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 누군가의 주인. (3) >
3.
이곳은 트라우마가 재현될 곳.
내 눈앞에서 걷고 있는 자수정 자작 또한, 말하자면 꿈속에 등장한 인물이나 다름없다. 나는 꽤 많은 악몽을 거쳐 왔지만, 자신이 트라우마의 인물임을 [자각]한 사람은 자수정이 최초였다.
“기분이 이상하거나 그러진 않으십니까?”
“네?”
“그야, 왜. 진짜로 존재하지 않으신다는 거잖아요. 여긴 저의 스킬이 빚어낸 트라우마고……."
“딱히요? 소인이 지금 느끼는 이상함이라면 김공자 씨, 당신이 구원하 자문사의 얼굴로 구원하 자문사의 목소리를 하고 있으면서 당신의 말투로 얘기한다는 것뿐이에요. 존나 이상하네요.”
자수정 자작이 키득거렸다.
“김공자 씨는 남자인가요, 여자인가요? 첨탑세계의 작명법을 고려하면 아마도 남자이지 않을까 싶은데.”
“아, 예. 남자입니다.”
“역시. 그런 당신에게 거울을 선물하지요.”
자수정 자작은 품 속에서 얍, 손거울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내 얼굴을 비추었다.
거울 표면에는 내가 빙의한 인물. 즉, 구원하 남작의 얼굴이 반사되고 있었다.
“어때요?”
"......."
“반반하지요? 알아요. 당연히 반반하지요. 다른 누구도 아니고 소인의 자문사인걸요.”
자수정 자작은 장난치듯 쿡쿡 웃었다.
하지만 구원하 남작의 얼굴은 장난에 그칠 수준이 아니었다.
‘아름답다.’
칠흑의 머리칼이 어깨까지 짧게 내려갔다. 빛이 비치어도 머리카락은 윤을 내거나 기름으로 번들거리지 않았다. 그저 흑(黑). 어떠한 빛도 미끄러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구원하 남작의 단발은 완연한 검은색으로 칠렁였다.
“와… 음. 으으음.”
칠흑의 머리카락과 정반대로 피부는 새하얗다. 얼굴이 백지장 같다고 흔히 말하는데, 이 사람은 온몸이 백지장으로 왁스를 발라놓은 것 같았다. 흑색과 백색, 오직 두 가지의 색조로 이루어진 사람이었다.
“신기하네요……."
“남자에서 여자가 된 기분은 어떤가요, 김공자 씨? 두근두근거리나요? 여기서는 양손으로 자기 양가슴을 몬지작몬지작하면서 [나, 정말로 여자애가 되었어!] 하고 깜짝 놀라는 클리세를 소인에게 보여주었으면 하는데요.”
“왜 하필 제가 이 몸에 빙의했을까요…?”
나는 정보 마법을 나 자신에게도 시전했다.
곧, 구원하 남작에 대한 서술이 죽 이어졌다.
+
[구원하]
신분: 귀족. 명예자작.
관계: 자작의 자문사.
위험도: 흑黑.
비고: 구원 가문의 가주. 영애 시절, 선선대 가주인 삼촌께선 흑백묘대전(黑白植大戰)에 휘말려 반란 혐의를 받아 폐작. 선대 가주인 아버지께선 이단교파들과 어울려다니다가, 교파의 숙청이 벌어질 때 함께 숙청. 가문의 윗어른들이 모두 죽었다. 구원하는 어쩔 수 없이 가주직을 맡게 된다.
반란과 숙청이 횡행하는 시대였다.
이 시기, 평소 친하게 지낸 시방패 후작이 접근. 반란군 수괴가 낳은 젖먹이를 부디 보살펴달라고 부탁한다. 구원하 남작은 반란군의 딸을 받아들여, 누구도 몰래 자신의 딸로 키운다.
딸은 시방패 후작과 함께 비밀리에 군대를 조직. 이 군대가 발각되자, 왕국에선 토벌령을 내려 쓸어버린다. 이 건으로 인해 시방패 후작은 처형당한다.
