.’

주인과 친구의 경계선. 가장 먼 타인과 가장 가까운 타인, 그 가운데 부모가 있는 거 아닐까 싶다.

부모는 주인 노릇을 부릴 수도 있고 친구가 되어줄 수도 있을 텐데, 이걸 먼저 결정하는 것은 아마도 자식 몫이 아니라 부모의 몫이리라.

‘이번 스테이지를 떠나기 전에 한번 말해주고 가야겠어요.’

그날 밤.

나는 100포인트 남겨둔 종족 포인트를 써서 아이템을 하나 장만했다.

[‘꿈에 등장’을 구입합니다.]

[100 종족 포인트가 소모됩니다!]

[당신의 가용 가능한 종족 포인트는 현재 0포인트입니다.]

[그 밖의 모든 종족 포인트는 현재 투자되어 가용할 수 없습니다…….]

나는 고르케의 꿈속에 들어갔다.

“안녕? 꼬맹아. 오랜만이다.”

-키르르르르?! 아, 악마!

열렬한 환영이 잇따랐다.

“어허. 그렇게 좋아해주면 내가 좀 머쓱한데…. 며칠 못 봤다고 외로워졌느냐. 내 너의 마음을 살피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정말로 미안하면 꿈에 나타나지 말아달라!

고르케가 펄쩍 뛰었다.

-지난번엔 달팽이들이랑 싸우느라 죽는 줄 알았다!

“에이, 안 죽었잖냐. 죽지만 않았으면 됐지. 너를 조지지 못한 모든 것이 결국은 네 깡다구로 이어질 것이다. 고르케야. 너는 세상에 조져지지 말고 필히 세상을 조지는 삶을 살거라.”

-여, 여전히 더러운 입이다. 똑같은 말도 어쩜 그렇게 더럽게 할 수 있냐? 케르. 신님이든 악마든 좀 더 깨끗한 말을 써주면 좋겠다…. 사자로 있을 땐 멋지면서 꿈속에 나타나기만 하면 영 꽝이다….

고르케가 중얼중얼 말했다. 환상이 깨져버렸다는 얼굴. 나는 녀석의 말을 부정하지 않고 도리어 맞장구를 쳤다.

“아해야. 바로 그거다!”

-고륵?

“작금의 지정족은 너무도 달콤한 환상을 품고 있다. 내가 너희의 구원자이고, 멋지고, 아무튼 완전하여 너희를 무조건 보살펴준다는 환상 말이다. 하지만 내 진짜 모습은 네가 말한 대로 살짝 악마스럽다.”

-살짝…?

고르케가 순간 철학적인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지정족 역사상 최초의 철학자가 탄생할지도 몰랐으나, 난 생깠다. 얘가 ‘만물은 케륵으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말을 남겨봤자 후대의 학생들만 고생하겠지.

“너는 유일하게 내 진실된 모습을 안다. 나는 너희가 생각하는 신이 아니다. 단지 조력자이고 조언자에 불과하다. 고르케야. 너에겐 가족과 친지, 동족에게 진실을 널리 알려야 할 책무가 있도다.”

-케! 싫다. 귀찮아 보인다!

“지난번 싸움을 보니까 네 오러가 아직 미숙하여 경지에 이르지 못했더구나. 오늘은 꿈속에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년 동안만 폐관수련을 하자꾸나.”

-고르케, 진실을 사랑한다! 고르케, 진실을 알린다!

고르케가 뜨겁게 열정을 불태웠다. 보기 좋군.

-하, 하지만 궁금하긴 하다.

"음?"

-신님이 아니라면 케케륵케르는 왜 우리를 보살피는 거냐? 왜 우리를 신경 쓰냐? 왜 태초의 재앙으로부터 우리를 구했고, 달팽이들의 지배에서 우리를 구출했냐? 케케륵케르가 그러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일단 너희가 귀엽고 깜찍해서….”

-케르? 눈 삐었냐?

이 새끼.

“사실 나도 너희랑 별로 다를 거 없다. 다를 바 없는 사람이지. 그런데도 내가 너희한테 잘 대해주는 이유를 꼽으라면… 너희가 나와 좀 비슷해서다.”

