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 거울에 비친 거울. (1) >
1.
“우부르카….”
“이런 감정을 느껴보는 것은 생애 처음이다. 심장이 마구 뛴다.”
“그, 그러냐.”
나는 뭐라고 말할 수 없어서 입술을 달싹거렸다.
[성좌 ‘패륜을 꿈꾸는 근육돼지’가 사랑의 달콤함에 감탄합니다.]
난감하다.
‘이거 어쩌지?’
태어난 지 수백 년 만에 첫사랑을 느낀 아이를 축복해줘야 하나?
그렇지만 흑룡주는 나와 절친을 먹은 동료다. 흑룡주 모르게 마냥 아들만 응원해주는 것도 뭔가 양심이 찔린다.
“아무튼 사랑을 하게 되었다니 축하한다. 우리 아들. 원래 찐사랑을 하게 되면 사람이 바뀌어. 여러모로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니까…."
“흑룡주라고 했지.”
우부르카가 내 어깨를 텁, 잡았다.
무거웠다.
우부르카의 손바닥 하나가 내 머리통만큼 거대했다. 코앞에서 반짝거리는 눈빛을 보고 있자니 좀, 그, 많이 부담스러웠다.
우리 아이 눈깔 미인이었구나.
“그것이 본명인가?”
“아니…. 흑룡주는 본명으로 불리는 걸 싫어해. 흑룡주라는 것도 사실은 흑룡 길드의 주인이라는 뜻에 불과해. 본명이 뭔지 아는 사람은 아마도 다섯 손가락도 안 될걸….”
“오오. 과연!”
우부르카는 감탄했다.
“이름조차 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인가! 좋다. 오직 용감하고 유능한 자만이 그에 걸맞는 이와 함께할 자격을 얻는 법이다. 철두철미한 인품이 느껴진다.”
“어어……."
흑룡주는 딱히 자기한테 다가오는 사람의 용기를 시험해보는 성격은 아닌데….
어느 쪽인가 하면 도리어 정반대에 가깝다.
흑룡주는 세상에 거의 아무런 기대도 안 한다.
“좋아하는 꽃은 무엇인가?”
“어, 라벤더랑 알리움….”
“모르는 꽃이군. 좋아하는 음악은 무엇인가?”
“피아노 음악을 좋아하더라…. 흰 도화지에 음을 한 방울씩 떨어트리는 거 같은 선율이랄까…. 의외로 재즈도 즐기고.”
“고아하고 우아하군!”
“응. 멋진 분이지….”
그보다 이런 걸 알려줘도 되나.
심장이 쫄깃쫄깃한 것이 점점 더 양심의 가책이 심해진다.
하지만 우부르카는 내 마음 따윈 상관하지 않고 어깨를 더 강하게 쥐었다.
“취미는? 좋아하는 음식은? 평소에는 뭘 하면서 지내는가? 생일은?”
아들.
사랑에 눈이 멀더니 부모고 애비고 뵈는 게 없니.
나도 첫사랑에 빠져본 적이 있어서 이해는 한다만, 아빠 어깨가 좀 많이 아프네.
“취미는 로맨스 소설… 이놈아. 이런 건 네가 직접 알아내라!”
나는 우부르카의 손을 떨쳐냈다.
“애당초 왜 나한테 물어.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 정도야 눈빛만 봐도 알잖냐. 정 자신이 없으면 좋아할 법한 것들을 전부 준비해서 선물하든가.”
“우고르? 그런 것인가?”
“오냐. 그런데 흑룡주는 선이 선명한 사람이야. 네 감정을 이유 삼아 제멋대로 선 안으로 침범하진 마라. 되도록 정중하게. 허락을 구하듯이. 뭔 말인지 이해했느냐?”
“어려운 이야기다….”
“뭐가 어려운 이야기니?”
우리 둘은 깜짝 놀라서 굳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흑룡주가 돌아와 있었다.
흑룡주는 눈썹을 슬며시 찌푸린 채 이쪽을 쳐다봤다.
