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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S급 자살헌터-210화 (210/400)

210화.  < 치트. (3) >

3.

“저의 이름은 김공자입니다.”

나는 심장이 쿵쾅거리는 걸 억누르며 말했다.

“그리고, 당신에게서 사왕이라는 이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요. 정식으로 뵙게 되어서 기쁩니다, 탑주.”

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으흠.”

탑주는 나의 턱을 쥐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의 얼굴은 숨결이 이어질 만큼 가까웠다. 탑주가 내쉬는 숨소리는 너무나 작아서 거의 들리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자기소개를 받았는데 소인도 소개로 응대하지 않으면 무례한 일이지요.”

탑주는 작게 혀를 찼다.

“좋아요. 그대가 말한 대로 소인은 탑주. 만생의 주인이란 이명을 가지고 있으며, 첫 번째 이름은 자수정(紫水晶), 두 번째 이름은 만화경(萬華鏡)이에요. 수많은 별칭을 두르고 있으나 그것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요.”

“그래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만.”

“정말 뻔뻔하군요.”

“탑주에 대해 알고 싶어서 이런 방법까지 썼습니다. 오직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요. 기특하지 않습니까?”

탑주가 코웃음쳤다.

“듣던 대로 교언영색이라. 하무스트라가 그대의 입발림에 홀라당 넘어갔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지요. 하지만 소인을 말로 들볶을 작정이라면 포기하세요. 그거, 소인의 특기니까요.”

“……사람을 유혹하시는 게 탑주의 특기라고요?”

“예에. 소인에게 유부남을 건드리는 취미가 없는 걸 다행으로 여기세요, 사왕. 유부녀라면 또 모를까.”

툭.

탑주는 내 턱을 놓았다.

[만생의 주인이 용압(龍壓)을 거둡니다.]

그제야 나는 내 몸의 윤곽을 되찾았다. 지금까진 이 어둠 속에서 얼굴과 입, 심장만 느껴졌다. 하지만 탑주가 턱을 놓아준 뒤로는 팔다리의 감각이 뚜렷해진 것이다.

머리가 한결 맑아졌다.

"음."

괜찮다.

여전히 심장이 두근거리지만 제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

“탑주. 제가 당신을 불러들인 이유를 아실 겁니다. 저는 제 스킬에 의거해서, 당신의 과거를 엿보고자 합니다.”

"......."

“당신은 이 탑에서 전지전능한 존재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동시에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공정해지고 엄정해지려는 운영자이기도 합니다. 전 정당하게 스킬을 이용했을 뿐이니, 저의 요구를 들어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빌어먹을.”

탑주가 미간을 좁혔다.

이제 와서 보면, [외전]의 자수정과는 정말로 달랐다.

외전에서 살아가는 자수정에겐 표정이 일절 없었다. 말에도 높낮이가 희박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서 얼굴을 찡그리는 탑주는 똑같이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음에도, 눈썹을 찡그렸고, 혀를 찼으며, 한숨을 쉬었다.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사왕.”

“네."

“소인의 과거를 체험하는 건, 특히나 트라우마들만 콕 찝어서 경험하는 건 진심으로 추천드리지 않아요. 위험해요. 차라리 허리에 다이너마이트를 두른 채 폭발 직전의 화산을 향해 다이빙하는 편이 조금 더 안전할 거예요.”

탑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부서지기 싫으면 부디 단념하세요.”

“저는 당신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사왕. 이카로스의 신화에서 제일 슬픈 존재가 누구인지 아시나요? 태어나자마자 영원한 미궁에 갇혀버린 미노타우르스? 날 수 있기에, 그저 조금만 더 날아보고자 한 이카로스? 아들에게 날개를 지어다준 다이달로스? 아니에요. 자신에게 다가오는 자를 불태워 창해(蒼海)에 떨어트릴 수밖에 없는 태양이에요. 소인을 슬프게 하지 말아주세요.”

"......."

