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 황금률. (3) >
사위가 조용해졌다.
자수정 자작의 발언에 많은 귀족들이 동요한 것이다.
“사랑스럽다고……?"
아루호 백작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대부분의 귀족 역시 반응이 비슷했다.
단, 자수정 자작이 직접 거두어들인 자들.
자작에게 사랑받으며 자작을 사랑하는 연인들만은 낯빛에 변화가 없었다. 무덤덤했다. ‘나와야 할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며, 들어야 할 이야기를 듣고 있다.’ 자작의 연인들은 그렇게 여기는 듯했다.
“예에.”
당혹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자수정 자작이 말했다.
“자신이 초래한 불행에 무너지는 자. 그것도 고귀한 자가 자기 자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신음하는 광경이란, 언제 봐도 심금을 울리니까요. 백설토 후작은 굳이 비유하자면 꿀떡이랄까요? 한 입 물면 달콤함이 입안을 가득 메우지요.”
“……지금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아루호 백작은 얼이 빠졌다.
“하아.”
자수정 자작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명백히 아루호 백작을 무시하고 깔보는 태도였다.
“모르면 됐어요. 보물지도가 코앞에 떨어져도 그걸 찾으러 떠나는 모험가가 있는가 하면, 도리어 모험가를 비웃는 천민도 있지요. 그래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는 건가요?”
“뭐?"
“더 하실 말씀이 없느냐 여쭙고 있어요. 백작님. [불쌍한 백성이 있다.] [귀족에게 손녀를 잃었다.] [그 귀족이 소인의 속하다.] 지금 까지 거론된 이야기를 정리하면 이쯤 마무리 지어질 텐데, 여기서 더 나올 말이 없으면 이만 물러나시지요. 안 그래도 밤이 늦었거늘 회의가 더 지체되면 곤란하잖아요.”
“네, 네 녀석……. 이 노인은 하나뿐인 손녀를 잃었다!”
아루호 백작이 호통을 쳤다.
“그날은 조모의 생일이었다. 알고 있는가? 손녀는 할머니한테 생일선물을 주려 뛰어가다, 백설토 후작한테 맞아 죽었다!”
"......."
옥좌 아래서 머리를 찍은 노인은 온순히 엎들여 있었다. 그 노인에게 눈길 한 점 주지 않은 채, 아루호 백작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비녀. 여염집 여인들이 머리에 꽂는 장신구였다.
“봐라! 지금 내 놓인 비녀는 바로 손녀가 준비한 생일선물이다. 이 선물을 얼른 조모한테 주겠다며 뛰어가는데 도중에 그만 백설토 후작 영애와 부딪힌 것이다!”
아루호 백작은 필사적으로 열변을 토했다.
백작이 과연 노인의 처지를 이해하기에 필사적인 것인지, 나는 의문스러웠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간에 인간의 필사적인 모습은 설득력을 가졌다. 어느새 귀족들은 자수정 자작의 발언을 흘려넘기고, 안쓰러워진 눈빛으로 노인을 쳐다봤다.
“손녀는 눈밭에 쓰러졌다. 그리고 순박한 미소를 지으면서 [죄송합니다], [제가 앞을 잘 봤어야 하는데]라고 백설토 영애한테 사과했다. 사과를 했으니 용서해주었다면, 단지 그거로 끝날 뿐인,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사고였다.”
아루호 백작은 이제 완전히 확신을 되찾았다.
노인의 초라한 등, 그 위로 쏟아지는 동정, 만사에 무관심한 듯한 자수정 자작의 얼굴.
모든 요소가 아루호 백작에게 승리의 확신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백설토 영애는 평민의 아이를 붙잡았다. 그리고……."
“지루하네요.”
자수정 자작이 중얼거렸다.
잠자리의 날개짓처럼 잠깐 들리고 만 목소리였다.
나를 제외하면 아무도 자작의 혼잣말을 듣지 못했다.
아루호 백작은 여전히 힘차게 연설하고 있었다. 좌중의 시선은 백작에게로 향했다. 그러기에 내가 자수정 자작을 쳐다봤을 때, 나는 온전히 그녀의 독백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그 날 생일선물을 준비한 사람은 아리뿐만이 아니었어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리…… 가 누구입니까?”
