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212화 (212/400)

212화.  < 그 신이 가진 것들. (2) >

2.

멸망해가는 나라.

자수정은 썩어빠진 왕국을 질주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날뛰어봐.”

그녀는 무위식 공작, 왕국에 여섯 명밖에 없는 귀족의 총애를 얻었다. 권력자의 비호를 받게 된 것이다. 거칠 것이 없어졌다.

소녀는 시대를 향해 칼을 겨누었다.

[제1막.]

[마녀 사냥.]

첫 번째 보스는 아인종 테러리스트.

반란 조직 ‘붉은 손톱’을 이끈 흑색마녀(黑色魔女).

본래 흑색마녀는 마탑에서 일인자로 군림한 마법사.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아인종도 아니고 순인종인 엘리트가, 왜 갑자기 극렬한 테러리스트로 전락했는가?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모르는 게 아니라, 알려고 하지 않는 거지.”

칠흑의 마녀는 비웃었다.

“오래 살면 여러모로 많은 걸 보게 되거든. 너희는 쌀가마니에 어린아이를 집어넣고 죽을 때까지 발로 찼어. 수만, 수십만 명의 아인종이 노예로 부려먹히지. 이제 와서 너희에게 개심을 바라진 않아. 신들에게 기적을 비는 것보다, 인간들에게 기적을 비는 것이 훨씬 더 비현실적이니까. 우리는 그냥……."

[붉은 손톱]의 반란은 왕국 전토를 뒤흔들었다.

“너희가 고통스러우면 참 좋겠단다.”

왕도에서 귀족 영애들이 납치되어 고문당했다. 남부에서 700년 동안 절대자로 군림한 대귀족이 순행 중 습격을 받아 죽었다. 남동부에서 왕실 직속의 특무대원들이 실종되었다. 백작령에서 수천 명의 노예가 탈출하여 반란군에 가세했다.

신분고하,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붉은 손톱]은 순인종을 고문하고 도륙했다. 흑색마녀의 목에 현상금이 걸렸지만 아무도 잡을 수 없었다. 권세가들은 공포에 질렸다.

“재미있네요.”

자수정은 환히 웃었다.

“조금 더 재밌게 해드리지요.”

자수정은 무위식 공작의 인맥을 타고 한 왕녀에게 접근했다. 참벌사(惨罰死) 왕녀. 왕실특무대의 수장이자 잔인하기로 유명한 승천인.

죄인의 오른팔을 잘라서 수집하는 것이 취미였다.

“소인이 각하께 승리를 안겨드릴게요.”

자수정은 왕녀를 유혹했다.

“각하께서 붉은 손톱에 골치를 썩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나이다.”

“골치 정도가 아니라 치통 수준이지만.”

“이빨이 흔들리는 까닭은 잇몸이 허물린 탓이에요. 각하.”

자수정이 속삭였다.

“작금에 아인종들이 동요하는 것은 왕국이 그들에게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하기 때문. 복수에 눈이 멀어 학살을 저지르는 자들은 아인종 중에서도 극소수. 목숨과 평등, 명예를 보장해준다면, 붉은 손톱의 세력은 자연히 줄어들 것이에요.”

+

[왕사任師)]

랭크: B+

효과: 천부적인 재략. 군왕을 보좌하는 재치.

이 스킬을 보유한 자는 본능적으로 적의 약점을 간파합니다. 더 나아가, 그 약점을 찌르기 위해서는 무엇을 시행해야 하는지 떠올립니다.

말 그대로 왕좌지재(王住之材). 정치판부터 전쟁판에 이르기까지 이 자가 꿰뚫어보지 못할 계략은 드물 것입니다.

※단, 정보가 충분할 경우에만 발동합니다.

+

"......."

왕세녀는 자신에게 다가온 귀족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자작의 제안은 이치에 합당하나 행하기 어렵다. 이미 한 번 왕국을 등진 자들이야. 그들을 도로 백성으로 끌어안으면 순인종들이, 귀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아인종의 반란을 막겠다고 순인종의 반발을 감수할 순 없어. 본말전도다.”

“소인이 어찌 감히 각하께 천한 자들을 끌어안으시라 조언하겠나이까?”

자수정은 서두르지 않았다.

