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1) >
1.
내 시야를 물든 빛이 잦아들었다.
우리 세 사람은 새하얀 공간에 덩그러니 떨궈졌다.
흑룡주와 성기사. 나.
“으음. 예상 외의 소득이 있어서 좋았어, 이번 스테이지!”
흑룡주가 기지개를 폈다. 헛차. 손깍지를 낀 채 오른쪽 왼쪽으로 허리를 기울이는 자태가 범상치 않아, 가히 마을 뒷산에서 몸을 푸는 배드민턴 동호회 아저씨들을 방불케했다.
“얼른 등천도시로 내려가서 흑기사부터 창설하고 싶은데….”
“어렵겠지. 40층까지 연속으로 공략해야 하니.”
“그러게…. 아아, 진짜! [밤하늘의 디바] 가 복귀한다는 소문이 나면 눈이 돌아갈 사람이 한둘이 아닐 거야! 성기사의 피아노를 그리워하는 애들이 더러 있다니까.”
“아직 완전히 결정난 건 아니다.”
성기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흑룡주의 어깨를 툭 쳤다.
“아. 왜?"
“옛날 별명으로 부르지 마라고 하지 않았는가. 아무튼 내가 무대에 오르는 게 확정된 것은 아니다. 내 사람한테 양해를 구하고 허락을 받아야지.”
“허락이 아니라 [윤허]겠지.”
흑룡주는 혀를 쯧쯧 찼다.
“당신 애인 말인데… 그것도 병이야. 집착이 너무 심해. 애당초 남들한테 얼굴 보여주지 말라며 맨날 투구만 쓰고 다니게 시키는 게 말이나 돼?”
“된다. 그런 독점욕이야말로 사랑스러운 것이다.”
“어휴, 이거 봐. 환자도 이런 환자가….”
흑룡주가 한숨을 쉰 순간이었다.
[귀인족을 인도하는 독사가 클리어를 선언합니다.]
[순인종을 인도하는 검성이 클리어를 선언합니다.]
우리와 합류하지 않았던 동료가 속속들이 합류했다.
아마도 이미 클리어를 해놓은 다음, 다른 사람들이 클리어를 선언할 때까지 기다린 것 같았다.
파아아앗, 빛이 퍼졌다.
잠시 뒤 그곳엔 외눈의 검객과 노년의 검사가 서 있었다.
“여어. 오랜만이다.”
천무문주(天武門主), 독사가 오른손을 설렁설렁 흔들었다.
누가 봐도 멋진 협객의 풍모다. 그러나 라노벨 황제 폐하의 속마음을 읽어본 나로선, 이제 그가 건넨 [여어]라는 인삿말조차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슬프구나.
알고 싶지 않았다 진짜….
“다들 짜고 친 것처럼 클리어 선언을 하더구만. 야아. 세 사람이서 몰래 연합국이라도 만든 건 아니지?”
“글쎄. 연합국 따위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한 걸 만들긴 했어.”
“엉? 정말로? 뭐야, 뭔데?”
“비밀이란다.”
독사는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꼬치꼬치 캐물었지만, 흑룡주든 성기사든 만만하지 않았다. 우리 탑에서 [무표정 연기 대회]를 열면 우승 트로피를 두고 자웅을 겨룰 두 사람 아니던가.
결국 독사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아니, 빌어먹을. 뭐야! 너희 세 명 왜 이렇게 갑자기 친해졌어? 고고한 척하기로 유명한 녀석들이. 젠장. 소외감 느껴지네.”
"......."
한편, 검성은 굉장히 미묘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놀라움? 미안함? 회한?
감정이 복잡하게 섞여서 나조차 쉬이 읽기 어려웠다.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가 현현합니다.]
잡담이 이어지는 동안, 스테이지를 담당한 성좌가 슬그머니 나타났다. 공녀(公女)는 언제나처럼 막 낮잠에서 깬 듯 졸리운 얼굴이었다.