-비슷하다? 이상하다. 케케륵케르는 우리와 전혀 안 닮았다.

“겉모습 얘기가 아니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사람은 자기와 닮았다고 여긴 거에 마음이 가. 나는 너희의 모습에서 나를 본다. 너희의 탐욕에서 내 탐욕을 보고, 너희의 처지에서 내 처지를 봐. 자기 자신을 발견하지.”

-고르…?

“내가 만일 너희를 아낀다면, 다만 내가 나 자신을 아끼기 때문일 거다.”

나는 고르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도 굳이 나를 모시려거든 신이 아니라 차라리 친우라고 생각해라. 나는 너희에게 우상으로 모셔지기보다 우정으로 대해지고 싶거든. 신앙보다는 신뢰가 훨씬 좋아.”

-우상보다 우정, 신앙보다 신뢰….

“그래. 그냥 가끔 가다가 너희 곁에 머무르는 친우. ‘우리는 신에게 사랑받고 있다’보다 ‘우리는 신이랑 친구먹었다’가 더 멋지지 않겠냐?”

고르케가 멍하게 나를 올려보았다.

[지정족의 신앙에 변화의 조짐이 생겨납니다!]

[원시 종교 ‘백사자 신앙’이 새로운 교리를 얻게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나는 씩 웃었다.

"잘 좀 해봐. 한동안 너희 곁에서 떠나야 하니까. 네가 다른 애들한테 오러를 가르쳐줘. 내가 너희의 친구로 남고 싶다는 것도 알려라.”

-떠, 떠날 거냐?

“오냐. 구루까지 데려다줬으니 내 할 일은 했지. 다음에 왔는데 또 산와족한테 얻어 터지고 있으면 화낼 거다.”

내 양손으로 고르케의 양볼을 마구 부볐다. 고륵, 케륵, 재밌는 소리가 고르케의 입에서 삐쳐나왔다.

“네가 다른 애들한테 오러도 가르쳐주고, 내 진짜 모습도 알려주고. 참. 이거 말하는 걸 깜빡했네.”

“지난번 싸움, 고생했어. 그럭저럭 멋있었다.”

나는 고르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주었다.

“열심히 살아라.”

고르케가 입을 열어서 뭔가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칼같이 꿈에서 퇴장했다. 작별이 길어지면 아쉬움도 뒤따라 길어지기 마련이라, 떠날 때는 내일 다시 만날 것처럼 떠나는 게 좋았다.

[아이템 사용이 종료됩니다.]

꿈이 끝났다.

일어나자마자, 나는 구루를 훌쩍 뛰어나갔다. 한밤이었다. 몇 주일째 귀향길을 걸어온 고블린들은 지쳐서 다 곯아떨어졌다.

나를 쫓아올 아이는 없어야 했지만.

'음.'

필사적으로 내 뒤를 따라오는 기척이 하나 감지되었다.

‘고르케인가.’

악마니 뭐니 말했지만 그 사이에 정이 들었나 보다.

‘이럴까 봐 일부러 막 대했는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기는 인연의 무거움을 느끼며, 나는 조금 더 박차를 가했다. 고르케는 끈질기게 따라왔지만 내 속도를 이길 순 없었다. 우리의 간격은 점점 더 멀어졌다.

얼마나 숲속을 뛰었을까.

마침내 기척이 끊어졌다.

‘자아.’

나는 크르릉, 사자 갈기를 옆으로 흘렸다.

‘아마 지금쯤 다른 헌터들은 고민하고 있을 거예요.’

-고민?

‘네. 이단심문관이 계속 스테이지에 머무르는 미친 짓을 보여줬잖아요. 그거로 종족 원탑을 먹었고요. 다른 사람들도 [이거 최대한 안 나가고 뻐기는 게 이득 아니야?] 싶어서 고민하고 있겠죠.’

이른바 눈치싸움.

‘문제는, 그런 미친 짓은 이단심문관밖에 못한다는 거죠.’

이대로 수백 년을 버틴다?

그 수백 년이 어쩌면 천 년이 될지도 모르는데?

‘오직 순도 130%짜리 싸이코패스 이단심문관만 가능한 짓입니다.’

