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170화 (170/400)

170화.  < 주인과 친구 사이. (3) >

3.

우리는 이번에 공략한 스테이지, 32층에 대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었다. 다들 어떻게 슬라임폴리스에서 탈출했는지. 무사히 추격군을 떨쳐냈는지….

물론 뒷담화도.

“이단심문관 개는 정말 어떻게 좀 해야 돼!”

흑룡주가 지긋지긋하다는 듯 성을 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모르겠어. 아니, 알긴 알겠는데. 알아서 더 화가 나! 보통은 그렇게까지 하지 않잖아.”

“뭐. 보통이 아닌 애니까 그러겠지.”

독사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별로 좋은 표정이 아니었다. 이단심문관이 200년의 시간을 홀로 군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 독사는 똥 씹어먹은 얼굴을 유지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놈이야. 이제 와서 달라지겠냐.”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

내가 말문을 열었다.

“바로 보상이에요. 여러분.”

“엉? 보상?”

“네. 다들 아직 31층 클리어한 보상도 받지 못했죠? 31층 보상은 32층에 가서 준다고 했는데, 32층 보상은 또 33층에 가서 준다잖아요. 저희한테 돌아와야 할 정산금이 자꾸 유예되고 있습니다.”

“……흐음.”

백작이 부채 끄트머리로 턱을 짚었다. 눈빛이 반짝거렸다. 최상위 랭커들 중에서 백작은 유독 금전이나 보상 문제에 민감했다.

“확실히 그렇구먼. 지금까지 탑이 헌터한테 빚을 진 적은 없었던 거로 기억하네만. 설마 우리한테 줄 게 없어서 보상을 유예하는 것은 아닐 테고….”

“응! 그럴 리는 없지!”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가 현현합니다.]

뿅!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내면서 공녀(公女)가 나타났다. 소리뿐만 아니라 장소도 이상했다. 꼭 두더쥐처럼 밑바닥에서 얼굴을 내민 것이다. 근처에 있던 독사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워매?! 깜짝아!”

“미안, 미안. 잠깐 위쪽에 일이 있어서 다녀오느라 늦었어. 어휴, 유능한 사람은 여기저기 불러다녀서 큰일이야. 이래서 능력도 적당히 있어야 한대두."

공녀가 읏차, 밑구멍에서 기어나왔다. 공녀의 몸이 빠지자 바닥은 다시 깔끔한 하얀색으로 돌아갔다.

“[위쪽]에 일이 있다고요?”

“응, 이래 봬도 난 상당히 고위직이야. 탑을 매니지하는 일에 참가해줘야 하거든. 아무튼 그래서 보상 이야기지?”

공녀가 자기 무릎을 탁탁 털었다.

“별로 우리가 보상에 인색하게 구는 건 아니야. 그냥, 너희가 40층까지 클리어하고 나면 그때 한꺼번에 보상을 주려고 했을 뿐이지.”

백작이 호오, 눈썹을 올렸다.

“열 개의 층을 한 단위로 묶어서 정산해주겠다는 건가?”

“응.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는데, 나중이 되면 알게 될 거야.”

공녀가 나를 쳐다보았다.

성좌는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벌써 짐작하고 있는 사람도 있는 거 같지만.”

“뭐, 하지만 너무 비밀주의를 고수하면 미안해지니까. 당장 [스테이지 클리어 보상]은 못 주더라도 짜투리는 나눠줄게. 에헴. 나한테도 그 정도 재량권은 있어!”

공녀가 당당히 가슴을 폈다.

“어디 보자. 이단이가 가지고 있던 종족 포인트를 예쁘게 잘라서 나눠주면…. 응, 이렇게 되겠네!”

촤르륵.

우리 눈앞으로 메세지가 떴다.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가 포인트를 정산합니다.]

[당신은 9,160 종족 포인트를 얻었습니다!]

[현재 당신이 가진 종족 포인트는 총합 9,160입니다.]

한 순간 정적이 가라앉았다.

