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 거인의 유산. (2) >
2.
“우부르카야. 네가 오러를 운용하는 방식을 보고 나는 한 가지 묘리를 깨달았다.”
-시발오러법 말인가?
“네놈들의 언어파괴가 참담한 수준이라 애통함을 금할 수 없다마는… 아무튼 그래. 나는 시발오러법에서 심후한 가능성을 엿봤다.”
내가 우부르카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은 채 말했다.
“바로 진법이다.”
-진법?
우부르카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게 뭐냐, 애비여?
진법陳法.
스승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무협지 몇 줄이나 겨우 읽었지만, 이후로는 틈틈이 배후령한테 무림의 상식을 배웠다.
진법은 말 그대로 진형陳을 이루는 방법法이다.
“무공은 기본적으로 나 자신 한 명의 몸을 감당하는 배움이지. 반면에 진법은 그걸 여럿이서 펼치는 거라고 보면 돼.”
-우고르. 전투와 같은 것인가?
“비슷하다. 그렇지만 단순한 패싸움이랑은 달라.”
나는 말했다.
“서로 묘리가 다른 문파의 사람들끼리 같은 편에서 싸운다고 해보자. 그건 합공(合攻)이고 협공(換攻)일 수는 있겠지만 진법은 아니야. 똑같은 교리. 똑같은 오러운용을 나눠야지 비로소 진법이 된다.”
-애비는 나한테 진법을 가르치려는 건가?
“오냐. 정확히는 먼저 마천신공을 가르쳐준 다음에 너랑 같이 진법을 개발하려고. 나도 진법은 경험해본 적이 없어서 잘 될까 걱정되는데, 안 되면 뭐 어때! 함 해보는 거지 뭐."
-잘 이해가 안 된다. 굳이 그걸 익혀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야, 야. 아가야. 처음부터 이유가 있는지 가치가 있는지 따져버리면 아무것도 시작이 안 된다!”
나는 우부르카의 정수리를 툭툭 두들겼다.
“일단은 그냥 설렁설렁 함 해보는 거지! 그러다 각이 안 보이면 포기하고. 감이 잡히면 파고들고. 오케이?”
-과연 설렁설렁 말인가.
“응. 설렁설렁.”
나는 활짝 웃었다.
“그런데 우리 아가. 이 애비가 물어볼 게 있어요.”
-뭐냐.
“일주일 넘게 굶어본 적 있니?”
우부르카가 눈을 깜빡였다.
-가우?
그때부터 나는 ‘설렁설렁’ 마천신공을 가르쳤다.
“마천신공은 아홉 갈래의 초식(招式)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대망의 초식(初式)이 바로 아사유검. 즉, 굶주림의 갈망과 필사적임을 본 딴 검이란다. 네가 지금 굶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지. 이야, 꿈이 좋긴 좋네! 시간도 마음대로 늘어나는데 아무리 굶어도 죽지 않다니!”
-죽여라!
꿈속에서 벌써 체감상 일주일째 굶은 우부르카가 울부짖었다. 철컹. 녀석은 팔다리가 쇠사슬에 매여 있었다. 나는 그 앞에서 달콤한 과일과 맛나는 생선을 먹었다.
정정당당히 결투를 통해 우부르카를 쓰러트린 결과였다.
-차라리 죽여라!
“괴롭니?”
-괴롭다!
“아프니?”
-아프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바로 그거란다! 우리 아가. 그 괴로움과 아픔으로 검을 노래하는 거다. 나도 일주일 동안 굶어봤지. 근데 굶어도 그냥 생각 없이 굶으면 안 돼요. 이 세상 어디선가 굶어죽는 농부를, 농부의 아이를 떠올리렴. 떠올리면서 굶어야 한다.”
-이 애비는 미쳤다!
가르쳤다.
