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 황금률. (2) >
2.
우리는 대의회장으로 발을 들였다.
뚜벅. 자수정 자작이 앞발을 내디딜 때마다 뒤로 수십 명의 귀족이 뚜벅, 뒤따랐다. 발소리가 교차하는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마지막 전투를 코앞에 둔 정예병들처럼.
"......."
대의회장에 입장한 순간, 나는 숨이 콱 막혔다.
이미 도착해 있던 타 파벌 귀족들이 일제히 이쪽을 돌아본 것이다.
분노에 차서 노려보는 자.
질투에 물들어 째려보는 자.
선망과 동경에 흠뻑 젖어서 올려다보는 자.
세상에 백의 감정이 있다면 백의 시선이 자수정 자작에게 향하고 있었다.
“안녕하셨나요, 여러분. 슬슬 회의가 재개될 것 같아서요.”
자수정 자작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소인의 파벌원들과 같이 왔는데. 너무 늦었을까요?”
적막.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수정 자작은 애초에 답변을 바라지 않은 듯했다. 싱글벙글 웃음을 흘리며, 자수정 자작은 제자리를 알아서 찾아갔다.
“뭐 하세요, 자문사?”
발길을 옮길 적에 자수정 자작이 나를 돌아봤다.
“예?"
“자문사의 자리는 소인 바로 옆이잖아요. 얼른 따라오세요. 설마 소인의 옆을 차갑게 비워둘 생각은 아니겠지요.”
아.
‘기억이 애매모호해진 나를 배려한 거구나.’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조용히 자수정 자작을 따랐다.
내게 배정된 의석에 다가가자, 그제야 대의회장의 광경이 눈에 좀 들어왔다.
내가 흔히 알고 있는 [의회]의 모습과 많이 달랐다.
우선 반원형이 아니라 완전한 원 형태였다. 콜로세움을 닮았다. 정중앙에 옥좌가 기둥처럼 박혀 있었고, 그 주변을 귀족의원의 좌석들이 둘러쌌다.
제일 특이한 부분은 따로 있었다.
‘……물?’
그렇다. 물이 흘렀다.
의석 아래로 수로(水路)가 설치됐다. 자리에 앉으면 무조건 발을 물에 담가야만 했다. 수로는 의회에 거미줄처럼 퍼져서, 흐르고 흘러 내려, 마침내 옥좌에 설치된 하수구까지 이어졌다.
“양수에요. 읏싸.”
자수정 자작은 가죽부츠를 벗은 뒤 앉았다. 주위를 둘러보면 다른 귀족들도 익숙한 듯 신발을 벗고 있었다.
“양수요?”
“예. 양수(羊水). 왕도의 지하에는 거대한 호수가 있어요. 그 호수에서 물을 길어올려 도시 곳곳으로 수로를 잇는데, 제일 먼저 물길이 통과하는 곳이 바로 여기. 백금탑의 대의회장이에요.”
나는 남들을 따라 신발을 벗었다.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여러 의미가 있지요. 여러 용도가 있고요. 소인들은 의회에서 법을 만들고, 법은 왕국을 만들어요. 왕국은 바로 이곳에서 태어나는 셈이에요. [우리가 왕국을 출산하고 있음을 항시 주의하라]. 그러기에 양수라고 불리지요.”
나는 양말까지 벗어 수로에 발을 담갔다.
찰랑, 발가락 사이로 따스한 온수가 스며들었다.
“따뜻해……."
“네, 지금은 겨울이니까요. 여름엔 시원해요. 이 넓은 회의실의 온도를 조절해주는 역할도 겸하고 있지요.”
“신기하네요.”
“온도뿐만 아니라 의제의 심각성에 따라 물빛이 바뀌기도 해요. 가령 의회에서 용국(龍國)의 토벌을 결의하면 양수가 핏물처럼 빨개져요. 왕도 전역에 흐르는 수로들도 붉게 물들지요. 작금에 위급한 사태가 벌어졌다, 고 백성들한테 알려주는 거예요.”