“뭘 그렇게 놀라? 꼭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몽마족을 상대하기 어렵겠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흐응…. 뭐, 좋아.”
흑룡주가 어깨를 으쓱였다. 다행히 우리를 의심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하긴. 홉고블린의 성좌가 자기한테 홀딱 반했다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거다.
“다른 마을도 잠깐 둘러보고 왔어.”
“어때요?”
“똑같아. 전부 잠들었더라. 하지만 성과가 없진 않았어.”
흑룡주는 검지 끝에 오러를 실었다. 사르르. 흑빛의 오러가 먹물처럼 허공에 그어졌다.
“촌장집에서 지도를 발견했단다. 다른 마을들도 뒤져봤는데 지도들이 대동소이했어. 마을끼리 신대륙의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다는 증거야. 개척자들의 경로도 이거로 추측할 수……."
흑룡주가 한없이 진지한 눈으로 지도를 그렸다.
반드시 수마(睡魔)에 잠긴 아이들을 구하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긴 머리가 흘러내린 흑룡주의 옆얼굴을 훔쳐보자, 우부르카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반할 만하지.’
아름다운 사람이다.
흑룡주는 좀처럼 자기 얘기를 안 한다. 가끔 옛날 이야기를 꺼낼 때도 있지만 그건 흑룡주 개인의 일이 아니다. [동료들과 함께 겪은 과거사]일 뿐.
마음에 고된 성벽을 두른 사람은 언제나 내 눈에 아름답다.
한 때 무언가를 지키려 했던 흔적이므로.
“……사왕. 내 얘기 듣고 있니?”
“그럼요. 열심히 듣고 있어요.”
나는 고개를 잘도 끄덕였다.
“선배. 문제는 우리 대륙이 침략당한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여기서 며칠만 더 지나면 잠에 빠져 쇠약해진 애들이 단체로 죽어나갈 거예요. 저희한테 남은 시간이 진짜 별로 없어요.”
길어봤자 일주일이 안 되겠지.
내 지적을 듣고 흑룡주는 표정이 딱딱해졌다.
“당신 말이 맞아…. 괜찮은 방법이 없을까?”
“몽마족은 현실이 아니라 꿈속에서 살아요. 그들을 설득하든 굴복시키든 아무튼 저희가 꿈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단.
"몽마족 한 사람 한 사람을 설득했다가는 끝이 없어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테고, 그동안 쇠약사하는 아이들이 속출할 겁니다. 종족 전체를 한꺼번에 설득하는 수밖에 없어요.”
“전체를 한꺼번에…? 무슨 수로 말이니?”
“저희가 일일이 찾아가는 대신, 몽마족들을 단체로 [초대]해야죠.”
나는 우부르카를 돌아봤다.
“제 작전은 이래요. 일단 최대한 많은 몽마족을 우부르카의 꿈속으로 끌어들입니다. 그리고 선배와 저도 우부르카의 꿈에 들어가서, 몽마족들과 담판을 짓는 거예요.”
“우거.”
왠지 몰라도 우부르카가 뺨을 붉히고 어깨를 좁혔다.
쉽게 말해 지렁이처럼 온몸을 비비 꼬았다.
“내 꿈속에 애비와 애비의 동료가 들어온다는 말인가? 그, 그건 좀 부끄럽군. 쉽게 보여줘서는 안 될 비밀을 활짝 열어버리는 기분이다."
"......."
뭐가 부끄러워?
이미 나한테 꿈속 특훈을 실컷 받아봤으면서.
이 아비는 너의 내숭이 심히 부끄럽구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래도 몰살은 막아야지 않겠니. 우부르카야. 여기서는 우리 아들이 단호한 결단을 내려주면 좋겠는데.”
우부르카는 흑룡주의 안색을 살폈다.
“알겠다. 우고르. 대의를 위해 기꺼이 나의 정신을 내어주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무고한 자들의 희생을 막는 것이니 말이다!”
