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207화 (207/400)

207화.  < 이스터 에그. (3) >

4.

‘당신과 얘기를 나누고 싶다’라고 말하자, 탑주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일 분이 지났을까.

탑주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안내했다.

“알겠어요. 저를 따라오세요.”

나는 탑주의 말에 따라 걸었다.

“이쪽으로.”

쇠락한 골목.

오래된 기와집들이 골목길을 따라 쭉 이어졌다.

한옥마을처럼 깔끔한 분위기가 아니다.

기와는 낡아서 잡초에 좀먹혔다. 이미 옛날에 헐린 돌담이 한 번도 수리를 받지 못해, 무너진 자세 그대로 시간의 중력을 견뎠다.

‘무슨 한옥들이 저러지?’

위화감을 느끼고 물어보려는 순간이었다.

“일제시대 때 지어져서 전해지는 저택들이에요.”

뚜벅.

탑주가 앞서 걸어가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이 도시는 거의 순식간에 밀렸어요. 그 때문에, 다른 곳들보다 과거의 흔적이 온전히 남아 있어요.”

“전쟁이라뇨?”

“6.25요.”

하수구에서 여름이 썩는 냄새가 났다.

“죽을 시기를 놓친 집들이지요.”

"......."

족보만 길죽한 주인들을 둔 기와집의 행렬이, 우리를 쳐다보았다.

고풍스럽다기보다 검버섯에 뒤덮인 얼굴과 같은 광경.

우리는 종기처럼 솟아난 돌담길을 걸었고, 옻칠이 벗겨진 대문을 열어, 잡초조차 자라지 않는 마당을 지났다.

“여기서 잠시 기다려주세요.”

대청마루에 앉아서 기다렸다.

에어컨은 물론이고 선풍기조차 없어, 머리를 식힐 곳은 처마의 그늘뿐.

메에, 메엠, 메에매에… 에……

직사광선 아래에서 참매미가 울었다.

잠시 뒤 탑주는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손님에게 대접해드릴 것은 없어요.”

“아뇨, 저야말로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나는 두 손으로 공손히 컵을 받았다.

학교식당에서 쓸 법한 스텐컵엔 물이 담겨 있었다.

“아마도 처음 뵙는 것이겠지요.”

탑주가 정좌하고 고개를 숙였다.

“저는 신서중학교 3학년 A반, 자수정이에요.”

“아."

그러고 보니 자기소개도 안 했네.

“저는 김공자라고 합니다.”

“예, 김공자 씨. 저와 무슨 일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인가요?”

"......."

어떻게 말해야 할까.

당신이 탑의 주인 같은데 왜 여기 있는지 궁금하다?

어쩌다 탑을 만들게 되었는지 말해주면 좋겠다?

하지만.

“저기."

내 입에서 흘러나온 질문은 전혀 종류가 달랐다.

“성함이 자수정이라고 말하셨는데….”

“예."

“뜻이 어떻게 되는지 여쭤도 될까요?”

“중원 자 씨를 써요.”

탑주는 서류가방에서 공책을 꺼냈다.

자수정(慈水晶).

날카롭게 깍인 연필이 백지에 까만 수를 놓았다.

‘이게 탑주의 이름이구나.’

어쩌면 이 세계에서만 통용되는 이름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우리 탑에서 최초로 탑주의 이름을 본 것이다.

‘자수정.’

입안에서 발음을 되새겼다.

절대로 잊어버리지 말자.

"여기에 다른 가족분들은 안 계십니까?”

"예. 작년까지는 삼촌과 같이 살았지만, 지금은 저 혼자 살고 있어요.”

"실례지만 어쩌다가….”

"괴한이 침입해서 삼촌을 살해했어요. 당시 삼촌과 같이 있던 남자 세 명도 함께 살해당했지요. 아직 수사가 종결되지 않은 사건이라, 많은 것을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탑주의 말에선 감정이 한 톨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그녀는 쭉 무표정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혹시 [탑]에 대해서 아십니까?”

"어떤 탑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바벨탑이요. 어느 날 갑자기 저희 세계에 나타나서, 거기로 가고 싶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약간의 절차를 거치고 들어갈 수 있죠. 들어가면 신천지가 펼쳐지는데…. 음.”

말하는 도중에 좀 부끄러워졌다.

이거 완전히 사이비 종교인 같잖아.

나는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모르십니까?"

탑주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예. 몰라요.”

“[기둥]이라는 말은 어떤가요? [헌터]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추측하건대, 김공자 씨께서 지금 말씀하신 단어는 통상의 의미와 다른 뜻을 가지고 있겠지요. 저는 기둥과 헌터라는 단어를 일반명사로 이해할 따름이에요.”

