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238화 (238/400)

238화.  < 사왕의 가문(Family). (2) >

3.

촤아아아아-

금사매의 주위로 검은 물이 휘몰아쳤다. 어쩌면 물이 아니라 그림자가.

태어날 적에 제일 먼저 접촉하는 물이든, 죽을 때까지 끌고다닐 그림자든, 탄생을 알리는 데엔 너무도 걸맞았다.

[지골룡의 상자가 발동합니다.]

물은…… 그림자는…… 물-그림자는 어느새 금사매를 완전히 감쌌다. 스슥, 스스슥, 누에고치 속에서는 물그림자가 회용돌이치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그리고, 작아지기 시작했다.

금사매를 둘러싼 고치는 작아지고 또 작아져서, 마침내 아이의 장난감 방울만한 크기로 졸아들었다. 내 손바닥 위에, 물처럼 물컹거리되, 그림자처럼 칠흑으로 어두운 구슬이 하나 놓였다.

"......."

그 자그마한 것이 실비아 에바나일의 존재.

나는 한손으로 구슬을 짚어서 천천히, 공손히, 입을 벌려서--- 투욱, 떨어트렸다. 케이크 위에 놓인 체리를 입에 넣는 것처럼.

"......."

장내의 모두가 나를 지켜보며 긴장하고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지금 나는 이반시아의 반려도, 마교의 소교주도 아닐 것이다. 나는 권능(權能)을 지닌 반신이었다.

그들이 반신의 이적이 펼쳐지는 모습을 숨 죽이고 지켜볼 적에, 나는, 단지 이빨을 씹었다.

물컹.

구슬을 씹고 우물거렸다. 당연하지만 구슬의 맛은 체리와 달랐다. 체리는 달콤하다. 시큼한 뒷맛이 있다. 하지만 이 구슬은, 이 실비아 에바나일의 존재는, 씹으면 씹을수록. 깨물면 깨물수록…… 서글픈 빗물의 맛이 났다.

-시, 실비아 영애님.

-명심해라. 너도 누군가에겐 개새끼다.

-집사! 뭐 하는 겁니까, 어디를 가요!?

기억이 조각난다.

구슬을 씹을 때마다 마치 팝콘 부스러기가 튀어오르듯 추억들이 터진다.

"음."

잘게 깨문 금사매의 기억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꿀꺽, 한 번 더 삼켰다. 인간의 일생이란 한 번에 삼키기엔 너무도 크거나 너무도 질척했다.

금사매는 질척거리는 쪽이었다. 너무 질게 만든 양갱처럼.

나는 꾸준히, 정말로 꾸준히 금사매의 존재를 집어삼켰다.

[지골룡의 상자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우우우......."

나는 숨을 천천히 토해냈다. 방금 내가 뱉은 숨결에는 질량이 있었다. 무게가 있었다. 색깔마저 있어서, 그것은 독연(毒煙)처럼 새까만 숨결이었다.

어두운 안개 속에서, 맹수처럼 빛나는 두 눈동자가 있었다.

[‘폐허를 추수하는 소’의 사도가 현현합니다!]

탑이 그녀의 두 눈동자를 옛된 이름으로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를 감싸기엔 너무도 헐거운 울림이었다.

“실비아 에바나일.”

"......."

숨결로부터 형체를 다시 얻은 자.

환생이라 부르기에는 과하고, 변신이라 부르기에는 웅장하니, 굳이 말하자면 변생(變生)이라. 한 번 죽었던 이는 변하여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새로 가지고 싶은 이름이 있나?”

“……없습니다. 부르던 대로, 불려오던 대로, 살고 싶습니다. 그보다…… 저, 저는. 당신을 무슨 식으로 불러야 합니까?”

금사매의 얼굴에는 외경이 서려 있었다.

당연했다.

그녀의 입장에서 지금 나는 죽은 자신을 살려낸 것이니.

[백귀환생]이라는 스킬에 저장된 백귀들의 기억을 사용하여, [지골룡의 상자]로 기억을 상자처럼 압축한 뒤, 내 신체로 이식시켰다. 이제 나는 원할 때마다 금사매를 되살릴 수 있다.

제아무리 마법과 신들 사이에서 뛰노는 사람일지언정, 이것은 누가 봐도 기적의 영역에 있었다.

“부, 부활은 그야말로 신성의 증거. 지금까지처럼, 그냥, 이반시아 부인님이라 부르기도 너무 격이 안 맞는 것 같아서……."

“가주(家主).”

“네?”

“너는 앞으로 나를 가주라 부르면 돼. 공식석상에서는 말이지. 사적인 자리에선 김공자, 공자 씨, 공자님, 아무렇게나 불러도 상관없어. 하지만 전쟁이나 전투가 벌어졌을 때는 가주라고 불러줘.”