“……뭐?”

흑룡주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이, 일만? 잘못 준 거 아니야? …일만 포인트라고?”

동료들이 얼떨떨해했다.

‘생각보다 많은걸?’

나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흑룡주의 반응을 보니 우리 모두한테 각자 9160포인트씩 배분된 듯했다.

“맞아."

공녀는 시원하게 긍정했다.

“딱히 너희한테 특혜를 베푸는 건 아냐. 이단이가 탈락했잖아. 걔가 가지고 있는 포인트를 너희한테 6분의 1로 나눠줬을 뿐이야. 패자 보다 승자를 우대하는 게 철칙이니까!”

“잠깐만…. 그럼, 이단심문관이 육만 포인트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야?”

“정확히는 54,964 포인트. 우수리로 4포인트 남는데 이건 그냥 검탱이한테 줬어. 서열 1위에 대한 배려심이라고 생각해줘.”

"......."

우리는 할 말을 잃었다.

“응? 왜 그래?”

공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단이는 200년 6개월 21일 동안 혼자서 스테이지를 독식했어. 이 정도 포인트는 당연히 쌓이고도 남지. 솔직하게 기뻐해도 좋아!”

자아, 하고 공녀가 손뼉을 쳤다.

“이제부터 33층 스테이지를 개시할 건데. 저쪽 세계의 시간을 빠르게 돌리기 전에, 미리 포인트를 써두고 싶은 사람?”

검성이 손을 들었다.

“질문이 있네.”

“응, 검탱아. 말해봐.”

“미리 써둔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야. 아직 저쪽 세계… 끄응. 이름이 붙지 않아서 부르기 귀찮네. 어쨌든 너희가 개입하는 종족들의 세계는 현재 멈춰 있어. 일시정지 상태라고 할까? 만일 지금 너희가 아이템을 사두면 그 아이템이 향후 역사에 영향을 끼치게 될 거야.”

공녀가 검지로 슥슥, 허공을 휘저었다.

그러자 공중에서 자주빛 문자가 새겨졌다.

+

[황동급 기술 발명(뽑기)] - 1,000p

[성은급 기술 발명(뽑기)] - 3.000P

[백금급 기술 발명(뽑기)] - 6,000p

+

“지금 이런 아이템을 써두면 역사에 반영이 되고, 다음 스테이지에 결과물로 나타나. 실시간으로 역사를 통제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음, 너희 입장에선 아이템을 쓰는 즉시 효과가 나타나는 셈이니까, 나쁘지 않을걸?”

“…과연.”

검성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역사를 결정하진 못할지언정 어느 정도 흐름을 잡아볼 순 있겠군. 지난번엔 이런 기회가 없이 바로 다음 스테이지로 스킵되었다만...."

“아아-. 응. 아무래도, 이단이가 저런 꼼수를 쓰니까 너희한테 미안해져서.”

공녀가 한숨을 쉬었다.

“이단이는 시스템의 허점을 이용했을 뿐이니까. 애당초 허점을 노출시킨 내 잘못이 커. 정말, 사왕도 그렇고 너희는 시스템을 가만히 내버려두질 않네에.”

“흐음.”

공녀가 투덜거리는 동안 동료들은 하나둘씩 [문명 상점]을 열어 아이템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나는, 공녀와 동료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심 고민에 잠겼다.

‘……스테이지 보상에 대한 얘기를 은근슬쩍 넘겼어.’

동료들은 별로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 모양이지만 미래를 한 번 경험한 나는 알고 있다. 보상이 계속해서 유예된다는 점 자체가 일종의 [힌트]다.

내가 그걸 언급하자마자 공녀가 나타나서 화제를 돌렸다.

‘자연스럽게 동료들한테 힌트를 주려고 했는데…. 혹시, 공녀가 일부러 나를 견제한 건가?’

성좌와 눈이 마주쳤다. 공녀는 방긋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성좌의 얼굴에서 적의는 찾아볼 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속내가 보이지도 않았다.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가 당신에게 양해를 구합니다.]