“손녀요. 백설토 영애한테 채찍을 맞아 죽은 아이.”
자수정 자작이 툭 대꾸했다.
“그 날은 영애 할아버지의 생신이기도 했어요. 때마침 두 명의 소녀 모두 생일선물을 준비했던 거지요. 백설토 영애는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브로치를 손수 만들었는데, 그걸 할아버지한테 건네주지를 못했어요.”
“……왜입니까?”
나는 자작의 눈빛에서 기이한 기미를 느꼈다.
마치, 다른 사람한테 전해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가 직접 본 광경을 얘기하는 것 같은.
“할아버지가 준 수학 숙제를 제대로 풀지 못했거든요. 혼났어요. 영애는 차마 브로치를 건네줄 수가 없었지요. 세상에 어떤 아이가 잔뜩 얼굴을 찡그린 어른한테 선물을 줄 수 있겠어요?”
"......."
“길에서 평민의 소녀와 귀족의 소녀가 부딪혔을 때, 브로치가 눈밭으로 떨어졌어요. 떨어져도 그냥 떨어진 게 아니라 하필이면 평민의 소녀한테 밟혔지요. 부러졌고요.”
자수정 자작은 열이 사라진 얼굴로 말했다.
“딱히 값비싸 보이는 브로치도 아니었어요. 솜씨가 좋다고 말하긴 어려웠지요. 망가진다 해서 뭔가 큰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닌 잡품. 하지만 영애는 부러진 브로치를 주워들어서 평민 아이한테 들이밀었어요.”
“그리고 말했지요.”
너 때문에 망가졌어.
“평민 아이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숙였어요.”
죄송합니다, 아가씨.
정말로 죄송합니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사과를 할 줄은 알아도 사과를 받을 줄은 몰라요. 하물며 당시 백설토 후작 영애는 [무뇌 영애]라고 불릴 정도로 개차반 망나니였어요. 반응이 고울 리 없지요.”
망가지면 안 되는 건데, 네가 망가트렸다고!
“영애에겐 호위병이 붙어 있었어요. 뭐, 사실상 영애는 후작가의 유일한 후계자였으니까요. 따라붙은 호위병의 충심도 깊었지요. 그 호위병한테 영애가 손을 뻗었어요.”
호위병!
채찍!
“호위병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주인아가씨한테 채찍을 건넸어요. 영애가 채찍을 잡았지요. 자신의 손아귀에 비해 지나치게 두꺼운 채찍을, 영애는 낑낑거리면서 휘둘렀어요.”
어린아이의 채찍이 어린아이의 등을 내리쳤다.
“한 명은 온몸의 힘을 끌어올려 채찍을 쳤고, 다른 한 명은 온몸이 경련하면서 채찍을 맞았어요.”
차라리 전부 부서트려버리지! 뭘! 뭘! 이렇게, 뭘!
“아파요, 아가씨.”
“아파요. 영애님, 죄송해요, 아파요.”
바보 같아.
전부 멍청이들뿐이야.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는 바보야!
“아무도 영애를 말리지 않았어요.”
눈밭에는 핏물이 낭자했다고 한다.
백설토 영애의 호위병은 채찍을 돌려받았다. 영애를 호종하던 시종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시체 속에서 미처 간수되지 못한 유품을 주웠다. 평민 아이를 동정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전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을 뿐이다.
“봐라!”
지금에 이르러 그 유품은 아루호 백작의 손아귀에 들려 있었다.
“이 유품에 서린 한을 보지 못하겠는가! 자작!”
지난 6년의 공백에 비녀는 삭았다. 아마도 할머니에게 선물하기 위해 반짝반짝 닦아놓았을 비녀는, 이젠 광택을 잃고 제 피부에 먼지들을 받아들였다. 낡고 낡아빠져서, 어디를 가도 볼 수 있을 법한 잡품이었다.
“자작의 피는 냉혈한인가!”
"......."
자수정 자작은 기이한 미소를 지은 채 아루호 백작의 호통을 듣기만 했다.
