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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S급 자살헌터-209화 (209/400)

209화.  < 치트. (2) >

“……나의 연인은 언제나 곤란한 선택지를 강요하는구나.”

라비엘이 한숨을 쉬려다 멈추었다.

도중에 토막난 숨.

남겨진 시간 동안에 라비엘은 내 귓볼을 쓰다듬었다. 나는 그녀가 한숨을 쉬려다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앞에서 한숨을 쉬기는 싫다]라고 생각했음을 알았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임은 이해했다. 만일 내가 그대와 동일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면, 나 또한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머리로는 알아도… 나의 심장이 쉬이 허락하지 않는군.”

당연하다.

라비엘이 말한 것은 고스란히 나한테도 적용된다.

만약 내가 라비엘과 같은 처지라면 절대로 쉽게 허락하지 못한다.

“저 아이를 설득할 논리는 준비해두었는가?”

라비엘이 자수정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하루 정도 곁눈질로 관찰한 게 전부다만 심지가 굳은 사람이다. 아니, 심지가 굳은 걸 넘어서 아예 심지가 사람의 형태를 취했다 해도 무방해.

자수정의 눈에는 라비엘과 우부르카가 [있는 그대로] 보인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라비엘의 은발이 흑발로 비추고, 우부르카의 초록 피부가 살색으로 비춘다. 인식에 혼동이 가해지는 것.

하지만 자수정에겐 인식변화가 안 먹힌다.

“그저께 나와 우부르카를 보고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다. 그대가 죽기를 원한다 해서 쉬이 들어줄 것 같지는 않구나."

그건 나와 생각이 다른 지점이다.

하지만 우선은 라비엘에게 동의를 구했다.

“일단 라비엘은 제 행동을 허락해주는 건가요?”

“좋다.”

라비엘이 조건을 말했다.

“내 눈앞에서 죽는다면.”

"......."

“내가 지켜보는 앞에서 절명한다면 허락하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2.

“모두 식사하세요.”

자수정이 쟁반을 들고 걸어왔다. 우부르카도 양손으로 그릇을 들었다. 메뉴는 초계국수. 그릇에 면발이 돌돌 말렸고 얼음이 동동 띄워졌다.

“잘 먹겠습니다.”

한 입, 국물과 함께 후르릅 빨아먹었다.

시원한 동치미 국물이 입안을 가득 메웠다.

“……엄청 맛있잖아?”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와, 무지 맛있네요. 진짜 요리 잘하시는 거 같습니다.”

“날이 더워서 초계국수를 했어요.”

자수정이 말했다.

"라비엘 씨가 준 보석이 값비싸서 한동안 식탁이 초라해질 일은 없을 거예요.”

"선물한 보람이 있군.”

이틀 전, 라비엘은 집에 머무르게 해준 대가라면서 에메랄드 보석을 건넸다.

보석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어마어마하게 비싸 보였다.

처음에 자수정은 [과하다]고 거절했지만, [과한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나다. 집주인으로서 손님인 나를 거지로 취급할 작정인가?]라는 라비엘의 말에 결국 물러섰다.

역시 이반시아 공작가. 제국에서 제일 돈이 넘치는 가문답다.

그 가문이 내 집안이지만.

으히허허.

“……애비여. 얼굴이 심히 재수없다. 밥 먹으면서 히죽거리는 건 그만두지 않겠는가? 아들로서 심각하게 부끄러워지는 거다.”

“참. 그나저나 보석은 어떻게 처분하셨습니까?”

나는 화제를 돌렸다.

“학생 신분으로 보석을 돈으로 바꾸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저와 알고 지내는 동급생 중에 이미호라는 분이 있어요. 제2금융업과 건설업에 손 대고 있는 그룹의 삼녀에요. 지역유지의 따님이기도 해서, 그 분께 처분을 부탁드렸어요.”

“네?"

어라.

지역유지+제2금융업+건설업이면…. 어어.

‘조폭이잖아!?’

조폭 집안의 동급생한테 부탁해서 보석을 처분했어?

‘진짜?’

나는 국수를 먹고 있는 자수정을 바라봤다. 무표정했다. 저 무표정 너머에 어떤 삶이 저장되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절대 평범한 인생은 아닐 거다.