구원하 남작은 남작위를 폐작당하고, 자유민 신분으로 강등. 4절 마법 보유자임에도 불구하고 마탑(魔塔)에서 추방된다.
아무것도 없이 길거리를 돌아다닐 때 테러조직 [붉은 손톱] 에 의해 납치. 이후, 9년 이상 붉은 손톱 아지트에서 감금당하고 학대당한다.
그리고.
자작을 만났다.
강점: [냉철한 판단력], [실행력], [2차 승천인]
약점: [반란군의 후계], [반란향 출신], [반란의 당사자], [반란수괴의 가족], [자수정 자작]. [딸아이]
+
이분도 참 파란만장한 인생을 사셨구먼.
“원래 귀족 가문이었는데 셋이나 줄줄이 반란에 엮였다는 거죠…?”
“아. 자문사가 만들어놓은 정보공책 보는 것이군요. 예, 맞아요. 삼촌, 부친, 본인. 세 명 모두 보란 듯이 반란에 엮였어요. 심지어 그 반란들이 전부 다른 반란이라는 게 웃기는데, 더 웃긴 건 뭔지 아세요?”
“뭡니까…?”
“자문사에게 딸이 한 명 있다고 나와 있지요? 원래는 반란군 수괴의 딸이었는데 시방패 후작의 부탁에 어쩔 수 없이 맡게 된 딸아이. 그 아이도 나중에 성장해서 진짜 반란군을 이끌게 된답니다.”
“씨발?”
“집꼬라지가 개같다, 는 표현은 이럴 때 써야죠. 소인도 이런 집안은 듣도보도 못했어요. 집안 전체가 반역 페티쉬인 줄 알았다니까요."
“아버지가 반란군이고, 딸아이도 반란군이고, 저조차도 반란에 엮여 있는데, 어떻게 아직도 귀족위를 유지하는 겁니까?”
“서프라이즈?”
“말이 안 되잖아요!”
“오우. 말이 안 되는 걸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세상엔 두 종류 있어요. 김공자 씨. 하나는 그냥 멍청이죠. 다른 하나는 권력자예요. 소인은 권력자이므로, 구원하 자문사에게 다시 귀족위를 하사했어요.”
"......."
“언더 스탠드?”
“자작님, 영어를 하실 줄 아는군요….”
“예. 독일어와 영어, 불어, 한국어, 일어까지는 대충 회화가 가능해요. 바깥세상에선 이세계로 넘어가는 풍습이 유행이라죠? 정반대로, 여기선 이세계인을 받아주는 풍습이 유행이어서요. 저도 어느 이세계인 과외선생님한테 언어 좀 배웠죠.”
“어라. 그럼 혹시 이 세상에도 영국인이나 프랑스인이 살아요?”
“아니요.”
달칵.
자수정 자작은 손거울을 닫았다.
그것과 동시에 내 눈앞에서 일렁거리던 글씨들도 휙 사라졌다.
“다 죽었어요. 한 분만 빼고.”
"......."
“유행에 편승해서 [나도 이세계에서 꽁냥꽁냥 모험할 테다!] 라고 즐거워하는 순간, 세상은 어디를 가도 세상이고 죽음은 어디에서도 죽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지요. 이세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외부인이라니. 그걸 알면 얼른 감금해버리거나 죽여버릴 수밖에 없잖아요? 소인들에게는, 소인들이 지켜야 할 것이 무척 많아요.”
"......."
“뭐, 어두운 이야기는 여기까지로 할까요. 얍."
자수정 자작은 손거울을 집어넣은 대신 이번엔 컵을 꺼내었다. 어디서 나온 거야? 자수정 자작의 품 속에 도대체 어떤 물리법칙적 공간이 숨어 있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김공자 씨, 잠깐 양팔을 벌려보세요. 몸이 보이게요.”
“이, 이렇게 말입니까?”
“네. 자아, 이 물잔은 보통 물잔이 아니라 반석으로 만든 물잔이거든요? 그래서 이런 묘기도 가능하답니다.”
자수정 자작은 어째서인지 내 몸을 향해 컵을 들이밀었다.
푹.
