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184화 (184/400)

184화.  < 신인 배우. (2) >

2.

지정족에겐 아주 좋은 문화가 있다.

제일 강한 놈이 제일 옳은 놈.

불만이 있으면 혓바닥이 아니라 주먹으로 얘기하라.

“일단 청소부터 합시다. 선배님들.”

그리고 여기선 내가 제일 쎈 놈이다.

“극장 꼬라지 좀 보세요. 이게 뭐예요? 거미줄이 실내 장식입니까? 곰팡이로 인테리어하시게요? 아이고. 썩은내 풀풀 풍기는 것 좀 봐. 쓰레기통이네, 아주. 손님이 여기 들어오면 자기가 음식물쓰레기인 줄 착각하겠어요.”

-아니... 하지만….

“나보다 쎄요? 나보다 연기 잘해요? 나보다 오러 잘 다뤄요?”

-아니….

“그럼 걸레나 드세요, 선배님들. 우리 아마추어 아니잖아요. 혈화극 연습이고 나발이고 그것도 다 환경이 갖추어진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주변 환경이 사람 마음이에요. 선배님들 마음이 얼마나 쓰레기 같으면 극장이 쓰레기통이야? 아니, 걸레 들라니까. 말 안 들어? 맞을래요?”

나는 빈말로 맞을 거냐는 말을 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신사는 협박 따윈 하지 않는다. 그저 구타할 뿐.

유독 게으름 피는 홉고블린을 골라 주먹 마사지로 서비스 해줬다.

“또 맞을래요?”

배우들이 울상을 지으면서 걸레를 들었다.

‘만만한 엘프가 막내로 들어왔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호랑이였다’ 하는 얼굴들.

“축축한 건 좋다 이거예요. 지정족 특징이니. 하지만 그렇다고 썩은물이랑 썩은내를 누가 좋아하냐고. 그냥 게으른 거지. 근데 [원래 지정족은 습한걸 좋아한다]느니 [진정한 배우는 환경을 신경 쓰지 않는다]느니 개소리로 무마하려 들면 주변이 아사리 개판이 되는 겁니다. 선배님들이 개예요?”

-마, 막내님. 말이 너무 심한 거 같다….

“허. 아직도 반성했다는 소리 안 나오는 거 보니까 개 맞네. 지금 선배님들 머릿속에 개새끼들이 들어 있습니다. 이제부터 제가 뭘 말하면 ‘왈’이라고 대답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와, 왈….

“개소리가 작습니다.”

-왈!

“좋아요. 손에 걸레 장착하십시오. 극장을 닦으면서 각자 자신의 마음을 닦는 겁니다. 마음속에 도사리는 개새끼들이 도망칠 때까지 열심히 닦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왈!

그날 하루, 다음날 하루, 더해서 이틀 내내 걸레질만 했다.

외눈 배우는 물동이를 들고 쉴 새 없이 우물가와 극장가를 오갔다.

“선배님. 우물에서 두레박을 길 때도 생각없이 긷지 마십쇼. 어느 귀족의 하인이 됐다는 심정으로 기르십시오. 연기에 몰입하라 이 말씀입니다. 얼마나 귀중한 기회입니까? 깨끗하게 청소도 해, 마음속의 개새끼도 내쫓아, 하는 김에 하인 역할에도 익숙해져. 일타삼피네.”

-와, 와알….

외팔 배우는 극장 바닥에 고인 썩은물을 덜어내고 썩은흙을 파냈다.

“삽질이 괜히 삽질이 아닙니다. 부조리의 극치죠. 축하드립니다. 선배님은 공짜로 삼천갑자의 부조리를 경험하고 있는 겁니다.”

“상상하세요. 지금 당신은 전쟁터에 나선 전사입니다. 전쟁통에 팔을 잃었어요. 오케이? 전쟁이 워낙 치열해서, 팔 하나 잃었는데도 지휘관이 쉬게 해주질 않습니다. 목책을 세우고 해자를 파야 해요. 계속. 전쟁터에서 물러서지 않는 것은 전사의 의무일진대, 그렇다고 외팔이 되었으면서도 삽질을 하는 것까지 전사다움일까요? 아니죠. 그냥 더러워요.”

-왈.... 더럽다….

“의무는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어떤 극한의 상황까지 가면, 아름답지 못할 때가 있어요. 의무가 추해지고 덕목이 더러워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도리어 의무에 충실해지면 충실해질수록 뭔가 이상해집니다. 이상한 더러움. 더러운 이상함. 그게 부조리예요. 땅 파세요. 선배님. 물 퍼세요. 자기가 전사인지 아닌지 의심하면서, 의심되면서, 열심히 삽질하십쇼.”