“헤에.”
“요컨대 백성들은 귀족들의 발가락이 한 번 훑고 간 물을 일상생활에서 쓰는 셈이지요. 이 사실이 몇몇 극소수의 귀족들과 신민들에겐 패티쉬적인 만족감을 안겨주나 봐요. 여러모로 실용적이지요?”
아니. 그건 좀.
내 질색한 표정을 보고 자수정 자작은 쿡쿡 웃었다.
“김공자 씨. 지금 전혀 구원하 자문사답지 못해요.”
“예?"
“소인의 자문사는 절대 그런 표정을 안 지어요. 김공자 씨의 정체가 탄로나도 재밌어지겠지만, 지금은 회의가 먼저니까요.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해주시면 감사하겠어요.”
음.
“구원하라는 분의 말투가… 어떤데요?”
“어라? 기억 안 나세요?”
“예, 조금 기억이 흐릿해서. 양수도 지금 처음 본 것처럼 느껴지는걸요."
“흐응.”
자수정 자작은 눈웃음을 지었다.
“뭐, 간단해요. 대체로 공손하게. 대부분 무표정하게. 세상사에 무관심하다는 투로 '입니다' '합니다' '습니다' 체로 말하면 그게 구원하 자문사의 어조예요.”
나는 미간을 좁혔다.
“……이렇게 말입니까?”
“좋네요. 약간 아쉽지만요.”
자수정 자작은 턱을 괴고 나를 바라봤다.
“조금만 더 무표정해지면 딱 맞겠어요. 소인의 자문사는 정말로 세상에 아무런 가치도 두지 않거든요.”
“세상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
“예. 그게 사람이든 백성이든 왕국이든, 일절 가치를 매기지 않아요. 자문사의 마음에서 무게를 가지는 존재는 오직 소인과 딸아이뿐이에요. 나머지는 전부 의미 없는 소음에 불과하지요.”
"......."
문득, 이 몸의 원래 주인이 표시해둔 정보마법을 떠올렸다.
그녀는 자수정 자작에 대해 이렇게 적어놓았다.
+
저의 주인.
저의 심장.
저의 피.
이 세상의 모든 것.
+
두근.
그 메모를 떠올리자 왠지 모르게 가슴이 저릿했다.
자수정 자작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표정 연기가 제법인걸요. 혹시 따로 연기를 배우신 적 있나요?”
“……있습니다. 탑을 오르는 도중 연극에 매진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의외로 다재다능하시네요. 김공자 씨. 지금은 무척, 구원하 자문사 같아요.”
자수정 자작의 눈웃음이 짙어졌다.
“이제부터는 김공자 씨가 아니라 계속 [자문사]라고 불러도 괜찮지요?”
왜일까.
심장이 다시 두근거렸다.
"......"
단지 자수정 자작과 눈을 마주치고 있을 뿐인데도 가슴이 갑갑했다. 이번 트라우마 세계에 빙의한 직후에 그랬듯이 머리에 안개가 낀 것이다.
다행히도, 안개에 완전히 휩싸이기 직전 주의를 환기시켜준 목소리가 있었다.
“주상전하 납시오!”
회의가 재개되었다.
3.
회의가 시작하자마자 타 파벌 귀족들은 자수정 자작을 향해 파상공세를 퍼부었다.
처음으로 포문을 연 사람은, 휴게실에 있을 때부터 각을 잰 아루호 백작이었다.
“자수정 자작은 사사로이 반란군을 수하로 받아들였다. 붉은 손톱뿐만이 아니다. 돌의 집회, 반돌, 왜악, 천신, 심장. 근래에 소란을 일으킨 반란도당은 죄다 자수정 자작의 부하가 되었지. 이런 전적을 가진 귀족을 공작위로 천거할 수는 없다.”
수백 명의 귀족이 아루호 백작을 바라보았다. 왕국의 국왕 또한, 아무런 말없이 백작의 발언을 내버려두었다.
