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 성지쟁탈전. (2) >
연합군 진지가 요란스러워졌다.
-오래된 전쟁을 끝내…?
-산와족을 멸망시키지 말라니.
별로 좋은 방향의 소란은 아니었다. 지정족 대전사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타종족 장수들이, 저마다 울분을 토해내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은 노예주의 편을 들겠다는 얘기 아닌가.
-어디서 개소리를!
-여태껏 참전을 주저한 이유가 이거인가!
-양군이 전력을 소진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이제 와서 꿀을 독차지할 셈이냐. 산와족의 의뢰를 받았느냐. 조상의 영(靈)들 앞에서 창피하지도 않는가.
비난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지정족 대전사는 눈 한번 깜빡거리지 않았다.
-뭐라고 지껄여도 상관없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한 바를 과감없이 밝힐 뿐이다. 화하평의회에선 12번의 소회의를 치렀고, 6번의 대회의를 소집했다. [산와족을 멸망까지 이르게 하는 것은 정당한 복수의 범위를 넘어선다]는 게 우리의 총의다.
-배신자들!
-너희 발목은 다시 쇠사슬이나 채워라!
-기다리게나.
퍼드득.
목책에 매달려 있던 박쥐들이 날개를 퍼득였다. 수백 마리의 박쥐들이 한곳에 모였고, 어느새 사람의 형체를 이루었다. 시꺼먼 망토를 뒤집어쓴 뱀파이어. 흡혈종의 진화체였다.
-본인은 피림(被林)에서 온 카라얀 변경백일세. 1600명의 정예를 이끌고 있지. 내 선조는 슬라임폴리스의 천장에서 살았으며, 내 어머니와 할아버지는 지난 원정군에 참전했네.
“...진짜로 뱀파이어가 됐잖아?”
흑룡주가 떨떠름해했다. 자기 종족의 진화가 생소한 듯했다. 물론 우리의 말소리는 이 세계에 사는 아이들에게 들리지 않았다.
-젖은 땅의 전사들이여. 그대들은 대탈출의 시대에 제일 먼저 슬라임폴리스에서 도망쳤지. 가장 먼저 돌도끼를 들고 봉기했으면서, 정작 산와족을 끝장낼 수 있는 기회가 도래했을 때는 등을 돌렸다네.
흡혈종의 귀족, 흡혈귀(吸血責)가 이빨을 드러냈다.
-전설에 따르면 산와족 추격군이 어째서인지 그대들을 놓아주었다지.
-.......
-본인은 의심스럽군. 1차 원정군 때부터 한사코 참전을 거부한 그대들이 이제야 나타나서 종전을 울부짖는 게 말일세.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그대들은 산와족과 밀약을 맺은 것 아닌가?
-천 년의 반도 더 된 일이다. 산와족 추격군을 물리친 것은 케케륵케르와 그의 충실한 사도(使徒) 고르케의 업적이었다. 사도 고르케는 케케륵케르의 등에 올라타, 13명의 산와족 병사를 연달아 1대1 결투로 꺾었다.
야아.
‘우리 고르케가 사도로 추대됐어?’
왠지 모르게 흐뭇하면서도 서글픈 감정이 들었다. 나한테 맞기 싫다며 악마 악마 거리던 꼬마였는데. 역사에 이름을 남겼구나.
-이 결투에 감복한 산와족 추격대장이 스스로 군을 물렸다.
-허. 감동적이군.
흡혈귀가 빈정거렸다.
-고귀한 선지자의 결투와 그에 감복한 적장이라. 실로 전설에서나 노래될 법한 서사시일세. 본인은 사람이 못나고 서툴러서 그런지, [적장의 감동] 같은 소재보다는 [두 세력의 밀약] 따위에 귀가 가는군.
지정족 대전사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명예로운 결투와는 거리가 멀었다. 케케륵케르는 야비하고도 잔인한 면이 있어, 싸우기 싫다는 고르케를 억지로 결투에 참가시켰다.
응?
-사도 고르케는 죽는 순간까지 일족에게 신신당부했다. 케케륵케르는 선한 초월자가 아니라, 단순히 우리를 좀 챙겨주려고 드는 친구에 불과하다고. 입이 더럽고 성질이 쪼잔하니 가히 가까이 두고 싶은 친구는 아니라고 말이다.