-와아아아… 삽질한다….

외귀 배우는 내 말을 완전 잘 따랐다.

“쓰레기 버렸습니까?”

-왈. 막내님.

“이제부터 새로 통나무를 베어다가 의자를 만듭니다. 좋습니까?”

-왈

“손님들이 앉을 의자입니다. 혈화극이 1시간 이어진다고 해봅시다. 관객들이 선배님 얼굴을 1시간 내내 쳐다보진 않아요. 하지만 1시간 내내 엉덩이가 의자에 붙어 있죠. 이 극장에서 유일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들한테 봉사하는 게 바로 의자입니다. 의자가 불편하면 연극도 불편해져요.”

-왈. 매우 중요한 임무란 걸 알겠다, 막내님.

“오늘 저랑 같이 새삥한 의자 한 판 만듭시다. 하는 김에 일반 좌석이랑 특별 좌석도 싹 만들 겁니다.

-왈왈. 충성이다.

그리고.

극단주는 거미를 잘 잡았다.

-아니…. 쏘니아, 내가 이래 봬도 극단주다만….

매우 심한 욕설.

-생각해보니 벌레들이 돌아다니는 건 잘못된 일이군! 빨리 치우겠다!

[극단 ‘진흙과 먼지’의 구성원들이 당신의 권위에 복종합니다.]

[극단 ‘진흙과 먼지’는 당신을 실세로 인정합니다!]

대청소가 끝난 다음에도 나는 행보를 멈추지 않았다.

탑의 목소리를 듣고 또 고쳐야 할 점이 떠오른 것이다.

-저기, 쏘니아….

“네?”

-사다리 들고 뭐 하려는 건지 물어봐도… 아니, 여쭤도 괜찮겠냐?

나는 극장 입구에 사다기를 겹대어 올라갔다. 양손에서 오러를 풍기면서. 그런 내 코앞에는 [진흙과 먼지]라고 새겨진 간판이 적혀 있었다.

“보시다시피 간판 좀 바꾸려고요.”

극단주 홉고블린이 당황했다.

-가, 간판을 바꿔?

“네. 130년 전통도 좋지만 솔직히 저희 극단은 하위권 중 하위권이에요. [진흙과 먼지]처럼 뭔가 멋진 척하는 이름보다 관객들한테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이름이 필요합니다.”

나는 낡아빠진 간판을 뒤집었다.

글자가 적히지 않은 뒷판.

손톱에 오러를 실어, 나무 판때기에다 글자를 깨작깨작였다.

“오케이. 까리하네.”

나는 새로운 간판을 보며 흐뭇해 했다.

[극단 개소리(犬音)]

-.......

홉고블린이 내 얼굴과 간판을 번갈아 봤다.

-저… 쏘니아?

“말씀하십쇼.”

-그래도 개소리는 아니지 않냐? 우리는 130년 전통….

“선배님들한테 얘기 들었습니다. 극단주. 여기저기 요정족 상단들한테 빚진 게 꽤 되신다면서요?”

극단주가 움찔했다.

“보름마다 최소 한 번은 빚 독촉하러 요정족이 온다던데.”

-그, 그놈들. 막내한테 있는 말 없는 말 전부….

“전통이 멋있는 게 아니에요. 자기 사람들부터 책임을 져야지요. 이 극단의 주인이시잖아요. 손님들 끌어모으고, 인기 얻고. 배우들도 분장실에서 새우잠 잘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숙소에서 쉬어야죠. 안 그래요?”

-.......

“저 요정족이에요. 장사하는 법은 그래도 지정족보다 잘 알 겁니다. 지금은 손님을 1명이라도 더 모셔야 할 때예요. 이대로 가면 극단 망합니다.”

나는 연극 인쇄지들을 품에 안고 길거리로 나섰다.

“극단 [개소리]! 극단 [개소리]에서 다음주 토요일 저녁, 화검난무를 상연합니다!”

-우고르.

길을 오가는 홉고블린들이 피식거렸다.

다른 극단에서 홍보하러 나온 엘프 매표원들도 풉 웃었다.

-뭐야. 개소리?

-어디서 나온 애야?

좋아. 반응이 온다. 아예 무관심한 것보단 훨씬 낫다.

이제 물꼬가 트인 거다. 이걸 되도록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바로 홍보의 역할이자 매표원의 임무다.

