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 프리마 돈나. (3) >
3.
흑룡주와 성기사는 언제 다퉜냐는 듯 의기투합했다.
“사왕. 이번 공연엔 우리도 참가시켜줘.”
“작곡에는 손을 놓은 지 오래됐지만, 내 머릿속엔 수많은 악보가 담겨 있다. 우리 세계의 음악을 접목시키겠다. 상상만 해도 멋지군...."
이 분들 왜 이렇게 열성적이야?
왜 이렇게 눈이 반짝반짝거려.
저, 여러분이 좀 낯설어지는데요.
“네가 만든 음악도 퍽 훌륭하다만, 나를 음악담당가로… 아니. 부감독으로 임명해주면 훨씬 더 나아질 거다.”
“그럼 난 시나리오를 맡을게. 무용극이니까 시나리오 작가보단 연출가라고 해야 하나? 수석 연출가? 흐음. 새로운 예술이다 보니까 직책의 이름도 새로 필요하겠구나.”
“후우.”
나는 호흡을 찬찬히 가다듬었다.
어떻게든 진정했다.
아직도 머리가 후끈후끈거리지만.
“알겠어요. 여러분이 도와줘서 공연 수준이 올라가면 저야 좋죠. 다 지정족 아이들의 피가 되고 살이 될 문화 유산이니…."
“그래.”
흑룡주가 옅게 웃었다.
수채화의 노을색 물감 같은 미소였다.
“당신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
“네?"
설마 또 칭찬 폭격을 감행할 셈인가.
경계심이 잔뜩 어린 눈으로 흑룡주를 쳐다봤다.
그러자 흑룡주는 키득거렸다.
“정답을 정해놓은 다음에 이득을 챙기잖아. 항상.”
“무슨 말이에요?”
“먼저 깃발을 세워놓고 모래를 긁어모은다는 뜻이야. 옆에서 보고 있으면 좀 아슬아슬하게 묘기를 부리는 거 같긴 한데, 뭐. 당신의 소울메이트가 어련히 알아서 잘 할까.”
알쏭달쏭한 말이었다.
내 표정을 들여다보고 흑룡주는 또 웃었다.
“됐어. 네 길드 이름이나 정하자꾸나.”
“좋은 생각이로군.”
성기사가 맞장구쳤다.
“이름은 중요한 법이다.”
“흐음, 내가 기억하기로 등천도시에 등록된 예술 길드는 정말 한 줌인데…. 아마 재즈공연 길드가 서른 곳 정도 됐나?”
“26곳이 있다. 챔버 오케스트라가 1곳. 사중주 악단이 11곳이다. 활동을 접은 길드들까지 감안하면 전부 합쳐서 50곳을 넘기지 못한다. 그마저도 길드원 대부분이 동시가입자로 이뤄져 있다.”
“정말 초라하긴 초라하구나….”
흑룡주가 한숨을 쉬었다.
“혹시 좋은 이름 생각나는 거 있니?”
“글쎄요.”
아.
“극단 [라비엘]은 어때요? 딱 어울릴 거 같아요.”
“으음. 잘 안 떠오르네….”
“원래 이름 정하는 일은 꽤 어렵다.”
“블랙 드래곤은 어때?”
“별로다. 오더 왓치는 어떤가.”
어라. 방금 내 의견 너무 자연스럽게 묵살당하지 않았나?
너무 자연스러워서 묵살당했다는 걸 눈치조차 못 챌 뻔했다.
“라비엘 어감 되게 좋은데….”
“자꾸 그러면 극단 [김공자]로 해버리는 수가 있단다.”
“자. 저희 진지하게 이름을 고민해보죠.”
우리 세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생각했다.
여러 제안이 나왔다. 래일(來日), 묵음(墨音), 바벨(Babel), 아우라(Aura)....
“안 되겠어.”
작명 회의가 끝도 없이 길어지자 마침내 흑룡주가 결단을 내렸다.
