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224화 (224/400)

224화.  < If. (2) >

3.

[세계랭킹 1위, S급 헌터, 바벨탑의 폭군, 헌터 유수하의 매니저를 모집합니다.]

현수막을 보고 유수하는 얼굴을 찡그렸다.

-수정아.

-예.

-수정 대리.

-말씀하세요.

-이건 좀 행사의 취지에 안 맞지 않아?

-무언가 문제라도 있나요?

자수정의 표정은 담담했다.

-세기의 관심종자인 유수하 씨를 배려하여 일부러 화려하게 준비했는데요. 내일 시간에 맞춰서 기자들도 올 거고, 누가 유수하의 측근으로 발탁되었는가에 대해서 기획기사까지 준비되어 있어요. 앞으로 2주 동안은 유수하 씨의 얼굴이 포탈 사이트 매인을 장식할 거예요. 잘 되었네요. 축하드려요.

-어디서 이런 씨발 유능한 매니저가 튀어나와서, 아오, 쌍, 수정아. 이 삼촌이 널 격하게 사랑한다! 알고 있지!?

-뜨거워요. 숨 막혀요. 더러워요. 가까이 다가오지 말아주세요. 가까이 다가오면 숨을 쉬지 말아주세요.

-야! 내가 왜 더러워!?

-아까부터 오바이트를 트리플 악셀로 세 번 연속이나 뽐내신 분께서 얼마나 향기로운 냄새를 풍길 거라고 기대하시나요?

-씨발. 샤워하고 왔어야 했는데…….

-그래서 현수막 내용이 마음에 안 드세요?

-아니,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라……. 잠깐만.

유수하는 길드 창고로 들어가서 페인트통을 들고 왔다.

-으이쌰.

소싯적 벽에 먹질 좀 해본 손놀림으로, 유수하는 현수막에 스윽스윽 붓질했다. 붓질이 이어나가자 현수막은 원래의 내용을 잃고 완전히 새로운 글귀로 범벅이 되었다.

-좋다. 완료. 개쩌는군.

-.......

[세계랭킹 1위, S급 헌터, 바벨탑의 폭군, 헌터 유수하의 매니저, 의 하인을 구합니다.]

자수정은 잠시 할 말을 일었다.

-유수하 씨.

-엉.

-유수하 길드장님.

-왜.

-현수막 내용이 완전히 달라졌는데요.

-말했잖아. 너 대리라고. 대리 달았으니 부하도 생겨야지.

유수하는 세상의 당연한 진리를 읊는 듯 당당했다.

-어디서 새파랗게 어린 신인놈이 들어와서 말이야, 어, 옛날부터 내 뒷바라지해준 매니저랑 똑같이 대접받으러 들어? 어? 사회생활이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에요. 자수정 대리.

-과연…….

-우리 길드는 무조건 연공서열이야. 난 영원히 존나 짱쎈 길드장 폐하님이고. 자수정, 넌 뭐 두 번째로 입단했으니까 아무튼 아랫놈들 부릴 자격이 있지. 거 매니지든 뭐든 직책은 아무렇게나 불러도 상관없으니까, 어디 마음대로 머슴놈 뽑아봐. 힘 좀 쓰고. 운전 좀 하고. 어? 아무튼 제대로 된 머슴새끼 한놈 기깔나게 뽑으라고.

-알겠어요.

-오냐. 그럼 난, 음...... 오…… 우웨에에에엑!!

그 날, 유수하가 네 번째 오바이트를 쏟아낸 바로 그 자리에서 면접이 열렸다.

물론 자수정이 대걸레로 깔끔히 닦아놓았기에 장당 100골드짜리 길드 타일은 제값을 했다. 반짝반짝.

-본 업무에 지원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자수정이 면접관석에 앉아서 지원자들을 쳐다봤다.

지원자들의 얼굴도 방금 닦은 타일처럼 반짝반짝거렸다.

-저, 저는 염제님과 똑같은 동아시아 출신 헌터입니다! 동아시아도 할 수 있다! 조건이 똑같은 탑 안에서라면 오히려 동아시아가 유리하다! 그걸 증명하기 위해 이 자리에…….

-지랄하고 있네요.

-네?

자수정이 고개를 저었다.

-저희 길드장은 고국을 싫어합니다. 고국의 주변을 둘러싼 나라들도 싫어합니다. 나라들이 모인 지구도 싫어하고, 지구가 존재하는 우주도 싫어합니다.

-..네?

-그리고 당신도 싫어할 것 같네요. 다음.

불합격.

-지원 동기가 무엇인가요?

-저는 평소부터 염제님을 마음 깊이 흠모하였습니다.

-어떤 점에서 인간적인 매력을 느꼈나요?