"전부 모였어? 빠진 사람 없구?”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모두 수고했어. 그럼 단도직입해서 말하면, 이번 스테이지엔 실패자가 없어. 퀘스트를 클리어하지 못한 아이가 없더라. 되도록 한 층마다 탈락자가 1명은 나와줘야 하는데….”
좀 곤란하네.
공녀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난 자잘한 거에 신경 쓰는 걸 싫어하지만 mula… 탑주(塔主)님은 양식미를 엄청 중요시해서. 미안한데 너희 중에서 제일 성적이 나쁜 사람을 골라서 탈락시킬게. 어디 보자. 사왕은 당연히 아니고……."
“잠깐.”
성기사가 왼손을 들었다.
“우리 중에서 반드시 한 명은 탈락해야 한다는 말인가?”
"응."
“이유를 말해다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 웬만하면 다 말해주고 싶지만… 여기서 나는 금제(禁制)가 걸려 있어. 으음. 본래는 보안등급 레벨6까지 마음대로 접근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기껏해봐야 레벨3까지밖에 언급할 수 없는 느낌이랄까?”
그때, 공녀의 눈동자가 내 얼굴로 향했다.
"사실 난 [이런 일]을 하고 있을 신분이 아니거든."
"......."
그렇다.
나는 공녀의 정체를 기억하고 있다.
‘성좌들보다 더 권위가 높은 존재.’
탑의 기둥柱.
나는 기둥들과 대면한 적이 있다. 아귀를 내 편으로 받아들일 적에. 그리고 [어느 회귀자의 사랑]이라는 스킬을 라비엘에게 얻어주었을 적에.
검제조차 모르는, 오직 나만 아는 비밀이다.
“30층 이후의 테마는 자각(自覺)이야.”
기둥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누구보다 탑에 애정이 많은 흑룡주가 즉시 반응했다.
“테마? 자각이라니?”
“자. 한 사람당 질문을 한 개만 받을게.”
공녀가 싱긋 웃었다.
“34층을 클리어한 보상이야. 너희는 특이한 아이들이니까, 종족 포인트보다 이런 쪽의 보상이 더 입맛에 맞지?”
동료 헌터들의 눈이 빛났다.
우리는 탑에 살고 있으나 정작 탑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어째서 세상에 불현듯 탑이 등장했는지.
왜 탑은 층마다 구조가 다른지.
수많은 헌터가 호기심에 목이 탔지만 정답을 알아낼 수 없었다. 대답을 들려줄 상대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상대가 우리 앞에 지금 나타났다.
“서열이 낮은 순서부터 질문해줘. 아! 서로 상의는 금지. 만일 대답해줄 수 없는 사안이라면 대답할 수 없다고 솔직하게 말해줄 테니 걱정하지 마. 그땐 다른 걸 질문해.”
"......."
침묵이 흘렀다.
우리는 눈빛을 교환했다. ‘서로 상의할 수 없다’는 조건이 입을 막았다. 성기사는 우리를 한 사람씩 쳐다본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탑의 존재의의는 무엇인가?”
“너무 광범위한 질문이야. 탑은 하나의 세상이야. 세상이 존재하는 의의를 질문하면 나는 굉장히 철학적이게 될 수밖에 없어. 응, 그걸 원해?”
“.....그건 아니다.”
“그럼 질문을 더 가다듬어줘.”
성기사는 골똘히 고민했다.
"......탑이 세워지는 방법을 알고 싶다. 우리 세상에는 탑이 있지. 그러나 탑이 없는 세상들도 있다. [천마실록]이 그러했고 [소르므윈 학원 이야기]가 그러했다. 어떻게 탑은 만들어지는가?”
“아-. 갑자기 핵심을 찌르고 들어오는구나. 말해도 되려나? 음. 말해도 될 거 같아.”