“이럴 때는 원래 창립 멤버들 이름에서 따오는 게 정석이야. 흑룡주, 성기사, 사왕, 세 명의 이름을 조합해서 그럴싸하게 만들자.” “그럴 수가 있는가?”
“응. 사왕이 쓰는 언어를 기준으로 하면 돼. 창시자니까 이 정도 배려는 해줘야지.”
흑룡주는 내 고향의 언어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다.
우리들은 각자 우크라이나어, 베네수엘라어, 한국어를 쓰고 있었다. 탑의 권능에 의해 자동으로 통역될 뿐.
실제로 각자의 이명이 어떤 발음으로 들리는지 알려면 서로 물어보고 확인해야 했다.
“좋아.”
내 설명을 듣고 흑룡주는 고개를 고덕였다.
“흑룡주의 [흑], 성기사의 [기], 사왕의 [사]를 따서 [흑기사]라고 하면 간단하네.”
“와오.”
나는 오금이 저렸다.
“흑룡주. 저기요, 흑룡주.”
척추에 꽂힌 전율을 느끼며 동료 겸 절친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 손 보이세요?”
“……잘 보이는데. 왜.”
“지금 오그리토그리 구부러졌는데 제 손 좀 펴주십시오.”
“알았어. 뭐, 그 정도쯤이야.”
흑룡주가 내 손가락을 쥐더니 반대 방향으로 훅 꺾었다.
“크아아아아악!?”
“됐니?”
“존나 구려요!”
나는 벌떡 일어섰다.
“극단 이름이 흑기사가 뭐에요! 창피해요! 쪽팔린다고요!”
“사왕. 당신의 이명은 사왕이란다. [죽음의 왕]이지.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당신한테 아직 팔릴 쪽이 남아 있기라도 하니?”
“아니, [블랙 드래곤 마스터] 씨가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돼죠!”
“영어로 풀어서 부르지 마!”
흑룡주가 내 멱살을 잡았다.
“죽을래!?”
“먼저 시작한 건 흑룡줍니다!”
“하지 말라면 하지 마! 그리고 영국인들한테 내 이명은 마스터가 아니라 퀸으로 번역돼!”
“아아. 블랙 드래곤 마스터가 아니라 블랙 드래곤 퀸이시구나. 겁-나 좋으시겠습니다. 약어로는 BDQ인가? 이야아, 치킨 주문하면 30분 안에 배달 올 거 같은 이름인데요.”
“좋아. 알았어. 극단 [김공자]로 결정이야.”
“흑기사 멋지네요.”
나는 감탄했다.
“가만히 듣기만 해도 고급진 어감이랄까? 혀에 착착 감기는 게, 극단 이름으로 이만한 후보가 없다 싶습니다. 역시 흑룡주예요. 휘하 길드만 최고일 뿐만 아니라 네이밍센스까지 최강입니다. 흑기사, 좋습니다. 흑기사로 가죠.”
“그래. 진즉에 항복할 것이지.”
우리의 개싸움을 지켜보며 성기사는 묘한 쓴웃음을 지었다.
욕조물 수면에서 인어의 꼬리가 살랑살랑 잔물결을 흩뿌렸다.
“정말로 사이가 좋군…. 신기한 일이다.”
극단 흑기사黑驗死.
내가 길드장을 맡고 흑룡주와 성기사는 부길드장을 맡는다.
서열 2위와 서열 3위, 서열 7위가 합작해서 창설하는 길드라니. 전례가 없이 호화로운 구성이다.
‘심지어 예술 계통이네. 이런 인원으로.’
입가가 올라갔다.
아마 공식적으로 길드가 발족하면 세상에 난리가 날 거다.
나도 슬슬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 반응이 어떨지 궁금하네요.”
“그치? 그렇지?”
흑룡주 역시 악동처럼 히죽거렸다.
나이든 흡혈귀의 얼굴인데도 장난스러운 미소가 잘 어울렸다.