맙소사.
어딜 봐도 너무 뻔한 멘트였다.
흑룡주한테 잘 보이고 싶다는 마음이 엿보이다 못해 직사광선으로 내리쬐어서, 나는 그만 눈을 질끈 감고 저 아이가 내 아들이란 사실을 외면하고 싶었다.
"......?"
안타깝지만 흑룡주는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머리를 한 번 갸웃거리고는 바로 본론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래, 사왕. 당신의 제안이 제일 빠른 해결책일 거 같네. 몽마족은 어떻게 초대할 계획이니?”
“아. 일단 몇 명한테 [꿈에 등장] 아이템을 써서 들어갈 거예요. 만나는 몽마족마다 쥐어패면 걔네들한테도 제 소문이 바로 퍼지겠죠. 불만이 있으면 우부르카의 꿈으로 오라고 말할 작정입니다.”
“응. 알겠어.”
흑룡주가 입꼬리를 올렸다.
“믿음직스럽네. 이번 스테이지에서 당신이랑 같이 움직이길 잘했어.”
“에이. 뭘요. 이 정도야 언제나---.”
그때였다.
흑룡주와 마주 웃으려는 순간, 어마어마하게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
우부르카가 맹렬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눈빛이라고 표현하기엔 너무 강했으며, 눈알이라는 표현조차 약해서, 그나마 ‘눈깔’이라 불러야 어울릴 듯한 안광이었다.
한마디로 우부르카는 일생일대의 원수를 보는 것처럼 나를 봤다.
[성좌 ‘패륜을 꿈꾸는 근육돼지’가 당신을 눈엣가시로 여깁니다.]
뭐?
[성좌 ‘패륜을 꿈꾸는 근육돼지’는 당신이 연적(惑敵)이 아닌가 의심합니다.]
아니.
야.
야! 미친놈아!
'이 애비는 흑룡주랑 친구야! 절친!’
나는 우부르카의 팔뚝에 몰래 글씨를 썼다.
우부르카가 입술을 삐죽였다.
‘애비도 수컷 아닌가. 의심스럽다.’
'이 애비한테는 이미 임자가 있어요! 와. 큰일날 소리를 지껄이네.’
‘애비의 세계가 다처다부제면 어쩌는가?’
기분 나쁘다!
내 아들이지만 지금은 무지 짜증난다…!
‘닥쳐!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마! 불경죄로 모가지를 잘라버릴 테다.’
‘아니면 아닌 거지 왜 이렇게 부정하나. 부정이 강하니 더 수상쩍다. 진심으로 관심 있는 거 아니냐?’
‘흑룡주랑 나는 함께 생과 사를 나눈 동료다! 친구고! 우정을 느끼니까 당연히 서로 미소 정도는 지을 수 있지!’
‘뭐라? 생과 사를 나누었다고? 우거.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함께하고 싶다는 얘기 아닌가. 애비가 문란한 인간일 줄은 미처 몰랐다. 실망이 크다.’
‘얘 골 때리네!?’
부자가 나란히 지랄하는 광경을 흑룡주는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지켜봤다.
“……당신들 아까부터 뭐하는 거니?”
“잠시 애비가 나한테 힘내라고 응원해주었다. 우고르.”
우부르카가 짐짓 호쾌한 미소를 지었다.
“하여간 애비는 쓸데없이 걱정이 너무 많아서 탈이다. 이래 봬도 나는 지정족 역사 천 년을 통틀어 최강으로 군림했다. 팔불출이 심한 것이다.”
“어라.”
흑룡주는 관심을 표했다.
"두 사람이 있을 땐 그러니?”
"그렇다 마다. 그대는 모르겠지만 애비도 알고 보면 잔소리꾼이다. 개인적으로 같이 있으면 매우 시끄럽다.”
“헤에.”
우부르카는 처음으로 흑룡주와 환담을 이어나갔다.
문득, 우부르카가 눈웃음을 지으며 나를 힐끗 봤다.