참벌사 왕녀는 어릴 적에 수십 명의 형제자매를 잃었다. 왕녀는 잔인하기로 유명했지만 그 잔인함은 유년기의 잔혹함에서 비롯했다. 어떻게 해야 어린시절에 잉태된 불행을 녹일 수 있는지, 자수정은 본능적으로 잘 알았다.

“소인 역시 귀족이에요.”

자수정은 왕녀에게 친언니 같은 존재가 되기로 했다.

“귀족은 누군가를 가신(家臣)으로 들일 수도 있으며, 사병으로 삼을 수도 있거니와, 영지민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요. 각하께서 반란 분자들을 직접 껴안으실 필요 따위는 어디에도 없어요.”

따뜻한 눈동자. 자비로운 미소. 상냥한 손길.

자수정은 천천히 참벌사 왕녀를 부식시켰다.

얼음을 녹일 적에 독의 향은 달콤했다.

“저하.”

인생을 한탄하면 차분히 들었다.

짜증을 부리면 손등을 쓰다듬었다.

왕세녀가 얼마나 대단한지, 그녀가 없으면 왕국이 얼마나 더 위태로웠을지, 자수정 자작은 틈이 보일 때마다 소곤거렸다.

“……자수정.”

자수정이 쓰다듬는 곳이 손등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앞머리로, 앞머리에서 뺨으로 바뀌었을 무렵, 왕세녀는 자수정을 [자작]이 아니라 [자수정]이라 부르고 있었다.

“계획을 말해줘.”

“간단해요. 붉은 손톱은 점조직. 소인이 정예를 이끌고 적의 소굴을 한 군데씩 짓밟을게요. 짓밟을 때마다, 항복한 이들을 소인의 가신이나 영지민으로 받아들이겠어요. 소인이 저하를 대신하여 왕국에 버림받은 백성을 껴안겠나이다.”

“나 대신 네가 나서서, 이목과 불만을 끌겠다는 거구나.”

“예."

“나는 뭘 해주면 좋을까?”

“소인을 사랑해주세요.”

독은 달콤했다.

“……사석에서라면.”

또한 치명적이었다.

무위식 공작과 참벌사 왕녀의 총애 아래, 자수정은 아인종 반군들을 포섭했다. 항복한 테러리스트들에게 자수정은 ‘절대적인 안전’을 보장했다. 전직 테러리스트들은 자작가의 사병, 자작가의 영민, 자작가의 노예가 되었다.

“저 미친개가 또!”

물론 보수파의 사람들은 그런 작태를 용납하지 못했다.

“저 자는 내 영지에서 분탕을 친 천민이오. 돌려주시오!”

“수 년 전, 제 친동생이 상행을 다닐 때 노예가 포박을 끊고 달아났습니다. 친동생은 그때 양쪽 눈을 잃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지금 그 노예가 자작 각하의 가신으로 있다 들었습니다. 충분히 사례할 테니 신병을 양도해주십시오.”

“어찌 국적(國敵)들을 사사로이 거두는가. 왕국을 향한 충심이 있다면 그대는 마땅히 사로잡은 반란도당들을 처분해야 할 것이다!”

왕국 각지에서 영주와 상인, 사제들이 벌떼처럼 출몰했다.

자수정은 싱긋 웃었다.

“꼴깝 떠네요.”

자수정은 강했다.

“과거가 어떻든 간에 이들은 이제 소인의 가신이에요. 소인의 노예이지요. 국법에 따라 이들에 대한 소유권은 소인에게 있어요. 그런데도 빼앗고 싶다면, 부디 소인에게 결투를 청하거나 가문전을 선포하세요.”

3번의 결투와 1번의 가문전에서 그녀는 전승했다.

자기 휘하에 들어온 아인종을 단 한 명도 내주지 않은 것이다.

+

[아인의 수호자]

랭크: B

효과: 순인종이 아닌 종족들에게 신뢰를 얻기 쉬워집니다.

종족차별에 신음을 받는 이들이 당신의 도래를 염원하고 있습니다. 오래된 노예의 사슬을 끊고, 왕국의 백성들을 해방하십시오. 당신이 먼저 배신하지 않는 한 아인종들은 당신을 따를 것입니다.

※단, 순인종이 당신을 경멸합니다.

+

처음엔 자수정을 의심하던 아인종들도 서서히 의혹을 거두었다.