컵이 내 몸 속으로 들어갔다.
“어?"
“훗.”
자수정 자작의 컵이 내 몸안을 휘저었다. 잠시 뒤, 자작이 손을 빼자, 컵안에는 물이 꽉 채워져 있었다.
“!?!?!?”
“어때요? 개신기하지요?”
“이, 이게, 이게, 무슨, 이게 뭔……!”
“참고로 말하면 겁나게 맛있어요. 이 물. 존나 일급청정수한테 뺨따귀를 때려버릴 정도로 시원해요.”
자수정 자작은 내 몸에서 퍼낸 물을 호르릅 마셨다. 세상에. 지나치게 이해불가능한 현상을 눈앞에 두고 내 머리는 고장났다.
“푸하아아… 시원하다. 이래서 소인이 자문사를 데리고 다니지 않을 수가 없다니까요.”
“구원하 자문사는 승천인이에요. 승천인. 이 세계엔 승천이라는 법칙이 있어서, 시련을 이겨낸 사람은 [조금 더 많은 걸 할 수 있는 인간]으로 바뀌어요. 무엇보다 [한 번 죽어도 죽지는 않는다]라는 은혜를 입게 되지요.”
“한 번 죽어도 죽지는 않는다……? 무슨 소리입니까?”
“말 그대로예요. 승천인은 한 번 죽으면 막 쪼끄매져요. 그 상태에서 한 번 더 죽으면, 그때가 정말로 죽는 순간. 더 이상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고, 평범한 사람처럼 목 날아가 뒤진답니다.”
"......."
“그렇지만 왕국에는 놀랍게도! 승천 너머의 승천. 하늘 너머의 하늘. 두 번째 하늘을 밟은 자들이, 극소수나마 존재해요!”
자수정 자작은 연극조로 과장된 몸짓으로 내 손을 붙잡았다.
“그것이 바로 당신! 구원하 남작! 이 넓은 세계에서 열두 손가락으로 셀 수나 있을까 말까 한, 정말로 극도로 극히 드문, 2차 승천인 마법사가 바로 그대, 구원하 남작이에요!”
“……제가 대단한 인간이라는 건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제 몸에 컵을 들이밀면 물이 떠지는 겁니까?”
“2차승천인은 슬슬 인간성에서 벗어나요. 약간 신회적인 존재가 되어간다고 보면 되는데. 가령 소인의 첫 번째 자문사는 핵이 [불] 이라서, 원하기만 하면 그냥 불사조처럼 도시를 붙태워버릴 수 있어요. 반면에 두 번째 자문사인 구원하 남작의 핵은 [물]. 그것도 아주 깨끗하고 아주 서늘한 물이지요.”
자수정 자작이 검지로 내 뺨을 스으윽, 훑었다.
“소인을 지탱하는 두 분의 지팡이가 공교롭게도 불길과 물길이라니. 소인은 정말 복스러운 인생을 타고 났다니까요?”
자수정은 손끝에 맺힌 물을 입술에 발랐다.
안 그래도 분홍빛인 입술에 내 물방울이 흘러내려, 더 윤이 났다.
"......."
“소인 전용의 립밤. 소인 전용의 세면장. 소인 전용의 세면실. 소인이 언제나 갓 물을 털고 나온 듯 생생한 향을 유지할 수 있도록, 구원하 남작은 소인을 시종하고 있어요. 안타깝게도 오늘은 욕조를 이용할 수는 없겠네요. 김공자 씨 때문에.”
그렇다.
확실히 이해했다.
‘구원하 남작은 자수정 자작의 가신이고, 자문사이며, 이 세상에 12명도 없다는 2차 승천인 대마법사이지만. 4대에 걸쳐 왕국에 반란을 일으킨 흉악무도한 가문의 인물이지만.’
구원하는 자수정을 사랑한다.
‘내 몸을 이루는 물은 단지 자작을 기쁘게 하고 편안하게 하는 데 쓰일 뿐.’
즉, 구원하 남작의 주인은 자수정 자작이다.
구원하에겐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지만, 자수정 자작을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은 그 밖에도 무수했다.
