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 흑룡(黑龍). (1) >
1.
우리는 몽환세계(夢幻世界)의 한복판으로 향했다.
-아하하! 어서 이 황후를 받들어 모시세요!
등 뒤에선 여전히 금사매를 따라한 서큐버스가 채찍질을 휘둘렀지만, 애써 무시하고 지나쳤다. 저런 거에 관련되고 싶은 사람은 우리 일행 중에 없었다.
한동안 걸어가니 기기묘묘한 풍광이 우리를 반겼다.
일단 머리 위에 드리운 하늘부터 심상찮았다.
“달에…… 눈이 달렸사옵니다. 주군.”
“그러게.”
깜빡.
달이 눈꺼풀을 감았다가 떴다. 아귀가 말한 대로, 보름달에 눈이 달려 있었다. 달의 눈동자는 붉었다. 빨간 달이 깜빡깜빡거리면서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약간 기괴하긴 한데 눈동자는 참 예쁘구나. 자꾸 올려보고 싶어져.”
왠지 모르지만 심장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그런 내 반응에 아귀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 음. 제가 생각하기로 저건 주군의 무의식에 영향을 받은 듯합니다. 아마도 사모님의 눈동자를 모사한 것 아니올련지….”
“어라? 그런가?”
다시 보니 라비엘의 것 같다.
눈동자만으로 내 심장을 훔치다니. 역시 우리 공작님. 머리부터 발끝까지 매혹적이지 않으신 곳이 한 터럭도 없다.
그다음에 도착한 장소는 아귀한테서 비롯했다.
"음."
붉은 목월(目月) 아래, 누런 밀밭이 이어졌다.
나락과 나락 사이로 농부들이 허리를 굽혀 일했다.
"......."
아귀의 낯빛이 눈에 띄게 딱딱해졌다.
나는 저곳이 어디를 모사했는지 곧바로 알아봤다.
“에스델의 마을이군.”
“……예. 그러하옵니다.”
아이김 제국과 연합군에 의해 초토화된 그 마을이었다.
언젠가 아귀의 트라우마에서 본 어린애들이 밀밭을 뛰놀고 있었다.
-정령님! 정령님!
누렇게 익은 밀알에 무언가가 누워 있었다.
거대한 짐승.
푸르른 털색을 가진 이리가 게슴츠레한 눈을 뜨고, 자신한테 다가오는 어린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여기 선물이에요!
-제일 예쁜 것만 골라서 만들었어요!
마을 꼬마들이 이리에게 꽃다발을 걸어주었다.
다만 이리의 머리가 너무 커서 꽃다발이 안 들어갔다. 아이들은 약간 당황하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식으로 이리의 귀에다 다발을 걸었다. 졸지에 이리에겐 꽃귀걸이가 생겼다.
-그르릉.
이리는 만족스러운지 어린아이들을 등에 태웠다.
바람이 불어 밀밭을 쓰다듬었고, 아이들의 웃음이 너울거렸다.
바람에 실린 웃음소리를 행복이라 이름 불렀다.
“저 짐승은……."
“저의 몽상이로군요.”
아귀가 중얼거렸다.
“제가 에스델을 잡아먹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인간이 되지 않고 계속해서 짐승으로 남았다면…… 하는 가능성입니다. 그럼 제가 에스델이 되어 성녀로 추앙받을 일도 없었을 테고, 마녀로 지탄받을 일도 없었겠지요. 마을이 불에 타 사라질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귀의 어조는 담담했다.
“미련하긴.”
그녀는 조용히 칼자루를 쥐었다.
“인간을 삼키지 않았다면 인간의 마음을 짐작하지도 못했을 터. 저는 오직 먹잇감으로 소화한 것만을, 소화한 다음에야 이해하는 족속입니다. 에스델을 먹지 않았더라면 저리 인간들과 함께 있고 싶다는 소망조차 품지 못했을 것이옵니다. 저곳에 펼쳐진 풍경은 모순 투성이의 소망이군요.”
아귀는 밀밭에 다가갔다.
아이를 태운 이리가 멈추었다.
고요한 대치.
도플갱어는 차가운 눈으로 자신의 모사품을 올려보았다.
“단(斷).”
그리고 검을 빼내어 이리를 일도양단했다.
아귀의 칼에 베이자마자, 이리는 핑크색 물감이 되어 녹아내렸다.
이리의 등에 타서 웃고 있던 아이들도. 밀밭에서 일하던 농부들도. 그들이 사는 마을도, 모조리 순식간에 녹아서 사라졌다.
“……후우.”
남은 것은 붉은 달 아래의 아귀뿐.
아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날 쳐다봤다.
“마저 가시지요. 주군.”
“……단호하구나. 그래도 너의 행복이 그려진 광경일 텐데.”