양해라.

‘하긴.’

나는 공녀를 보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지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알려주면, 동료들이 성장할 기회를 뺏어버리겠지.’

여태껏 나는 회귀의 경험을 밑천으로 삼아 동료들을 이끌었다. 미래를 안다는 특권을 부린 것이다.

그러나 이 특권의 유효기간도 얼마 안 가서 끝난다.

‘염제가 클리어한 스테이지가 40층까지니까.’

그다음부터는 미지의 영역.

40층부터 49층이 어떤 [컨셉]을 잡고 있는지는 알고 있다. 50층에서 모든 세계의 탑들이 공유하는 스테이지가 개방된다는 사실도 안다. 하지만 그뿐.

51층부턴 나도 모르는 세계가 펼쳐진다.

‘그러면… 내가 알려주는 대로 움직이기만 하는 부하가 되어선 곤란해.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 방비하지 못한 부분도 채워주는 동료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혼자서 차지하고 혼자만 아는 것.

독식(獨食)만큼이나 독식(獨識)도 해롭다.

당장의 난관을 돌파할 순 있겠지만,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 탑]의 전력을 갉아먹는다.

‘유수하의 전철을 밟을 순 없지.’

나는 공녀의 양해를 받아들였다.

동료들이 먼저 진상을 깨달을 때까지 놔두자.

다 나처럼 고생하고 나보다 멋진 사람들이다. 어련히 알아서 깨닫겠지.

‘그보다 남은 포인트를 어디에 투자하느냐가 문제인데….’

나는 [문명 상점]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사실, 내가 사들일 아이템은 정해져 있었다.

‘32층에서 여유분이 생길 때마다 족족 투자해둔 이유가 있지.’

나는 아이템 설명문을 읽었다.

+

[종족 진화]

랭크: 미정(未定)

효과: 특정 종족은 진화체를 품고 있습니다. 오러나 마력이 존재하는 세계에선 생태계가 매우 복잡하며, 이 때문에 대단히 극적인 진화를 겪습니다! 오러는 의지를 실체화시키는 힘이며, 의지에 따른 변화는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보다 매우 빠릅니다.

진화가 무조건 좋은 방향으로 흐르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종족은 잘못된 것을 의지할 수도 있습니다. 파괴를 의지하는 종족은 오직 학살을 일삼는 종족으로 변질될지도 모르며, 은둔을 의지하는 종족은 아예 세상에서 격리될지도 모릅니다. 신중하게 선택하십시오!

비용: 8,900 종족 포인트 (현재 이자를 합해 1100포인트가 투자되어 있습니다….)

해금 조건: 당신의 종족이 최소한 세 가지 정체성을 획득할 것.

※현재 지정족은 진화 조건을 만족시킵니다.

+

‘원래는 34층 이후에나 구매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투자한 거였지만….’

나는 눈을 반짝였다.

‘바로 지금 살 수 있겠어.'

종족 진화.

염제가 키운 [하이 엘프] 문명에 대항해서 마지막까지 지정족이 싸울 수 있었던 이유였다.

***

회귀하기 전. 염제 유수하는 요정족을 선택했다.

요정족은 선척적으로 오러를 감응하고 마나를 감지하는 데 재능이 있어, 염제의 수호 아래 그야말로 승승장구했다.

그런 요정족의 활시위에 최후까지 저항한 세력이 바로 지정족.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정족의 [최종 진화체]다.

-어어?

배후령이 얼 빠진 소리를 냈다.

-뭐야. 그런 뒷사정이 있었냐?

‘그럼요. 괜히 제가 고블린을 선택했겠어요?’

-너랑 닮은 구석이 많아서 동병상련을 느꼈다매.

‘느꼈죠. 느끼고 있고요. 그런데 제가 말했잖아요. 얘네, 언젠가 날아오를 거라고요. 전 진심으로 고블린들이 날아오를 거라고 말한겁니다.'

