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241화 (241/400)

241화.  < 우리는 어느 낡은 도시의 대청마루에 앉아 있었다. (2) >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가 현현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던 빛이 순간, 잘게잘게 쪼개어져 흘러내렸다.

무수한 꽃잎, 꽃잎, 꽃잎…….

하얗게 빛나는 꽃잎들이 안뜰로 낙화했다. 꽃잎에는 색만 있을 뿐, 윤곽도 향기도 없어서 마치 투명한 나비들이 아름답게 난무하는 것 같았다.

“으으으음! 안녕!”

그리고, 난무하는 꽃잎 한복판에서, 탑의 기둥 중 하나가 힘껏 기지개를 폈다.

“오랜만이야! 모두!”

기둥.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는 금발의 아가씨였다.

공녀는 꽃잎을 깡총, 깡총, 밟으면서 상공에서 지상까지 계단을 내려왔다. 한 명의 신이 춤추듯 이 땅에 강림하는 광경을, 우리는 안뜰에서 올려다보았다.

“다들 잘 지냈어? 내가 보내준 휴가에는 모두 만족했어?”

탁.

마침내 공녀의 구둣발이 마지막 꽃잎을 짓이기며 땅바닥에 디뎠다. 짓이겨진 꽃잎은 하얀 먼지가 되어 사르르,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야, 사왕이. 사랑하는 연인이랑 사랑받는 아들이랑 같이 있는 걸 보니까 참 사랑스러운걸.”

공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찍이 백귀(百鬼)의 멍에를 짊어졌던 이들이 꼿꼿하게, 살아있는 육신을 얻은 채, 주위에서 포위하고 있었다.

“흐응.”

공녀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곧바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정말로 대단한 휴일을 보낸 모양이구나, 사왕.”

“격조했습니다. 공녀.”

“응. 나는 너희보고 휴식을 즐기라며 이곳에 보내줬지. 그런데 이게 뭐람, 휴일은커녕 상상도 못한 짓거리를 벌인 모양이야. 사왕아. 왜 얘네들이 육신을 얻었지? 어째서 전성기를 간직한 모습으로 부활했니?”

“제가 언제나 하던 짓을 했죠.”

나는 손바닥을 펼쳤다.

“좋은 스킬을 얻어서, 좋은 데 썼습니다.”

스킬이 오픈되자, 그곳에 황금색 카드가 나타났다. 황금색 카드의 정체를 보고 공녀는 눈썹을 찡그렸다.

“[지골룡의 두개골]……? 잠깐만. 이거,”

“예. 당신 어머니께서 갖고 계시는 스킬이지요.”

"......."

“당신이 탑주의 첫 번째 따님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탑주의 존함이 자수정이라는 것 또한 알지요.”

공녀의 얼굴이 굳었다.

내가 한마디 한마디 이어나갈수록 주변의 분위기가 어두워졌다.

공녀는 흐응, 하고 목을 꺾으면서 나를 올려보았다.

“그러게. 정말로 많은 걸 알게 되었구나, 사왕.”

“예."

“굉장해. 대단해. 응, 이건 진심. 정말 진심으로 칭찬하는 거야. 왜냐면, 엄마의 스킬을 복사해왔다는 건 엄마에게 한 번 죽었다는 얘기이고--- 그러면, 봤겠네?”

공녀가 내 팔뚝을 살며시 잡았다.

그리고 뱀처럼 내 상반신에 기대어,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엄마의 트라우마.”

"......."

“어디까지 봤어?”

나는 그제야 탑주와 공녀의 얼굴이 참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두 사람은 똑같이 백금이 질투해버릴 만치 찬란한 금발을 가졌다. 상대방에게 귓속말로 속삭이길 좋아하는 버릇도 똑같았다.

“탑주가 참석하던 귀족의회 한복판에 떨어졌습니다.”

“아하. 음, 아하. 그래서?”

“탑주가 살아가던 세계가 얼마나 썩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곳을 자수정 자작이 어떻게 구해냈던 건지도. 그 분이 공작 위에 오르게 된다는 것도.”

“그것뿐?”

“그리고 황금률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공녀가 입술을 닫았다.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가 충격을 받습니다.]

설마 내가 거기까지 돌파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는 걸까.

"저는 거기서 탑주의 의지를 봤습니다. 탑주는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상처를 짊어지실 작정이더군요."

"엄마는 괜한 소리를 하는 게 아니야. 정말로 그런 세상을 만들려는 거지.”

공녀의 목소리는 허했다.

“모두가 단 한 명을 탓하기만 하면 되고, 그리하여 [잘못 태어난 사람] 따위는 아무도 없는 세계. 오직 엄마만 잘못 태어난 사람이 되는 세계야.”