우리가 휴게실에 들어서자마자 수많은 귀족들, 귀족들을 호종하는 시종들이 몰려든 것이었다.
“자수정 자작 각하!”
“지난 안건에서 찬성표를 던져주신 것에 대해….”
“아직 시노아(屍怒?I) 남작령에 형편이 어려운데 왕실에선 이를 어찌….”
“분부하신 대로 고깃덩어리는 영상궁과 협력하여 확보해두었습니다. 다 썩은 고기도 상관없다 말씀하시어서 물량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각하. 이걸 어디로….”
와글와글.
마치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부 자수정 자작과 상담해야 한다는 듯 인파들이 떠들었다.
자수정은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일일이 대응했다.
“예, 여기 사인이에요.”
“시노아 남작령에 새로이 영주만 내려보내지는 않을 것이에요. 왕국에서는 해당 영지와 영지 주변의 공허(空虛)구역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어요. 재상부 차원에서 지원이 이루어질 것이니, 너무 염려하지 말고 기다리세요.”
“잘했어요. 고기는 그대로 왕실로 옮기세요. 내경(內京) 말고, 언제든지 대의회장으로 가져 올 수 있게 가까운 곳에다 쌓아두세요. 영상 합하껜 소인이 이미 말씀을 드려놨어요. 거기 가면 왕실의 상궁과 나인들이 잘 도와줄 거예요.”
청원한 사람들은 전부 “감사합니다!” “송구합니다!” 하고 예를 표한 뒤 또 어디론가 달려갔다.
휴게실에서 앉아 있는, 다른 수십 명의 귀족은 그동안 침묵하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자수정 자작을 노려보는 자도 많았다.
“오늘도 자수정 자작께선 왕국을 구하느라 바쁘시군. 굉장해. 누가 보면 자작이 아니라 공작은 되는 줄 알겠어. 이 얼마나 백성들을 보살피는 마음이 가륵하신지….”
“아루호(开樓虎) 백작 각하.”
어느새 휴게실엔 순흑신 자작이 돌아와 있었다. 순흑신 자작을 중심으로 수십 명의 귀족들이 앉아서 차를 마셨는데, 그들이 바로 [자수정 자작의 파벌]이었다.
“누가 뭐라 하여도 올해 가장 눈부신 공을 거둔 귀족은 자수정 자작입니다. 그에 걸맞는 보상과 대우가 약조되어야 마땅하겠지요.”
“원래 전쟁판에선 제일 잘 죽인 놈이 제일 대빵이야. 귀족이 그것도 몰라?”
“하. 우두머리가 천박하니까 아랫것들도 똑같이 천박하군. 어디 명예자작 주제에 백작의 말에 끼어드냐?”
“왜? 결투 걸려고? 거시든가.”
나는 자수정 파벌의 사람들이 입을 열 때마다 정보를 확인했다.
“안 그래도 저기 회의실에서 13시간이나 발을 물에 불렸다. 13시간. 너 힘들고 나 힘들고 우리 모두 힘든데, 왜 하필이면 제일 힘든 우리 당수(黨首)를 건드려? 쳐맞을래?”
+
[대하란]
신분: 귀족. 명예자작.
관계: 자작의 제자.
위험도: 백白.
비고: 전(前) 왕정군 백금장군. 60년 전 반란이 대대적으로 일어났을 때 선봉에 서서 반란군을 진압했다. 이때 발생한 사망자가 양군 합쳐 6만. 민간인을 합치면 21만이다. 그러나 이 반란 자체가 왕실에서 계획적으로 꾸며낸 일이라는 게 발각되자, 왕정군은 해산되고, 대하란(大臟卵)은 무직이 된다.
대하란은 왕국에 왕정군이 없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며, 귀족들의 사병에 전적으로 안보를 맡겨서야 기다리는 것은 파멸뿐이라 주장. 극단적인 폭력시위를 통해 왕정군의 필요성을 이끌어낼 계획…… 이었지만, 자수정 자작에 의해 사전 차단당했다.
자수정 자작께선 대하란을 막내 제자로 받아들였으나, 도통 말을 알아먹지 못해 고생하고 계신다.