회의라기보다 자수정 자작에 대한 청문회에 가까웠다.
“지금 당장이라도 자수정 자작의 그늘 아래에 숨어든 반역자들을 도로 잡아들여, 그들이 저지른 죄악에 따라 처벌함이 옳다. 만일 자작이 왕국의 충신이라면 마땅히 협조할 것이다. 안 그런가, 자작? 역심을 품은 게 아니라면 무슨 연유로 반역자들을 숨겨주고 있겠는가?"
“백작님. 소인이 수하로 받아들인 아이들은 모두 소인이 생포한 자들이에요.”
자수정 자작은 미소를 지은 채 반박했다.
“전쟁터에서 사로잡은 포로는 모두 장수의 소유가 되지요. 소인이 마음대로 소유물을 처리하겠다는데 뭐가 문제인가요?”
“그게 설령 왕국에 칼을 겨눈 반역자들이라 해도 말인가?”
“물건에는 죄가 없는걸요. 뛰어난 무사의 칼은 수십수백 명의 피를 머금었어요. 그러나 누구도 그걸 칼의 잘못이라고 탓하지 않아요. 무사의 잘못이라면 또 모를까요. 소인은 그저 피를 좀 많이 머금은 칼들을 수집했을 뿐이에요.”
“지금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들을 두고 물건이라 말하는 것인가!”
“네."
"......."
“소인의 소유물이라니까요. 꼬우면 백작님이 생포했어야죠. 아니면 노예제를 폐지하시든가요.”
참, 하고 자수정 자작이 천연덕스럽게 눈을 깜빡거렸다.
“아루호 백작령에는 노예들이 많지요? 재정이 노예경제에 의존하는 영지는 좀 안타깝네요. 진즉에 영지 경제를 일신하시지 그랬어요."
“감히 백작가의 경영에 이래라 저래라….”
“똑같아요. 소인이 잡은 포로들 역시 소인의 사유재산이에요. 백작님에게 무슨 권리가 있어 가문의 일을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서로 선을 지키는 편이 백작님과 소인 양쪽 모두에 좋지 않을까요?”
아루호 백작이 이를 물었다.
“……자작의 소유물이 아니라 버젓이 살아있는 사람이 죄를 저질렀다면 어쩔 텐가.”
"으흠??"
“전하.”
아루호 백작이 옥좌를 바라보았다.
“삼가 전하께 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
“발언하시오.”
“새로운 공작위를 만드는 것은 왕국 이천 년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막중한 사안이옵니다. 그만큼 엄중한 절차가 요구되는바, 공작 후보의 도덕적 자질을 검증하는 것은 필수라 사려되옵니다.”
태양왕은 묵묵히 백작의 말을 들었다.
지난 60년 동안 궁궐에서 나오지 않은 국왕이었다. 일하지 않는 자에겐 성공이 없었고, 성공하지 않은 자에겐 권위가 없었다. 태양왕에겐 권위가 없었다.
그리고 귀족들은 권위 없는 자를 존중하지 않았다.
“소신은 자수정 자작의 도덕적 품성에 관해 상당히 의심스러운 보고를 몇 개 접하였사옵니다.”
"......."
“이에, 전하께서 윤허해주신다면 이 자리에 증인들을 소환하고자 하옵니다.”
태양왕은 고개를 돌려 자수정 자작을 쳐다보았다.
자작의 의중을 묻는 눈빛이었다.
자수정은 아무 걱정도 하지 말라는 듯 싱긋 웃었다.
“……윤허하겠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미리 준비된 증인이 속속들이 의회에 입장했다.
제일 먼저 양수에 발을 디딘 자는 행색이 단정한 노인이었다.
아루호 백작이 노인에게 물었다.
“증인은 이름이 무엇인가?”
“남석(消石)이라 하옵니다.”
“증인의 신분과 출신은 무엇인가.”
“자유민이옵니다. 41년 전, 사조성(死此星) 남작령에서 왕도로 와 정착하였습니다.”
