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185화 (185/400)

185화.  < 신인 배우. (3) >

3.

-특별 좌석이 전부 매진되다니!

-그, 극단에 우리 들어오고 나서 이런 적이 있었나?

배우들이 신났다.

-없었다. 자리가 반이나 차면 다행이었지….

-우리도 이러다가 대박 배우 소리 듣는 거 아니냐?

-막내님이 아주 보석이다! 우고르!

아무리 골목의 삼류 극장이라 해도, 아니 그러기에 더욱더, VIP석 매진 소식에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곧 다음 공연의 기획을 듣게 되자 표정들이 달라졌다.

-대사 한 줄도 없이 공연을 한다고?

선배들은 깜짝 놀랐다.

도저히 상상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다들 정반대로 생각해보세요.”

나는 차근차근 말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혈화극은 원래 대사가 없었어요. 각본도 없었고요. 오직 불길을 오러로 조종해서 움직이는 거, 그게 혈화극의 기원입니다.”

-그, 그랬냐?

-으으음.

선배들은 애매하다는 듯 윗입술을 인중에 붙였다.

‘뭐. 하긴.’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나야 직접 봐서 알지만 이 아이들은 아니니까.

‘자그마치 900년 전의 이야기지.’

말이 구백 년이지 반올림해서 천 년이다. 혈화극의 원초적인 모습이 어떠했는지, 지금의 지정족이 알 리 만무하다.

이 시대에서 오직 나만이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다.

“선배님들. 여러분에겐, 지정족에게는 단지 불길만 봐도 슬픔에 잠기는 능력이 잠들어 있어요. 아세요? 굉장히 멋진 감수성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그 감각을 일깨울 수 있다고 믿어요.”

-.......

“오히려 대사는 방해만 됩니다. 선배님들 연기가 형편없는 이유는 선배님들이 형편없어서가 아니에요. 혈화극을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그런 겁니다!”

나는 홉고블린 한 명 한 명을 바라보았다.

외눈.

외팔.

외귀.

어디 한 군데를 잃어버리고 만 배우들이 그곳에 있었다.

“선배님들은 전부 빛나는 보석을 심장에 이고 있어요. 다만 파묻혀 있습니다. 모래사장에 묻혀 있기만 하면 보석이든 돌멩이든 다를 게 없어요. 저는 선배님들을 모래사장으로 데려갈 겁니다. 그리고 선배님들이 진심으로 연기를 사랑할 수 있게 도와드릴 거예요.”

-부,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이거든요.”

-.......

“앞으로 일주일 7일."

나는 손에 오러를 실었다.

그리고 극장 벽면에 [7]이라고 크게 새겼다.

“정말 잠도 안 자고 선배님들한테 오러 운용법을 전수하겠습니다."

그날 밤부터 과외 수업이 시작되었다.

4.

“편한 자세로 앉으세요. 최대한 편하게. 막 그냥 발 뻗어도 괜찮아요.”

배우들이 무대에 편히 앉았다.

“좋아요. 어깨 결리는 분? 어디 몸 불편한 분 있으면 말하세요. 제가 마사지해서 풀어드릴게요. 없어요? 오케이. 시작하죠.”

선배들이 바라보는 앞에서 입을 열었다.

“자아. 흔히, 오러는 정신적인 무언가로 퉁치고 넘어갑니다. [의지를 발현하라]느니 [정신을 각성하라]느니. 도통 알 수 없는 말들만 난무하죠. 선배님들. 한 번 의지를 발현해서 오러를 일으켜보세요.”

-어….

배우들은 좀 당혹스러워 하면서 오러를 일으켰다.

미세하게 흐물흐물거리는 신기루.

형(形)이 안 잡히고 향(向)도 안 보인다.

역대급 전사였던 우부르카에 비하면 [재능이 없다]고 단언해도 될 수준이겠지.

“잘 안 되시죠?”

배우들이 머쓱해졌다.

