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 프리마 돈나. (4) >
4.
결심(結心)의 말.
그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음.”
나는 몸에 오러를 돌렸다.
취기가 서서히 벗겨져 나갔다.
‘정신이 돌아오는군.’
우리 탑에는 [기껏 술을 마시는데 오러 따월 써서 혼자만 말짱하면 예의가 아니다]라는 상식 아닌 상식이 있다.
내가 이 주례(酒禮)를 사랑하긴 하지만, 쏘니아가 진지한 애기를 꺼냈는데 취한 상태로 듣는 건 더욱 무례한 짓이다.
‘옷차림은…. 뭐야, 왜 나 상의가 엉망이야?’
어젯밤에 대체 얼마나 취한 거람.
술을 마신 것 자체가 오랜만이어서 그랬나.
“미안하다. 쏘니아. 잠깐 씻고 와서 얘기를 시작해도 괜찮을까? 이런 이야기는 좀 깨끗한 몸으로 듣고 싶어서.”
-아. 음, 그러실 필요까진….
“있어.”
내게 중대한 결심을 털어놓는 사람은 누구든 정중히 대우받아야 한다.
“아마 근처에 냇가가 있을 거다. 얼른 씻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줄래?”
-……네.
쏘니아가 왠지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시냇물에 가서 씻었다. 어젯밤, 플라잉 욕조를 타고 오면서 슬쩍 봐둔 장소였다. 서늘한 물웅덩이에 몸을 담그니 정신의 노폐물이 말끔하게 개였다. 머릿속으로 마천신공을 1식부터 7식까지 복기한 다음, 나는 일어섰다.
“앉아서 애기하자.”
-예.
나는 쏘니아와 마주앉았다.
“다음 공연에선 직접 연기해보고 싶다고?”
쏘니아가 고개를 고덕였다.
“은퇴하지 않고 계속 혈화극 배우를 하고 싶다는 뜻이구나.”
-네.
“만일 괜찮다면 이유를 들려줄 수 있을까?”
쏘니아는 고민했다. 자신만의 언어를 진지하게 고르고 있었다.
내 코앞에서 열심인 얼굴을 보면서 문득, 지금 상황과 전혀 동떨어진 무언가를 생각했다.
‘원장님이랑 똑같네. 나.’
어린아이가 뭔가를 털어놓으려 할 때마다 원장님께선 신중히 준비하셨다. 먼저 몸과 마음을 가다듬으신 것이다. 일어나자마자 취기를 쫓아버리고 목욕재계부터 한 내 모습엔, 이미 원장님의 흔적이 짙게 배어 있었다.
"......."
그래.
나는 차분히 쏘니아를 기다렸다.
-…이대로 대접을 받는 인생이 싫은 건 절대 아니에요.
오러로 말린 내 머리카락이 햇살에 다시 건조될 쯤에, 쏘니아가 입을 열었다.
-오히려 공짜로 이런 횡재를 누려서 정말 기뻐요. 예. 가족들도 동족들도 절 무시하지 못하겠죠. 제 창고에 쌓인 금화도 엄청나고요. 케케륵케르 님 덕분에 전 평생 기분 좋게 살 수 있겠지만….
쏘니아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꽃밭에서 흑룡주와 성기사가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 흑룡주는 “으으” “아” “슬슬 시동 걸고 있어…” 같은 뜻 모를 말만 중얼거렸다. 성기사는 “아니다” “오해다” “아니야” 같은 신음을 냈다.
대체 무슨 시동을 걸고 뭐가 오해라는 건지 수수께끼다.
내 동료지만 참 재밌는 친구들이야….
-어제 확신했어요.
쏘니아는 우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여러분이 술 마시고 떠들고 애기하고…. 춤추고, 연주하고, 노래할 때, 저는 삶을 느꼈어요. 저게 삶이구나 싶었어요. 아니. 저게 삶이면 좋겠다고 느꼈어요.
쏘니아의 무릎에 올라간 손이 꾹 쥐어졌다.