더군다나 이단심문관은 이번 스테이지에서 탈락이 확정됐다.

노예 종족의 대탈출을 막지 못했으니 말이다.

‘어차피 결국 다들 포기하고 [스테이지 클리어]를 선언할 수밖에 없어요. 지금 우물쭈물거리는 건 그냥, 자기가 먼저 클리어 선언하면 괜히 손해보는 거 같아서 그럴 뿐이에요.’

-하긴.

배후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거야?

‘어쩌긴요. 이럴 땐 먼저 손해를 보더라도 첫타를 끊어주는 사람이 나와야 다른 사람들도 따라오는 법이에요.’

구루에서 충분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스테이지 클리어를 선언합니다.’

싸아아아!

하얀 빛이 내 전신을 감쌌다.

[스테이지 클리어!]

[32층 스테이지가 클리어되었습니다.]

[보상 정산은 33층 진입 후 이루어집니다.]

[연쇄 계층 진행중 - 당신은 33층으로 강제 전송됩니다!]

2.

다음 순간, 나는 하얀 공간에 서 있었다.

33층 스테이지로 넘어가기 전에 잠깐 머무르는 대기실.

그곳에는 제일 먼저 [스테이지 클리어]를 선언한 나보다 일찍 도착한 헌터가 한 명 있었다.

“아핫. 오셨군요!”

이단심문관.

유일하게 퀘스트를 달성하지 못하고, 그리하여 스테이지 클리어에 실패한 동료가 손을 흔들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왕!”

"......."

“슬라임폴리스를 제외하면 아직 산와족의 제국은 멀쩡합니다만, 아무래도 퀘스트에 실패하면 ‘저’는 자동으로 실격처리 되는 모양입니다. 아쉽군요!”

“하아.”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번 스테이지에선 댁 때문에 고생 좀 했습니다. 아니. 생각해보면 당신 때문에 고생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은 거 같네요. [소르므윈 학원 이야기]에서도 그랬고.”

“어라? 소르므윈 학원에선 저, 상당히 얌전했던 거로 기억합니다만?”

“당신은 그러겠지만 제 입장에선 전혀 아니걸랑요….”

금사매 영애한테 자아가 잡아먹혀서 히-죽 웃던 이단심문관의 모습은, 아직도 내 뇌리에 선명히 박혀 있다. 임팩트가 굉장했지.

“으흠. 너무 오래 전 이야기라서 제가 잘못 기억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단심문관이 뒷짐을 졌다. 찰랑. 그의 자라지 않은 금발이 작게 들썩거렸다.

“저는 200년 동안 정신없이 일했습니다. 최선을 다했지요! 단언하건대, 제가 만일 탑의 정점에 오르더라도 슬라임 제국을 건설했을 때보다 더 노력할 수는 없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사왕. 저는 당신에게 저의 모든 능력을 보여드린 셈입니다!”

"......."

“그런데도 저는 당신한테 패배했습니다.”

“저에게 진 건 아닙니다.”

내가 말했다.

“우리 모두한테 패배한 거죠.”

“똑같습니다!”

이단심문관이 고개를 저었다. 단호했다.

“랭킹 1위부터 랭킹 7위까지, 동료들을 단합시킨 사람은 다름아니라 당신입니다. 감히 말하자면 일초지적도 안 되었다고 평가해야 올바르겠지요! 저는 저 자신을 평가하는 데 사감을 넣지 않습니다.”

이단심문관이 방긋 웃었다.

“결국 저의 능력은 여기까지입니다! 제 판단은 당신의 판단보다 덜떨어졌습니다. 제 윤리는 당신의 윤리보다 못합니다. 제 유능함은 당신의 유능함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저는 상대적으로 당신보다 무능한 것입니다.”

"......."

“무능한 자의 독단은 파탄을 낳습니다. 무능한 자의 행위는 파멸을 부르지요. 저는 파탄과 파멸의 버튼을 누르는 자로 전락하기 싫습니다! 마땅히, 저보다 유능한 자에게 판단과 행동을 맡기는 편이 올바릅니다.”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간단한 논리입니다. 사왕.”

이단심문관이 미소를 지었다.

“저는 이제부터 당신을 저의 주인으로 섬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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