“자작의 머리에는 성현의 이치와 고전의 글귀만 고여 있는가! 아니라면 어찌 이 유품, 이 피의 흔적, 이 죽음의 잔흔을 보고도 그리 태연자약하게 앉아 있는 것인가!”
아니다.
“자작에겐 정녕 인간의 피가 흐르지 않는군!”
그게 아니다.
아루호 백작은…… 그리고 사람들은 무언가를 착각하고 있다.
자작에게는 [모든 것이 다 보인다].
아루호 백작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심지어 저기에 등을 업드리고 있는 노인보다도, 훨씬 더 가까이서 손녀의 죽음을 목도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손녀가 죽어갈 때 마지막으로 무엇을 생각했는지. 무엇을 마지막으로 말했는지. 백설토 후작 영애가 뭐라고 악을 쓰면서 채찍을 휘둘렀는지.
자수정 자작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머리가 아찔해지는 가운데, 간신히 추론을 입으로 흘렸다.
“자작. 당신께서는…… [황금룡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흐응?”
그러자 자수정 자작이 나를 돌아보았다.
“무슨 말인가요, 자문사?”
나는 침을 삼켰다.
멀리서 아루호 백작이 고래고래 소리를 치고 있었다. 인본(人本)을 모르는 천것이라 욕했고, 근본이 없는 사생아라는 소리까지 나왔다. 백성을 아낄 줄 모르는 폭군이라 비방했다. 저런 자를 공작위로 추천함은 언어도단이라 단언했다.
사방이 시끌벅적했고, 덕분에, 우리 두 사람이 은밀한 속삭거림을 주고받기엔 최적의 환경이 만들어졌다.
“황금룡의 눈 말입니다.”
“예. 황금룡의 눈, 에 무언가 문제라도 있나요?”
“황금룡의 눈은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전지적인 관점에서 말입니다. 어떻게 당신께서 하나의 몸을 가졌으면서도 탑 전체를 망라할 수 있는지 알겠습니다. 자작. 당신에겐 삼라만상을 한꺼번에 직관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 것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래서요?”
“……거기에 더해서 당신은 [빙하룡의 숨결]까지 갖고 있습니다.”
가슴속이 쿵쾅거렸다.
“[빙하룡의 숨결]은 원하는 시간으로 이동하게 해줍니다. [무엇이든 볼 수 있는 눈]. [어디로든 향할 수 있는 숨]. 두 가지를 모두 가진 것입니다. 만일, 당신께서 바라신다면……."
“소인이 바란다면?”
“그 손녀 아이가 채찍질을 맞아 죽은, 바로 그 순간을 코앞에서 지켜보는 것도 가능합니다.”
나는 말했다.
“그것이 당신의 전지(全知)입니다.”
탑주가 전지적인 능력을 가지게 된 이유다.
“[황금룡의 눈]과 [빙하룡의 숨]을 써서, 당신은,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죽음과 절망을 가장 코앞에서 지켜볼 수 있습니다.”
"......."
“두 가지의 권능은, 당신으로 하여금 탑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을 지켜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이었다.
[정답.]
[제2관문을 돌파한 것을 인정합니다.]
[황금룡의 눈과 빙하룡의 숨결은 탑의 관측기관을 이룹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보라색 눈동자가 내 얼굴을 음미했다.
“맞아요.”
자수정 자작이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연한 입술의 끄트머리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쁘지 않네요. 자문사한테 주어진 정보는 별볼일 없었을 텐데요. 용케도 이리저리 조립해서 소인이 계획한 프로젝트를 알아맞추었어요.”
“당신은……."
“정답을 맞힌 용사에게는 보상이 있어야겠지요.”
자수정 자작이 내 손목을 살짝 움켜잡았다.
"---저 손녀의 죽음을 보여드릴게요.”
물컹.
발목에서 무언가가 기어올랐다. 뱀의 피부처럼 서늘했다. 깜짝 놀라 아래를 내려보니, 수면에서 물그림자, 그림자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어둠이, 내 살결을 따라 기어오르고 있었다.
“따라오세요.”
다음 순간, 나는 그림자에 파먹혔다.
4.