“그대의 접근권한이 B급이지요.”

탑주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어둠에 자주색 글씨들이 새겨졌다.

+

지옥도(地獄道).

아귀도(載鬼道).

축생도(畜生道).

수라도(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

+

“그대가 겪게 될 만생의 심도는 축생도. 일전에 살천성의 트라우마를 다녀와 봤으니 알겠지만, 축생도부터 이미 트라우마를 [보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 되어버려요. 만일 그대의 등급이 C급 이하였다면 소인도 고민했을지 모르지만….”

탑주가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안 돼요.”

"......."

“뼛국물도 못 남기고 뒈지기 싫으면 단념하세요.”

의외로 탑주는 입이 거칠었다.

“……저의 스킬에 대해서 자세히 아시는군요. 축생도 다음의 단계가 뭔지, 저는 모르고 있었는데.”

“당연하지요.”

탑주는 툭 말했다.

“그거, 원래 소인의 능력인걸요.”

“예?"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발언이었다.

탑주는 한숨을 쉬며 오른손으로 금발을 넘겼다.

“모든 스킬에는 원본이 있어요. 이 세상에 원래 없는 걸 만들어내는 것보다, 이미 있는 걸 참조해서 개발하는 것이 훨씬 편하니까요. 그대가 가진 [트라우마를 보는 페널티]란 건, 원래 어떤 용제……. 아무튼 소인의 조상격이 가진 능력 중 하나예요. 소인은 그걸 만생(萬生)이라 부르지요.”

어어.

“혹시 [만생의 주인]이란 이명도……?"

“맞아요. 거기서 따왔어요.”

맙소사.

그럼 나는 탑주랑 비슷한 능력을 공유하고 있다는 얘기인가?

“생각지도 못한 영광입니다. 아니, 어쩌다 이런 우연이……."

“영광은 무슨. 이 씨발 같은 능력 때문에 소인의 인생이 나락으로 빠졌는데요.”

정정하겠다.

탑주는 예상보다 훨씬 더 입이 거친 사람이었다.

“심지어 우연조차 아니에요. [회귀자의 태엽시계]에 부착된 페널티잖아요. 스킬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는 이미 들었지요?”

“아, 예.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가 만들었다고……."

“그 아이가 소인의 딸이에요.”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네에?”

“소인의 딸이라고요.”

탑주는 한숨을 쉬며 왼손을 내밀었다.

“자요.”

“뭐, 뭡니까?”

“냄새 맡아보세요.”

심각하게 곤란한 요구였다.

“어. 그. 탑주님. 저어, 는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이어서….”

“미쳤어요? 죽을래요? 아까 남정네한테 관심 없다고 말했지요? 설명할 게 있으니까 손등에 코 박고 냄새만 맡아보라고요. 확 그냥 콧구멍을 뒤집어다가 코털이랑 머리털을 교환 삽입해버릴라.”

"......."

난생 처음 들어보는 욕설에 나는 순순히 손등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윽."

그때, 아찔한 향기가 두개골에 치밀어 올랐다.

눈앞이 아찔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머리를 들어 거리를 벌렸다.

“……복숭아 향?”

“예. 소인의 체향이지요.”

“미친.”

“소인도 미쳤다고 생각하는 부분이에요.”

탑주는 뭐 씹은 표정을 지었다.

“이제 소인의 딸이 항상 들고 다니는 베개를 떠올려보세요."

머릿속으로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를 떠올렸다.

탑주의 말마따마 공녀는 언제나 베개를 폭 안고 다녔다.

그리고 베개에 그려진 문양은.

“복숭아……."

“그 아이. 중증의 마마걸이거든요.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소인의 체향이 곁에 없으면 잠을 안 자요. 못 자는 게 아니라, 안 잔다는 점이 악질이네요.”

나는 정신이 멍해졌다.