“꿈이 진짜 좋군. 설원을 떠올리면 설원이 나타나고, 전염병을 떠올리면 전염병이 창궐하고. 아주 마천신공을 익히기엔 최적의 환경이야. 내 때는 이런 것도 없었어요, 아휴.”
-추워… 애비여, 추웁다아….
“그것이 곧 동사접검이라! 담요 한 장 없어 낙엽을 긁어모아 몸을 가리는 어느 백성의 마음을 그리는 거다.”
-그리기 전에 내가 먼저 얼어 뒈지겠다….
“괜찮아, 괜찮아. 안 죽어. 우리 아가 지정족 역사상 최강의 전사잖니. 이 정도는 가뿐하지? 그치?”
-참으로 오랜만에 나도 이 말을 입에 담을 수밖에 없겠다. 시바알….
가르쳤다.
“배우기 어려워? 불에 타는 건 너무 아파? 알았어. 이 애비도 같이 타줄게. 아파도 같이 아프면 좀 괜찮아. 안 괜찮다고? 여전히 아프다고? 당연하지. 아프라고 타는 건데. 그런데 우리 아가. 목소리가 잘 안 들린다. 성대가 탔으면 오러로 목소리를 내면 돼. 아빠를 보렴. 헛바닥도 안 움직이는데 오러만 써서 자유롭게 지껄이잖아. 자. 한 번 해봐.”
-여… 긴… 지옥이다….
“아이구, 역시 우리 꼬맹이야. 깨우침이 빨라! 마천신공이란 다름 아니라 인세의 지옥을 차례대로 펼치는 거라 할 수 있다.”
-이런… 끔찍한 무공을… 애비는 대체 어떻게 배운 건가…?
“그러게.”
나는 빙그레 웃었다.
“어쩌다 배우게 되었으려나.”
가르쳤다.
[‘꿈에 등장’을 구입합니다.]
[100 종족 포인트가 소모됩니다!]
[현재 당신이 가진 종족 포인트는 8800입니다.]
열흘.
다른 동료 헌터들이 제각각 종족들을 보살피느라 바쁜 가운데. 나는 오로지 우부르카한테 시간을 쏟아부었다. 체감으로만 따지면, 열흘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꿈속에서 함께 보낸 것이다.
“음.”
나는 뺨을 긁적였다.
“뭐, 나쁘지 않네. 나쁘진 않아. 좀 아쉽긴 하지만 이거로 만족할게.”
-그게 다인가?
우부르카가 이를 갈았다.
-본인은 열흘 동안 생지옥을 맛봤다!
“아니. 음. 그게 참…. 나도 너를 가르치면서 깨달았지 뭐냐. 내가 되게 마천신공에 재능이 충만했던 거지, 이거, 웬만큼 재능이 넘쳐 흘러도 깨우치기 어려운 거였구나….”
-당연하다! 어떤 미친놈이 아사(飯死), 갈사(渴死), 익사(潮死), 동사(凍死), 독사(毒死), 병사(病死), 장사(杖死), 소사(燒死), 전부 다 생생하게 깨우쳐서 오러로 펼쳐내겠는가! 사람은 한 번밖에 죽을 수 없고, 한 번 죽으면 끝이다! 본인도 꿈속이 아니었다면 배울 엄두조차 못 냈다!
“하긴….”
우리 마교가 좀 빡센 곳이긴 하지.
-애당초 이런 끔찍한 무공을 자유자재로 펼치는 애비가 이상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아니,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칭찬 고맙다. 자. 오늘이 지나면 나도 이 시대에 작별을 고할 거다. 그전에 진법의 초안이라도 같이 구상하자꾸나.”
-.......
“네가 마천신공을 깊이 깨우치진 못했을지라도 최소한 입마(入魔)의 경지엔 이르렀다. 우부르카. 이제 너와 나는 같은 방식으로 세상에서 숨을 쉬는 종자란다. 꿈을 나눌 수 있게 되었으니 꿈을 펼치는 것도 가능할 거다.”