자수정 자작은 수도 인근의 거대한 숲속에 마을을 지었다. [붉은 손톱]의 전직 테러리스트들에게 잠잘 곳과 일자리를 선물했다. [붉은 손톱]의 아지트가 한 군데 짓밟힐 때마다, 자수정 자작의 마을은 풍요로워졌다.

"......."

흑색마녀가 움직였다.

“예, 슬슬 움직일 줄 알았어요.”

자수정은 왕세녀를 미끼로 해서 [붉은 손톱]의 본대를 끌어들였다. 사방을 포위했다. 테러리스트들에겐 도망칠 곳이 없었다. 도망친다 하여 조직의 앞날이 보장되지도 않았다.

흑색마녀는 이를 으드득, 깨물었다.

“건방진 애송이가…… 제법인걸.”

“그 쪽도 제법이었어요. 무능한 꼰대 씨.”

“나를 죽인다고 해서 붉은 손톱이 무너질 것 같아? 우리는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야. 너희 왕국이 존재하는 이상 우리는 결코 멸하지 않아.”

“소인이 어떻게든 해볼려고요.”

자수정 자작은 검을 휘둘렀다.

“소인은 새로운 귀족 파벌을 만들 작정이에요. 수십 년이 걸릴지라도 노예제를 폐지할 것이고, 광노와 농노도 차근차근 해방할 것이에요. 이미 공연파와 인외파의 지지를 얻었어요. 간단하지요.”

“하."

흑색마녀는 검은 피를 흘렸다.

“누가 어린 것이 아니랄까 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어라. 이 무슨 모함일까요? 소인이 아무것도 모른다면 이 세상 사람들의 9할 9푼 9리는 원숭이일 텐데요.”

“우리는 보답을 바라는 게 아니야. 보상을 바라는 건 더욱더 아니지. 너희가 제아무리 평화로운 시대를 약속해봤자,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아.”

마녀의 눈동자에 핏빛이 돌았다.

“너희의 채찍질에 등살이 찢겨나가 죽은 어린아이들이 있어. 장난 삼은 고문에 갈비가 부러지고 폐가 찔려 제 피에 스스로 익사한 노예들이 있어. 너희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기억한다. 왕도의 미친개! 죽어버린 아이들을 되돌릴 수 없다면, 너희가 뭐라고 지껄이든지 개 소리에 불과해!”

"......."

자수정이 멈칫했다.

보랏빛 눈동자가 아래를 내려보았다.

자신이 찍어누른 검에 심장이 찍혀, 흑색마녀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그것은 자수정이란 인간에게 있어 신선한 충격이었다.

“노예제를 없애드릴 수 있어요?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순인종과 아인종 사이의 차별도 해소할 수 있어요. 소인은 그만큼 유능하니까요. 그것이 여러분이 바라는 미래일 텐데. 상관없다는 얘기인가요?”

“처음부터 미래 따윈 상관없었어.”

흑색마녀가 마지막 마력을 끌어올려 반격했다. 마법의 기미가 감지되자마자, 자수정은 칼끝을 비틀었다. 퍼석! 심장이 한 번 더 조각났다. 흑색마녀는 토혈했다.

“죽어버려.”

"......."

“너희 전부, 다, 죽어버려.”

자수정은 마녀의 저주에서 진실을 느꼈다.

“과연.”

그리고 깨달았다.

“이미 벌어진 죽음들에 대해서, 소인은 철저히 무능하군요.”

자수정은 아비를 죽인 날 이후 처음으로 무력함을 느꼈다.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은 소인이 어떻게든 해볼 수 있어요. 무위식 공작님도 소인을 귀애하고, 참벌사 왕녀 저하도 소인을 총애하지요. 하지만…… 그렇네요. 이미 죽은 사람의 불행은 소인이 해결할 수 없군요.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

“아직도 소인은 무능했네요.”

흑색마녀가 자수정을 올려보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붉은 손톱의 두령?”

“뭐를……."

“어떻게 해야 이미 죽은 사람들까지 책임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자기 자신이 아니라 이미 죽어버린 자들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을 위로할 수 있을까요?”

자수정의 눈동자는 투명했다.

한없이.

이미 심장이 멈춰가던 흑색마녀는 불현듯 섬칫했다.

“모르세요?”

"......."

"모르시는군요."

하긴, 하고 자수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엉뚱한 사람들이나 쳐죽이고 다녔겠지요.”