-왜 여러분이 떠들고 웃는 숨소리에만 삶이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저도 그 속에 끼어 있기를 원해요. 저도 무대 위에 오르겠습니다. 저도…. 여러분처럼. 저는, 아름다워지고 싶어요.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나 역시 쏘니아와 똑같은 처지에 놓인 적 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쏘니아에게 가장 절실한 말이 무엇인지 안다.
“도와주마.”
나는 문명 상점을 열었다.
[‘꿈에 등장’을 구입합니다.]
[100 종족 포인트가 소모됩니다!]
[현재 당신이 가진 종족 포인트는 6602입니다.]
“너는 지금까지 쭉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나를 지켜봤다. 내가 고안한 안무, 무대, 오러운용법, 모든 걸 실시간으로 수업처럼 들은 셈이야. 이론적으로는 가르칠 게 더 없으니 남은 건 경험뿐이다.”
-예!
“그런데 도와주기 전에 한 가지만 묻자.”
나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명색이 마교 소교주이자 마천신공의 전수자로서 이른바 양식미란 걸 갖춰야 하는 법이다.
“우리 쏘니아 며칠까지 굶어봤니?”
침묵이 흘렀다.
부잣집 상인 가족에서 태어난 요정족은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넴?
좋은 반응이구나.
쏘니아의 깜찍한 표정이 절규로 망가지는 데엔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5.
지옥의 훈련을 거치고, 마침내 공연날이 다가왔다.
내게는 이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감독한 공연.
하지만 쏘니아에겐 감격스러운 첫 데뷔 무대가 될 거다.
[퀘스트 ‘연극 전국시대: 고전의 위기’가 진척됩니다.]
[현재 이단침식율은 11%입니다.]
이번 스테이지의 퀘스트 진행도 무척 순조롭다. 내가 창안한 혈화극. 이른바 무용극은 이미 도시 전체에 퍼졌다.
[개소리]뿐 아니라 다른 극단들도 슬그머니 유행에 편승하고 있다.
이제는 가만히 놔두기만 해도 알아서 퀘스트가 깨지겠지.
“야아. 관객 입장에서 보는 건 처음입니다.”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발 아래선 손님들이 우글우글 객석을 채우고 있었다.
“이러니까 또 기분이 새롭네. 흑룡주는 어때요? 긴장되지 않아요?”
“긴장은 무슨……."
흑룡주가 옆머리를 뒤로 슥 넘겼다.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한 손은 손가락을 오므리고 있었다.
아닌 것 같아도 긴장하셨네.
나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성기사 님은 완전 멀쩡하시네요?”
"음. 나야 무대에 올라가본 적도 많고 재즈바를 운영한 적도 있다.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긴장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어어. 재즈바까지 운영하셨어요?”
“입탑 2년 차의 옛날이야기다.”
성기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예전에는 재즈를 하면서 살고 싶었다. 운 좋게 사람들이 내 음악을 좋아해주었지.”
“헤에.”
참고로 흑룡주는 더 이상 흡혈귀가 아니었고, 성기사도 새기족이 아니었다. 원래의 모습 그대로 공중에 둥실둥실 떠오른 채 무대를 보고 있었다.
우리 세 명 모두 [인물 빙의]에서 빠져 나온 것이다.
“바깥세상에선 꿈으로 그쳤던 재즈바를 자신만만하게 오픈했다. 여러모로 멋진 경험이었다.”
흑룡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시절 이야기는 꺼내지 말라며. 왜 갑자기 사왕한테 얘기하니?”
“생각이 바뀌었다.”
“흐응. 하여간 당신도 은근히 이랬다 저랬다 왔다갔다 하는 스타일이야…. 재즈바 이름이 뭐였더라? 기억이 안 나네.”
“리틀 베네치아.”
“아, 맞아. 베네치아였어. 당신 그거로 쫄딱 망했잖아.”
흑룡주가 키득였다.
"괜히 악질들한테 돈 빌렸다가 빚만 엄청 지고. 내가 그때 마피아들이랑 술 마시면서 들었어. 웬 S급 호구가 제 발로 기어들어와 대박을 터트렸다나 뭐라나.”