-우선 아폴론 조각상처럼 잘 다듬어진 미모에서 황홀함을 느낍니다.

-아폴론 조각상이라는 비유는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제는 소인의 귀가 그 단어만 들어도 고막이 발작을 일으킬 수준에 왔지만, 뭐. 좋아요. 여긴 시적 감수성을 체크하는 면접장이 아니니까요. 계속 말씀해보세요.

-무엇보다 다른 사람을 걱정하며 돌보시는, 아름다운 마음씨에…….

-지랄이 염병이라.

불합격.

-솔직히 염제님이랑 한 번 자고 싶어서 지원했습니다.

-그런가요.

-네. 그렇습니다.

-.......

-.......

-여기, 서류에 서명해주세요.

-무슨 서류인가요? 혹시 합격서류입니까?

-아니요. 비밀보장서류에요. 톱급 헌터 6명이 스킬들을 때려박아 만든 서류지요. 만일 이곳에서 듣게 되는 내용을 바깥에서 발설할 시, 온몸에서 대충 열세 개의 구멍이 생기면서 목숨이 [어맛 여기에 탈출구가 있네? 나가야징!] 하고 가출하게 되는 결과를 이룩하게 된다네요.

-.......

-쓸 건가요?

-쓰겠습니다.

-정말로 썼군요.

-예, 정말로 썼습니다.

-그럼 말씀드릴게요.

-듣겠습니다.

-유수하 씨는 고자예요.

-.......

-.......

-.......

-.......

-네?

-임포라고요. 발기부전이요. 소인이 명사뿐만 아니라 동사와 형용사까지 동원하여 설명드려야 할까요? 그러면 이해하실까요?

-아, 아뇨. 그러니까. 저는. 그게……. 어…….

-열세 개의 구멍을 기억하세요.

-.......

-참고로 열세 개의 구멍 중에는 눈구멍, 콧구멍, 귓구멍, 배꼽구멍, 오줌구멍, 똥구멍이 포함되어 있지 않아요. 그 이외에 구멍들로만 열세 가지에 이르지요. 자신의 신체가 얼마나 구멍에 관해 진화적으로 창대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죽어도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다음.

불합격.

-저는.

그리고.

-저는, 그게…… 그러니까, 음.

면접석에 후줄근한 남자가 앉았다.

-음, 한 번이라도…… 한 번이라도 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분이랑 똑같은 공기를 마시면서 살고 싶습니다.

자수정은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왜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가요?

-제가 사는 여기보다, 제가 사는 지금보다…… 다른…… 잘 모르지만, 아무튼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것 같아서요. 아니, 있을 겁니다. 있어야 합니다.

-.......

-저, 저는 재능도 없고 스킬도 이상한 거뿐이라서…… 그 [위]에 올라갈 순 없지만, 올라가지 못하겠지만. 위로 올라가는 분을 곁에서 도와드릴 수는 있습니다. 아니.

남자가 의자에서 일어나 허리를 푹 숙였다.

-꼭,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그 자리에 있는 걸 허락해주십시오! 허드렛일이라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봉급은, 그, 굶어죽지 않고 나가죽지 않을 정도면 충분합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소녀가 남자를 내려본다.

자수정이 김공자를, 바라본다.

-염제님의 성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김공자는 눈을 깜빡인다.

-어....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 정말로 솔직하게요. 소인은 지원자의 사고방식을 되도록 정확하게 파악해야만 해요. 여기서 거짓을 말하면, 당장은 합격을 받을지 몰라도, 어차피 하루나 이틀 뒤에 쫓겨날 것이에요. 서로 시간을 절약하도록 하지요.

-......좀.

-조금?

-성격이 나쁘시죠.

-으흠.

자수정은 면접이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턱을 괴었다.

-어떤 면에서요?

-일단, 그, 염제님은 본인이 염제님이라 불리는 거 싫어하시잖아요. 근데 그거 진심이 아니죠? 폼 잡는 거지요……. 왜냐면 사람들은 멋지다 대단하다 짱이다 막 환호하면서 염제님! 염제님! 하고 외치는데, 본인은 딱 쿨하게 [누가 별명 지었는지 존나 병신 같네] 라고 쳐버리니까…….

-쳐버리면?

-난 내 이명이 싫다. 그거 하나로 자기를 칭송하는 사람들을 죄다, 완벽히 아랫사람들로 만들어버리는 거죠. 팬들은 그것도 너무 쿨하다며 좋아하니…… 완벽한 선순환…… 아니, 악순환인가 이거……?

-흐응.

자수정이 손깍지를 끼고 그 위로 턱을 올렸다.

이 역시 면접이 시작하고서 처음 취해진 자세였다.

-재미있네요.

-네?