[성좌 ‘패륜을 꿈꾸는 근육돼지’가 당신을 견제합니다.]
이 놈?
“새벽 훈련은 했느냐, 오러 운용법은 가다듬었느냐, 마천신공은 더 깊이 이해했느냐. 일에서 열까지 간섭하지 않는 게 없다. 적당히 거리를 두면 좋은 애비건만. 가까이 지낼수록 피곤해진다.”
이 자식?
“아들한테서 슬슬 독립해주었으면 한다. 언제까지고 내가 애비를 챙겨줄 순 없지 않은가? 애정결핍이 심해서 툭하면 곁에 있는 사람한테 들러붙으니 귀찮다. 아까도 봤지 않는가. 팔뚝에다 글씨를 새겨서 암구호를 나누고… 솔직히 징그럽다.”
이 새끼가?
‘배은망덕한 것 같으니!’
나는 부들부들 떨었다.
부자의 정 따윈 연정 앞에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구나!
이래서 아들내미 키워봤자 후회막심이란 소리가 있는 건가.
“아하.”
흑룡주가 손등으로 입가를 가린 채 키득거렸다.
“정말로 사이가 좋구나. 두 사람.”
그녀의 눈에는 따스한 빛이 듬뿍 담겨 있었다.
호감이 아니라 호의였다.
“웃으면서 투덜거린다는 건 그만큼 서로 터놓고 지낸다는 얘기인걸. 처음에 고블린을 기르겠다고 선언했을 때는 쟤가 어쩌려고 저러나 싶었는데, 역시 괜한 걱정이었어. 사왕. 당신은 아이들한테 좋은 친구가 되어줄 거야.”
심지어 그 호의가 향한 쪽은 우부르카가 아니라 나였다.
“어… 네, 감사합니다….”
“뭘. 나도 칭찬할 때는 칭찬해.”
흑룡주와 나 사이에 훈훈한 기운이 감돌았다.
"......."
우부르카의 안면이 썩었다.
[성좌 ‘패륜을 꿈꾸는 성좌'가 당신을 깊이 원망합니다!]
돌겠네.
흑룡주는 나와 라비엘의 로맨스를 실시간 영상으로 지켜봤으며, 이 세상에서 나만큼 무해한 남자가 없다는 사실을 안다. 내게는 오직 라비엘뿐. 아무리 가까이 지내도 사랑이니 뭐니 연애감정이 피어날 리 없다는 걸 확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터놓고 지낼 뿐인데, 이 아들놈은!’
어쩌겠나.
애비가 되어서 아들의 연애사업을 방해할 순 없는 노릇이다.
나는 가슴속이 터지려는 걸 꾹꾹 참으며 슬그머니 일어섰다.
“저… 몽마족들 협박하고 올게요. 흑룡주는 우부르카랑 같이 여기서 기다려주십쇼….”
“어머? 괜찮겠어? [꿈에 등장]도 하나에 100포인트나 잡아먹잖니.”
“괜찮아요. 포인트야 나중에 또 벌면 되죠….”
“내가 후배 하나는 잘 뒀어. 정말.”
흑룡주는 싱긋 웃으면서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나는 잠든 아이들의 영양실조를 해결할 방법이 없나 찾아보고 있을게. 얼른 다녀오렴, 사왕.”
툭툭.
내 어깨를 두들겨준 흑룡주의 손길엔 우정이 넘쳤다.
우정도 엄연히 정(情)인 만큼, 그 손짓을 다정하다 부르지 못할 것도 없었다.
"......."
나는 슬쩍 우부르카의 얼굴을 쳐다봤다.
[성좌 ‘패륜을 꿈꾸는 근육돼지’가 당신을 명확히 적으로 인식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우부르카는 온몸에서 핏빛 오러를 뿜어내며 날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착각한 게 아니라면… 저건 살의였다.
[성좌 ‘패륜을 꿈꾸는 근육돼지’가 패륜을 결심합니다!]
이 자식 닉값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