자수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언가 문제라도 있나요?”

“어. 아, 아닙니다. 그냥 친우 관계가 상당히 흥미롭구나 싶어서…. 그보다 이런 걸 부외자인 저한테 전부 알려주셔도 괜찮겠습니까?”

“예."

자수정이 간단히 대답했다.

“김공자 씨가 물어봤으니까요.”

음.

“……말뜻을 분명히 밝혀두고 싶은데. 제가 특별한 사람이라서 대답해주었다는 게 아니라, 질문을 받았으니 당연히 대답을 해준다는 말이죠?”

“예. 그러해요.”

나는 입을 닫았다.

그저께 만났을 때부터 쭉 느낀 거지만.

‘이 사람. 방벽이 없어.’

사람의 질문이나 부탁을 다 들어준다.

적어도 지금까지 내 말을 거절한 적은 없다. 단 한 번도.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다 말했을 때도, 우부르카와 라비엘을 재워줘도 괜찮겠냐고 물었을 때도, 자수정은 아무 망설임 없이 [예]라고 받아들였다.

“저기. 자수정 씨."

저녁 식사가 끝난 후.

나는 내 생각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죄송하지만 부탁 하나 드려도 괜찮을까요?”

“예. 제가 도울 수 있다면.”

“탁자 위에 올라와 앉아주십쇼.”

자수정의 머리가 살짝 기울어졌다.

금발이 옆머리로 미끄러졌다.

“탁자는 앉는 곳이 아니에요, 김공자 씨.”

“네. 알아두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

자수정은 천천히 탁자에 올라 정좌했다.

"흠."

“우거?”

우리 두 사람을 지켜보던 라비엘이 미간을 좁혔고, 우부르카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는 내 판단이 옳다는 예감을 강하게 받으면서 재차 요구했다.

“제 머리에 손을 얹혀주시겠습니까?”

“예."

자수정이 내 앞머리에 손을 올렸다.

나는 계속해서 부탁했다.

“배고픕니다. 야식으로는 닭꼬치를 먹고 싶은데 해주십시오.”

“……김공자 씨.”

자수정은 나직하게 나를 타일렀다.

“저를 편리하게 이용하는 것은 장차 김공자 씨한테 악영향을 끼칠지도 몰라요. 그리고 야식은 건강에 해로워요. 제가 판단할 때 김공자 씨는 배가 고픈 게 아니라, 단지 저의 행동양식을 파악하고자 이 같은 주문들을 하고 있어요.”

“네. 맞습니다. 그러니까 부탁드립니다.”

"......."

자수정은 고개를 끄덕이고 장바구니를 가져왔다.

정말로 닭꼬치를 만들기 위해 집을 나가려는 것이었다.

“잠깐 기다려라.”

라비엘이 자수정의 어깨를 잡았다.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자 천하의 라비엘도 간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수정 양. 혹시나 싶지만, 길거리에서 모르는 사람이 조금만 도와달라고, 따라와달라고 부탁하면, 따라갈 것인가?”

“예."

자수정이 선뜻 긍정했다.

“제가 도울 수 있다면.”

“매우 극단적인 예시가 되겠다만, 만일 그 부탁이 1년 동안 외전 시설에서 감금되어 달라는 부탁이어도 말인가?”

“예. 제가 도움이 된다면요.”

라비엘이 입술을 다물었다.

잠시 뒤 그녀는 “과연”이라고 중얼거렸다.

“이건…. 위험하군.”

라비엘과 내가 눈을 마주쳤다.

나는 머리를 끄덕임으로써 그녀와 뜻을 나누었다.

“맞아요. 위험합니다, 라비엘.”

“……머리가 똑똑하므로 상대방의 진의를 가릴 수 있다. 상대방의 목적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파악할 뿐, 상대방이 진심으로 부탁해오면 절대 거부하지 않는 것인가. 아니, 이 정도 수준이면 거부하지 못한다고 봐야겠구나.”

라비엘은 눈썹을 찡그렸다.

“방금 오간 이야기로 확신했다. 공자가 말한 대로 이 아이는 탑주가 맞다. 최소한 평범한 경로를 거쳐 태어나서 자라난 인간은 아니다."