그녀의 눈동자는 이곳이 아닌 다른 어딘가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이성의 빛이 꺼져있던 옛날,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어. 그들은 그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희생양을 만들어 모든 죄악과 고통을 떠넘기고는 했지. 이단이가 만들어냈던 달팽이 제국처럼 말이야.”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모두 너 때문이다.

“사람들의 기분을 달래주기 위해 만들어진 원시종교의 세계는, 인과에 대한 논리적 귀결을 갈무리하고자 하는 엄마의 세계와 겹치는 곳이 있어.”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모두 나 때문이다.

“재미있지.”

정작 그렇게 말하는 공녀는 조금도 즐거워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곧, 공녀는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듯 목소리의 톤을 바꿨다.

“아무튼, 거기까지 갔는데도 현세로 되돌아오다니. 사왕.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터프한 사람이구나. 내가 칭찬을 별로 안 하는 성격인데 이건 좀 해야 할 거 같아. 굉장해.”

공녀가 오-! 소리를 내면서 손뼉을 쳤다.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는 당신을 찬양합니다.]

음.

“칭찬해주시는 거야 언제든 환영입니다. 그런데 저희를 다음 스테이지로 보내주시는 게 먼저지요. 휴일이 생각보다 길어졌잖아요. 위에서 기다리는 동료들도 생각해야죠.”

“응, 뭐, 알아서 조치해뒀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알았어.”

공녀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럼 다 찢어지자. 라비엘은 원래 소르므윈 아카데미가 있는 세계로 전송하면 되겠고. 살천성은 카페 플라네 타리움에 데려다주면 되지? 훙, 999명의 교인들이 문제네. 너희는 당분간 강호무림에서 수련이나……."

“공녀님.”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나는 공녀의 손을 잡았다.

“여기 모인 인원. 라비엘을 제외하고, 전원. 스테이지 공략에 투입될 겁니다.”

“후웅……?”

공녀는 팔짱을 끼었다.

“무슨 소리니? 30층부터 40층은 최고위 서열의 전사들만 입장할 수 있어. 너희 무사들이 강한 건 알겠지만 아직 서열이 정해지지도 않았잖아.”

“아니요.”

나는 여전히 공녀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이들은 저와 함께 이번 스테이지에 올라갑니다.”

“뭐?”

“이번 스테이지뿐만 아니라 다음 스테이지도, 심지어 다음 스테이지도. 탑의 종막이 보이는 그 날까지, 이들은 저와 함께 움직일 것입니다.”

규정에 맞지 않은 말.

탑에서 허락할 수 없는 행동.

그것을 나는 태연하게 [괜찮다]고 말한 것이다.

"흐응."

공녀는 입꼬리를 올렸다.

“어때서? 아니, 어떻게? 당신한테 무슨 권한이 있어서?”

“저한테는 아무런 권한이 없습니다. 다만, 처음 뵈어서 말씀드렸을 때부터, 저에게는 다만 스킬이 있을 뿐입니다.”

나는 [지골룡의 두개골] 카드를 내보였다.

“이들은 저의 스킬 [지골룡의 두개골]에 모두 묶여 있습니다.”

“응. 해서?”

“그리고 이미 입장 인원이 제한되어 있는 묵시록에서 저는 백귀환생을 썼던 바가 있지요.”

나는 힘주어서 말했다.

“즉, 스킬에 따른 인원 추가는 탑의 규칙을 어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헤에. 즉?”

“이번 역시 마찬가지예요. 저는 [지골룡의 두개골]을 가졌고, 여기에 약 1000명의 가문원이 매여 있습니다. 따라서 제 가문의 병력 1천은, 저에게 부속해서 따라오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옳습니다.”

“룰 갖고서 노는 버릇 어디 안가는구나, 우리 사왕이.”

공녀는 실쭉 웃었다.

“하지만 백귀들은 소환수였구? 얘네는 살아있는 인간이구. 즉 사왕이는 얘네를 자기 소환수로 취급하고 싶다는 걸까? 아니면 해석의 문제가 있으니 다시 한 번 기둥 회의를 요청하고 싶다는 걸까?”

공녀는 확실히 탑주의 딸이었다. 뒷짐을 진 채 빙글 도는 공녀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뱀비늘의 윤기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말해두지만, 기둥 회의에서 다시 지지받을 확률은 높지 않을 거야. 특히 엄마의 스킬까지 가졌다는 게 밝혀진다면 말야.”

"......."