“탑주와 만나면 이런저런 비밀을 듣게 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이런 비밀을 알게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지요? 알아요. 이해해요. 원래 세상에 비밀 따위는 없고, 억지로 알아내면 그다음 그대를 기다리는 것은 무한한 책임뿐이지요. 빌어먹을.”

탑주의 말버릇은 ‘빌어먹을’이었다.

“소인도 똑같아요. 소인의 비밀을 알려 하지 마세요. 파내려 하지 마세요. 알아내고 파낸 다음에 그대가 건사할 수 있으면 다행인데, 소인의 밑바닥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유물이라곤 썩어빠진 비명밖에 없어요.”

“……그래도 보기를 원한다면, 어쩌실 겁니까?”

“소인은 그대에게 다른 보상을 지불할 수 있어요.”

탑주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동안에 탑주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이 때만큼은 [외전] 속의 자수정과 모든 것이 똑같아 보였다.

“원하시는 스킬을 말씀해보세요. 선처하지요. 원하시는 권능을 말씀해보세요. 헤아릴게요. 대신, [회귀자의 태엽시계]를 찢어주세요. 트라우마 페널티가 발생하지 않도록.”

"......."

“회귀 능력을 잃어버릴까 걱정된다면 염려할 필요 없어요. 트라우마 페널티만 삭제하고, 똑같은, 아니 그보다 더 좋은 스킬을 선물해 드릴게요.”

“과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저를 억지로 막으실 수 없군요?”

탑주가 한숨을 쉬었다.

“……예.”

“당신이 저를 상대로 할 수 있는 건 설득뿐. 지금도 당신은 저를 설득하기 위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스킬에 따라 페널티가 발동하는 걸 중단시키면 [권한 남용]이 되니까. 당신에겐 저를 막을 힘이 있고, 아예 이번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세계를 바꿔버릴 수도 있을 텐데, 그러지 않습니다.”

왜냐면 당신은 스스로 세운 규칙에 얽매이는 인물이므로.

“아무리 막고 싶어도 제가 그대로 강행하겠다면, 당신은 그대로 진행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제 말이 맞습니까?”

“사왕.”

“저는 [회귀자의 태엽시계]를 찢을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제발 부탁드려요. 그대가 찢어질 거예요.”

“여기서 물러서면 99층에 오르고 100층에 올라도 저는 영원히 당신에 대해 무지할 겁니다. 그러기 싫습니다. 단 하루의 삶이라도 당신과 살고 싶습니다.”

"......."

문득, 탑주의 눈매가 내려앉았다.

“그래요.”

탑주는 한탄하고 있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고 각오했어요. 칼을 휘두른 자는 똑같이 칼에 찢겨나갈 것을 알아야 하는 법. 소인과 같은 말, 소인과 같은 논리, 소인과 같은 신념을 말하는 아이가 억겁의 시간 동안 나타나지 않을 리가 없지요.”

탑주는 양손을 뻗어 내 머리를 잡았다.

“힘내어 주세요.”

그리고 자신의 이마를 내 이마에 붙였다.

[만생의 주인이 당신을 축복합니다.]

보라색 눈동자가 내 눈동자를 비추었다.

“소인은 언제나 여러분의 곁에 있어요.”

목소리가 속삭인 순간.

[현재 당신의 헌터 랭크는 B급입니다.]

[경고.]

[당신을 죽인 적의 트라우마를 구현합니다.]

멈추어 있던 시계 바늘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페널티 심도는 상(上).]

[축생도(畜生道)입니다.]

눈동자.

자주빛으로 물든 세상 한복판에 나의 눈이 맺혀 있었다.

한 번 맺힌 눈동자 속에는, 다시 보라색 눈동자.

보라색 눈동자 속에는 다시 나의 눈동자…….

거울의 미로로 내 의식은 떨어졌다.

그 해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신월석 남작구에서 누가 건드리지도 않은 돌이 저 스스로 굴렀다. 반석의 영토에서 멋대로 돌멩이가 돌아다닌 것이니 흉한 징조라며 백성들이 수군거렸다.