“왈! 왈! 이 도시의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고 맛볼 수 없는 개소리의 향연이 펼쳐집니다! 염제가 사실은 착한 놈이었다에 질리신 분! 나쁜 놈은 지대로 나빠야 제맛이라는 분! 어서 오십시오! 아, 세상 천지에 이런 개자식이 또 없습니다! 진정한 개새끼가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우고르.

-요정족이 재밌긴 재밌다.

-꼬마가 여리여리해서 귀엽군.

홉고블린들이 거리를 오가며 키득거렸다.

-.......

나를 뒤따라 온 극단주는 멍하게 내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행인들이 조금 모였다 싶었을 때, 나는 비장의 한수를 꺼냈다.

“자아! 멋진 전사 여러분! 날이면 날마다 오는 혈화극이 아닙니다!”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디잉-!

허공에서 경쾌한 음이 울렸다.

마치 피아노 건반을 두들긴 듯한 소리에 길거리를 지나가던 행인들이 깜짝 놀랐다.

-우거?

-방금 뭐냐?

소리의 정체는 간단했다. 오러를 동시에 두 갈래로 쏘아보내서 서로 충돌시킨 것이다.

오러가 떨리고 공기가 진동하면서 피아노 건반음과 유사한 소리를 냈다.

제법 고난이도의 오러 운용이었지만, 내게는 어렵지 않았다.

“기대하시라!”

나는 연이어서 오러로 파장을 일으켰다.

음악에 문외한인 나조차 흉내낼 수 있는 음악. 젓가락 행진곡이었다.

“자아자아! 매표원인 요정족조차 이만큼 오러를 운용할 수 있다! 극단 개소리! 과연 얼마나 신기에 가까운 혈화를 보여주려고 이러는 것인가!”

환한 하늘, 햇빛이 쏟아지는 길거리.

나는 아무것도 없이 오직 손가락만 움직여서 가락을 연주했다.

효과가 있었다.

-파공음(破空音)?

-말도 안 된다. 세상에.

-설마 저거 오러로 소릴 내는 거냐…?

드디어 행인들이 발걸음을 멈춘 채 내 쪽만 바라보기 시작했다. 행인만 그런 게 아니었다. 대형 극단 소속의 매표원들도 휘둥그레 눈을 떴다.

“극단 개소리의 공연에서는 대사가 한 마디도 없습니다! 염제! 케케륵케르! 아무도 대사를 치지 않습니다! 불은 말하지 않는다. 다만 타오를 뿐! 역사상 최초의 무(無)대사 혈화극을 목격하십시오!”

-무대사라니….

홉고블린들은 내 현란한 손놀림을 머엉 구경하다 입을 벌렸다.

-혈화극에 대사가 없을 수도 있었나?

-글쎄, 아예 한 마디도 안 할 수는….

오러 연주에 경악한 사람. 무대사 혈화극이라는 광고를 수상하게 여기는 사람.

[어떻게 저럴 수가?] 하는 놀라움과 [저럴 리 없는데] 하는 의심. 홍보에서 제일 좋은 감정 두 가지가 삼거리의 공기에 섞여들었다.

“배우들이 한 마디라도 대사를 하면 전액 환불해드립니다! 대사 한 마디에 전액 환불! 대사 두 마디에 입장 금액의 두 배를 드립니다! 대사 세 마디에 제 전재산을 드리겠습니다!”

나는 실실 방긋방긋 웃으면서 사람들한테 전단지를 나눠줬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혈화극이 아니야! 전단지를 가지고 오시면 동행하는 손님 1분, 무료로 입장시켜드립니다! 1인당 동행자 1명씩 무료! 무료 입장 가능! 돈 쓰는 공연이 아니라 돈 버는 공연이 여기 있다! 감사합니다! 예에, 감사합니다!”

행인들에겐 이미 내가 건네는 종이를 거부할 힘이 남지 않았다.

살짝 넋을 놓고, 짙은 향에 취한 것처럼 전단지를 제깍제깍 받았다.

광고지가 금세 바닥 났다.

“감사합니다! 본 연극이 있는 날까지! 매일 여기서 연주를 펼치겠습니다! 당연히 연주회는 공짜! 아, 큰일입니다. 우리 극장 사장님 상단한테 빚진 거 많은데 이러다 진짜 파산하신다! 필사적이시다!”

나는 극단주의 손을 덥썩 잡았다.

극단주는 조금 놀랐지만 순순히 내 손을 받아들였다. 행인들의 시선이 주목되자, 어설프나마 허허 미소까지 지었다.

좋아.