“남석아. 한낱 백성 된 몸으로 이 자리에 발을 디뎠으니 네 몸에 하사된 성은이 결코 가볍지 않다.”
노인은 무릎을 꿇어 이마를 바닥에 대었다.
“불초소생,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네가 억울하다며 귀족들에게 돌린 상소가 있을 것이다.”
“소생이 하나뿐인 손녀를 잃어 세상이 무너진 듯하여, 감히 미천한 붓길로 글귀 아닌 글귀를 몇 자 적어 귀하신 분들의 눈을 더럽혔나이다.”
"......."
나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내 옆자리에서, 백설토 후작의 낯빛이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손녀를 잃었다니 애석하구나. 하지만 사람의 목숨이 떨어지고 말고는 하늘에서 정하는 일이다. 어디 가족을 잃은 백성이 남석이 너 하나뿐이겠느냐. 무엇이 그리도 억울하여 상소문을 돌렸느냐?”
“천한 백성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은 이름 모를 잡초가 한 포기 베이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오나, 소생의 손녀는 하늘에서 거두어 들인 것이 아니옵기에 억울함을 호소하옵니다.”
“어허.”
아루호 백작은 짐짓 자비로운 위정자인 양 말했다.
“손녀가 어찌 죽었기에?”
“저의 손녀는 백설토라는 분께 채찍을 맞아 절명했사옵니다.”
양수가 술렁거렸다.
"백설토? 귀에 익은 이름이군. 그 자의 신분이 어찌 되는지 알고 있는가?”
"손녀가 죽은 6년 전에는 백설토 영애라고만 들었사옵니다.”
"백설토 영애라면 지금 저곳에 앉아 있는 후작 나리 아닌가.”
귀족들이 백설토 후작을 쳐다보았다.
후작은 이제 얼굴이 새파래졌을 뿐만 아니라,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후작.”
“예……?”
“여기 백성의 손녀가 후작에게 편초를 맞아 죽었다는군. 6년 전에 말이다. 이것이 사실인가?”
“아. 그것이. 저, 저는……."
그 순간, 자수정 자작이 일어섰다.
자작이 일어나면서 발 아래의 물이 튀었다.
“전하.”
“발언하시오.”
“백설토 후작가는 소인의 그늘에 머무르는 가문이옵니다. 소인의 가문이 종문(宗門)이옵고 후작가는 속문(屬門)이니, 아랫사람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마땅히 소인이 질책을 받아야 할 것이옵니다. 아루호 백작이 소인의 속하를 책문하는 것은 바르지 못한 줄 아뢰옵니다."
“……백작의 생각은 어떻소?”
“자수정 자작의 마음 씀씀이가 곱습니다. 소신 또한 백설토 후작이 아니라 자수정 자작에게 묻고 싶습니다.”
아루호 백작은 바로 그런 반응을 노린 것처럼 의기양양했다.
“자작.”
“예, 백작님.”
“자작은 후작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는가?”
“알고 있었어요.”
양수가 한 차례 더 술렁였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가?”
“소인이 백설토 후작을 속하로 받아들일 때 이미 알고 있었어요. 후작이 소인에게 직접 고백했지요."
“아니. 그렇다면 후작의 죄를 알았으면서도 속하로 받아들였다는 얘기인가?”
“그리 되겠네요.”
쾅!
아루호 백작이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어찌하여? 후작은 채찍질로 어린 백성을 때려 죽였다. 그리 잔인무도한 귀족을 무슨 염치로 받아들였는가!”
자수정 자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고 있자니 가슴속이 몹시 불안하게 울렁거렸다.
“아실련지 모르겠지만…. 당시 후작 영애는 천방지축으로 유명했어요. 바보 영애, 머저리 영애, 무뇌 영애…. 온갖 비아냥을 다 듣고 살았지요. 소인은 후작 영애를 만나고 나서, 이 아이를 제대로 키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대로 키워?”
“영애는 가문에서 학대받다시피 자랐거든요.”