“내가 장담하는데 여러 사람이 뒤짚어질걸. 아. 당연히 다른 애들한테도 비밀이야. 나중에 첫 공연 열 때 검성 할아범을 초대하자. 정말, 어떤 표정을 지을까?”
문득 흑룡주가 본래의 얼굴로 똑같은 미소를 짓는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왠지 몰라도 그 미소는 굉장히 멋질 것 같았다.
“좋아요.”
나도 미소를 지었다.
“좋네요.”
우리는 밤새도록 다음 공연에 대해 떠들었다.
연극은 [라비엘과 케케륵케르]로 정했다.
케케륵케르라는 어감이 너무 생뚱맞다는 흑룡주의 주장에 따라, 공연 이름은 [은의 심장]으로 바뀌었다.
“주인공은 반드시 이반시아 공작이어야 해. 이견의 여지가 없어. 등장인물을 정해서 출연시키지 말고, 이반시아 공작의 심리적 변화를 안무로 풀어내자.”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극적으로 묘사해야겠군. [무도회장]을 무대 배경으로 삼겠다. 하얀색 생화를 무대 위에 무수히 깔고, 그 위에서 배우들이 춤추도록 하지.”
“아. 그거 예쁘겠다!”
모두 흥분했다.
우리 주변으론 이미 싹 비워진 포도주 몇 병이 뒹굴고 있었다.
술을 마시면서 회의한 것이다.
“음. 사랑에 빠지는 순간, 이반시아 공(公)의 발끝에 밟힌 꽃들부터 하얀색에서 붉은색으로 바뀌는 것이다. 한 송이, 두 송이, 세 송이 ..... 그래서 하이얀 바다 위에 붉은색 징검다리가 놓인다. 사왕은 오직 붉은색으로 변한 꽃들만 밟고, 밟아서, 이반시아 공한테 건너간다."
흑룡주가 일어났다.
“안 되겠네. 너무 좋아. 우리 당장 시험해보자!”
“여기 꽃가게 없는데 괜찮아요?”
“순간전이로 따오면 그만인걸. 가자!”
흑룡주와 나는 성기사의 욕조에 들어가 서로 손을 잡았다. 우리 세 명은 어디론가 전이되었다. 어디가 어디로 이름될지 우리는 몰랐 다. 몰라도 상관없었다.
어디인지, 하얀꽃이 필 것 같은 곳으로.
우리는 산의 자락을 가늠하고 꽃의 향기를 더듬어서 전이했다. 밤이었다. 밤하늘 아래 꽃은 향기가 자욱했다. 노란꽃이 핀 골짜기가 있었으며, 보라꽃이 만발한 산등성이가 있었다. 우리는 밤하늘의 공기에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리며 하얀꽃만 찾아나섰다.
‘좋다.’
자꾸 웃음이 새어나왔다. 술에 취한 것같이.
“우리 지금 욕조 타고 하늘 날아다니는 거 아세요?”
“양탄자가 업그레이드 하면 원래 욕조야. 사람은 물에서 태어나잖아.”
“제정신이 아니로군….”
“우리 만취했어요. 큰일이네. 탑 사람들이 이거 보면….”
우리는 어느 꽃발에 내렸다.
고개를 수그려서 땅에 만개한 하양.
꽃밭에 내리자마자, 흑룡주는 얼른 어항을 나와 구두를 벗어던졌다.
“여기가 적당하겠어! 사왕!”
“하하.”
“바보가 되어버렸네. 성기사!”
“그래.”
성기사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피식 웃으며, 양손을 들었다.
군살이 잡힌 손가락이 낙하했다.
느릿하게.
조금 더 느릿하게….
손끝이 허공에 닿을 무렵.
성기사의 얼굴은 어느덧 무표정해져 있었다.
___________.
음(音)이 밤하늘을 교태롭게 휘저었다.
성기사의 손끝이 허공을 두들겼다.
마치 그곳에 보이지 않는 피아노 건반이 펼쳐진 것처럼.
꽃잎이 흔들렸다. 긴 손가락이 투명한 백건(白鏡)을 건드릴 때마다, 밤하늘의 오러가 진동했다.