“명배우가 따로 있냐! 파산에 몰린 배우들만큼 명연기를 펼치는 사람이 또 없어! 다들 집도 없어! 이젠 정말 무대뿐이다! 연기력과 지갑 사정은 반비례한다는 게 학계의 정설! 극단 개소리, 저도 출연합니다. 다음주 토요일 저녁. 다음주 토요일 저녁 상연! 감사합니다. 개소리! 다음주 토요일 저녁입니다!”

나는 행인들한테 허리를 숙였다.

내게 손이 잡힌 극단주도 자연히 인사하게 됐다.

손뼉 치거나 환호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분위기가 나쁘진 않았다. 아주 좋았다. 나는 흑룡주한테 배운 영업용 미소를 흩뿌리며 얼른 길거리에서 빠져나갔다.

-와.

배후령이 중얼거렸다.

-안 쪽팔리냐?

‘제가 할 일 하는 건데 쪽팔린 게 어디 있어요.’

-너 그래 봬도 마교 소교주잖아.

‘농부들 쫓겨나고 광부들 도망쳐서 세운 곳이 마교예요. 길에서 전단지 뿌리는 게 뭐 어때서요? 이것도 일입니다.’

-진짜…. 이 새낀 밀림 한복판이나 사막 한가운데 떨어트려도 알아서 잘 살 놈일세. 염제란 놈이 대단하긴 해. 너 같은 놈을 세상에 출하시키다니.

-케케륵케르 님….

정신체가 된 쏘니아는 차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묘한 표정이었다.

존경심과 자괴심이 반반 치킨으로 섞인 얼굴.

-대단하시긴 한데, 뭐랄까, 제가 평소에 상상하던 케케륵케르 님과 너무 다른 의미로 대단하신 거 같은…. 아니…. 이게 오히려 케케륵케르 님다운 건가…?

오냐.

이게 나란다.

한편, 완전히 길거리를 벗어난 다음에 극단주가 입을 열었다.

-진심인가.

“응? 뭐가요?”

-무대사 혈화극 말이다. 어떻게 무대에서 대사를 하나도 안 칠 수 있는가.

“당연히 진심이죠. 제가 예비 손님들한테 구라를 쳤겠어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제가 열과 성을 다해서 어떻게든 돈 내고 볼 만한 공연을 올리겠습니다. 정 안 되면 저 혼자라도 무대에 오를 거니까. 손님들한테 거짓말한 거 아닌지 심려할 필요는 전혀 없어요.”

-.......

“그보다 할 일이 있어요. 지금쯤 저희 극장에 의자가 쫙 새로 깔렸을 겁니다. 그 중에서 VIP 좌석… 특별석만 따로 골라서, 깔끔하게 표를 만들어주세요. 가격은 일반 좌석의 12배.”

-여, 열두 배?

극단주가 놀랐다.

-그렇게나….

“전단지 쫙 뿌려졌잖아요 손님으로 올 사람은 십중팔구 전단지 들고 와요. 그럼 공짜 손님이 엄청 많을 텐데, 부족한 수익은 특별 좌석으로 뽑아야죠.”

-하, 하지만 너무 비싸지 않냐?

“비싸죠. 그걸 비싸게 여기지 않는 손님만 살 거고요.”

디잉.

나는 가볍게 오러를 튕겨서 라 음을 냈다.

“아까 제가 저기서 오러 운용하는 거 다 지켜봤잖아요. 호승심이 있는 전사라면 최대한 가까이서 제 공연을 보고 싶어할 겁니다. 보고 익히려고요.”

-.......

“[공연을 보러 온 손님]한테는 지나치게 비싼 값이지만, [오러를 배우러 온 전사]에겐 싼 값입니다. 저희는 전자를 공짜로 끌어모으고 후자한테 수익을 뽑아낼 거예요. 극단주. 저 믿고, 가격 후려치십쇼.”

다음날.

정오 무렵부터 홉고블린 서너 명이 극장 앞을 서성거렸다.

-여기가 극단 개소리인가?

-다음주 토요일에 공연이 있다고 들었다. 앞쪽 좌석을 미리 구하고 싶다.

-저기 요정족도 무대에 출연한다고 들었는데…. 정말이냐? 저 요정족이 나오는 공연표를 구한다.

가격을 듣고도 홉고블린 전사들은 간단히 좌석을 샀다.

네 명한테 VIP 좌석표를 판 다음에도, 극단주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날 쳐다봤다.

극장을 열고 나서 이런 일이 없었겠지.

“어때요.”

나는 방긋 웃어주었다.

“제 말이 맞지요?”

이틀 뒤.

VIP 좌석이 전석 매진되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