"너......."

“살인은 궁극적인 무능이에요. 설득할 수 없기에 죽이고, 개심시킬 수 없기에 죽이며, 자신의 마음대로 지배할 수 없기에 죽이지요. 마치 소인이, 소인을 감금한 아비를 죽인 것처럼요.”

마녀의 눈에 비친 자수정은 무표정했다.

“소인은 결국 아비를 바꾸지 못했거든요. 12년 동안이나 노력했는데도.”

공작한테 사랑을 구하고 왕녀한테 사랑을 베푼 소녀의 모습은 종적조차 없었다. 일말의 흔적마저. 그곳에는 다만 영원히 신음하는 짐승이 한 마리 있었다.

“재미없네요.”

자수정이 머리를 기울였다.

“흑색마녀 씨. 이미 죽은 사람들을 위하는 방법을 모른다면, 그걸 아는 다른 사람이 어디엔가 있을까요? 혹시 그런 사람을 아시나요?”

“그런 인간이…… 있을 리, 없잖아……."

“확실히. 인간 중에는 없겠어요.”

자수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면 용(龍)들 중에는 아는 이가 있을지도요.”

숨이 끊어지는 도중에 붉은 손톱의 수장은 알게 되었다.

“고마워요. 흑색마녀 씨. 덕분에 오늘 소인의 무능함을 깨달았어요.”

눈앞에서 공손히 머리를 숙이는 이 귀족은, 어딘가가 치명적으로 망가져 있다.

“안타깝게도 이 무능은 당분간 해결할 수 없겠네요. 용제(龍帝)들은 대부분 왕국 바깥에서 살고. 지금 소인이 정무를 내팽개치고 용의 꼬리나 쫓아다니면 이 왕국, 금방 멸망해버릴 테고…. 으흠. 그래요. 일단 용어(龍語)를 배워야만.”

자수정은 환히 웃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소인이 사자(死者)를 위하는 방법을 알아낸 다음 바로 흑색마녀 씨한테 보답부터 해드릴게요.”

“괴, 물……."

“안녕히 계시기를.”

자수정은 마녀의 목을 참했다.

“다시 눈을 뜨면, 행복한 봄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자수정 자작은 일약 영웅으로 등극했다.

붉은 손톱의 간부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 전원 자수정에게 항복했다. 테러에 지친 자들은 숲속의 마을에 은거했고, 여전히 피에 굶주린 자들은 자수정의 사병이 되었다. 왕국은 멸망하는 중이었다. 순인종과 아인종의 갈등이 아니더라도 핏물이 흐르는 전쟁터는 즐비했다.

자수정은 왕국의 독을 하나씩 수집했다.

‘무위식 공작의 애완’이자 ‘참벌사 왕녀의 스승’이며 ‘흑색마녀를 사냥한 자’. ‘붉은 손톱의 법통을 이어받은 자’.

어린 나이에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비아냥거리기엔 지나치게 화명한 이명.

그러나 그녀가 앞으로 얻어낼 이름들에 비해선, 초라하다 일컬을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황금룡(黃金龍) 씨."

마녀사냥이 이루어지고 1년 뒤.

“처음 뵙겠어요. 소인은 왕국 귀족, 자수정 자작가의 가주, 자수정이라고 해요.”

자수정은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그녀의 등 뒤로는 수많은 전사들이 서 있었다.

지난 1년 간 그녀가 수집한 ‘독’들이었다.

[왕도제일검] 궁극검 공작. [수도군벌의 수장] 세아귀 자작. [집행자] 유익묘 남작. [붉은 손톱의 마지막 수령] 주탄하. [내경의 불사조] 난락제 왕녀. [자수정 자작의 꽃] 심안찰 자작…….

한 때 왕국의 멸망을 꿈꾸었던 자, 원했던 자, 앞당기려 했던 자, 반겼던 자, 무시했던 자. 능히 왕국을 뒤엎고도 남을 전력이 자수정 자작의 등 뒤에 도열했다. 그들의 칼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용을 지키기 위해 뛰어든 병사들의 피였다.

“초면에 무례한 말씀이겠으나.”

자수정이 환히 웃었다.

“혹여 이미 죽은 자들을 위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지요?”

그 날.

자수정은 누천년을 살아온 용을 사로잡았다.

[제2막.]

[용제 사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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