“역시 실력이 안 녹슬었잖아!”
“시끄럽다.”
“하여간 네 애인 독점욕은 알아줘야 돼.”
“더 시교럽군.”
선율이 격렬해졌다.
피아노 소리가 말소리를 파묻었다.
잡담이 가라앉고 흡혈귀가 터트리는 웃음소리만 선율 위로 퍼졌다.
“얼간아! 리베르탱고는 너무 오랜만이잖아!”
흑룡주는 맨발로 하얀꽃을 밟았다.
발에 밟힌 꽃잎이 검게 물들었다.
____ , ____ , ________.
성기사의 손이 밤을 저었다. 흑룡주의 발이 꽃을 상처냈다. 작은 발톱에 긁힌 꽃잎에서 피 흘리듯 검정 물감이, 착색한 오러가 흘러나왔다.
선율 하나에 춤사위.
한 번의 손짓에 한 번의 발짓.
하얀 꽃밭에 까만 발자국은 점점이 번졌다.
“사왕!”
“예쁘다….”
“바보 같긴!”
“전 하얀색이 좋아요….”
“아, 멍청아. 너무 빨라!”
“시끄럽다.”
이어지는 듯 이어지지 않는 듯, 우리의 웃음소리와 음악소리, 발소리가 녹아내렸다. 우리는 하얀 도화지에 밤하늘의 점을 찍는 세 명의 어린아이였다. 성기사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나, 탑이 너무 좋아!”
흑룡주가 춤에 취해서 웃었다.
“조금만 더 일찍 생겼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아버지도 같이 살았을 건데…."
“저도 좋아해요. 탑.”
“늦으면 안 돼. 사왕.”
검은색 꽃향기가 아찔했다.
“항상 늦으면 안 돼.”
“맞아요.”
“우리, 잘 살 수 있겠지?”
“네."
“행복해지고 싶어라. 영원히….”
“친구잖아요.”
“맞아!”
“다 잘 될 거예요.”
"응."
흡혈귀의 늙은 손이 내 손가락을 잡았다.
“춤을 추자. 김공자.”
삶이 한 번의 놀이라면 우리는 단지 놀이할 사람을 만나려 했는지 모른다.
우리는 빙그르르, 윤무(輪舞)를 추었다.
흑룡주가 밟은 하양은 검게 색칠되었다.
내 발에 짓이겨진 꽃잎은 붉은색, 몹시 붉게 물들었다.
우리가 춤을 추며 나아간 길 위로 검은 잔물결, 붉은 잔물결이 쳐서, 백색의 화원은 온통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흥건해졌다.
"________."
성기사는 피아노를 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Lascia ch'io pianga
mia cruda sorte, e che sospiri
la liberta---.
e che sospiri
la liberta---.
탑은 성기사의 노래를 한 번 집어삼켰다가 도로 흘리지 않았다.
그저 밤공기에 내버려두었다.
우리는 밤에 내버려진 세 명이 되어, 하얀꽃을 못되게 홀렸고, 홀린 채 쓰러졌다.
-.......
대낮이 되어서야 눈이 떴다.
눈부신 햇빛.
성기사는 어항에 누워 아가미를 벌렁거렸고, 흑룡주는 꽃발에 코를 박은 채 가만히 잠들었다. 완전히 만취한 취객들의 말로 그 자체였다.
“으아….”
띵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나는 일어섰다.
그런 내 앞에 쏘니아가 가만히 서 있었다.
“응?"
-케케륵케르 님.
진지한 목소리였다.
“뭐야…. 왜…? 우와, 머리 진짜 땡기네. 이거 술이 안 좋았나….”
-저, 다음 공연에 직접 연기하고 싶어요.
나는 쏘니아를 올려다보았다.
푸른 눈동자에 어떤 이름 모를 욕망이 도사리고 있었다.
-저도 당신처럼…. 아니.
쏘니아는 말했다.
-저도 당신들처럼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