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180화 (180/400)

180화.  < 우리 아이들이 달라졌어요. (1) >

1.

당연하지만 [아무런 일도 없었다]라는 말로 퉁치고 넘어갈 순 없었다. 백작이 탈락한 이유를 다들 궁금해 했으니까. 나는 대충 보고 들은 걸 이야기해줬다.

“그 사람은 정말이지…. 한심한 걸 뛰어넘어서, 안타깝구나.”

흑룡주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평소에 무덤덤할 뿐. 흑룡주는 일단 얼굴 근육을 움직이면 굉장히 적나라하게 감정이 드러난다. 가령 어이없는 표정을 짓기만 해도 상대방을 진짜 어이없는 존재로 만들어내는 특기를 가지고 있다. 대단해.

“애초에 요정족을 고른 게 잘못이네. 욕심이 옅으면 그만큼 만족하기도 쉬워지는데. 그런 아이들한테 돈맛을 알려줬으니 다른 일에 한 눈을 팔 리 없지.”

"백작......."

성기사가 안타깝다는 듯 허공을 올려봤다. 그곳에서 백작의 환영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것 같았다. 우리는 백작의 어이없는 존재에 관해 한 차례 묵념했다.

“참. 백작이 가지고 있던 포인트는? 이제 우리한테 분배되는 거니?”

“응, 맞아. 그렇지만 이단이 때처럼 꿀을 빨진 못할걸.”

공녀가 하품했다.

“백작이는 포인트가 모일 때마다 알뜰살뜰하게 다 써버렸거든. 그래서….”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가 포인트를 정산합니다.]

[당신은 2포인트를 얻었습니다!]

[현재 당신이 가진 종족 포인트는 8802입니다.]

“너희한테 나눠줄 포인트도 별로 없어.”

미친. 우리 모두 백작의 자린고비 근성에 전율했다.

“아. 딱 맞아 떨어지지 않아서 1포인트 남았어. 이건 검탱이 줄게. 검탱이가 너희 서열 1등이잖아? 나라도 챙겨줘야지. 감사히 받아! 내 기분이야!”

“……고, 고맙군.”

“별 말씀을!"

결국 백작이 탈락함으로써 우리에게 남긴 것은 어이없는 존재에 대한 고찰, 종족 포인트 1푼의 소중함, 마지막으로 돈지랄에 환장해 버린 짠돌이 엘프들이었다.

뭐지? 왜 우리 동료들은 탈락할 때마다 우주에다 민폐를 뿌리는 걸까? 이러다 40층을 클리어할 쯤엔 우리 탑 이름이 등천도시에서 등신도시로 개명당하진 않을지 몹시 두렵다….

“자아, 이제 너희를 34층으로 보내줄 거야. 들어가기 전에 아이템 살 사람? 얼른 골라.

“음.”

나는 문명 상점을 힐끗 살폈다. 노리는 상품이 있긴 있었다.

+

[종족 진화]

랭크: 미정(未定)

효과: 당신의 종족은 총 2번 진화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진화에는 첫 번째 진화보다 비용이 훨씬 더 많이 듭니다!

비용: 30,000 종족 포인트

해금 조건: 당신의 종족이 최소한 여섯 가지 정체성을 획득할 것.

+

나는 혀를 찼다. 너무 비쌌다.

‘최종진화까지 타는 건 아직 힘들겠네.’

어서 우리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온 천하를 재패하는 광경을 보고 싶지만. 아쉽게도 내 소망은 조금 뒤로 미뤄야 할 듯싶다.

-미친놈아 저기서 더 무럭무럭 자라면 어쩌라고!

‘홉고블린이 한 번 더 진화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어? 글쎄. 드워프? 아니면 트롤?

‘이 양반이 역시 감을 못 잡으셨네.’

나는 마음속으로 흐흐 웃었다.

‘기다려봐요. 애들이 다 크고 나면 왜 제가 지정족을 픽했는지 저절로 알게 될 겁니다. 그때 가서 아이고 공자님 아이고 제가 지정족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지만 마세요.’

-좀비야…. 그렇게 웃지 마라. 너 음흉하게 웃으면 존나 꼴사나워.

말이 너무 심하시네.

다른 동료들은 저마다 필요에 따라 아이템을 골랐다. 우리가 준비를 끝마친 걸 보고 공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희가 산 아이템은 전부 역사에 반영될 거야! 환불은 불가능하니까 양해해줘. 그럼 다음 스테이지까지 시간을 돌리면…. 이번엔 300년이 흘렀네!”

300년.

원시림이 불타 사라진 시대로부터 천 년이 훌쩍 지났다.

회귀하기 전엔 이 시점부터 염제의 천하통일이 본격화 됐던 거로 기억한다. 염제를 화신(火神)으로 모시는 엘프들이 대륙을 불태웠지.

아무렴 사람 태우는 것보다야 돈 버는 거에 취미를 붙인 지금이 건전하다.