“외람된 말씀이오나, 모순된 망상에 내던질 만큼 가벼운 삶을 살지는 않았습니다. 제 뇌리에 에스델의 피를 마시고 아이의 살점을 집어삼킨 기억이 선명하건만, 어찌 꿈에서나마 없던 일로 만들겠나이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우리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여로에서 우리는 교인들의 꿈과 우부르카의 꿈을 마주쳤다. 몽환세계의 우부르카는 나를 깔아뭉갠 채 우고르! 우고르! 파안대소하고 있었다. 우부르카도 몽마족들과 접촉하고 있기 때문에 무의식이 반영된 것 같았다.
“아직 이 세계의 핵은 멀었나?”
“아니요. 거의 다 왔사옵니다.”
아귀가 우부르카를 걷어차며 저편을 가리켰다.
“저기서 성좌에 버금가는 존재감이 느껴집니다.”
그곳에는 오래된 철조망이 있었다.
너저분하게 세워진 철책 앞에, 몽마가 앉아 있었다.
몽마는 우리가 다가서자 “헤에”, 머리를 갸웃거렸다.
-정말로 이곳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구나. 신기한걸.
서큐버스는 익숙한 얼굴을 취하고 있었다.
내가 아는 모습보다 훨씬 더 작고 여렸지만, 나는 그녀가 누구를 본딴 것인지 깨달았다.
“흑룡주?”
-응. 당신이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지. 이 인간은.
일곱 살 아니면 여덟 살 정도 되려나.
지금보다 한참 어린 시절의 흑룡주가 읏차, 몸을 일으켰다.
-우리에겐 타고난 얼굴이 없어서. 어떤 식으로든 다른 짐승의 형체를 빌려야 대화를 할 수 있거든. 당신이 소중하게 여기면서도 당신과 냉정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이 아이 정도밖에 없더라.
“무슨 말이야?”
-감정에 쉽게 휘말리지 않는다는 얘기야. 간단하지.
몽마는 내 어깨 너머를 힐끗 봤다.
유수하와 아귀, 금사매, 사마군, 교인들이 나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손님은 많은데 대접할 찻상이 하나도 없네. 미안. 하지만 우리 사정도 이해해주렴. 노략질로 빌어먹을 것도 없는 이 누추한 장소에 뭐 이래 군졸을 잔뜩 데리고 왔니?
“노략질에 끼어든 건 우리가 아니라 너희지. 안 그래? 바다를 건너서 침략하고 있잖냐.”
-피냄새에 들짐승이 꼬이는 건 자연의 당연한 이치란다.
“그렇게 따지면 강자가 약자를 쥐어패는 것도 자연의 섭리이니, 잠자코 내 말에 따라주면 좋겠다.”
-무서워라.
“더 무섭게 해줄까?”
뚜벅.
나는 일행들을 뒤로 한 채 몽마한테 다가갔다.
“아무래도 여기선 물리력이 잘 통하지 않아서 우리를 우습게 여기나 본데….”
-흐응. 만약 그렇다면?
“이대로 대화가 안 통하면 나 나름대로 초강수를 둘 수밖에 없어.”
-흥미로운걸.
어린 서큐버스는 미소를 지었다.
-어떤 수인지 부디 알려주면 고맙겠어.
“내게는 사자소생(死者蘇生)의 스킬이 있다. 너희를 전부 죽이고 되살려주마.”
나는 [백귀환생] 카드를 소환했다.
황금빛 카드가 손안에서 반짝거렸다.
“나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존재는 소생한 뒤부터 내 명령에 복종한다. 너희 몽마족을 내 수중에 복속시키는 건 일도 아니야.”
-.......
“허세라고 생각하냐?”
나는 코앞에서 서큐버스의 눈을 들여다봤다.
이미 한 번 [불멸하는 행복 전도사]를 쓸어버린 적 있었다.
똑같은 짓을 두 번 못할 이유는, 적어도 내겐 없었다.
몽마족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실종되었다.
-……아니. 당신의 진심을 의심하진 않아. 사왕, 당신은 무서운 사람이니까.
내 눈동자를 바라보던 서큐버스가 고개를 저었다.
-단지 안타깝다고 느낄 뿐이란다.
“안타까워? 뭐가?”
-정확히는 우리가 아니라 이 몸의 원본이 되는 짐승이 느끼는 감정이지. 결국에 당신이 우리를 설득하는 방법도 힘의 논리잖아.
그때였다.
철책 저편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주군!”
“소교주!”
아귀와 사마군이 순간적으로 내 주변을 둘러쌌다. 그러나 내게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아귀나 사마군이 다친 것 같지도 않았다.
우리의 행태를 보고 서큐버스가 키득거렸다.
-걱정 마. 너희가 말하는 방식에 따르면, 이것도 몽상이야.
철책과 철조망 너머에선 여전히 총소리가 울렸다.
총성이 들린 방향을 보니, 작은 아이를 껴안은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쫓기듯이.
-단 한 순간의 경험이 얼마나 너희에게 깊은 자국을 남기는지. 알면 알수록 놀라워.
남자는 끝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이에겐 절대로 등 뒤를 보게 하지 않을 셈인지, 아이의 몸을 가렸다.
턱수염이 더부룩하게 난 남자가 아이에게 속삭였다.
-절대로 보지 마렴. 알겠니?