“내게 돈을 관리하는 일은 무척 어려운 것이다….”
“좀 고쳐. 당신이 그러니까 자경단이 맨날 자금 조달에 쪼달리잖아. 뭐, 그 일을 계기로 좋은 인연을 만나셨으니….”
“아."
내가 무대 위를 가리켰다.
“쉿, 시작하나 봐요.”
흑룡주와 성기사는 바로 입을 다물고 무대를 바라봤다. 흑룡주가 각본을 만들었고, 성기사가 음악을 작곡했으며, 내가 안무를 짰다. 연출은 모두가 함께 고심했다.
우리 세 사람이 처음으로 합작한 작품.
어두운 무대로 배우들이 춤을 수놓았다.
"......."
흑룡주는 조마조마하게 발을 떨었다.
아이김 제국의 성벽에 올라 장병들한테 연설할 적에도 떨지 않았으면서. 이런 때는 의외로 긴장을 많이 타는 성격인 건가.
나는 가볍게 흑룡주의 팔을 잡아주었다.
“……사왕.”
“네."
“왜 내 팔꿈치를 잡는 거니…?”
“손을 잡아주는 게 정석이긴 한데, 제게 허락된 손은 라비엘의 손뿐이라서요. 친구끼리 손 잡는 것도 어째 좀 민망하고. 그렇다고 어깨에다 손을 올리면 뭔가 젠체하는 느낌이 들잖아요? 팔꿈치로 타협했습니다.”
"하......."
흑룡주가 작게 웃었다.
“당신 진짜 또라이야.”
“그런 소수의견이 있다는 건 압니다. 블랙 드래곤 퀸.”
“정말… ”
흑룡주는 한숨을 쉬었다. 공연을 지켜보는 흑룡주의 옆얼굴은 한결 편안했다. 발도 더 이상 떨지 않았다.
무대 위의 춤이 이어졌다.
“……어떡해. 역시 다들 아직 오러가 미숙하나봐.”
“저 정도면 수준급이죠. 저희 수준을 바라면 안 됩니다.”
“음악 연주와 안무를 동시에 해내는 게 어렵나 보군…. 아니, 하지만 음악은 생각보다 괜찮다. 들어주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우리는 수군거렸다.
발 아래의 객석에서도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거. 뭔가 평소보다 못하지 않냐?
-그런가? 난 이번이 처음인데 멋지다.
-잘 모르겠지만 오러가 좀 약한 느낌이….
-미묘하군.
역시.
‘바로 관객들이 알아보는구나.’
내가 공연에서 빠진 영향이었다.
여태껏 나는 무대의 한복판에서 배우들을 조율해줬다. 오러가 모자란 부분을 채워줬고, 약하다 싶은 부분을 격렬하게 태웠으며, 음악을 지휘했다.
그러나 이번 공연에서는 모든 배우들이 오러, 안무, 음악에 참여했다.
나의 부재가 관객들한테도 전해진 것이다.
-훅.
-흐읍…!
외눈의 아리카, 외팔의 유마르, 외귀의 사쿰, 모두가 최선을 다해 춤을 추었다. 각자 맡은 선율을 간신히 발산하면서 말이다.
물론, 쏘니아도.
아이들이 흘린 땀 한 방울 한 방울이 내 눈에는 보였다.
‘괜찮아.’
나는 주먹을 쥐었다.
‘잘 될 거다. 우리 아이들.’
너희는 성공할 준비가 되어 있다.
‘힘내라.’
관객들의 웅성거림이 점점 더 심해졌다. 극단 개소리에 열광하여 광적으로 추종하던 단골 손님일수록 실망감은 짙었다.
이게 뭐냐. 뭔가 아니다.
그런 말소리가 공공연히 흘러나왔다.
"......."
우리 세 사람은 말없이 침을 삼켰고.
무대 위에선 클라이맥스가 다가왔다.
-.......
배우들이 모두 동작을 뚝 멈추었다.