“왕국 귀족회의에서 봤지? 엄마를 적대하는 이들만큼이나 엄마를 숭배하는 이들은 많아. 그리고 그런 이들은 당연히 기둥들 중에도 있지. 사왕이, 네가 엄마의 스킬을 가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불쾌감을 느낄 이들이 어마어마하게---”

“공녀.”

나는 그녀의 말을 끊었다.

고개를 기울이는 공녀에게 나는 질문했다.

“공녀. 당신에게 [스킬]이란 무엇입니까?”

흐응, 소리를 낸 공녀는 곧바로 막힘없이 답했다.

“박제된 기술. 남과 경쟁하여 승리하기 위한 도구. 유리한 위치를 점령하기 위한 수단. ”

“아니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도 처음에는 그런 식으로 생각했습니다만, 아닙니다.”

“흐음, 그러면?”

"스킬들은, 단 한 장도 예외없이, 전부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누군가의 [인생]을 담고 있습니다.”

자수정이 내게 말해주었다.

스킬들은 한때 누군가가 지닌 능력이나 누군가의 삶을 담아낸 것이라고.

말하자면 스킬들은 자화상 이어서, 우리는 스킬을 쓸 때 단지 누군가를 공격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동시에, 매우 먼 옛날 이 세상에 살았던 누군가의 흔적을 증명하는 것이다.

“[인형술사의 퍼레이드]란 카드만 떠올려도 알 수 있어요.”

일찍이 살천성이 지녔던 스킬.

비록 내가 가지진 않았으나, 카드의 설명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나는 오러를 운용하여, 정확히 똑같은 글귀가 적힌 모조품을 허공에 만들어냈다.

+

[인형술사의 퍼레이드]

랭크: S

효과: 어느 세계에 늙은 인형술사가 살았습니다. 인형술사는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고독을 견딜 만큼 강하지도 못했지요.

‘또 다른 나를 만들자.’ 인형술사는 고안했습니다. ‘또 다른 내가 사랑받게 하자. 살게 하자. 사람들과 함께, 사람들과 더불어서. 그리고 만일 상처를 받게 된다면--- 버려버리자.’ 인형술사는 속삭였습니다. ‘영원히 지워버리는 거야.’

무수한 인형이 살았습니다.

무수한 인형이 폐기당했습니다.

이 스킬은 약자를 위한 사술(邪術). 가질 기억과 버릴 기억을 선택할 권리. 당신은, 당신과 정확히 똑같은 외형과 능력을 가진 인형을 13체 만들 수 있습니다. 인형이 죽으면 또 다른 인형이 깨어납니다. 부서진 인형은 다시 수리할 수 있습니다.

그대에게 모방된 영생을. 조립된 영원을.

※단, 인형 간에 기억은 공유되지 않습니다.

+

“심지어 [고블린 상류사회]에조차 같은 이치가 담겨 있지요.”

+

[고블린 상류사회]

랭크: F

효과: 대왕 고블린은 고심했습니다. ‘우리 고블린의 문화는 수준이 너무 낮다. 모든 언어가 케르륵, 케륵, 으로 끝나다니. 이래서는 본좌의 위엄을 빛낼 수가 없지 않은가!’ 그때. 대왕 고블린의 천재성이 번뜩였습니다. ‘그렇다! 이제부터 본좌는 케륵이 아니라 고륵이라 말하겠노라. 고륵! 본좌의 고상한 감성에 어울리는 발음이로다.’

※단, 부족 내의 갈등이 심해집니다.

※몬스터 대왕 고블린으로부터 복사한 스킬입니다.

+

“만약 스킬이 도구에 불과하다면, 그래서 기능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어째서 저런 설명문들이 빼곡히 붙어 있겠습니까?”

“그건 말이야, 사왕. 무릇 카드 게임에는 플레이버 텍스트가 붙어 있어야 설정에 깊이가 좀 있구나 하고들 생각하기 때문이야. 실제로는 그냥 남을 압도하기 위한 것이 전부”

“아니요.”

나는 공녀의 말을 끊으면서 카드를 들어올렸다.

“스킬은 다만 그렇게 남을 압도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내 손에 들린 카드는 [검의 성좌].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자 시절에 얻은 카드.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이어지기 위한 시스템입니다.”

그리고 내게 너무도 깊은 영향을 남긴 스킬이었다.

“스킬 카드 오픈.”

내 손에 잡힌 카드에서 글자들이 새어나왔다.

+

[검의 성좌(星座)]

랭크: A+

효과: 이세계 출신. 이세계의 탑을 99층까지 클리어했으나 100층을 눈앞에 두고 좌절. 그 원망이 남아서 성불하지 못한 채 배후령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물리적으로 간섭할 순 없으나, 소유자의 정신에 참견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의 풍부한 경험과 놀라운 실력에 조언을 구하십시오!