-으, 음. 잘 될 때도 가끔 있는데 …

“그래요. 소위 [잘 긁히는 날]이 있긴 있죠. 컨디션 좋고, 왠지 모르게 감정이 쌩쌩하게 움직여서 오러가 쭉쭉 뽑혀 나오고. 하지만 그런 걸로는 부족해요.”

-부족하다면…?

“이제부터는 원할 때면 언제든 시원하게 오러를 뽑아낼 줄 알아야 합니다.”

-우고르.

선배들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 마음대로 되면 얼마나 좋겠냐는 낯들.

인생의 체념을 잡아먹고 입가에 뿌리 내린 미소였다.

나 역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제안 하나 할게요. 저희, 이곳에서 [의지]란 말은 쓰지 말죠. [오러]가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는 건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오러의 발동]이 의지에 의해 일어나는 건 절대 아니에요.”

-음?

“오러는 [의지]가 아니라 [기억]에 의해 발동됩니다.”

그것이 내가 내린 결론.

천마실록, 스승님의 세계에서 배운 진실이다.

“선배님들은 [기억을 잘 떠올리는 법]을 배워야 해요. [의지를 강하게 키우는 법]처럼 무슨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기억을 잘 떠올린다….

“네. 되도록 강렬하게.”

나는 진지하게 홉고블린들과 눈을 마주쳤다.

“선배님들. [바다]를 떠올려보세요.”

배우들이 눈을 감았다.

-음.

“떠올리셨어요?”

-떠올렸다.

“오케이. 제가 한 번 맞춰 볼게요. 양옆으로 넓게 펼쳐진 수평선을 떠올리셨죠? 꼭 도화지에 그려진 그림처럼요. 예쁘장한 푸른색. 맞죠?"

선배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빙긋 웃었다.

“그게 바로 제일 저급의 기억. 오러를 운용할 때 반드시 피해야 하는 기억 연상법이에요.”

-우거?

“선배님들은 지금 바다를 떠올리신 게 아니에요. 그냥 [바다]라는 단어만 떠올린 거지요. 그런 저급의 기억으로는 절대 오러가 만개하지 못합니다. 자아!”

나는 손뼉을 쳤다.

“일어서세요!”

배우들이 엉거주춤 일어났다.

“이번엔 모래사장에 발바닥을 디뎠다고 상상합니다. 발목. 물에 잠긴 발가락의 느낌을 상상해보세요. 쏴아아아. 바닷물이 선배님들 발가락 사이로 흘러들어요. 발목까지 싸악 잠겼다가, 다시 싸아아 밀려나갑니다.”

-.......

“바닷물 색깔이 어떻습니까? 파란색이에요?”

-아니. 투명하다.

“발가락 사이에 흘러든 바닷물은 어때요? 뜨겁습니까?”

-서늘하다.

“시원하죠. 바닷물은 어때요. 마냥 깨끗해요?”

-아니…. 흙알갱이가 뿌옇게.

“파도가 치면서 흙도 쓸린 거죠. 좋아요. 발가락 사이에 모래가 끼었다고 상상해보세요. 발목에도 자잘자잘한 흙알갱이가 묻습니다.”

-음.

“전 그 감촉 좀 싫어하는데. 까끌까끌하잖아요? 알갱이들에 소금물이 같이 묻어서 좀 찐득찐득하고.”

-맞다.

“바닷물에 들어가서 종아리까지 흠뻑 젖었습니다. 소금기가 찝찝해요. 이제 어쩌실래요? 뭐 하실 거예요?”

배우들이 저마다 말했다.

-우물이 있는 곳까지 가서 발부터 씻겠다.

-어차피 바다까지 와서 젖었으니 수영이라도….

-조개는 없냐?

오케이.

“바로 그게 훨씬 더 [강한 기억]입니다.”

나는 말했다.

“선배님들. 앞으로 뭔가를 떠올리려 할 땐 절대 단어에서, [바다] 같은 낱말에서 출발하지 마세요. [바닷물에 담근 발바닥의 감촉]처럼, 아주 구체적인 감촉을 떠올리십시오. 그러면 선배님들의 기억이 알아서 도와줄 거예요.”

나는 외눈의 홉고블린을 바라봤다.