어어.
-그렇다. 굳이 말하면 케케륵케르는 우리의 악우(惡友)다.
-신을 가리켜서 악우라니! 신성모독이다!
순인종 지휘관이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지정족 대전사는 계속 탈모증에 걸린 고슴도치같이 슬픈 표정을 유지했다.
-전승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 케케륵케르를 가리키는 이름은 [입이 더러운 사자], [두들겨패는 손맛을 사랑하는 자], [폭력교육의 신봉자]다.
"......."
동료 헌터들이 지그시 내 쪽을 쳐다봤다.
어어어, 어.
시선이, 눈길이, 마치 뭐랄까. 나를 의심하고 비난하는 눈빛이라 해야 하나? 우리 동료님들한테 이런 시선을 받아보는 건 너무 오랜만인데.
“사왕…."
흑룡주가 입을 열었다.
“당신… 그런 사람으로 안 봤는데. 우리가 보지 않는 곳에서 애들 패고 다녔니? 조금, 충격인걸. 솔직히 말하면 많이 충격이야.”
“…사람의 진정한 모습은 부모가 되어 아이를 키울 때 드러난다고 하지.”
성기사는 도끼눈으로 날 보았다.
“얼마나 고블린을 못 살게 굴었으면 저런 전승이 내려져 오겠는가. 사왕. 고블린의 자그마한 몸뚱이에 때릴 곳이 뭐 얼마나 된다고 때렸나. 반성하길 바란다….”
“아니, 아니, 아니. 잠깐만요! 스톱! 웨잇 어 미닛!”
나는 손을 격렬하게 좌우로 흔들었다.
“억울합니다! 저 그렇게 폭력적인 사람 아니에요! 아시잖아요!”
“글쎄. 좀 막무가내인 면은 있지 않니…? 아니라면 왜 저런 전승이 생겼겠어.”
“때리긴 때렸지만! 그건 [꿈속에 빙의] 아이템을 써서 때린 거예요. 왜, 아이템 있잖아요. 아이템! 꿈에선 아무리 맞아도 죽어도 상처가 안 남으니까 그걸로 오러를 교육……."
“세상에. 꿈속에서 고블린이 죽었단 말인가?”
성기사가 눈을 크게 떴다. 다른 동료들도 수군덕거렸다.
“몸에 상처가 안 남는 것과 정신에 트라우마가 남는 것은 전혀 별개다. 정신에 남은 상처가 도리어 더 심각할 수 있다. 하물며 구타와 죽음을 통한 교육이라니….”
“[입이 더러운 사자]….”
“[두들겨패는 손맛을 사랑하는 자]….”
“[폭력교육의 신봉자]….”
“아니, 잠시만요. 정말로, 그렇게 말하니까 정말로 쓰레기 같긴 한데, 아니에요! 뭐가 아닌지 정확하게 말할 순 없지만 거기까지 심하게 하진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저는 그저 블린이들이 예쁜 문화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했던 겁니다. 믿어주세요!”
“전형적인 자기변명….”
“가정폭력의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아아, 아아!
내 평판이! 내 이미지가 더럽혀진다!
언제 어디서나 의지할 수 있고 믿음직스러우며 착한데다 유능하기까지 하다는, 나의 소중한 이미지가!
-야. 누구냐, 그거…?
‘전데요.’
-신박하게 미친 새끼….
나의 고결한 이미지가 와장창 깨지는 와중에, 한편으로, 다종족 연합군의 수뇌부도 지정족 대전사를 얼떨떨하게 쳐다봤다.
-돌소금의 후예들이 맛이 간 것은 이미 유명하다만….
-자신들이 모시는 신을 저리 천박하게 대하다니, 제정신인가?
-역시 상종하지 못할 종자들이다.
뭐지. 지정족도 이미지가 이상한데.
설마 이게 전부 내 탓은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마도.
-우고르.
지정족 대전사가 한숨을 쉬었다.