“그럼 34층을 개방해줄게. 저번엔 퀘스트가 없었지만 이번엔 있을 거야. 단, 모두가 함께 깨는 공동 퀘스트가 아니라 단독 퀘스트! 종족별로 하나씩 따로 퀘스트를 나눠줄게.”

공녀는 베개를 내려놓고 빙긋 웃었다.

“슬슬 너희 아이들도 유년시절은 끝났어. 사람으로 치면 [사춘기] 려나? 안에서 문제가 곯아서 터질 시점이거든. 성장의 진통을 겪을 때야.”

짝.

공녀가 가볍게 손뼉을 쳤다.

“각자 힘내! 무서운 애들 돌아다니기 시작했으니까 조심하고!”

각자힘내라.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것은, 새하얀 빛이 우리를 감싸고 난 뒤였다.

눈앞이 먹먹해지는 가운데 머릿속에서 탑의 목소리가 울렸다.

[지정족이 새로운 특성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얻습니다!]

아마도 역사가 전개됨에 따라 지정족의 변화가 반영된 모양이다.

34층 스테이지가 펼쳐지기를 기다리는 순간, 추가로 음성이 들렸다.

[지정족의 특성 ‘악우 교리’가 변화합니다!]

[지정족이 새로운 특성 ‘마교(魔敎)’를 얻습니다!]

‘뭐?’

마교라고?

그 목소리의 의미를 미처 곱씹어 보기도 전에, 나는 다음 시대로 전송되었다.

2.

전송이 되자마자 이전 스테이지들과 다른 점이 눈에 띄였다.

나는 외딴 길거리 한복판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흑룡주? 검성님? 여보세요. 아무도 안 계세요?”

동료들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공녀가 말한 [각자 힘내]는 정말로 제각각 떨어져서 퀘스트 완수를 위해 힘내라는 뜻이었다.

아마 자기 종족이 정착한 도시로 뿔뿔이 흩어진 거 아닐까.

-우고르. 저녁에 훈련 끝나면 한잔 하자.

나 역시 지정족의 도시에 떨어졌다.

-요즘은 수박이 제철이다. 수박을 갈아서 술에 타마시는 게 맛있다.

-술 마시면 모처럼 훈련으로 불려놓은 근육이 상하지 않냐?

-가끔은 술을 적셔줘야지 근육도 유연해지는 법이다.

지정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길을 돌아다녔다.

지난번 스테이지에서 지정족이 패자로 등극했다더니, 의외로 도시는 별볼일없었다. 화려한 건물도 휘황찬란한 길거리도 없었다.

꼭 흰개미집을 정갈하게 지어놓은 모양새라고 할까?

울퉁불퉁한 백색 건물들이 쭉 이어졌다.

-오늘 밤에 혈화극(穴火劇) 있습니다! 인기 배우 총출동! 2년이 넘도록 흥행 몰이 중! 좌석 매진, 입석도 얼마 안 남았습니다!

그런 도시에 유별나게 큼직한 원형 건물이 이따금 있었다. 극장이었다. 극장 앞에선 매표원들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입석표를 팔았는데, 놀랍게도 매표원들은 전부 엘프였다.

-자아자아! 매진 임박! 매진 임박이요!

더 놀라운 건 연극 제목이었다.

-오늘 밤만의 특별한 경험! 연인과 함께! 동료와 함께! 300년 전통의 명품 극단이 펼치는 [라비엘과 케케륵케르]를 경험하세요!

“푸읍!?”

내가 침을 뿜었다.

-세기의 사랑 이야기! 천상의 로맨스! 어째서 제국에서 제일 아름다운 공녀는 황태자를 버리고 별볼일없는 케케륵케르를 선택했는가! 케케륵케르는 어떤 말빨로 공녀를 꼬셨는가! 인생에서 결국 중요한 것은 말빨이라는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라비엘과 케케륵케르]! 당신도 정신 나간 혀놀림을 얻으십쇼!

“아니, 이 새끼들이?”

나는 극장 앞으로 달려갔다. 극장 앞 삼거리에는 먹물로 그려진 포스터들이 잔뜩 붙어 있었다. 라비엘과 나를 연기하는 배우들 초상화도 그려졌는데,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둘 다 홉고블린이었다.

홉고블린 초상화를 앞에 두고 홉고블린들끼리 떠들었다.

-정말 아름답군….

-우거. 솔직히 [라비엘과 케케륵케르]는 어릴 때부터 너무 많이 보지 않았냐? 이젠 눈 감고도 대사를 줄줄 외우겠다.

-너가 뭘 모르는 거다. 요즘은 고전 명작을 재해석하는 게 유행이다. 저번에 내가 본 연극에선 라비엘이랑 금사매가 이어졌다.

-말도 안 된다. 그건 [라비엘과 케케륵케르]가 아니라 [은백합과 금사매] 아니냐? 제목 사기다.