“아까 맨 처음에 [바다]를 떠올렸을 때는 어땠어요? 바다가 그냥 단순히 푸른색이었죠? 단순한 도화지 그림처럼요.”

-우고르.

“하지만 발을 담그니까 어때요? 투명하지요.”

-맞다.

“투명할 뿐만 아니라 찝찝한 감촉까지 떠올려지죠. 심지어 선배는 이후에 뭘 할지, 어떻게 행동할지 생각했어요. 바로 그겁니다.”

제대로 기억을 떠올리는 것.

발가락에 끼인 모래알의 감촉처럼, 제일 구체적인 감촉을 떠올리는 것.

그것만 능수능란하게 해내면 오러는 자연히 강렬해진다.

“---만약 선배님들이 [불에 타서 죽을 뻔한 기억]이 있다면.”

화르륵.

내 손안에서 간단히 불길이 타올랐다.

"선배님들은 오러로 불지옥을 표현하는 것도 가능하겠지요. 죽음의 위기란 건, 사람에게 강제적으로 기억을 심어버리니까요.”

-.......

“아마 선천적으로 배우의 재능을 타고 난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막 그냥 알아서 슬픈 감정을 토해내고, 정말로 전쟁터 한복판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연기하는 사람요. 선배님들은 그런 배우를 부러워하시겠죠. 질투하실 거고요. 선배님들. 그 사람들이 어쩌다 재능을 얻게 됐는지, 비밀을 알려드릴까요?”

나는 손안에 피어난 불꽃을 더 넓게 퍼트렸다.

“기억이 있는 겁니다.”

트라우마.

“어떻게 진짜 불지옥 한복판에 떨어진 것처럼 연기할까요? 간단해요. 그 사람에겐 원래 세상이 불지옥라서 그래요. 평상시도, 일상도 다 그래요. 뭘 어떻게 해도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기억의 그늘에 붙잡혀 있어요.”

-.......

예를 들어 우부르카.

지정족 역사상 최강의 전사였던 아이도 똑같다.

그 아이는 백색증을 심하게 앓았다.

다른 사람들에겐 축복인 햇빛이 우부르카에겐 적대적인 칼날이었고, 태양 아래서 걷는 것 자체가 적군과 싸워 이겨내는 일이었다. 태양을 적으로 둔 아이는 자연히 온몸을 오러로 둘렀다.

“저희가 다음주에 공연할 [화검난무]는 케케륵케르가 염제에게 실망하고 분노하는 연극이에요. 여러분은 케케륵케르가 아니지요. 염제도 아니에요. 하지만, 없으세요? 사람한테 실망한 적.”

나는 차례차례 배우들을 바라봤다.

외눈. 외팔. 외귀.

어느 한 군데씩 망가진 아이들을 보았다.

“사람을 실망시킨 적, 없으세요?”

-.......

“없으실 리가 없지요.”

나는 불길을 거두었다.

“우리 모두 개새끼를 경험했고, 우리 모두 누군가한테 개새끼가 되어봤습니다. 선배님들 중 누구든 케케륵케르가 될 수 있어요. 염제는… 아… 그놈은 좀 고난이도지. 참 존재 자체가 난이도를 가진 새끼예요. 그러니까 다음 공연에서 염제 역은 제가 맡겠습니다.”

아무리 특별과외를 해도 시간의 한계가 있다.

이 중에서 유수하를 분할 수 있는 인물은 나뿐이다.

남은 세 사람의 배우가 여섯 쌍의 눈으로 나를 올려보았다.

-그럼…

-케케륵케르의 역할은.

-누가 맡게 되는 건가?

“여러분 중 한 분.”

나는 대답했다.

“일주일 동안 제일 성취가 높은 분한테 주연을 드리겠습니다.”

달리 말해.

“사람에게 제일 강하게 실망해본 분이, 실망하고 있는 분이, 주연을 맡게 될 거예요."

선배들이 침묵했다.

5.

-아비가 도박을 한다.

외눈 배우의 이름은 ‘아리카’였다.