오러를 진동시켜 연주하던 음악도 끊겼다.
어두운 극장이 침묵에 휩싸였으며, 갑자기 내려앉은 침묵에 관객들은 당황했다. 그 당황이 더 흐르기 직전에 라비엘 이반시아가, 그녀의 역할을 맡은 쏘니아가 입술을 열었다.
-Lascia, ch'io pianga---.
붉은색 오러를 품은 노랫자락이 도도히 울렸다.
입술에서 노래가 한 뼘 새어나오자마자 관객들이 움찔했다.
쏘니아는 피를 토하듯, 정말로 피를 토하면서 익힌 노래를 읊조렸다.
-mia cruda, sorte....
단기간에 내 수준까지 오러를 쓰도록 가르치기란 불가능했다.
그래서, 우리 세 사람은 머리를 맞대어 작은 연출을 마련했다.
바로 [배우가 홀로 노래하는 장면]을 우리 극단에서 처음 도입한 것이다.
“좋아."
관객들 반응을 둘러보며 흑룡주가 속삭였다.
“먹힌다, 얘! 먹혀.”
우리 극단의 혈화극은 아무런 대사가 없기로 유명했다.
가끔 배우들이 춤을 추며 소리를 내긴 했으나, 그건 “우!” “훅!” 같이 의미가 없는 소리들. 혹은 일부러 뜻을 뭉개버린, 원시적인 발음들에 불과했다.
관객 중 누구도 오페라의 아리아를 예상하진 못했다.
-la liberta....
예상의 헛점을 불쾌가 아니라 쾌감으로 바꿀 만한 실력을, 쏘니아는 갖추었다.
오직 이 순간을 위해서 중점적으로 교습과 훈련을 받은 덕분이었다.
한 명의 엘프가 고요한 어둠 속에서 노래했다.
-la liberta....
홉고블린들은 멍하게 아리아를 지켜봤다.
그들의 눈빛에서 우리는 성공을 직감했다.
“다행이네요.”
“응. 약간 꼼수를 쓴 거지만….”
“꼼수를 써야 할 상황이었다. 설령 전체적으로는 수준이 떨어지더라도 클라이맥스가 백미의 값어치를 하면,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지. 한숨 돌렸다….”
우리는 흐뭇하게 공연이 이어지는 광경을 보았다.
[현재 이단침식율은 10%입니다.]
[이단침식율을 10% 이하로 떨어트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퀘스트 클리어!]
마침, 퀘스트 달성을 알리는 탑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쏘니아와 배우들을 쳐다보며 몸을 일으켜세웠다.
“갈까요.”
“벌써?”
“아이들이 저 없이도 잘하는 모습을 봤으니까 만족했어요. 괜히 또 관객들이 박수 치는 모습까지 봐버리면 눈물 날 거 같아요. 지금 가죠.”
“의외로 눈물샘이 약한 편이구나, 당신.”
“11층에서 엉엉 운 블랙 드래곤 퀸만큼은….”
“너 진짜 맞을래?”
흑룡주와 성기사도 몸을 일으켰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배우들을 향해, 우리는 아무한테도 들리지 않는 손뼉을 쳤다.
무대에선 아리아가 끝나고 다시금 춤이 이어지고 있었다.
‘잘 될 거야.’
땀 흘리며 열연하는 쏘니아를 바라보았다.
‘잘 있어라.’
그리고.
“스테이지 클리어를 선언합니다.”
우리 세 명은 시간차를 두지 않고 말했다.
[흑룡주가 스테이지 클리어를 선언합니다.]
[성기사가 스테이지 클리어를 선언합니다.]
[스테이지 클리어!]
눈앞이 하얘지기 직전, 쏘니아의 눈동자가 허공을 훑었다.
내가 떠 있는 방향을.
불가능한 일이지만, 나는 쏘니아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34층 스테이지가 클리어되었습니다.]
[보상 정산은 35층 진입 후 이루어집니다.]
[연쇄 계층 진행중 - 당신은 35층으로 강제 전송됩니다!]
하얀 빛이 우리를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