대하에서 밤마다 까닭 없이 강물이 끓었다. 수로마다 개구리가 뛰어오르더니 땅바닥에 머리를 꼬라박아 죽었다.

왕도에서 하루에만 날벼락이 스물여섯 번 내리쳤는데, “숫자 열셋이 위아래로 겹쳐 스물여섯을 이룬 꼴이니 흉조다”라고, 북문의 점쟁이가 지껄였다.

함부로 나라의 길흉을 점쳤으므로 죄가 컸다. 왕도경비대는 점쟁이를 끌어내어 모가지를 쳤다. 그 날, 아직 장마가 오지 않았으나 강물이 크게 범람하여, 왕도로 통하는 길이 사방팔방으로 막혔다.

“왕국은 회생불가능한 병신 환자다.”

귀족들이 공공연하게 탄식했다.

흉년이 거듭했다. 돌림병이 연이었다. 세월은 썩은 척추와 같아, 거듭되고 연이어지는 마디마다 고름이 고였다. 범람하는 강물 위로 백성들의 주검이 흘렀다.

멸망하는 시간.

무너져 가는 왕국의 한복판, 어느 십이월에, 소녀는 태어났다.

수정(水晶) 남작가.

특별한 눈동자를 타고났기에, 자수정 남작 영애.

썩어가는 왕국의 마지막 양분을 전부 흡수하여 피어났는지 남작 영애는 아름다웠다.

“보랏빛 눈동자.”

어떤 귀족은 [한 번 보면 잊기 어렵다]라고 그 눈동자를 상찬했다. 반면, [보기 드문 색을 타고났다는 것 이외에는 특기할 게 거의 없다]고 혹평하는 이도 있었다.

섬세하게 빗질한 머리카락은 주인이 고개를 돌릴 때마다 작게 흘러내렸다.

“머리칼은 백금색으로 가히 신성하다. 일견에 눈길이 빼앗긴다. 그것 또한 멀리 있을 때나 허락된 사치다.”

과하게 칭송하는 추종자 또한 있었다.

“가까이 다가서면 손길이 눈길보다 먼저 빼앗기어서, 무심코 팔을 뻗어버리고 만다. 내가 팔을 뻗는 잠깐 동안 시간은 기꺼이 멈춘다. 그녀가 나를 돌아본다. 선명하게. 몹시, 선명하게. 그리고 나는 깨닫는다. 내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는 사실을.”

자수정 영애는 무표정했다.

“말이 없어 얼핏 보면 천치다.”

태어날 때부터 표정이 없었던 것일까.

긴 눈썹은 한 번도 찡그려본 적 없는 양 미끄러웠다.

“일개 관심종자.”

“긴장하는 법이 없다.”

“타고난 무대체질.”

영애가 열일곱 살이 되던 해.

그 해는 소문이 끊이지 않아, 누가 건드리지도 않은 돌이 스스로 굴러다녔으며, 강물이 까닭 없이 들끓었고, 마른 날벼락이 스물여섯 번이나 왕도에 쳤다. 봄에는 가뭄이 일었으며 가을에는 반란이 일어났다.

작은 영애에게도 소문이 하나 있었다.

“이미 사교계의 인사들이 쉬쉬 하다시피-.”

그 해 영애는 죽은 아비를 대신하여 가주(家主)의 직위를 물려받았다.

“남작 영애가 자신의 부친을 죽였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그런 소문을 떠드는 귀족들 앞에서 자수정 영애는 방긋 웃었다. 평소에 무표정한 만큼 환한 꽃이 피는 듯했고, 그걸 지켜보는 사교계 인사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천사와 같은 입술에서 거의 선율이 될 뻔한 목소리가 흘렀다.

"---꼴깝들 떨고 있네요. 염병.”

자수정 남작.

소녀는 왕국 이천 년 역사에서 제일가는 또라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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