-어릴 때부터 그랬댄다. 젊을 때 대장간에 들어가서 쇠질을 했는데, 동료를 따라다니다 도박을 배워버렸다. 그런데 재능이 있었다. 끼가 있었나 보다.

재능이 없는 자보다 있는 자가 더 비참한 세계가 몇 개 있다.

그 중 하나가 도박판이었다.

-하루에 산더미 만한 금화를 딸 때도 있다. 그럴 땐 별장을 사서 아예 나까지 거기에 살게 한다. 비싼 가정 교사를 붙여주고, 가정부도 둔다. 먹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다 한다.

“며칠 가나요?”

-길면 2년. 짧으면 3일. 보통은 2달….

외눈의 아리카가 중얼거렸다.

-도박으로 돈 따면 그거로 사업을 한다. 도박꾼들 상대로 숙박업도 하고, 타짜들한테 돈 꿔주는 일도 하고. 나름 잘 나갈 때도 있다. 하지만, 사업이 조금 안 되면….

사업은 언제나 부침이 있다.

잘 될 때 흐름을 타는 것이 실력이라면, 안 될 때 시간을 인내하는 것은 능력이다.

-꼭 도박으로 본전을 메꾸려 한다.

아리카의 아비에겐 단순히 인내하는 능력이 부재했다.

-이런 식이다. 하루 매상을 금화 3닢으로 잡는다. 매상이 벌리면 좋지만, 안 벌리면 도박을 해서 딴다. 아비의 말로는 그것도 사업이고, 어쩔 수 없는 장사 방법이란 거다.

외눈의 아리카가 한숨을 쉬었다.

-나한테는 집이 없다. 다 별장이었거나 여관이었다. 집이라고 부를 정도로 오래 머무른 장소가 없다. 제일 도박판이 쎈 도시에서 살다가 실패하면 그보다 좀 못한 도시로, 거기서 더 못한 도시로, 거기서 더….

외눈의 아리카는 천천히 머리를 감쌌다.

-어느 날 어떤 여자가 여관에 찾아왔다. 난 생활 습관이 엉망이라서, 정오가 한참 지났는데도 여관방에서 자고 있었다. 누가 방을 두들기지 뭐냐.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서 방문을 열었다.

「아리카 씨 맞으세요?」

-척 봐도 뭔가 있어 보였다. 난 또 아빠가 사고를 쳤구나 싶었다. 가끔 가다 아비한테 돈을 빌려준 사람들이 왔으니까. 아니면 여관에서 일하는 가게 사람인가 싶었지.

「아버지 계시나요?」

「아뇨.」

-나는 잠자다 막 일어나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표정은 완전히 구겨져 있었다. 그래서 여관방 문고리를 잡은 채, 여차하면 방문을 닫아버리겠다는 티를 은근히 풍겼다.

「누구세요?」

「.......」

여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말을 얼버무리고 여관을 떠났다.

외눈의 아리카는 이상하다는 듯 문을 닫았고, 저녁이 되어서 아비한테 그 날 찾아온 여자에 대해 얘기했다.

-그 여자가 내 어머니였다.

"......."

-내가 세 살일 때 집을 나갔다. 알아보지 못한 거다.

손으로 가려진 아리카의 이마에서 눈썹이 구부러졌다.

-다 괜찮다. 하지만 내가 그때 지었던 표정이 자꾸 생각난다. 짜증을 냈다. 너무 귀찮다는 식으로 그 여자를 바라봤다.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그게 싫다. 모르겠다.

아리카가 외눈으로 바닥을 내려봤다.

-그런데 왜 어미는 나를 [아리카 씨]라고 부른 거냐. 왜 하필 [씨]냐? 그걸 모르겠다. 내 이름은 아비랑 어미 두 사람이 고민해서 지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왜 [아리카 씨]냐. 모르겠다.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시발.

다음.

외눈의 배우가 나가고, 외팔의 배우가 들어왔다.

몸통에 새겨진 하얀 문신이 이어지다 오른 어깨에서 멈췄다.

-난 마약상이다.

외팔 배우의 이름은 ‘유마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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