-응.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 깨달았다.
저것은 흑룡주의 유년 시절이었다.
오래도록 씻지 못했는지 남자도 아이도 옷차림에 때가 묻었다. 흙탕물이 바짓자락에 묻혀 굳어버렸다. 무거워진 발길을 이끌어, 남자와 아이는 도망치고 있었다.
「일곱 살 때야.」
나는 옛날에 흑룡주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바깥세상에 있을 때 내전으로 아버지께서 돌아가셨거든.」
철책에는 좁디좁은 문이 한 군데 나 있었다.
그 문으로 남자는 아이를 먼저 우겨넣었다.
총성이 점점 더 가까이 엄습해왔다.
「부모랑 같이 도망치는데, 아마도 군인들이 쫓아왔던 거 같아. 아버지께서 뒤에 남으셨고.」
철문에 끼어서 아이가 비명을 질렀다.
-아빠! 아빠…….
-절대 뒤를 보지 마! 먼저 가! 아빠가 따라갈게!
남자는 억지로 아이를 밀어서 철책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아이는 계속 비명을 지르면서, 그러나 아비가 한 말에 따라 발을 움직였다.
「나는 정말로 뒤를 돌아보지 않고 뛰었어.」
이후로 남자의 모습은 흑룡주의 기억에 포착되지 않았다.
다만 마지막에, 어린 흑룡주의 뒤에서, 퍽! 하고 무언가가 떨어지는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끝으로 철책의 광경은 이어지지 않았다.
"......."
나는 소리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남자는 아이를 보낸 뒤, 철책을 넘으려고 시도했을 것이다.
나무를 타듯 울타리에 올랐겠지.
그러다 흉탄에 맞아서 즉사하여, 땅바닥에 떨어졌다.
흑룡주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소리엔 아마도 그런 내막이 있을 거다.
-아무리 강해도 되돌이킬 수 없는 일을 돌이킬 순 없지.
서큐버스가 덤덤히 말했다.
-그러니, 미연에 사태를 방지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야. 끝없이 준비하고 대비해야 돼. 이 몸의 원본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구나.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 사람의 죽음부터 상상하는 습성이 있어. 가련하게도.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
-어라. 그럼 이 원본이 너에 대한 납치 시도와 암살 시도를 지금까지 8번 방지했다는 것도 알고 있을까?
“……뭐?”
나는 놀라서 몽마를 돌아봤다.
-당신은 급속도로 성장했어. 거기에 질 나쁜 관심을 가지는 세력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지. 원본이 최대한 박살내고 말살했지만, 여전히 탑에는 바깥세상에서 보낸 각국의 스파이가 남아 있거든.
"......."
-힘이 없으면 곁에 있는 사람의 목숨조차 지키지 못해.
와르르.
몽환세계의 하늘에 떠오른 달이 쪼개어졌다.
붉은 달이 조각조각 나면서 지평선으로 낙하했다.
-사왕. 당신은 힘을 가진 사람이니까, 일단 고개를 숙이겠어. 바다 너머로 출항시킨 동족들에겐 귀환을 명령할게. 하지만 당신이라고 영원히 대륙에 머무르면서 일곱 종족을 보살펴줄 순 없겠지?
대지가 물렁물렁해지더니 핑크색 바다로 바뀌었다.
풍덩, 풍덩-.
조각나서 낙하한 달의 조각들이 분홍 바닷물에 빠졌다.
-당신은 우리를 일시적으로 제압했을 뿐. 진심으로 설복시키진 못했어. 힘에 의한 강제란 건 결국에 그런 법이니까.
달이 떨어진 바다에서 해일이 일어났다.
하늘까지 치솟은 바닷물이 우리를 덮치려던 순간, 서큐버스의 형체도 녹아내렸다.
-다음에 보자. 사왕.
그리고 몽환세계는 무너져 내렸다.
2.
"---사왕? 괜찮아, 후배?”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흑룡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선배?”
"다행이야. 눈빛이 돌아왔구나.”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루브카의 꿈속에서 펼쳐쳤던 밀림의 풍경이 아니었다.
항구 마을의 광장에 내 몸이 누워 있었다.
“몽마족들은……."
“당신이 뿔사슴과 대화한 직후에 갑자기 꿈에서 튕겨져 나왔어. 어떻게 된 거니? 설득에 성공했어, 실패했어?”
“일단은 성공했어요.”
내 말을 입증하듯 광장에 누워 있던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오래동안 꿈을 꾼 탓인지 몸동작이 금떴지만,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어 보였다.
“하아아….”
흑룡주가 깊이 한숨을 쉬었다.
비로소 안심했다는 표정이었다.
“잘 했어. 어떻게 된 일인지는 조금 있다가 들어도 상관없으니까….”
“선배.”
나는 흑룡주의 손목을 잡았다.
흑룡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나를 돌아봤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뭔데 갑자기 진지한 얼굴이야?”
“진지한 말이라서요.”
기묘한 정적이 우리 둘 사이에 흘렀다.
나는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흑룡주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선배. 저는, 회귀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