-무시하지 마라. 일각에선 굉장한 인기를 얻었다….

-맞다. 그 연극에 홀려서 전재산을 쏟아부은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요정족 작가가 떼돈을 벌었다더라.

그뿐만이 아니었다.

-절호의 기회! 최고의 혈화극은 이거다! [천마 실록]이 오늘밤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화하평의회 서열 16위의 대전사가 직접 시연하는, 황홀한 불길을 직접 목격하십쇼! 검제 역엔 특별히…….

-유일무이한 대규모 혈화극! 동원되는 엑스트라 숫자만 육십육 명! [에스델, 성녀에서 마녀까지]! 이만한 연극을 무대에 올릴 수 있는 곳은 구루에서도 오직 감탕 극장뿐! 기분 좋은 가성비, 지금 예매하시면 수박 맥주가 공짜로 제공됩니다!

엘프들이 고래고래 악을 쓰면서 홍보했다.

삼거리에만 극장이 서너 개씩 몰려 있었다. 대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는 꼴이니 호객 행위가 격렬해질 수밖에 없었다. 엘프 매표원끼리 시비가 붙어 서로 귀를 붙잡기도 했다.

-야! 수박 맥주라니! 치사하게 먹을 거로 꼬시는 게 어디 있냐! 극단이면 정정당당히 연극의 품질로 승부 보자!

-사업에 치사한 게 어딨어! 너희도 상품을 개발하든가! 패배자가 말이 많아!

-우고르? 지금 싸우는 거냐?

-싸워서 이기는 매표원의 연극을 보겠다. 심판 봐줄 테니 붙어봐라.

충격과 공포의 풍경이 흘러갔다.

“저, 저 또라이들이….”

물론 우부르카가 말했었다.

내 이야기들을 혈화로 만들어 대대손손 들려주겠노라고.

하지만 나는 할머니가 손주한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정도를 상상했지, 설마 이렇게 본격적으로 상업화될 줄은 몰랐다.

-요정족 영향 아냐? 엘프들이 돈에 환장했다며.

배후령이 실실 웃었다.

-야, 그보다 저거 재밌어 보인다. 함 보자!

그가 가리킨 극장에선 한창 [라비엘과 케케륵케르]가 상연되고 있었다. 나는 반쯤 정신줄을 놓은 채 배후령을 따라갔다.

원형 극장은 거대한 동굴을 닮았다. 사방이 어두컴컴했는데, 배우들이 오러를 자유자재로 조종하면서 대사를 읊조렸다. 연극보다는 뮤지컬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

-아아. 라비엘 님. 저는 저의 마음을 깨달아버렸습니다.

-실비아.

-조개는 심장에서 병을 키우지요. 하얀 병. 빛나는 질병을. 그 병이 굳어서 진주가 되니 제 운명이 꼭 그러해요. 라비엘 님. 저는 이 아름다운 질병을 거부하지 못하겠어요.

무대 위에서 홉고블린이 연기했다. 굉장한 열연이었다. 실비아라고 불린 걸 보니 저 홉고블린이 금사매 영애를 분하는 게 틀림없었다.

-실비아, 안 된다. 그만하여라. 그 이상 말하면….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제국의 태양이 아니에요. 저의 집사도 아니지요. 라비엘 님. 공작 각하. 저는 당신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맙소사.

맙소사.

-정신이 나갔는가, 실비아 남작 영애!

이 아이들이 정신이 나갔구나!

-아니요. 저는 지극히 제정신이랍니다. 내일 황태자 전하께 이별을 통보하겠어요. 분노하시겠지만, 그분의 분노가 제 사랑을 집어삼킬 순 없겠지요. 아니. 차라리 집어삼키라지요! 저는 기꺼이 불타렵니다.

-남작 영애!

나는 넋 놓고 혈화극을 봤다.

줄거리는 이랬다. 라비엘이 금사매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황태자와 금사매가 헤어지고, 헤어진 끝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황태자가 암살을 꾀한다. 마침내 클라이막스. 암살을 막으려다가 케케륵케르 집사가 대신 죽는다….

“내가 죽으면 안 되지, 이 자식들아!?”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제목이 [라비엘과 케케륵케르]라며! 어느 홉고블린이 말한 대로 제목 사기다!

하지만 주변의 지정족 아이들에게 내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지정족들은 혈화극이 끝난 다음에 감동했다는 듯 수군거렸다.

-오늘도 멋진 불이었다….

-난 벌써 네 번째 보는데 질리지 않는다. 배우 전원이 오러를 정말 잘 쓴다.

-고르. 솔직히 감격했다. 나도 언젠가 무대에 오르고 싶군!

아니야.

뭔가 아니야.

나는 극장 앞 삼거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어쩌죠? 우리 아이들이 이상해졌어요….”

배후령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네 아이들은 원래부터 이상했단다. 좀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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