백설토 후작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백설토 후작의 조부인 백미토 후작은 천재였어요. 안 좋은 의미로 천재였지요. 그는 자신보다 지능이 낮은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보다 똑똑하지 못한 손녀를 이해하려 들지 않았어요. 질타. 폭언. 학대. 백설토 후작의 유년기는 조부의 악의 어린 무시로 물들었어요."
아루호 백작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래서? 백설토 후작도 불쌍하니 용서해주어야 한다는 소리인가?”
“아니요.”
자수정 자작이 옷소매로 입가를 가리고 키득거렸다.
“그대로 가만히 두었다면 백설토 후작은 영원히 [무뇌 영애]인 채로 살았을 거예요.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후회할 일도 없이, 자책할 틈도 없이, 누군가가 보낸 암살자에 의해 편히 죽음을 맞이했겠지요.”
"......."
“소인은 그건 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뭐가 아니라는……."
“소인은 백설토 후작을 데리고 보름 동안 여행을 떠났어요.”
자수정 자작이 흥얼거렸다.
꼭 즐거운 과거를 회상하는 것 같았다.
“평생 손에 물을 묻혀본 적도 없는 영애한테 현실을 보여주었지요. 일하지 않으면 먹지 못하는 백성의 삶을 강제로 경험시켰고, 일해도 먹기 힘든 바깥세상의 현실을 역시 강제로 주입시켰어요. 덕분에 백설토 후작은, 설령 자신이 불행하다 하더라도 [견딜 만한 불행] 속에 있음을 깨달았지요.”
“그리고 소인은 영애와 주기적으로 수업을 가졌어요. 때로는 북쪽 항구에 가서 상인들의 일상을, 가끔은 도적 토벌에 끌고 가서 사람들의 목숨이 아작나는 광경을 보여주었어요.”
자수정 자작의 숨결은 붉었다.
마치 무언가에 도취된 사제처럼, 자수정은 나지막하게, 뜨거운 숨결에 채색된 말을 읊조렸다.
“아시겠나요? 백설토 후작은 아직 열다섯이에요. 열다섯이지만, 이미 천민의 죽음과 상인의 죽음, 도적의 죽음을 경험했어요. 감히 장담을 드리건대 백설토 후작은 이 왕국에서 열두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훌륭한 위정자가 될 것이에요.”
“하.”
아루호 백작이 비웃었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앞으로 훌륭한 정치가가 될 테니 과거의 오점은 덮어주자는 말이었군. 자작, 그런 썩어빠진 정신으로……."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네요. 백작님.”
“뭐?"
“앞으로 훌륭한 정치가가 되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요. 중요한 지점은, 그토록 훌륭한 귀족이 되어도 [결코 되돌리지 못할 잘못]을 과거에 범했다는 것이에요.”
자수정 자작의 숨소리가 열을 띄었다.
“아시겠나요? 훌륭해지면 훌륭해질수록 백설토 후작은 불행해져요.”
"......."
“제아무리 선정을 펼친들, 제아무리 수많은 백성의 삶을 위무한들, 백설토 후작님은 결코 자기 자신을 선인으로 여길 수 없어요. 당연하지요.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사실은 변치 않으니까요.”
자수정 자작은 양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어디엔가 기도하듯.
“소인은 백설토 후작을 왕국에서 제일 훌륭한 귀족으로 키울 것이에요. 그리고, 왕국에서 제일 불행한 귀족으로 자라나게 만들 것이에요. 날이 지날수록 불행이 후작을 염색하겠지요. 자책과 자괴가 어우러져, 후작의 얼굴을 채색할 것이 분명해요.”
"......."
“백작님. 그렇게 된 후작을 상상해보세요. 한 번 손짓할 때마다 허공에 불행이 묻어나오고, 한 번 걸을 때마다 과거가 그림자에 끌려 다니는 모습을, 부디 상상해주세요. 어떤가요?”
자수정 자작은 성녀와 같이 환히 웃고 있었다.
“사랑스럽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