읏차.
나는 우부르카의 머리에서 뛰어내렸다.
“앉으렴.”
-우거.
“진법은 무공과 달리 묘리가 정돈되지 않았다. 중구난방이지. 먼저 협공 수준으로 진법을 만드는 문파가 있어.”
나는 우부르카와 마주앉은 채 돌멩이들을 쥐었다. 가볍게 오러를 끌어올렸다. 그러자 돌멩이들은 공깃돌처럼 내 손안에서 굴렀다.
“돌멩이 하나하나가 한 명의 무인이라고 생각해보렴.”
-이해했다.
“여섯 명 중에 다섯은 일정한 리듬으로 움직여. 일종의 음악이지. 이들을 상대하는 자는 다섯 명의 리듬에 익숙해진다. 그렇게 익숙해진 순간, 나머지 한 명이 완전히 다른 리듬으로 달려드는 거야."
휙!
여섯 개의 돌멩이 중에 한 개가 순간적으로 튀어나갔다. 우부르카는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가슴근육에 돌을 맞았다.
-.......
데미지는 제로. 하지만 자신이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는지 우부르카는 멍하게 나를 바라봤다.
“이게 협공 수준의 진법. 사람은 지성을 가지고 있어. 지성이란 규칙을 파악하는 힘이야. 리듬 또한 규칙이지. 사람의 인지능력을 역으로 파고드는 게 이런 진법의 핵심이다.”
-…굉장하지 않은가?
“굉장하지. 제일 기초적인 수준의 진법이지만.”
나는 씩 웃었다.
마교의 법통을 이어받은 뒤 시간이 날 때마다 배후령한테 이것저것 배운 보람이 있었다.
“그다음 수준으로 발달한 게 환술(幻術)이야.”
나는 손바닥에서 오러를 피어올렸다.
“뭐로 보이냐?”
-불길처럼 보인다.
“맞아. 불이 아닌데도 불길처럼 보이지. 왜냐면 내가 오러로 불꽃을 따라해서 그래. 우부르카야. 네가 실제로는 몸이 거대해진 것도 아닌데 꼭 거인이 된 것처럼 거대해진 것도 일종의 환술이란다.”
나는 여섯 돌멩이에 오러를 집중시켰다.
돌멩이들이 불에 타올랐다.
“만약 여섯 명이 함께 오러를 불태우면 어떻게 될까? 그런 여섯 명한테 둘러싸인다고 상상해봐. 자아. 마치 자기가 불지옥 한복판에 떨어진 거 같은 착각이 들겠지?”
-우고르.
“우리가 이제부터 같이 구상할 진법도 이런 거란다.”
탁.
나는 허공에서 공깃돌들을 휘어잡았다.
“아직 마천신공을 익힌 사람은 너와 나 둘뿐이지. 하지만 만일 세 명이 되면? 여섯으로 늘어다면? 열둘로 늘어나고 스물네 명으로 늘어나면 어떻게 될까.”
-.......
“백 명, 삼백 명, 육백 명이 마천신공을 익혀서 모두 한꺼번에 똑같은 절기를 펼칠 수 있게 되면 어떨까.”
우부르카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나는 교활한 악동처럼 입꼬리를 들고 있었다.
“나 혼자서는 아무리 용을 써봤자, 반경 다섯 걸음 정도만 불지옥으로 만들 뿐이야. 하지만 너와 함께 신공을 펼치면 능히 열 걸음, 열다섯 걸음까지도 불태울 수 있다. 만일 수백 명이 함께한다면….”
-전쟁터를 모조리 태워버릴 수 있는가.
우부르카는 입을 벌렸다.
어딘지 모르게 눈빛이 몽롱했다.
내가 말한 광경을 상상하고 그것에 홀린 것일까.
-수백의 전사가 같은 심상, 같은 묘리에 따라 영혼을 불사른다. 전장은 순식간에 불지옥이 되어버리겠다.