아군.
죽일 수 있다.
강점: [생존], [무술], [전투], [전쟁]
약점: [학살자],[약탈자], [참을성 없음], [전쟁 이외엔 멍청함]
주의: 백설토 후작가에서 식객 살이 중.
+
그리고.
나는 슬슬 눈치채기 시작했다.
“뭐, 쳐맞아? 오냐. 새우알 새끼야. 오늘 내가 네놈 명줄을 따주......."
“기다려. 다들 너무 열이 오르지 않았니?”
온화한 인상의 귀족이 디리링, 관현악기를 손으로 뜯었다.
“오늘은 60년 만에 국왕 전하께서 친히 의회에 참석해주신 날인걸. 이런 날에 휴게실에서 귀족끼리 결투를 벌였다는 얘기가 나오면, 아마 전하의 체면에 누가 되지 않을까? 그걸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하더라도 자수정이 슬퍼할 거야.”
+
[해명섬]
신분: 귀족. 왕도남작.
관계: 자작의 동료.
위험도: 청靑.
비고: 전 해명섬문(海鳴閑門)의 문주. 해명섬문은 극소수로 이루어진 정예였다. 주로 요인암살, 거점파괴, 수확이 이루어질 농장에 방화, 독물을 통한 토양 오염 등, 특수공작에 투입되어 높은 명성과 어마어마한 실적을 자랑했다. 과거 육천문(六天門)이라 불린 왕국 6대 용병단 중 하나.
자수정 자작께서 육천문을 전격 발탁할 때 따라 들어와 남작위에 봉해졌다.
아군.
죽일 수 있다.
강점: [생존], [신속], [반드시 의회를 지킴], [승천인]
약점: [방화마], [독살자], [방랑벽]
주의: 자수정 자작을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기 시작함.
+
이렇게까지 정보가 많이 모이면 보일 수밖에 없다.
자수정을 주인으로 모시는 연인들의 ‘공통점’이.
휴게실에서 입을 여는 사람 하나하나마다, 외모가 달랐고, 성격이 달랐으며, 인생이 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지울 수 없는 빨간줄이 강하게 그어져 있었다.
“음. 나는 오늘에야 남작위를 받은 신참이니, 정 결투를 해야겠다면 나를 대신 보내라. 얼빠진 신참 놈들끼리 무례한 짓을 저질렀다 정도로 풍문이 끝날 거다.”
구세주(救世主) 남작. 자작의 노예.
반란수괴의 오른팔이 되어 수백 명을 직접 고문하다 죽였다.
“굳이 결투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아루호 백작이 화를 내는 이유는, 자신들이 아무것도 못하고 스승한테 일방적으로 밀린다는 느낌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일방적으로 승리를 되갚아주면 문제가 해결될 거예요. 아루호 백작은 왕기에 능숙하다고 들었으니, 스승과 왕기를 두어서 이기면 되지 않을까요.”
세아귀(世飯鬼) 전 자작. 자작의 제자.
순흑신 자작과 마찬가지로 [붉은 손톱]한테 납치된 경력이 있음. 그때 ‘어둠의 의식’을 배웠고, 무사히 왕도로 돌아온 다음부터도 의식을 속행.
휘하 귀족들과 함께 수천 명의 인간을 잡아먹었다.
"......."
어린 백설토 후작마저 평민의 아이를 채찍찔로 때려 죽인 전과가 있다.
“김공자 씨?"
파벌들 사이의 신경전을 구경하고 있던 자수정 자작이, 나를 돌아보았다. 수많은 민원을 즉석에서 처리했는데도 지친 기색이 안 보였다. 오히려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아니, 여기서는 구원하 자문사라고 불러야지요. 그래요. 구원하 자문사. 소인의 얼굴에 뭐 이상한 거라도 묻었나요? 얼굴이 하얘요. 아니면 혹시……."
즉.
자수정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바라던 대로, 이제 알게 되었을까요?”
살인자.
혹은 학살자다.
“소인이 어떤 인간인지 이제 조금은 알겠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