※단, 소유자를 제외하면 아무도 배후령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헌터 마르쿠스 칼렌베리로부터 복사한 스킬입니다.

+

배후령은 내 바로 뒤에서 뒷짐을 진 채, 강호무림을 호령하던 시절 그대로의 풍채를 보이면서, 서 있었다.

“이것이 스킬의 진짜 의도입니다.”

나는 말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것. 세계와 세계를 이어주는 것. 내가 오늘 발을 뻗으며 발동한 스킬이, 언젠가 아주 오래 전 어느 노고수가 일생을 바쳐 터득한 경신술이라는 점. 그리하여 우리는 스킬에서 인간을 느끼고, 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어머니이자 이 탑의 주인이 바라는 것 아니던가요.”

"......."

공녀는 침묵했다.

깊이 침묵했다.

잠깐씩 입술을 달싹였지만, 다시 다물었고, 그리고 다시 달싹거렸다.

“정말,”

그래서 공녀의 말은 한참의 시간을 간격에 두고 드문드문 흘러나왔다.

“말로는 못당하겠구나.”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래서, 사왕. 같이 올라가고 싶다고?”

“예. 부탁드립니다.”

“후우.”

공녀가 한숨을 푸욱 쉬었다.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습니다.]

공녀는 옷소매를 펄럭거리더니, 주변을 향해 외쳤다.

“너희 전원 36층으로 전송시킬 거야! 챙길 거 있으면 얼른 챙기고! 시간 얼마 안 줄 거니까, 2분 이내에 전부 집합해! 얼른! 빨리! 나 바쁜 몸이라구!”

우당쾅쾅쾅.

그러자 엄정히 오열을 맞추고 있던 전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최대한 조심스레 움직이는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낡은 한옥 저택은 지진에 휩쓸린 것처럼 후들거렸다.

"허."

나는 어이가 없었다.

“어이! 조심들 좀 해! 그러다가 망가지기라도 하면……."

“저는 괜찮아요.”

집주인인 자수정이 담백하게 말했다.

“어차피 쓰지도 않는 물건들인걸요. 망가진다면, 여러분이 왔다 갔다는 추억이 실리는 것이니 나쁘지 않아요.”

"......."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신님의 분신에게,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삶을 살도록 결정된 제물에게, 다만 모성으로서 존재하는 화신에게, 신서중학교 3학년 A반의 자수정에게 물었다.

“저희와 같이 가시지 않을래요?”

“아니요.”

질문은 길었으나 대답은 짧았다.

자수정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제가 가면, 학교의 토끼들을 돌볼 사람이 없어져요.”

"......."

“제가 떠나면 슬퍼할 사람들이 있어요. 많지는 않지만, 확실히 있어요. 지금은 잠깐 여름휴가를 떠난 백 씨, 능향 양, 선배, 거기에 도연 씨까지. 아마 소인이 사라지면 그분들이 굉장히 외로워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죄송하지만, 공자 씨의 말씀에는 응해드릴 수 없어요.”

아마도.

여기서 내가 [도와달라]고 부탁한다면.

자수정은 일말의 주저 없이 나를 따라올 것이다.

그녀는 신이었고, 신의 파편이었으니까.

만인의 상처를 짊어지기 위해 존재하고자 하는 신님의 일부니까.

하지만.

“……예.”

나는 신님의 전능을 증명하기 위해 탑을 오르는 것이 아니다.

“그럼 어쩔 수 없지요. 건강히 계십시오, 자수정 씨. 그동안 실례가 무척 많았습니다. 덕분에 연인이랑 아들과 즐겁게 숙식할 수 있었어요. 하나부터 열까지, 정말, 신경써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신이 없어도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나는 탑을 오른다.

신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하여.

"예."

그녀가 잘못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다녀오세요, 공자 씨.”

자수정은 내게 기도해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새하얀 빛이 낡은 한옥을 감싸안았다.

[36층 스테이지가 개방됩니다.]

[탑에 오르는 자들이여.]

완전히 빛에 감싸이기 직전.

내 근처에 있었던 자수정이 걱정되어 돌아보자, 나는 예상치 못한 모습을 보고 말았다.

자수정은 환히 웃고 있었다. 그리고 양손을 자그맣게 모아 기도하고 있었다. 그녀의 주변으로 새하얀 빛이 넘실거렸고, 그래서, 그녀는 신에게 기도하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에게 기도하는 신처럼 보였다.

그녀가 작게 입술을 열어 중얼거렸다.

[그대들에게 행운이 함께하기를.]

그리고 빛이 우리 가문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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