그렇다.
개인기가 아니라 공동의 기술.
내가 새롭게 구상한 마천신공은 진법이 될 것이다.
-애비는 그걸 환술이라 불렀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환상이 세상을 집어삼키면 그것이 곧 진짜다.
“어때? 해볼 만하지?”
-해보고 싶군.
“오케이. 차근차근 시도해보자고.”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 진법이 성공하려면 우리 모두 같은 심상을 마음에 품어야 돼. 합창곡을 하려거든 다 똑같은 가사를 외워야지. 우부르카. 너는 동족들에게 마천신공을 널리 알릴 뿐만 아니라, 우리가 공유할 풍경들을 또한 퍼트려야 한다.”
-어떤 풍경을 말인가?
“지금부터 알려주마.”
나는 땅바닥에 저택을 그렸다.
“그건 내가 외딴 저택에서 아이들의 인형을 만났을 때인데---."
그리고 이야기했다.
여태까지 내가 겪어온 일들을.
봐온 풍경들을.
제1진법.
어느 불지옥 저택의 어린 인형들.
제2진법.
어느 변방의 마을에서 살던 그림자 마왕.
제 3진법.
어느 멸 망한 겨 울에 핀 모란.
제 4진법.
어느 거울에 심장을 뺏긴 달.
제 5진법.
어느 옥상에서 추락한 눈물.
때로는 땅에 그림을 그려가며. 때로는 오러로 모습을 그려가면서. 나는, 내가 몸으로 겪은 이야기와 눈으로 본 풍경들을 이야기했다.
이것들은 아직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형(形)을 갖추지 못했으니 진법이라 부를 수도 없었다.
그러나 언젠가 진법의 단초가 되어줄 풍경들이었다.
“이게 내가 가진 심상들이다. 다섯. 앞으로 더 늘어날지도 모르고, 아마 늘어나겠지만, 일단은 다섯이야.”
-그런가.
우부르카가 중얼거렸다.
-애비는… 열심히 사는군. 나는 누구보다 격렬하게 살고 있다 자부한다만, 애비는 그런 나보다도 바지런하다. 시간의 밀도가 굉장하다….
“여기저기 많이 싸돌아 다녀서 그래.”
-나도 애비와 같은 곳을 돌아다닐 수 있겠는가?
“글쎄.”
나는 일어섰다.
“어쩌면. 넌 혼자서 환골탈태를 한 아이니까. 반로환동(返老還童)도 가능할지 모르지. 나는 이번 시대에서 떠나지만, 다음 시대까지 네가 살아남아서 재회하게 될 수도 있어. 그다음 시대도. 다다음 시대도….”
-아주 오래 살아야겠군.
우부르카가 웃었다.
-애비의 이야기를 우리 종족에 널리 알리겠다. 연극으로 만들어서 무대에 올리겠다. 자라는 아이들에게 들려주겠다. 다섯 개의 이야기를 다섯 가지의 혈화(穴花)로 만들어, 가장 어두운 보름달마다 내가 몸소 시연하겠다. 약속한다. 아비가 우리 종족을 보살피듯, 우리 역시 아비를 잊지 않을 것이다.
나는 팔을 내밀었다.
우부르카가 허리를 굽혀 손을 뻗었다.
내 자그마한 손이 홉고블린의 거대한 손바닥에 잡혀, 악수했다.
"우부르카.”
-음.
"넌 멋진 애다. 앞으로도 천하에 너의 시발함을 흩뿌리고 다니렴.”
우부르카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물론이다. 애비여.
그리고.
‘스테이지 클리어를 선언합니다.’
[스테이지 클리어.]
[33층 스테이지가 클리어되었습니다.]
[보상 정산은 34층 진입 후 이루어집니다.]
[연쇄 계층 진행중 - 당신은 34층으로 강제 전송됩니다!]
하얀 빛이 나를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