찰싸아아악-
채찍질에 엉겨붙은 눈발이 튀었다.
눈알맹이는 핏물에 엉겨붙어 무거웠다. 허공에 튀어올랐지만 얼마 높이 날아가지 못했다. 뭉특하게, 뭉특한 몸뚱어리로, 이미 새빨개진 피웅덩이를 향해 수직낙하했다.
“네 잘못이야!”
“살려……주세……요……."
“네, 네, 네 때문이야! 너! 너 잘못이라고! 너만 아니었으면!”
채찍이 허공을 내리쳤다.
피웅덩이의 수면에서 눈알맹이가 사르르 녹았다.
“아……."
자그마한 아이가 경련했다.
아이의 몸에 마지막으로 남은 체온 한점이 눈발으로 흘러내렸다. 그 체온에 녹아내린, 아주 미세한 물줄기가 주변으로 퍼졌다.
"......."
“저 아이예요.”
자수정 자작이 손가락을 들었다. 우리 두 사람은 골목의 어둠에 잠겨 있었다. 길거리를 오가는 행인이 있었지만, 서슬퍼런 후작가 호위병의 기세에 겁먹어 다들 골목길로 비껴 피해갔다.
“백설토 후작. 지금은 백설토 후작 영애지요. 10살 시절에 영애가 채찍으로 죽인 아이는 바로 저기에 누워 있고요.”
나는 본능적으로 뛰어나가려 했다.
그러나 불가능했다.
나보다 아득히 강한 악력을 가진 손아귀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안 돼요.”
“왜, 왜 안 됩니까? 지금 당장 가야 해요. 가서 의원한테 데려가면, 어쩌면……!”
“어쩌면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예. 어쩌면 겨울 한철은 죽을 듯이 아파서 고생하지만, 계절이 흐를수록 몸은 나아져서, 다시 평범하게 행복한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을지도 몰라요. 후작가에서 보상금도 두둑하게 내려주겠다. 오히려 예전보다 유복하게 살 수 있겠지요.”
“그런데, 왜 지금 제 손목을……!”
“자문사.”
자수정 자작이 미소를 지었다.
“김공자 씨.”
저기서 채찍 소리가 겨울 하늘에 울려 퍼졌다.
“소인이 대체 몇 번이나 이런 광경을 보았다고 생각하나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아이의 시체에, 앳된 영애가 사납게도 채찍을 때렸다. 그곳에서 누군가의 겨울이 죽어가고 있었다.
“소인은 열여덟 살이에요. 그러나 열여덟이라는 숫자로는 도저히 담지 못할, 무수한, 무한한 삶을 보내왔어요. 지금처럼 한 아해의 죽음을 지켜봤고, 수백 아해, 수천 아해, 수만, 수십만, 수백만, 수천만, 억, 조, 항하사(恒河沙)의 죽음을 바로 코앞에서 지켜보았지요.”
“소인은 왕국이 건국된 2001년 전 겨울부터 현재, 왕국력 2001년 12월 24일까지, 벌어진 모든 영아 살해와 강도 살인, 승전과 패전, 패주, 학살을 보았어요. 아직까지는 왕국의 역사에 한해서지만요. 언젠가는 이 세상. 아니, 모든 세계의 죽음을 전부 지켜볼 것이에요.”
“그리고, 아무 짓도 안 할 거예요.”
나는 목이 쉬었다.
“예……?”
“소인은 얼마든지 저 아이의 죽음을 막을 수 있어요. 얼마든지 억울한 죽음들을 되돌릴 수 있었어요. 회귀하고, 또 회귀하여서, 마침내 불합리한 죽음들이 모조리 없어질 때까지 회귀하여, 한 줄기의 올바른 세계선을 정초할 수도 있었지요.”
하지만.
“안 해요.”
자수정 자작은 방긋 웃었다.
“영원히."
"......."
“절대로 간섭하지 않아요.”
“어째서입니까……?”
“그래야만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불행이 오로지 [소인의 탓]으로 귀결되니까요.”
아이는 죽었다.
후작 영애는 씩씩거리면서, 제 분을 못 이겨 시체를 발로 찼고, 뒤돌아서서 어디론가 걸어갔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발이 작은 영애의 등을 가렸다.