-당신의 생각은 잘 알겠어요. 김공자 씨. 그런데도 유수하 씨를 위해 일할 수 있나요?

-아, 네. 저는…….

-유수하 씨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악질인 사람일지 몰라요.

-.......

-저희 길드에 입사하여 함께 행동하다 보면 좋으나 싫으나 유수하 씨의 면면을 보게 되겠지요. 사건에 따라, 결과에 따라, 반응에 따라선, 당신은 입막음용으로 죽임을 당할 수도 있어요.

-.......

-다시 묻겠어요. 그런데도 유수하 씨를 위해 일할 수 있어요?

김공자는 오래 생각했다.

오래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저는 유수하 씨 아래에서 일하러 왔습니다. 하지만, 유수하 씨를 위해서 일하지는 않을 겁니다.

-헤에.

-만일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유수하 씨가 훨씬 더 심각하다면…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막으려 들겠지요. 아무리 그래도 한 번 정도는 더 제 신뢰를 되찾아주시라 기회를 드릴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런 경향이 되게 강해서…….

-흐응.

-그러니까, 면접관님 질문에는 죄송하지만 긍정적인 대답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더 재미있네요.

자수정이 머리를 기울였다.

-제가 그런 당신을 매니저로 뽑아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냐하면.

남자가 소녀를 올려본다.

김공자가 자수정을 바라본다.

-아마 면접관님도 저와 똑같을 테니까요.

-.......

-당신은 염제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염제님 아래에서 일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매니저로 부임한 이후로 당신은 염제님의 성격에 대해 단 한 번도 좋은 치장을 한 적이 없습니다. 여론전을 벌인 적도 없어요. 알바도 고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듣고 있어요.

-당신은 자신의 동지가 될 사람을 구할 것이지, 염제님의 심복이 될 사람을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수정이 미소를 지었다.

-합격.

그리고.

-뭐? 랭크 F급? 수정아. 내가 힘 깨나 쓰는 머슴놈 구해오라고 어젯밤 신신당부한 거 같은데 웬 쓰레기를 가져왔냐? 쓰레기 분리수거통은 저기야. 버리고 와.

-참고로 분리수거일은 수요일이지요. 오늘은 월요일이에요.

-내가 그딴 걸 어떻게 알아!?

-이틀만 두고 보세요, 유수하 씨. 이틀 동안 괴롭히시고요. 그리고 판단해주세요.

-아니, 판단이고 자시고. 나랑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 보이는데…….

유수하는 마뜩치 않은 얼굴로 김공자를 야렸다.

-저 나이까지 F급이었으면 인생 견적 알 만하잖아. 쓰레기야, 쓰레기. 가끔 알바 뛰고, 2층 사냥터로 산책 다녀오고, 산책하면서 줍줍한 아이템으로 일용할 양식 얻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인터넷이나 깨작거리고. 와, 씨, 나 말하면서 소름이 돋네. 어이. 자수정. 진짜 애를 이틀이나 안구에 처넣으라고? 내 안구 건강을 관리하는 것도 매니저의 역할…… 크아아아악!? 씨발, 뭐야!?

-귤즙이요.

-왜 귤즙을 안구에 발사하고 처난리인데!?

-귤이 눈에 좋다고 해요. 유수하 씨.

-이 씨발년은 몸에 좋다면서 두개골 활짝 열어버린 다음 인삼을 쑤셔박을 또라이네! 야, 내가 요즘 수정아 수정아 오냐 오냐 해주니까 아주 박박 기어오른다? 죽을래? 내가 너 못 죽일 거 같아?

-네.

-씨발!

그리고.

-그래도 이 새끼가 괴롭히는 맛이 있네 그려.

-헉, 허억, 혁헉억, 어어어억, 허억…….

-안 따라와도 된다니까 바득바득 31층까지 기어온 거 봐. 왜 저러냐? 지켜보는 나야 꿀잼이다만. 어? 혹시 나한테 유잼을 선물하려고 일부러 저런 쓰레기를 뽑은 거냐?

-예.

-역시 내가 매니저 하나는 잘 뽑았어. 자수정 대리. 아니, 자수정 부사장. 우리 수정이 부사장도 한 번 달아야지! 내가 아리멘탈리움 캐서 아주 그냥 죽여삐게 명패 하나 만들어줄게. 자수정 부사장. 수정 사장. 얼마나 어감이 또 어울려? 둘 다 시웃지웃 시읏지읏이야. 이거 수정이가 사장이 될 기운을 타고났네.

-허어어억, 헉, 헉, 흡, 허어어억……!!

-공자 씨가 죽어가는데요.

-죽으라 해. 그것도 지 복이지.

-맞는 말이네요. 공자 씨. 복 받으세요.

-복 많이 받아라, 알바생.

-씨발…….

그리고.

시간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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