“……그러시군요.”

뭐랄까.

대화가 이어질수록 위화감이 진해졌다.

‘탑주로서의 기억이 하나도 없구나.’

눈앞의 소녀는 정말로 탑을 모른다.

‘목소리만 똑같지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

기억을 잃어버린 신.

어떤 내막과 사정이 숨어 있는지 몰라도, 내 앞에 앉은 아이에겐 탑주의 권능이 없고 기억조차 없다.

단지 자신에게 배정된 인생을 묵묵히 살고 있다.

"......."

지금의 그녀한테 탑에 관해 캐물어봤자 소득이 없겠지.

나는 호기심의 방향을 돌렸다.

“아까부터 묻는 말에 전부 대답해주시고 계신데 그래도 괜찮습니까? 괴한이 침입한 적까지 있다면서요. 음. 제가 만약 자수정 씨한테 악의를 품은 범죄자면 어쩔려고요.”

“괜찮아요.”

탑주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김공자 씨가 범죄자였다면, 아까 사거리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접촉을 꾀했을 테니까요.”

“네?"

“저는 하교하면서 지하도를 2번 건너요. 그중 한 곳은 인적이 없어요. 조명이 고장나서 어둡고, 군데군데 움푹 파인 공간이 있지요. 범죄를 계획한 사람은 지하도에서 저를 습격하거나 미리 잠복해 있다가 공격할 것이에요.”

탑주는 정좌한 채 말했다.

“김공자 씨의 얼굴을 보았을 때 우발적인 범죄를 저지를 기색은 없었어요. 김공자 씨의 시선은 줄곧 제 얼굴에 머물렀어요. 특히 눈을 마주쳤지요. 제가 도망칠까 염려했다면 하반신을, 제가 반항할 것을 예상했다면 손을, 저 자신을 노렸다면 제 몸을 주로 보았을 텐데, 김 공자 씨는 오직 저의 얼굴만을 관찰했어요. 그건 자신이 아는 누군가를 찾으려 하는 사람이 곧잘 보이는 행태예요.”

“어……."

“방금도 김공자 씨가 주목한 부분은 저의 이름이지요. 저의 개인정보를 궁금해하고 있다는 증거예요. 제가 물을 뜨기 위해 자리를 비웠을 때도, 김공자 씨는 집안의 내부를 상세히 둘러보지 않았어요. 범죄자라면 혹시 집안에 제3자 있는지,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천천히 살펴야 마땅하지만요.”

탑주는 양손으로 스텐컵을 들었다.

한 모금 물이 탑주의 입을 적셨다.

"김공자 씨의 모든 행동은 범죄자와 들어맞지 않아요. 따라서 저는 김공자 씨가 제게 악의를 품은 범죄자가 아니라고 판단해요.”

"......."

"그러니 김공자 씨의 질문에 대답하자면, 예. 저는 괜찮아요.”

메에에에에-

대청마루에 매미소리가 울렸다.

나는 멍하게 여름이 늘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헛!’

정신을 퍼득 차렸다.

“괴, 굉장히 말을 잘하시네요. 똑똑하시고요.”

“예."

탑주가 덤덤히 긍정했다.

“저는 똑똑해요.”

"......."

나는 깨달았다.

설령 기억을 잃었을지라도 눈앞에 있는 여자아이는 보통이 아니다.

“그, 죄송한데 잠깐 화장실 다녀와도 괜찮을까요…?”

“집 뒤편으로 돌아서 가면 있어요. 다녀올 때 조심하세요.”

나는 푸세식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왜 탑주가 [조심히 다녀오세요]가 아니라 [다녀올 때 조심하세요]라고 말했는지, 뒤늦게 알았다.

화장실을 나왔을 때였다.

"응?"

뒤뜰 한켠에 지어진 창고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 인기척이 움직이는 기색은 없었다.

다만 가만히 창고 너머에서 웅크릴 뿐.

"......."

뭐야?

무더운 여름인데도 목덜미가 쭈뼛거렸다.

낡은 창고문을 쳐다보자 인기척은 말없이, 마치 내 시선을 정면으로 맞받아 치려는 듯, 가만히 있었다.

‘진짜 뭔데?’

가까이 다가가봤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인기척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차가운 손길이 목덜미를 더듬는 듯한 느낌이, 뚜렷해졌다.

‘야. 아니, 너 뭐나고?’

혹시나 몰라서 오러를 쏴봤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인기척은 줄어들긴커녕 점점 더 가까워졌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시발?’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조심스럽게 창고의 문고리를 쥔 순간.

“안 돼요.”

뒤에서 무언가가 내 옷자락을 잡았다.