“저 아이가 죽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문사? 무엇이 잘못되어서 죽었을까요.”
자수정 자작의 목소리에 사락눈이 묻었다.
“하필이면 백설토 후작 영애랑 마주친 것? 그게 잘못일까요? 글쎄요. 백설토 후작 영애의 잘못은 무엇일까요? 하필이면 되바라진 조부의 밑에서 자라난 것? 조부가 흡족해할 만한 머리를 타고나지 못했다는 것? 그렇다면 백설토 후작 영애는 태어난 것 자체가 잘못일까요?”
자수정 자작은 내 손목을 놓았다.
“아니에요. 그런 것들은 전부 우연이에요. 우연을 탓할 수는 없어요. 여러분은 잘못 태어나지 않았어요. 잘못 태어난 생명 따위는,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어요.”
"......."
“잘못한 자는 오직 소인 한 사람뿐이에요.”
그녀는 양손을 가슴에 모았다.
“소인은 저 손녀 아이한테 다가가서 이 앞길은 위험하니 다른 길로 가렴, 하고 말해줄 수 있었어요. 그러면 어린아이는 간단히 자신에게 닥쳐올 불행을 피했겠지요. 소인은 또한, 백설토 후작 영애한테 이름 모를 친구가 되어주어서, 그녀에게 일일이 과외교습을 시켜줄 수도 있었어요. 그러면 영애는 나날이 똑똑해져서 언젠가 조부의 인정을 받았겠지요.”
자수정 자작은 어디론가 기도하듯 양손을 모은 뒤, 나를 올려보았다.
“소인에게는 그럴 능력이 있으나.”
"......."
“안 해요.”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어느덧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피에 젖은 눈밭은 사라지고, 양수가 흐르는 대의회장이 펼쳐졌다.
아루호 백작은 여전히 이쪽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자수정 자작을 성토하고 있었다. 왕도의 기생이 인간성을 결여했다더니 정말이었다, 어찌 인간이라면 아해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겠는가, 왜 도우려 하지 않겠는가……
“자문사.”
소음이 핏기를 머금고 낭자하는 의회 한복판에서, 자수정 자작은 내게 속삭였다.
“이 세상에 우연한 죽음 따위는 단 하나도 없어요. 우연한 불행조차 없어요. 모든 죽음과 불행은, 소인이 의도적으로 방관한 것이에요."
"......."
“여러분이 지금까지 겪은 불행들은 모두 소인의 잘못이에요. 소인이 움직이지 않았기에, 소인이 보살피지 않았기에, 소인이 무시했기에, 무량의 불행과 항하사의 절망이 있어왔어요. 적어도 이 왕국에서만큼은. 그리고 장차 모든 세계에서도.”
"......."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나요, 소인의 자문사?”
자수정 자작은 성녀처럼 웃었다.
그때, 다시 한 번 주위의 풍경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순흑신 자작이 인육을 먹는 장면이었다.
“자아.”
자수정 자작은 내 손등을 쓰다듬었다.
“이제 소인을 탓하세요.”
심장이 두근거렸다.
“왜 도와주지 않았느냐고 절규하세요. 그건 무의미한 절규가 아니에요. 소인에겐 도와줄 힘이 있었고, 소인은 정말로 당신이 불행했던 바로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요. 왜 구해주지 않았냐고 질문하세요. 그건 결코 무의미한 질문이 아니에요. 소인이 해결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녀는 내 손을 꽉 쥐었다.
"소인이 존재함으로 인해.”
숨이 막혔다.
“이제 여러분은 한 점의 거짓 없이, 한 점의 의심 없이, 명명백백하게 손가락질할 [죄인]을 소유하게 되어요.”
한 명의 신이 말했다.
“소인은 [결코 회귀하지 않는 신]. 어느 누구를 위해서도 회귀하지 않으며, 오직, 그대들의 불행을 지켜볼 뿐인 신.”
신은 조용하게 선언했다.
“그러기에 여러분이 규탄하고 찢어발길 수 있는 신이에요.”
신의 이름은 자수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