공녀가 하얀 바닥에 손을 뻗었다. 쑤욱. 지면이 두부처럼 갈라지더니 그곳에서 베개가 꺼내어졌다. 복숭아가 그려진 베개를 품안에 안은 채, 서서히, 공녀가 입술을 열었다.
“그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의 삶을 살면 돼.”
“뭐?"
“내 대답에 모호한 부분이 있어도 양해해줘. 말했다시피 보안등급이 내려간 상태라서. 하지만, 아무튼… 탑을 세운 주인이 있어. 그 주인은 각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의 인생을 대신해서 살아. 탑이 세워진 세상은 이미 주인이 살다가 지나간 곳. 탑이 세워지지 않은 세상은, 아직 주인이 들르지 않은 곳이야.”
"무슨......."
“다음.”
성기사가 무언가를 더 물어보려 했으나, 공녀는 단호히 시선을 거두었다.
그다음은 서열 6위의 헌터. 독사였다.
독사는 외눈을 찡그리고 있었다.
“제일 불행한 사람이라니. 그런 걸 정할 수 있나?”
“그러게. 어려운 일이야. 불행이란 건, 상대적인 면이 크지. 가끔 보면 누가 더 불행한지 알쏭달쏭한 후보들이 있어.”
공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여러 번 살아야겠네.”
"......."
"다음."
서열 5위인 백작과 서열 4위인 이단심문관은 탈락했다. 고로 다음 차례는 흑룡주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들을 들은 흑룡주는 날카롭게 공녀를 노려봤다.
“아까 말한 테마란 건 뭐니? 당신 같은 존재에게 탑은 놀이공원이고, 우리는 그 속에서 발버둥치는 구경거리에 불과해?”
“아하하!”
공녀가 빵 터졌다.
“으응,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훨씬 편해질 텐데. 일단 질문에 답부터 하자면, 전혀 아니야! 전혀! 테마란 건 단순히 시험의 출제 의도 비슷한 거야.”
“출제 의도?”
“응. 가령, 사람은 일생에 거쳐서 자기 자신을 키우잖아? 흔히들 자식을 기른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자식을 키우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키우는 것이기도 해. 나를 알아가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30층 이후의 테마는 자각. 그뿐이야.”
“우리한테 왜 그런 시험을……."
“다음.”
공녀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사왕은 뭘 질문할래?”
나는 눈앞의 작은 공녀를 바라보았다.
‘회귀하기 전엔 이런 존재가 없었어.’
정확히 말하면 등장하지 않았다.
회귀 전, 어느 공략기를 살펴봐도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라는 이름은 안 보였다. 언급조차 전무했던 것이다.
‘공녀가 나타난 건 하무스트라가 타천했기 때문이겠지.’
하무스트라는 제법 고위의 성좌였다고 했다.
그런 하무스트라가 타천했기 때문에, 공녀는 그 자리를 메우기 위해 내려온 것이리라.
‘그리고 하무스트라가 타천한 건 나 때문이니까… 공녀가 나타난 건 순전히 내 탓일 가능성이 높아.’
그렇다면.
나는 질문을 결정했다.
“왜 저한테 유독 호의를 가지고 있습니까?”
의아한 일이었다.
공녀는 자주 잔다. 일하는 걸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런 공녀가, 스스로 말했듯 [이런 일]을 하게 된 원흉은 나였다. 악감정을 가지면 가졌지 좋은 감정을 품을 이유가 없는데도, 공녀는 내게 호의를 가진 채 접하고 있었다.
“우웅.”
공녀는 난처해했다.
답하기 싫은 질문을 받아버린 분위기였다.
“...지금은 듣는 사람이 너무 많아. 조금 있다가 따로 대답해줄게.”
“네?"
“다음.”
“어, 잠시만---”
“다-음-!”
공녀는 강인하게 차례를 넘겼다.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음."
결국, 마지막으로 질문할 권리가 남은 검성이 턱을 쓰다듬었다.
“이 탑의 맨 꼭대기에는 무엇이 있는가?”