“네. 이 성격은 [형성]된 게 아니라 [기입]된 거에 가깝습니다.”

마치 조건에 따라 반응하는 AI와 같이.

그저 사람들의 소망에 대답하는 존재.

“자수정 씨."

나는 작은 금발의 아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제야 눈높이가 맞추어졌다.

자수정은 장바구니를 든 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저는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입니다. 라비엘도 우부르카도, 모두 각자의 세계에서 건너온 여행자들이에요.”

“그렇군요.”

비상식적인 말을 들어도 자수정의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익히 짐작했다는 듯 가벼이 턱을 끄덕일 뿐이었다.

“스킬 카드, 오픈.”

나는 황금색 카드를 꺼내었다.

+

[회귀자의 태엽시계]

랭크: EX

효과: 죽으면 자동으로 발동. 죽은 순간에서 24시간 전으로 회귀합니다. 회귀해도 기억과 능력치는 보존됩니다.

※단, 헌터 랭크가 높아질수록 강한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헌터 유수하로부터 복사한 스킬입니다.

+

내 비장의 카드를 증거물로 보여주었다.

“우리들의 세계에는 스킬이란 게 있습니다. 스킬을 이용해서 공간을 이동하는 것도 가능하고, 시간을 되돌리는 것마저 가능하지요.”

"......."

“보시다시피 저는 죽어도 죽지 않는 스킬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 스킬을 제시함으로써, 저는 자수정 씨에게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부디 저를 한 번만 죽여주십시오.”

“어째서인가요?”

“저는 당신이 우리의 세계들을 통괄하는 신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자수정과 똑바로 마주보았다.

“우리들의 신은, 자신을 대신해서 각 세계마다 한 명씩 단말을 심어둡니다. 제일 불행한 삶을 살다 간 사람이 단말의 후보가 되지요.”

“제가 그 단말이라는 말씀인가요?”

“네."

그리고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탑으로 들어오게 된 이야기. 원장 선생님과 김율의 이야기. 탑에서 겪은 일, 스승님과 만난 일, 라비엘과 만난 일. 나의 삶을 증거로 삼아 눈앞의 아이한테 바쳤다.

"......."

한 시간 반이 넘도록 이야기가 이어졌지만, 자수정은 시종일관 묵묵히 내 눈을 바라보았다.

나는 입술을 다물고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김공자 씨의 얘기에 따르면 제가 탑주의 단말일 가능성이 확실히 있네요. 모순을 이용해서 관리자를 끌어내, 그 관리자의 진상과 마주하겠다는 발상에도 일리가 있어요.”

자수정은 손을 뻗었다.

“열심히 사는 분이군요. 김공자 씨는.”

마른 손가락이 찬찬히 내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얼마 전에 갑자기 김율 선배가 실종되었지요.”

“김율 선배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사라졌어요. 김율 선배를 괴롭히던 사람들이. 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실종을 인지하지 못했어요. 희귀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김공자 씨의 말에 따르면 설명이 되네요.”

자수정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만일 탑주를 만난다면 저의 말을 전해주시면 기쁘겠어요.”

“어떤 말입니까?”

“저는 행복해요.”

자수정이 조용히 말했다.

나는 그 한마디에 순간 등이 저릿했다.

“저는 이 도시를 사랑하고,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을 사랑해요. 여름에 우는 참매미를 사랑하고 옆집의 낡은 창문에서 새어나오는 라디오 소리를 사랑해요.”

그리고 내가 무엇을 착각했는지 깨달았다.

눈앞의 아이는 결코 AI와 같은 무언가가 아니었다.

감정이 없어서 상대방의 질문과 부탁을 다 들어주는 건 더욱더 아니었다.

단지.

‘우리 모두를 [아이]로 보고 있구나.’

자신이 보살펴야 하는 아이들로 볼 뿐.

창고에 잠든 정체불명의 괴물들도.

지금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나도.

잘못된 점을 타이르고 지적할지언정 마지막 부탁을 져버리진 못한다.

요컨대, 이 아이는 어미(母)다.

“그러니 저에 대해선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전하겠습니다.”

“저에게 칼을.”

나는 허리춤에 차인 단검을 건네주었다.