“들어가지 마세요.”

고개를 돌려보니 탑주가 나를 무표정하게 올려보고 있었다.

언제 여기에 온 것인가.

“네……?"

“김공자 씨가 들어가면 [아이들]이 놀라요.”

아이들.

“어, 아이들이라면… 어떤 아이들입니까…?”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탑주는 창고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고 나서 인기척이 급격히 부풀어 올랐다.

여태까진 기껏해야 목덜미를 쓰다듬는 느낌이었지만, 이제는 아예 손톱을 세워서 긁는 감각으로 변했다.

"......."

"미안해요. 손님이 찾아왔어요."

창고 안에는 커튼 뭉치가 널려 있었다.

탑주가 커튼자락을 넘기자, 거기에는 그저 하나의 전신 거울만이.

거울이 드러난 것과 동시에 인기척도 씻은 듯 사라졌다.

“얌전히 있으세요.”

탑주는 근처에 놓인 수건을 들어서 거울의 표면을 닦아주었다.

나는 뒤에 덩그러니 남겨진 채 탑주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 그 거울. 뭔가 이상하거나 그렇진 않습니까?”

"예. 이상한 아이예요.”

"사람들한테 해를 끼칠 것 같은데….”

"이 아이는 이제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요.”

탑주가 걸레를 거두고 거울에 다시 커튼을 덮었다.

여전히 인기척은 느껴졌지만 아까만큼 사납진 않았다.

꼭 얌전히 웅크린 느낌이었다.

"앞으로는 해를 끼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니까요.”

"......."

냐옹.

발 밑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강아지 인형]이 발등에 올라와 있었다.

"......."

냐아.

입도 없고 성대도 없을 강아지 인형에서, 틀림없이, 분명히, 고양이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이건?’’

“냐옹이예요.”

강아지 인형한테 붙이면 안 되는 이름이었다.

“절대로 귀엽다고 머리를 쓰다듬으면 안 돼요.”

“쓰다듬으면 어떻게 됩니까?”

“다음 주인을 찾을 때까지 김공자 씨의 머릿속에 6초 간격으로 계속 냐옹 소리를 낼 거예요.”

“……진짜로요?”

“예."

“미친.”

“지금은 강아지 인형에 안치시켜서 얌전해요. 자신이 고양이인지 강아지인지 고민하느라, 주인을 찾는 걸 뒷전으로 미뤄두고 있거든요.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기 전에 자신의 정체성부터 고민하는 아이예요. 성실하지요.”

“이, 이거도 충분히 위험한 거 같습니다만?”

“괜찮아요. 정체성을 확립하면 그다음엔 다람쥐 인형으로 이동시킬 예정이에요.”

“네에……?”

“그러면 다시 자신이 다람쥐인지 아닌지 1년 정도 고민하게 되거든요. 10개월에서 13개월 사이마다 몸을 바꿔주기만 하면 안전해요. 자, 냐옹이 씨. 손님한테 폐를 끼치면 안 돼요. 이리로 오세요.”

탑주는 강아지 인형의 목덜미를 잡아들었다.

냐오옹.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인형이 선반에 올려졌다.

“세상에.”

나는 넋을 잃고 창고 안을 둘러보았다.

선반에 뭔지 모를 물건들이 수없이 진열되어 있었다.

벽에는 액자가 걸렸는데, 내가 쳐다보자, 액자 속 사진이 라비엘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저건 뭡니까?”

“그 사람이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비춰주는 아이예요.”

탑주는 별것 아니라는 양 무덤덤했다.

“너무 오래 지켜보진 마세요. 보면 볼수록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거든요.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과 정반대로 사진은 점점 더 생동감을 얻어가지요. 이윽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억이 전부 사라지면, 그다음 두 번째로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이 비쳐요.”

나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이, 이런 것들을 왜 모아두십니까?”

“다른 장소에 있으면 사람들한테 폐를 끼쳐요.”

“무, 무섭지 않습니까? 결국 귀신 같은 것들이지 않습니까."

“그건 이상한 질문이네요.”

탑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신이라면 김공자 씨도 한 명 데리고 있잖아요.”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예?”

“저기."

탑주가 손가락을 들어 내 등 뒤를 가리켰다.

“근육이 우락부락한 귀신이 김공자 씨한테 있는걸요.”

"......."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배후령이 떠 있었다.

-어?

배후령이 화들짝 놀랐다.

-뭐야? 설마 지금 내가 보이는 거냐?

오직 나에게만 보이는 모습과 나에게만 들리는 목소리.

그러나 탑주는 배후령의 질문에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예."

그녀는 나 이외에 최초로 배후령을 본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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