-그게 찐이었어…?

‘쯔쯧. 아무렴 제가 구라를 쳤겠습니까.’

-넌 인생이 구라잖아. 예언자 새끼야.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해줘라.

“공녀님.”

"응?"

“전 이걸 구매하겠습니다.”

나는 [종족 진화]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다른 동료들 눈엔 비추지 않지만, 성좌에겐 홀로그램이 보이는지 공녀가 “헤에” 하고 흥미를 보였다.

“사왕은 정말 알뜰살뜰하게 포인트를 쓰는구나. 아깝지 않아? [황동급 기술 발명]이라거나 [국가급 장군] 같은 건 몇 개나 뽑을 수 있는데.”

“아니요.”

모처럼 기술을 발명해봤자 그걸 잘 쓰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뛰어난 인재가 나타난다 해도, 시기와 질투를 받아 출세하지 못하면 역시 무의미.

반면에 지정족 전체가 누릴 수 있는 [종족 진화]는 효과가 확실하다.

“전 이거로 할게요.”

“후회는 없어?”

“없습니다. 왜 자꾸 물으세요? 혹시 제가 이거 말고 딴 거 고르길 바라는 거 아닙니까?”

“……이래서 치트 플레이어는.”

공녀가 작은 한숨을 쉬었다.

“좋은 쇼핑 고마워.”

딸랑, 금전이 떨어지는 효과음이 울렸다.

[‘종족 진화’를 구입합니다.]

[8,900 종족 포인트가 소모됩니다!]

[현재 당신이 가진 종족 포인트는 260입니다.]

오케이.

곧바로 아이템을 사용했다.

[시대의 격변! 지정족이 진화를 겪습니다!]

[지정족의 스테이터스가 변화합니다.]

[다음 스테이지에 입장하기 전까지는 지정족의 진화체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오케이. 아직 최종 진화를 이루려면 1단계 더 남았지만. 목표에 가까워졌다.’

고블린이 세계의 주인으로 우뚝 서게 될 날이 머지 않았다.

‘아아. 세상의 방방곡곡에 고륵이 울려퍼지고 만인이 케륵을 연호하게 될 순간이 다가온다니까, 제 삭막한 가슴에 불이 지펴지고 저의 차가운 심장도 두근거리네요.’

-또라이 새끼….

다른 동료들도 아이템을 구매했다. 포인트를 전부 쏟아부은 사람. 후일을 기약하여 아껴둔 사람. 적절히 분배한 사람까지, 쇼핑 방법은 각양각색이었다.

“다 끝났지? 이제 더 없지?”

공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 물리기 없기! 이제부터 저쪽 세계의 역사를 돌릴게. 어디 어디, 이번엔 몇 백년이 흐르려나……. 헤에? 어라. 흐응?"

공녀가 눈을 깜빡였다.

“저번보다 이번이 훨씬 더 시간이 많이 지나갔네. 슬라임폴리스가 노예 반란으로 무너진 때부터 660년이 흐른 시점이야.”

660년.

이단심문관이 극단적으로 축약시킨 시대에 비하면 확실히 세월이 껑충 뛰었다.

“지난 시대의 패자인 산와족들은… 저런. 가여워라.”

“산와족이 어떻게 됐습니까?”

“으응. 뭐, 직접 들어가서 봐보면 알 거야.”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가 양팔을 활짝 벌렸다.

“그럼 지금 33층을 개방할게!”

파아아앗!

우리에게 익숙해진 빛이 시야를 하얗게 뒤덮었다.

머릿속에서 뇌수가 소용돌이치는 듯한 감각도, 이제는 꽤 견딜 만했다.

-우오오오오오오!

다음 순간.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함성이 고막을 세차게 때렸다.

-죽여라! 더러운 달팽이들의 촉수를 끊어버려라!

-돌격! 돌격! 적에게 우회를 허용하지 마! 끝까지 달라붙어라!

우리는 전쟁터 한복판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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