자수정은 칼을 넘겨받아 몇 번 휘둘렀다.

이내 감을 잡았는지 내게 칼끝을 향했다.

"......."

라비엘은 말없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김공자 씨. 저는 힘이 약해서 단번에 숨을 끊지 못할지도 몰라요."

"각오하고 있습니다. 처음 겪어보는 일이 아니기도……."

"만약 고통스럽게 된다면, 죄송해요. 미리 사과를 드릴게요.”

푸욱!

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차가운 쇠가 목을 꿰뚫었다.

‘어?’

시야가 깨진 유리창처럼 여러 조각으로 갈라졌다.

깨트려진 틈새로 격통이 번지는 동안, 나는 머리 한구석으로 황당함을 느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아직 학생이면서 쿨타임도 없이 바로 목을 찌르는 게, 말이나.......'

몸이 기우뚱거렸다.

내가 착각한 게 아니라면 방금 자수정은 단검을 한 번 더 휘둘렀다.

‘말이나…….'

갈갈이 찢겨나간 시야 속에서 자수정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당신에게 행운이 함께하기를.”

의식이 툭, 끊겼다.

예의, 내 죽음을 고하는 소리와 함께.

[당신은 죽었습니다.]

[현재 당신의 헌터 랭크는 B급입니다.]

.......

[당신을 죽인 적의 트라우마를 구현합니다.]

[자료를 원주인의 기억에서 추출합니다.]

.......

[실패.]

[트라우마를 구현하기 위한 자료가 거부되었습니다.]

[즈라쿠아에 자료를 요청… 실패. 거부되었습니다.]

.......

[트라우마를 구현할 수 없습니다.]

[즈라쿠아에 승인을 요청합니다.]

[실패.]

[즈라쿠아로의 승인이 거부됩니다.]

[해당 사안은 즈라쿠아의 의제가 아닙니다.]

.......

[대처 불능.]

[‘만생(萬生)의 주인’이 현현합니다.]

그 순간.

“----세상에.”

누군가가.

아니, 무언가가 내 턱을 잡았다.

강하게.

“이렇게나 얄미울 수가.”

그것은 붉은 비단을 복숭아즙에 몇날며칠 재워, 마침내 건져내어 힘껏 쥐어짜니 후두두둑, 단물이 사방으로 튀는 듯한 목소리였다.

“아무리 소인이 봄에 우연을 뿌려 가을에 수확하기를 즐긴다지만, 이건 정말 예상하지 못한 사태인걸요.”

그것은 백 마리의 독사가 얇디 얇은 혓바닥을 낼름거려, 백 갈래의 혀끝이 귓구멍으로 파고드는 듯한 목소리였다.

“감히 소인의 과거를 엿보려 하다니.”

나는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한 명의 소녀가 히죽 웃고 있었다.

그 존재는 방금 전까지 낡은 한옥에서 내 머리를 쓰담던 자수정과 똑같이 생겼다. 한 군데를 제외하면 말이다.

“첫 번째엔 논리에 설득되어 주었고, 두 번째엔 아부에 모르는 척 넘어가 주었지요. 세 번째엔 그 의기가 가상하여 편의를 봐주었어요. 어리석게도.”

눈동자.

“마침내 오늘 네 번째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이 또한 소인의 과오라.”

[만생의 주인]은 보랏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 한들 샛길이 곧게 펴지진 아니하며, 치트가 정석으로 인정되는 것도 아니지요. 사왕(死王). 참으로 재미있는 짓을 해주었어요."

보라색은 무언가를 비추기엔 제일 어두운 색일 것이다.

그러나 탑주의 보라색은 어둠 속에서도 홀연히 투명했다.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심장을 비추는 명도(明度)였다.

“이 깜찍한 말괄량이를 어떻게 혼내줘야 할까요?”

“벙어리처럼 입을 다무는 건 별로 추천드리지 않아요. 소인이 그대를 어디까지 삶아먹을 수 있는지 알게 된다면, 입을 다무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없음을 깨닫겠지요. 어디 말씀해보시지요.”

나는 입을 열었다.

“정식으로는 처음 뵙겠습니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탑주.”

나는 최초로, 이 탑을 만들어낸 존재의 얼굴을 본 것이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