“아아, 당신들이 지금까지 겪어온 추억들이 아름다운 보물처럼 반짝반짝…. 미안. 농담이야. 아무튼 그 질문엔 대답해줄 수 없어. 그걸 대답하면 Mula-Gaga… Nail!”
공녀는 베개를 꽉 졸랐다.
“진짜! 아무튼 탑의 주인이 무진장 화낼 거야.”
“알겠네. 그럼, 자네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강한 검사가 누구인가?”
왜인지 배후령이 어깨를 빳빳하게 폈다.
반짝이도 부르르, 부르르 떨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어필했다. 이거 혹시 모르스 부호를 보내는 건가? ㄹ... ㅔ... ㅍ... ㅏ... ㄴ...ㅌ...
하지만 그런 둘에게는 무정하게도, 공녀는 전혀 다른 이의 이름을 내놓았다.
“절검공(絶劍公).”
즉답이었다.
“순전히 검사로서의 강함만 따지면 절검공을 따라갈 사람이 없어. Zaqu…. 아니, 너무 금제가 심한 거 아니야? 어휴. 아무튼 어느 왕국의 공작이고 [왕족을 제외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든 죽여도 처벌받지 않을 권리]를 가진 귀족이야. 달리 말해서 누구든 죽일 수 있을 만큼 강하다는 소리겠지?”
“그 자와 본인의 실력 격차는 어느 정도 되는가?”
“무의미해.”
공녀가 툭 말했다.
“실력 격차란 것도 어느 정도 수준이 맞아야 논할 수 있잖아.”
검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논할 가치조차 없다는 것인가?”
"응."
"......."
“자존심 상하지 마. 절검공은 시초공작(始初公舊). 이천 년 이상을 산 괴물이야. 아, 괴물이라 부르면 안 되는데…. 아무튼. 자연재해랑 비슷해. 직접 만나게 될 일은 아마도 없을 테니 안심해도 좋아.”
꾸욱.
검성이 주먹을 쥐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동료들도 살짝 충격을 받았다.
‘비교조차 불허하다니.’
바깥세상에서 모든 재산과 지위를 버리고 탑에 투신한 어르신이다. 오직 칼만 들고 실력을 갈고 닦았건만, 코앞에서 무시당한 것이다. 얼굴은 무표정해도 자존심에 상처가 난 게 분명했다.
“자아, 그럼 내가 사왕한테 대답을 들려주는 동안…. 다른 애들은 조금만 기다려줘.”
짝.
공녀가 작게 손뼉을 쳤다.
그러자 동료들이 빛에 휩싸여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디론가 전송된 것이다. 하얀 공간에는 어느새 공녀와 나밖에 남지 않았다.
"......."
공녀는 우물쭈물 내 눈치를 살폈다.
성좌를 뛰어넘어 기둥까지 차지한 양반이 나한테 왜 이러는가 모르겠다.
“아까부터 왜 그러세요?”
“으, 으으음… ”
공녀는 베개를 내려놓았다.
"미안!"
그리고 갑자기 허리를 굽혀서 베개에 자기 머리를 박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깜짝 놀랐다.
“지금 뭔……."
“정말로 미안해! 사왕!”
머리를 박은 자세 그대로 공녀가 소리쳤다.
“옛날에 염제한테 스킬을 준 기둥이 바로 나야!”
뭐?
공녀를 일으켜세우려던 내 몸이 굳어버렸다.
“그, 왜 염제가 가지고 있는 황금색 스킬 있잖아. 사왕 네가 가져온….”
설마.
“혹시 [회귀자의 태엽시계] 말하는 거예요?”
“응. 맞아. 그거…. 사실 내가 줬던 스킬이야……."
뭐라고?
“그러니까 네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불타죽은 거에는 내 책임도 아주 조금은 있어…. 아주 조금이지만, 아니. 음. 정말 미안해......."
미친.
“아니, 어쩌다가 그러신 건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