-우리는 평의회의 의사를 전달했다. 그대들이 우리를 어찌 받아들일지는 관여치 않겠다. 허나, 우리가 이 전쟁을 끝내러 왔다는 것. 그것이 산와족이든 어떤 종족이든 간에 결코 완전한 몰살을 두고보진 않겠다는 것을 명심하라.
-허! 너희들이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둘 것 같은가!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멋대로 산다.
지정족 대전사가 사자 머리를 돌렸다.
-유념하라. 우리는 선봉장에 불과하다. 평의회 의장(議長)이 본대를 이끌고 오고 있다. 비를 마시는 사자들과 불을 사랑하는 전사들이 다가오고 있다. 그대들은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대전사는 휘하 장병들을 향해 말했다.
-전군, 움직인다.
지정족 전사들이 일체가 되어 이동했다. 연합군은 난감해졌다. 이동을 막아세우자니 싸워야겠는데, 아군도 아니고 적군도 아닌 세력과 싸워봤자 얻을 이익이 없었다. 연합군은 활시위를 매만질 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지정족들의 꽁무니를 쳐다봤다.
-아니.
그리고.
-저것들이?
지정족의 행선지를 보고 연합군 병사들이 술렁거렸다. 수뇌부도 경악했다.
-저, 저딴 곳에 진지를 세워?!
연합군 진영과 산와족 슬라임폴리스의 정중앙.
어느 쪽에서 투석기를 쏴도 닿을 것 같은 바로 그곳에, 지정족들은 보란 듯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우오그. 여기 흙의 점성이 나쁘지 않다.
-딱 기분 좋을 정도로 끈적거리는군.
-진군하느라 지쳤다. 등이나 밀어달라.
평야엔 냇물이 흘렀다. 400명에 이르는 지정족들이 익숙하게 냇가의 진흙을 반죽했다. 서로 등짝을 밀어주거나 몸에 문양을 새겨줬는데, 그 한가롭고도 느긋한 풍광은 가히 휴가철 피서지를 연상케 했다. 전쟁터 한복판에 웬 목욕탕이 생겨버린 거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놀러운 줄 알겠다.
“저 뻔뻔함..."
“왠지 모르게 익숙하군….”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 느낌이 드는구먼…?”
동료 헌터들이 나와 지정족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아니. 뭐. 왜요.
나 진짜 아이들한테 좋은 일만 해줬다니까.
-번호를 뽑은 대로 움직인다.
목욕이 끝나자, 두 명의 지정족이 대열에서 이탈했다.
한 명은 연합군 쪽으로.
다른 한 명은 산와족 쪽으로.
단 두 명의 전사가 양군의 통행로를 점유한 것이다.
-우고르.
지정족 전사는 대검을 짊어진 채 상대편 병사들을 꼬라봤다.
어디 올 테면 와보라는 식.
-저, 저……!
그 행동과 시선의 의미를 알아채고 연합군 수뇌부들이 분개했다.
-저런 무례한 놈들! 일대일 결투로 뚫어보라는 거냐!
-지정족들은 항상 저 모양이지! 입으로는 고색창연한 말을 떠벌리지만 막상 행동은 야만스럽기 그지없다!
-우리는 수호신들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모시는 기사들이다. 악우니 뭐니 떠드는 잡종들이 어딜 감히 우리의 앞길을 막아서는가!
-투사를 출진시켜라! 이쪽에서도 전사를 보내면 그만이다!
얼마 안 가서, 요정족 투사가 백마에 올라타고 출진했다.
-곰팡이 새끼! 오늘 너희의 썩은내를 땅밑에 파묻어주마!
엘프답지 않게 우락부락한 용모를 자랑하는 투사였다.
자신을 향해 돌격해오는 요정족을, 지정족 전사는 멀뚱멀뚱 쳐다봤다.
-내 이름은 무르무. 케케륵케르와 뛰논 대전사 고르기르의 자손. 화하평의회의 서열 631위 전사다. 넌 이름이 뭐냐.
-너 따위에게 밝힐 이름은 없…!
그 순간, 지정족 전사가 대검을 투척했다.
풍차가 돌듯이 거대한 칼이 휘르륵휘르륵 날아갔다.
-다?!
요정족이 깜짝 놀라서 쌍검을 들어올렸다. 차아아앙! 거대한 파열음이 울리면서 요정족은 낙마했다. 칼날을 막았지만, 기세를 다 없애진 못해서 몸이 날아가버린 것이다.