"......."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단순히 굽었던 허리를 핀 것에 불과했지만, 나 스스로 느끼기엔, 긴 겨울잠을 잔 짐승이 마침내 몸을 일으킨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그리 느꼈다면, 나를 지켜보는 수많은 자들에게도 그리 느껴졌으리라.

“들어줘.”

나는 목소리에 오러를 흘려 읊조렸다.

“패밀리에는 두 가지 뜻이 있어. 하나는 가족이고, 다른 하나는 가문이지. 나와 라비엘은 유일무이한 가족이야. 이 세상에서 내게 다가오는 존재들이 모두 나의 가족이 되는 것…… 그것이, 나의 이상(理想)이야.”

라비엘을 사랑하듯 다른 누군가도 사랑할 수 있다면.

그 불가능한 일을 해낼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에스델.”

“아, 네, 주구…… 아버님.”

에스델이 내 부름을 듣고 단번에 달려나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걸 보고 나는 작게 웃으면서 에스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거야.”

“……예?"

“에스델이 날 아버지라 부르고, 내가 에스델을 딸이라 불러도, 바로 그 순간부터 마치 마법처럼 [가족]이 만들어지진 않아. 봐, 에스델. 아빠한테 한쪽 무릎을 꿇는 딸아이가 어디에 있니.”

“아,"

에스델이 당황했다.

“이건, 그, 제아무리 부모자식 간이라 하더라도, 부모가 왕(王)의 지위에 있다면 자식은 자식뿐만 아니라 신하의 도리도 다해야 하는 것이어서, 어쩔 수 없이……!”

“괜찮단다.”

나는 웃었다.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충분히 가까워지지 않았을 뿐이니까.”

“……아버님?”

“나는 누군가의 아버지로서 미숙하지. 에스델, 너도 딸이 되어본 적 없으니 그게 뭔지 모를 거야. 그러니까 우리는 아직 가족에 도달하지 못했어. 어떤 아버지가 되고 어떤 딸이 될지, 우리는 아직 몰라.”

밤의 바람이 불었다.

십여년 전에 탑의 바깥에 있는 어느 고아원에도 이런 바람이 불었다.

불었었다.

“우리는 아직 모르는 게 많아.”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가 될지, 정해져 있지 않다.

“우리는 아직 하나의 가족이라 할 수 없어.”

겨우 출발선에 섰을 뿐이다.

“만일 그걸 무시한채, [우리는 가족이다], [가족처럼 끈끈하다]라고 생각해버리면, 언젠가 그 생각 자체가 족쇄처럼 우리를 발목잡을 거야. [가족인데도 사실 상대방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가족인데 어째서 이만큼도 못해주냐]. 그런 비탄이 뒤따르겠지.”

마음이 앞서나가는 것은 아름답다.

하지만 마음은, 뒤에서 행동을 받쳐줄 때 더 아름답다.

우리 고아들이 모두 모인 앞에서, 원장님은 그렇게 말했었다.

“우리가……."

언젠가 예의 피곤한 얼굴로 그분께서 말씀해주신 것들을 나는 읊었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이해할 부분을 이해받고 싶은 만큼 이해하며, 이해하지 말라는 부분을 이해하지 말라는 연유대로 이해하지 아니하며.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습관인지. 당신이 결국 이 세상에 남기고 싶은 한 절명의 목소리는 무엇인지. 당신은 왜 노을을 사랑하는지……."

나는 천천히 사랑의 징조들을 읊었다.

“우리 사이에서 그것들이 알려질 때까지, 알아갈 때까지, 우리는 아직 [가족]이 아니야.”

나는 세상을 멸망시키려 든 마왕, 영원한 겨울에서 온 교인들, 사람을 저주한 귀족 영애를 하나씩 둘러보았다.

“우리는 서로 가족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원장님.

“가족은 가족이란 말로 완성되거나 끝나는게 아니야. 가족은 관계다. 관계의 극한이지. 서로가서로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맹세야. 서로를 위하는 것조차 어려우며, 노력한다는 것은 더욱더 어렵거늘, 어떻게 가족이 쉽게 만들어지겠냐.”

그래.

“많이 노력해야 할 거다.”

많이 싸우겠지만.

우리는 할 수 있다.

“그 전까지--- 우리는 가족이란 허물을 뒤집어쓰는 대신, 하나의 [가문]이 되자.”

내 선언에, 머리가 쓰다듬어지고 있던 에스델이 반응했다.

그녀의 귀가 쭈뼛거렸다.

“아버……님. 가문이라 말씀하옵시면…?”

“가문에는 각각의 직책이 있고 역할이 있어. 시종장은 가문의 위생과 복지를 책임지고, 가문 사람들이 배고플 때 요리를 하지.”

원장 선생님이 우리에게 각각 하나씩 역할을 맡겼던 것처럼.

결국 사람은 자신이 배운 대로 행할 뿐이고, 거기서 조금 더 나아지려 노력할 뿐이다.

나는 에스델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장녀는 보통 후계자다. 후계자 교육을 받는 한편으로, 가주가 손님을 대접해드리지 못할 때 장녀가 나서서 무도회와 사교회를 도맡아. 에스델. 너는 우리 가문의 장녀이니, 앞으로 네가 많은 걸 맡게 될 거야.”

"......."

“반면에 전사들은 가문의 안위를 지킨다. 어떤 악질이 가문원을 납치하지 못하게 지키고, 감히 우리 가문을 무너트리려는 세력이 있을 때는 나가서 싸운다.”

밤하늘.

나에게 소중한 교인들이 밤의 어둠에 녹아 있다. 그 무사들은 담벼락에, 담벼락 아래에, 안뜰에, 대청마루에 여기저기 앉아서, 나를 올려다본다.

“나는 너희에게 가족이 되기 위해 노력할 거야.”

이 중에 핏줄이 섞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지만.

“그 날이 오는 순간까지, 먼저, 가문이 되자.”

우리는 어느 누구보다 서로를 아낄 수 있을 것이다.

누구보다 상처를 입어보았고, 인간을 증오해봤으며, 세상에 배신당했고, 멸망을 지켜보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이곳에 도착하여, 어쩐 일인지, 이렇게 만났으므로.

나는 입을 열었다.

“사마군(四魔君)아."

“예!"

어두운 저택의 구석에서, 각기 사방향을 치고, 마교 최정예 사인방은 내 발앞에 집결했다.

그 중에서 그나마 맏이인 혈마(血魔)가 입을 열었다.

“말씀하십시오, 소교……."

혈마의 잘 생긴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좋게 말하면 원칙주의자. 나쁘게 말하면 고지식한 그는, 스승님을 가장 근척에서 지키던 호위무사로서 교인들의 기강을 잡았다. 훤칠하게 잘 생겼지만 꼰대였다.

그런 그가 짧은 시간 고민하더니, 한숨을 쉬듯 호칭을 고쳐불렀다.

“……가주님.”

“음.”

“저희는 그저 도구처럼 쓰여도 좋습니다. 소교주…… 아니, 가주님께선 심성이 바르십니다. 저희가 도구로 쓰인다 한들 자괴감이 들거나 후회할 날은 없겠지요. 그저, 잘 벼려진 칼이구나 감탄해주신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스승님은 내게 어머님과 같은 분이었어.”

"......."

"너희에게 스승님은, 어머니 이상의 의미였을 거다."

"......."

“혈마야.”

나는 허리를 굽혀 혈마의 포권을 내 양손으로 덮었다.

“우리는 한 분을 잃었고, 그분은 우리 모두에게 어머님과 같았다. 안 그러냐?”

“……예, 그러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형제다.”

나는 말했다.

“사람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로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무엇을 잃었느냐로 하나가 되는 거야. 그것이 우리 마천의 교리다. 허면, 스승님을 잃어버린 우리는 분명히 슬픈 하나다.”

"......."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더 많이 이해하려 애쓰고, 서로의 경계선을 알아가고, 가끔 서로한테 개새끼가 되어보고, 그러면서."

지금보다도.

지금보다 훨씬.

“훨씬 더 아름다워지고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

“그 날이 올 때까지, 나는 이 가문의 가주를 맡으마.”

혈마가 마른 입술을 열었다.

“예, 가주님.”

“혈마에게 가문의 군사일을 맡긴다. 그대의 직책은 무사부관(武士副官)이다. 곧 다른 사람을 무사장(武士長)에 임명할 테니, 부관으로서 무사장을 보좌해라.”

“예! 가주님!”

나는 고개를 돌렸다.

“우부르카!”

“흐음.”

쿠웅.

우부르카가 대청마루에서 일어나 발을 딛자, 안뜰이 가볍게 진동했다. 이때까지는 우부르카 스스로 오러를 갈무리하여 체중의 무게를 제어했다. 이제 나에게 호명되자, 우부르카는 숨겨온 기세를 다 풀어젖혔다.

“불렀는가. 애비여.”

여기저기서 두려움에 질린 숨소리가 흘렀다.

마교의 교인들. 이제는 내 가문의 무사들이 된 자들은, 우부르카가 어떤 경지에 이르렀는지 가늠한 것이다.

우부르카는 괴물이다.

어릴 때 환골탈태를 하여 늙어서 반로환동을 한 무인. 지정족 역사상 최강의 무재. 만일 시간이 흐르고 기연이 주어진다면, 한때 스승님이 밟았던 경지를 엿볼지도 모른다. 내 가문의 무사들은 그것을 알아차리고 긴장했다.