-크, 흡!?
제대로 낙법을 펼치지도 못한 요정족이 비명을 질렀다. 컥, 숨을 뱉으며 요정족이 어떻게든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이미 지정족 전사의 사자가 다가와 있었다. 사자는 앞발로 요정족의 어깨를 찍어눌렀다.
-히….
-이름과 선조를 밝히지 않다니, 예법도 모르는 놈이다. 우고르.
퍽!
지정족 전사는 그대로 사자를 조종해서 엘프의 얼굴을 깔아뭉갰다. 이름 모를 요정족의 머리통이 실종된 순간이었다. 사자는 크르릉, 투레질을 하면서 여유롭게 앞발을 땅바닥에 부볐다.
순식간에 끝나버린 결투.
-이히힝!
주인을 잃은 백마가 울면서 평원 저편을 향해 애처로이 내달렸다. 그것만 보면 그럭저럭 그림이 될지도 몰랐는데,
-이힝?!
지정족 중 누군가가 창을 던져서 백마를 잡았다. 평원이 고요해졌다. 투창한 지정족이 총총총 뛰어가서 백마를 끌고 갔다. 연합군의 멍한 시선이 집중되자, 지정족은 그제야 머쓱한 짓을 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예의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배가 고파서….
-.......
-저래 보내면 아깝다고 생각했다. 고기는 귀하다. 아무튼 내 생각은 그렇다. 계속 결투해라.
그리고 유유하게 지정족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머리를 숙이는 예법이 너무도 완벽히 공손했다.
-.......
연합군 수뇌부가 입을 벌렸다.
-저…….
-치사한 놈!
-천하에 저것보다 무식한 새끼가 있겠는가!
-명예로운 결투에 나섰으면서 검을 던지다니! 그러고도 전사인가!
-억울하면 너희도 칼 던져라. 우고르.
요정족을 쳐죽인 전사가 심드렁하게 코를 씰룩였다.
-그리고 우린 원래 무식하다.
-뭐?
-어릴 때부터 오러를 터득하랍시고 형들이 우릴 줘팬다. 우린 못난 종족이라서 오러도 못 쓰면 뒈져야 한다. 차라리 죽이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두들겨패는데, 이 형들의 구타질이 너무 절묘해서 죽지를 못한다. 맞고 맞고 또 맞으면 어느 순간 오러를 깨우치게 된다.
나를 팬 형들 중 한 명을 골라잡아 역으로 줘패는 것이 바로 성인으로 인정받는 절차다.
지정족 전사가 노을 진 하늘을 올려봤다.
똘망똘망한 눈동자에 차마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애수가 담겼다.
-이런 무식한 종족이 있다니 평의회의 일원인 나조차 믿기지 않는 거다….
-.......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게 최선이다. 오러를 터득하는 데 죽을 만큼 괴로워지는 것 이상으로 효율적인 교수법이 없다. 이것이 바로 600년 전, 케케륵케르가 고귀한 사도 고르케에게 직접 내려주신 가르침이다.
전사의 웅얼거렸다.
-우리는 이것을 케케륵케르의 말버릇을 빌려 [시발 오러 전수법]이라 부른다. 참으로 시발한 거다.
뒤쪽에서 지정족 동료들이 일제히 호응했다.
-우상보다 우정을! 신앙보다 신뢰를! 시발!
-씨발!
-시벌!
전사가 고개를 까닥거렸다.
-우리 종족의 한은 깊고도 크다. 이 세상에 신 따윈 없으며 있는 거라곤 악우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잘해야 한다. 우리가 잘할 수밖에 없다. 오래된 사슬에 함께 매였던 자들이여. 산와족을 멸족시키는 건 관둬라.
-.......
-안 그러면 우리한테 뒈진다.
평원이 침묵했다.
내가 침묵했다.
동료 헌터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사왕이다….”
“완전 사왕이잖아….”
“사왕, 왜 그대가 저기에 있는가?”
“언제부터 어금니를 기르고 살을 녹색으로 칠했어, 사왕?”
잠깐.
진짜 내 이미지 어떻게 되어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