모든 무사들이 긴장하는 가운데, 나는 미소를 지었다.

“너는 내 아들이다.”

“우고르. 맞다.”

“요즘 뇌가 쳐돌이로 변했는지 뭐 만나는 사람마다 사랑에 빠지고 고백하려드는 낌새가 보이긴 한다마는……."

“내 성좌명을 잊은 것 같구나, 애비여. 쳐돌이한테 쳐맞고 싶은가?”

[성좌 ‘패륜을 꿈꾸는 근육돼지’가 당신을 위협합니다.]

아하하.

나는 조금 더 웃었다.

“괜찮아. 사춘기여도 우리 아들은 멋져. 우리 아빠가 연애를 해본 적은 딱 한 번밖에 없지만 바로 그 한 번으로 삼라만상 최고의 님과 결혼하지 않았겠냐? 가성비 차원에서 보자면 나는 이미 연애의 왕이지. 언제든 애비에게 상담하려므나.”

“애비의 경우는 매우 특수하고, 더럽게 특별하여서, 전혀 참고가 안 될 거 같다만…. 우거. 뭐 얘기할 게 있으면 얘기하겠다.”

“그래. 너는 내 장남이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강한 전사다.”

"......."

우부르카가 나를 내려보았다.

“애비에게 몇 번이나 도전해서 패배했는데도 말인가?”

“나는 에스델에게 한 번의 승리를 거두기 위해 수백 번 패배했어. 패배의 숫자는 승리를 더 멋지게 해주는 장식물에 불과하지.”

“나도 언젠가 애비를 이길 수 있는가?”

“나는 너의 재능을 믿고, 노력을 믿으며, 의지를 믿는다.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전사야.”

"......."

“내 가문의 무사장(武士長)이 되어주렴.”

나는 우부르카의 커다란 손등에 내 손바닥을 올렸다.

“우리가 싸워야 할 때 맨 앞에서, 나와 함께 우리를 이끌어다오. 너는 마천신공(魔天神功)을 배웠다. 배웠을 뿐만 아니라 꿰뚫었다. 너는 나 다음으로 신공의 극에 이르렀으니 가문의 무사들도 기꺼이 네 호령에 복종할 거다.”

무사들의 숨소리가 조금 더 조용해졌다.

두려움이 적어지고 기대감이 흘러든 탓이리라.

"나는 마천신공(魔天神功)을 개조하여, 한 사람의 칼이 아니라 수백 명의 춤과 노래로 승화시키는 마천진법(魔天陳法)을 창안했다. 배워라. 잘 배울 것이다. 배워서 무사들에게 가르쳐라. 잘 가르칠 거야.”

"......."

“나의 과분한 아들. 우부르카.”

터업.

우부르카가 반대편 손을 들어서 내 손등을 덮었다.

거인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어리게만 보이는 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비의 무사장이 되겠다.”

그리고 맹세했다.

“감히 이곳을. 우리 가문을 망가트리려 하는 자들을 용서치 않겠다. 아비와 아비에게 소중한 자를 지킬 것이며, 그들이 또한 내게도 소중한 이들이 될 수 있게 노력하겠다. 아비가 나를 사랑해주는 한, 나 역시 세상을 사랑하마.”

나는 미소를 지었다.

고맙구나.

나는 고아로 태어났고, 너는 백색증을 앓는 환자로 태어났지만, 지금 내 주변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지금 네가 태양을 싫어할 까닭을 모르듯이.

먼 훗발, 우리는 조금 더 다른 무언가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무언가를 증명할 것이다.

"......."

나는 그리고 아직 소환하지 않은 백귀(百鬼)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 사람이 가진 향기, 머리카락, 눈동자. 그 사람의 향기에서 헤매는 어떤 존재에 대한 암시와, 머리카락의 결들 사이로 감추어진 상처의 흔적과, 새파랗고 무표정한 눈동자에서 어느 파묻혀버린 과거를, 나는 떠올렸다.

“나와라.”

떠오른 그것을 불렀다.

[스킬을 발동합니다.]

그림자가 울렁거렸다.

그곳에서 부글부글 끓며 손이 뻗어나왔고, 곧 머리카락이, 얼굴이, 몸이 빠져나왔다. 하얀 백귀는 작게 숨을 쉬었다.

“후우.”

내가 상상한 대로 향기와 머리카락, 눈동자를 가진 존재였다.

라비엘의 먼 선조인 그는 라비엘을 닮았고, 라비엘을 닮은 누군가를 떠올리기란 무척 쉬웠다.

“불렀는가.”

나는 끄덕였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김율."

너 역시 나에게 조금 더 많은 의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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